-1792.12.26루이16세에 대한 재판 시작-
지롱드당(=비교적 국왕에대해 호의적, 온건 공화파)와 뷔조, 당통은 루이16세의 구명을 원했으나, 튈를리 궁전의 금고에서 발견된 문서들에 의하면 국왕의 측근이 반혁명음모를 기도했고 루이 16세도 이를 알고있었음을 입증하는 문서가 발견됨에따라 더이상 지롱드당도 루이16세의 구명을 주장할수없게 되었다. 또한 투표방식또한 누가 찬.반투표를 했는지 알수있는 기명투표방식이었으므로 루이16세의 처형을 반대하는 왕당파에 더없이 불리했다.

그러나 루이16세는 재판에서 자신은 국왕으로서 원칙에 위배되는 행위는 일체 하지 않았노라고 답변했다.국왕의 변호사인 드쎼즈는 국왕의 불가침성을 강조했다.
전체 표결이 실시되었을때 전체721표중에 과반인 316표만있으면 국왕의 처형결정은 가능했다. 그러나 361표의 과반수를 얻어 국왕의 사형결정. 찬성표중에는 종형제인 오를레앙공 필립 에갈티의 표도 있었다.

▼1793.1.21 루이16세 처형전날 -
루이 16세 처형직전, 마지막으로 만나서 오열하는 가족들...마지막까지 그는 그의 가족들에게 "나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거나 그럴마음을 갖지 말것"을당부했다고 한다.




▼1793.1.21 처형직전, 마지막으로 연설하는 루이16세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외쳤다. [국민이여! 짐은 죄없이 죽는다!]
이날 파리의 날씨는 음산했고 사람들은 눈을들지 못했다.신성한 왕권에 대한 신앙과 聖루이왕과 앙리4세의 추억이 사람들의 가슴속에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1793. 1.21 사형집행중인 루이 16세
사형에 찬동한 사람들은 점차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면서 이제부터는 전력을 다하여 혁명을 유지발전시켜야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들이 멸망하게 되리라는 것을 뼈저리게 인식했다. 당통도 하는수없이 사형에 투표했다.로베스피에르는 돌이킬수없는 결말을 원하고 있었으며 그는 기어코 자기뜻대로 관철하고야 말았다.

▼처형직후 형리가 잘려진 머리를 들어올려보이고있다.

▼루이16세의 잘려진 머리..
마리 앙투아네트,루이16세, 마담 엘리자벳, 마담 뒤바리, 당통,로베스피에르등
처형에 사용된 길로틴(단두대)
믿기 어렵겠지만 프랑스에서 1970년대 후반까지 사용되었다고한다...
(1981년 사형제가 법으로 폐지되면서 사라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