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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장량, 소하, 한신 세 사람을 얻고서야 유방은 비로소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한초삼걸』은 장량, 소하, 한신이 유방을 중심으로 항우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제패하기까지의 과정을 소개한 책이다. 유방과 한초삼걸의 홍기에서 시작해 마침내 혜하 결저에서 항우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제패하기까지 결정적 순간마다 이들 세 참모가 어떤 재능을 어떻게 발휘하여 유방을 보좌했는지 흥미진진하게 펼쳐낸다. 또한 참모로서 세 사람의 서로 다른 처세와 운명을 유방과의 관계를 통해 밝힘으로서 2인자의 처세에 대한 통찰도 전해준다.
저자소개
1966년 북경대학 중문과를 졸업한 고전문헌전공자. 1940년 생. 란쩌우대학 사학과 교수 등을 거쳐 1990년 북경외국어대학 중문과 교수 겸 중문과 주임 및 중국사문헌연구실 주임을 겸직했다. 현재는 중국역사문헌연구회 상무이사이며, 중국사기연구회 상무 회장 등의 직책을 맡고 있다. 주로 중국 역사문헌학 및 진, 한, 삼국사의 교수와 연구에 종사하였다. 100여 편의 학술논문과 전문서적 8권과 편저 10여종을 출간하였는데 그 가운데 5종의 저서가 전국 및 성급사회과학 우수도서상을 수상하였다. 주요논저로는 「사기연구」, 「사기전본신주(史記全本新注)」, 「사기문헌연구」, 「사기정언묘어(史記精言妙語)」, 「사마천평전」,「삼국사」, 「사기교정(史記敎程)」 등이 있다.
저자 : 쉬르훼이
1983년 난주대학 사학과를 졸업. 1999년 상하이사범대학 고전문헌 석사과정을 수료했으며 현재는 항주상학원 여행과 교수로 있다. 선진시대사, 삼국사, 역사지리, 민속문화, 음식문화 등을 연구했다. 저서로는 「사기팔서와 중국문화연구」,「진주사지秦州史地」, 「진나라 초기의 발전사」등이 있다.
역자 : 장성철
1992년 옌볜대학延邊大學) 사학과를 졸업하고 1995년 같은 학교 조선문제연구소에서 한국고대사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7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 입학해 고대의 한중관계사를 연구하였다. 2000년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로는 『사기의 탄생, 그 3천년의 역사』 『대청제국 12 군주열전 상하』2 등 중국 관련도서를 기획하고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다.
목차
1장. 한초삼걸, 유방이 천하를 얻은 까닭
서로 다른 배경의 세 사람 : 장량, 소하, 한신
한초삼걸의 흥기
2장. 난세가 인재를 단련하다
난세의 도래
포의장상의 시대
난세는 인재 단련의 용광로
3장. 유능한 신하는 현명한 군주를 택한다
일하기 싫어하는 농부의 아들, 유방
장량, 현명한 군주를 만나다
소하, 패공을 추대하다
한신, 대장군이 되어 한중대책을 세우다
4장. 장량, 장막 안에서 천 리 밖 승부를 결정짓는 전략가
위기를 역전시킨 전략, 하읍획책
초한전쟁의 주전장, 성고전투
세 명의 왕을 세워 항우를 포위하다
5장. 한신, 천하의 절반을 경략한 군사 천재
‘명수잔도 암도진창’ 전술의 재연
배수진의 전략 발상은 어떻게 나왔는가?
제의 왕이 된 한신 초한전쟁의 대단원, 해하결전
6장. 한신의 군사사상과 지휘예술
다다익선(多多益善): 많을수록 좋다
선계후병(先計後兵): 먼저 대책을 강구하고 나서 출병한다
출기제승(出奇制勝): 예기치 못한 방법을 써서 승리를 얻다
의병시형(疑兵示形): 거짓으로 적을 유인한다
출신입화(出神入化): 용병이 입신의 경지에 이르다
7장. 소하, 나라의 근본을 안정시킨 명재상
관중에 소하가 있어 유방이 싸울 수 있었다
나라를 세우고 제도를 창설한 행정가
무위치국無爲治國의 도를 따르다
8장. 진평, 백만 대군을 이길 계책을 세우다
항우를 고립시킨 반간계
계책으로 포위된 유방을 살리다
한신을 안정시키다
거짓으로 놀러가 한신을 잡다
흉노에 잡힌 유방을 구하다
9장. 유방과 한초삼걸
장량, 유방의 벗이자 스승
소하, 뛰어나되 결코 유방을 넘지 않다
한신, 군주의 명성을 넘어 토사구팽당하다
천하 최강의 참모진, 한초삼걸
초한전쟁도
출판사 서평
장량, 소하, 한신
세 사람을 얻고서야 유방은 비로소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 시골 유협(遊俠) 유방을 황제로 만든 한초삼걸 평전!
