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모의 길, 자식의 길
누가복음 1:68-79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대림절 둘째 주일, ‘베들레헴의 초’를 켠다. 베들레헴은 아기 예수가 탄생하신 곳이다. 지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으로 아무도 베들레헴을 찾아갈 수 없다.
이번에 이스라엘 외교부가 한국방문을 방문하는 자국민에 대해 주의령을 내렸다고 한다. 전쟁을 벌이고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를 위험한 국가로 지목하고 있다니, 참 모욕적으로 들렸다.
그런데 부끄럽지만, 현실은 인정해야 한다. 지난 12월 3일 밤에 일어나 비상계엄 때문이다. 불과 6시간 만에 종료되었지만 ‘서울의 봄 2’를 연상시킨 때문에 우리 사회가 몹시 혼란스럽다. 다행한 것은 이번 기회에 청년 세대가 계엄이니, 내란이니 생소한 단어들을 새로 학습하고 있다고 한다.
어제 여의도에 다녀왔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놀란 것은 수많은 인파가 아니다. 그 인파들의 다수가 젊은이들이란 사실이다. 최근 달라진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집회가 발랄하고, 색상도 밝고, 표현도 자유롭다.
한국 민주주의가 이번 기회에 다시 재교육을 받는구나, 싶다. 그러니 이스라엘 등 한국방문을 자제하는 나라들의 판단은 잘못되었다. 한국 방문을 포기하는 외국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와서 다시 새롭게 될 K- 민주주의를 경험하라”고 말이다.
또한 젊은이들의 무관심을 탓하던 부모 세대에게도 말하고 싶다. 역사를 바꾸는 것은 ‘그 부모에 그 자식’들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자식 세대에게 실망할 이유가 없다. 나도 여의도에서 아들을 만났다.
1)
누가복음은 부모 세대의 경험이 자식 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증언한다. 따라서 역사가인 누가는 그 사람과 함께 그 시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 사건은 아기 출생 배경과 깊이 관련있기 때문이다.
누가의 세례 요한에 대한 기록에 따르면 그 부모 세대가 닦아 놓은 길이 있었다. 위대한 선지자요, 구약과 신약의 분깃점에 된 요한은 아버지 사가랴와 어머니 엘리사벳의 신실한 믿음과 삶을 통해 등장하고 있다.
우리가 대림절마다 세례 요한의 출생 이야기를 반복하여 다루는 이유이다. 누가복음 첫 머리는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를 이렇게 소개한다.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눅 1:6-7).
요한의 부모에 대한 평가가 ‘하나님 앞에 의인이다’, ‘계명과 규례대로 흠없이 행한다’ 등 지극히 높은 평가다. 정교회 결혼식에서는 신랑 신부에게 권면할 때 꼭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이름을 말한다. 이 부부처럼 진실하고, 모범적인 남편과 아내로 살라는 당부이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면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닮으라는 축복은 결코 축복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자녀가 없었기 때문이다. 두 내외에게 큰 근심이 있었다. 이제 나이가 많으니 자식을 낳을 소망이 더 이상 없었다. ‘뒤로 오는 호랑이는 속여도 앞으로 오는 나이는 속이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두 노인에게 이제 자식에 대한 소망은 가당치 않아 보인다.
그런데 천사 가브리엘이 찾아와 스가랴에게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눅 1:13)고 인사하였다. 천사의 인사말을 보면 그동안 사가랴가 아이를 얻기 위해 꾸준히 기도했음을 알 수 있다. 마침내 천사는 늙은 부부가 아이를 얻을 것이라고 반가운 소식을 알려준다.
사실 아기의 출생은 남다른 비밀이 아니다. 요한의 경우도 특별한 사건도 아니다. 지금도 아기는 태어나고, 부모가 존재하니 신비할 일도 아니다.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이러한 일상적인 세상사 속에서, 지극히 세간의 상식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누가복음은 세례 요한이야말로 특별한 영웅이 아닌 그 부모의 그 자식이었다고 증언한다. 더 나아가 그 부모의 자식에 머물지 않고 그 시대의 자식이었다고 고백한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훌륭한 것은 아들을 시대의 자식으로 충성되게 바친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요한의 위대함은 이미 그 부모에게 원인이 있었다. 아들을 하나님의 사자, 시대의 자식으로 키워낸 데는 그 부모의 신앙적 자각과 하나님 앞에서 소명 때문이었다. ‘사람은 부모의 얼굴보다 그 시대를 닮는다’는 말도 있다.
2)
본문은 한 편의 노래이다.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불렀기에 ‘사가랴 찬가’, 혹은 자비의 송가(‘베네딕투스’)라고 부른다.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의 찬양을 들으면 메시야 시대가 가까이 왔음을 깨닫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68-69).
사가랴는 하나님이 자기는 물론 고통과 아픔에 휩싸여 있는 자기의 시대를 돌아보셨다고 감격한다. ‘돌아보다’는 어떤 사람을 인정하다, 보살피다, 은혜롭게 대해 준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연약해질 때, 마음이 상할 때, 홀로 있어 외로울 때, 누군가 나를 돌아보기를 기대한다. 그러니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길 간구하라. 모든 기도의 출발점이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가 늘그막에 요한이란 아들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결과이다. 더 나아가 그 가정뿐 아니라 인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긍휼하심, 불쌍히 여기심의 결과이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76-77).
자비의 송가(베네딕투스)는 유대교 전통의 중요한 기도 형식이다. 이 속에 구약성경의 표현들, 약속, 인용, 암시로 가득하다. 모세를 통해(출 4:30-31) 이스라엘을 찾아오신 하나님처럼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우리를 방문하신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도 ‘예수 기도’를 통해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실 것이다. 우리를 평안, 평강, 평화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바로 구원의 결과이다.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78-79).