장량, 소하, 한신이 유방을 중심으로 항우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제패하기까지의 과정을 소개한 책 <한초삼걸>이 번역 출간되었다.
<사기(史記)>와 중국 고문헌을 연구해온 두 학자는 충실한 고증과 역사적 추론을 통해 한초삼걸의 활동과 업적을 생생하게 재현해내고 있다. 특히 초한전쟁을 다룬 책들 대부분이 항우 또는 유방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반해 이 책은 장량, 소하, 한신 등 유방의 참모진에 초점을 맞춰 장량, 소하, 한신을 주전(主傳)으로, 유방과 진평을 부전(副傳)으로 삼아 구성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초삼걸이란 용어는 기원전 202년 한(漢)나라를 건국한 후 한고조 유방이 연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세 사람의 공적을 높게 평가한 데서 유래했다.
“장막 안에서 작전을 짜서 천 리 밖 승부를 결정짓는 걸로 말하자면 나는 자방(子房)을 따르지 못하오.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다독이며 양식을 공급하고 운송로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일이라면 나는 소하를 따르지 못하오. 백만 대군을 이끌고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하면 기어코 빼앗아 취하는 일에서는 내가 한신을 따를 수 없소. 내가 이 걸출한 세 사람의 인재를 기용했기에 천하를 얻은 것이오.” (史記·高帝記)
■ 전략가 장량, 행정가 소하, 군사가 한신
유방의 평가처럼 장량은 유방의 벗이자 스승으로서 초한전쟁의 전략을 세우고, 한신은 탁월한 군사능력을 발휘해 전략을 실행하며, 소하는 후방을 안정시키며 전략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저자들은 이 책을 통해 유방과 한초삼걸의 흥기에서 시작해 마침내 해하(垓下) 결전에서 항우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제패하기까지 결정적 순간마다 이들 세 참모가 어떤 재능을 어떻게 발휘하여 유방을 보좌했는지, 흥미진진한 드라마처럼 펼쳐간다.
또한 참모로서 세 사람의 서로 다른 처세와 운명도 소개한다. 장량은 유방을 섬기며 스승이면서 또한 벗의 관계를 유지했고, 소하는 유방을 수행하며 그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늘 전전긍긍했으며, 한신은 유방의 권위를 침해하며 욕심을 드러내서 삼족이 주멸당하는 비운의 결말을 맞았다. 저자들은 이를 유방과의 관계를 통해 밝힘으로써 2인자의 처세에 대한 통찰도 전해준다
■ 장량, 장막 안에서 천 리 밖 승부를 결정짓는 전략가
한(韓)나라에서 5대에 걸쳐 재상을 지낸 가문의 후손인 장량은 한초삼걸 중 유일한 귀족 출신이었다. 유방은 장량을 만나면서 비로소 항우와 맞설 능력을 갖게 되었을 정도로 그의 모략과 전략적 능력이 탁월했다. 정사(正史는) <삼국지>의 저자는 “제갈량을 평가하여 그 재능이 장량과 진평 다음 간다”고 할 정도였다.
유방의 목숨을 놓고 지혜와 모략을 겨뤘던 홍문연에서 장량은 항우의 책사 범증을 물리치며 당시 절대적 우위에 있던 항우에게 정치적 패배를 안긴다. 장량의 책략 중 백미는 한나라 군대가 패주하던 때 전세를 역전시키고 마침내 초한전쟁을 승리로 이끈 하읍획책이었다. 하읍획책의 핵심은 항우의 강력한 우군인 팽월을 와해하여 한나라 군대의 남쪽 전선을 구축하고, 중립 세력인 팽월을 쟁취하여 초나라의 후방을 교란시키며, 한신에게 북쪽에서 제2의 전장을 개척하여 항우에 대한 전략적 포위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유방의 주력군이 정면에서 항우를 견제하며 측면 세력의 발전을 기다린다.
궁극적으로 네 방면의 군대가 연합하여 항우군에 대한 포위를 완성하는 날, 총공세를 펼쳐 항우를 멸망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결국 초한전쟁은 그의 계책대로 전개되었다.