사가랴 찬가는 세례 요한의 소명을 담고 있다. 처음 제사장 사가랴는 천사 가브리엘의 소식을 들었을 때에 의심하고, 부인하였으며, 미더워하지 않았다. 그 결과 한동안 벙어리로 지냈다.
그러나 이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가랴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와 그 시대가 올 것임을 찬양한다. 그 아들 요한은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살 것이다.
예전에 베네딕투스를 우리말로 ‘분도’라고 번역하였다. 베네딕도 왜관수도원 이름이 분도수도원이다. 처음에는 원산 덕원에 설립되었는데, 해방 후 북한에서 박해를 받다가 대구 근처 왜관으로 이주하였다.
그 왜관에 유명한 분도출판사가 있다. 나는 분도수도원을 좋아해 종종 방문해 그곳에서 십자가도 찾고, 책도 구한다. 지난 해에 걷기도를 하면서 왜관수도원에도 들렀다.
분도출판사는 7-80년대 우리나라 어두운 시대에 등불 같은 책을 보급하였다. <현실에 도전하는 성서>, <말씀이 우리와 함께>, <해방신학> 등이다. 분도출판사의 책은 아주 값싸고, 실속 있으며, 시대정신이 가득한 신학책들이었다.
분도출판사에서 만든 400여 권의 신앙서적을 만든 사람은 독일인 신부 하인리히 세바스티안 로틀러 선교사이다. 한국 이름은 임인덕이다. 그는 책을 통해 한국 사회의 등불을 밝힌 분이다. 길을 닦는 일에 헌신하였다.
그의 전기 <책으로 노래하고 영화로 사랑하다>를 보면 세바스티안의 부모는 자기 아들이 평생 가난한 나라 한국에 가서 사역하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누군들 자기 자식과 멀리 떨어져 살기를 원하겠는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도 그랬을 것이다. 처음 아버지 사가랴는 고지식한 마음을 품었다. 제사장다운 형식주의와 율법의식에 얽매여 하나님의 자유로운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의 마음이 바뀐 것은 아내 엘리사벳의 신심 때문일 것이다. 아내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였다. 먼 친척 마리아의 방문을 받고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교회는 아버지의 태도를 존중하지만, 또한 어머니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한때 아버지 스가랴가 지닌 권위주의, 율법의식, 체면치레가 있다면 버려야 한다. 그리고 어머니 엘리사벳의 이해심과 따듯한 마음과 순종하는 모습을 닮아야 한다.
오늘은 당회이다. 한국 교회가 달라지려면 사가랴의 찬가를 통해 배워야 한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 해방, 자비의 역사를 배우고, 우리가 사는 사회와 역사 속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수용하려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3)
누가는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에 대한 출생의 진실을 전하면서, 오늘 우리 시대에도 이러한 일이 반복되고 있음을 깨우쳐 준다. 이를 통해 바로 자기 시대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개입을 말하려는 것이다.
누가는 아버지로서 사가랴를 말함으로서, 아들로서 요한을 더욱 자세히 조명하려고 한다. 제사장으로서 사가랴가 아니다. 예언자로서 요한이 아니다. 바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눅 1:17) 전하려는 그 아버지의 진심이며, 그 아들의 소명이었다.
요한은 하나님의 예비자로 불린다. 그가 선포한 하나님의 역사 개입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현실화 되었다. 주의 사자 가브리엘이 전하길, 사가랴가 얻게 될 아들은 이럴 것이다.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눅 1:17).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에서 과연 무엇이 아버지 마음인가? 시인 김현승은 ‘아버지의 마음’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 아버지의 동포다.
...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이 시를 읽으면서 요한의 아버지가 부른 사가랴의 찬가를 생각한다. 그는 이 노래에서 아들 요한의 사명을 고백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좌지우지할 것이 아니었다.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었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깨닫게 하셨다.
아버지 사가랴 이야기는 여전히 자식을 낳고 기르는 우리 시대, 우리네 삶까지를 두루 포함한다. 또한 자식을 키우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하나님을 향한 충실함이 있다면 자기 자식에 대한 사랑의 질과, 그의 시대와 역사를 대하는 진지함에 있어서 이제는 좀 남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민족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세대의 경험을 아들과 딸에게로 이어왔다. 민족의 역사는 해방의 역사를 방해하는 불의에 대한 거센 저항의 흐름이었다. 동학, 3.1운동, 항일 운동, 4.19와 5.18. 6월항쟁 그리고 촛불 등 모두 역사를 바르게 세우려는 과정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우리와 달랐다. 그들에게 황제의 권력은 나와 거리가 먼 존재였다. 땅은 넓디 넓고, 천자는 멀고 멀리 있다. 그런 까닭에 그저 오늘 내가 만든 만두만 다 팔면 만족이었다.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다르다. 내가 나서면 어떤 무자비한 권력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를 쓰고 서명을 하고, 광장으로 나선다. 대한민국이 잘되는 것은 정치인들 때문이 아니다. 국민의 힘, 깨어있는 시민의 힘 덕분이다.
의로운 할아버지 할머니와 그 부모에 이어 그 자식들에게로 이어진 의로움과 지혜와 용기는 얼마나 귀한가.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 자식 세대에게 그런 의로움, 지혜, 용기를 주셔서 이 땅에 흔들리지 않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견고히 세우고, 드넓은 평화를 세우시기를 소망한다.
2025년을 앞둔 대림절, 2천 년 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그 길을 통해 다시 오실 것이다. 오늘 그리스도인 된 우리의 소명의 자리가 여기에 있다. 우리 시대에 그런 자비의 송가가 울려 퍼지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이 땅에서 혼란을 진정하고, 불안한 사람들의 삶을 위로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