한나라 건국 후 유방은 장량의 공을 평가하여 “스스로 제 땅에서 3만 호를 식읍으로 고르라.”고 했다. 당시 식읍이 가장 많았던 평양후 조참도 1만 6백호에 지나지 않았을 정도의 특혜였다. 그러나 장량은 스스로 사양한 끝에 공신 순위에서 62위에 이름을 올린 채 물러나 평생 은거하였다. 이로써 그는 공을 이룬 뒤에는 이를 자랑하지 않고 스스로 물러나 명성을 지키는 전범이 되었다.
■ 한신, 천하의 절반을 경략한 군사 천재
한신은 타고난 군사적 재능 외에도 전쟁에서 항상 약자인 척하며 지모로써 승리를 취하는 지혜까지 갖췄다. 스무 살의 나이에 회음의 거리에서 무뢰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지나간 일화는 굴종이 아니라 큰 뜻을 위해 작은 분란을 피하려는 그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는 유방 진영에 참여하여 일약 대장군으로 임명된 뒤 당시 항우에게 눌려 서쪽의 오지 파촉과 한중의 왕으로 물러나 있던 유방에게 올린 ‘한중대책’에서 항우를 평가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항왕의 개인적 위용은 천 사람을 능히 제압할 정도이나 어진 장수에게 믿고 병권을 맡기지 못하니 이는 필부의 용맹일 따름이며,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친절하고 부드럽지만 부하가 공을 세워 마땅히 작위나 식읍을 내려야 할 때에 이르면 인장이 닳아질 때까지 만지작거리며 차마 내주지 못하니 이는 ‘부인지인(婦人之仁)’일 뿐입니다.”
이후 한신은 오합지졸을 데리고 배수진으로 적을 상대하는 등 신출귀몰한 군사재능으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군사천재로 평가받고 있다.
■ 소하, 나라의 근본을 안정시킨 명재상
유방이 패현에서 군사를 일으킬 때부터 소하는 사실상 승상으로서 모든 행정 업무를 탁월하게 수행하였다. 유방이 진나라 수도인 관중으로 들어갔을 때, 다른 사람들은 진나라 왕실의 재물을 모으느라 분주했지만 소하는 군대를 지휘하여 진나라 승상부와 어사부에 소장되어 있던 율령과 도서를 수거하여 몰래 소장하였다. 이러한 국가의 문서들은 한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사마천은 “한왕은 천하의 산천과 요새, 호구의 많고 적음, 재력의 분포, 민중의 질병과 고통 등을 숙지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소하가 진나라의 문서를 온전하게 수중에 넣었기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
초한전쟁에서 소하가 이룬 공적은 크게 네 가지이다. 첫째는 나라를 안정시켰다. 후방에서 나라의 근본을 지키고 관중과 파촉이라는 두 근거지를 경영하였다. 둘째는 백성들을 다독이고 정상적인 생산과 생활 질서를 회복하여 새 정권을 옹호하게 만들었다. 셋째는 군량을 공급하였다. 사회가 안정된 상태에서 정치적 조치를 취하고 각종 수단을 동원해, 새 정권을 위해 백성들이 양식과 병력을 내어 전선을 지원하게 하였다. 넷째는 양식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전쟁에 필요한 식량과 군수품의 공급을 원활히 하였다.
<책속으로 추가>
그러나 진여는 송양공宋襄公처럼 인의도덕을 강조하면서 모든 군대를 정형으로 집중시켜 한신과 당당하게 겨루려고 하였다. 진여는“정의로운 군대는 사특한 계략 따위를 쓰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좌거를 훈계하였다. “내가 들으니, 병법에 아군이 적군의 열 배가 되면 포위하고 두배가 되면 맞서 싸우라고 하였소.”(손자병법·모공謀攻) 그는 한신의 군대가 적은데다 수천 리를 달려왔기에 이미 지쳐있다고 보았다.“ 지금 이를 외면하고 치지 않는다면 나중에 대군이 쳐들어올 때는 어떻게 싸우겠소? 그렇게 되면 제후들이 우리를 비겁하다고 여기고 함부로 쳐들어 올 것이오.”그래서 이좌거의 계책을 채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한나라 군대에게 소모전을 강요하자는 전술마저 외면했다. 한신의 군대가 정형으로 진입하도록 내버려 두고 오직 요새만 지키며 전투태세를 취했다.-226쪽
대치 초기에는 항우 쪽이 우세했다. 나중에 유방은 장량과 진평 등의 계책을 받아들여 항우의 병력을 분산시키는 전략전술을 펴서 초나라 군대를 피로하게 만들었다. 한나라 군대가 반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정확한 전략적 지도가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소하가 관중과 파촉을 지키면서 양식과 병력을 넉넉히 공급하여 장기전을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방의 군대가 기운찼던 것은 양식이 풍부했기 때문이고 항우의 군대가 피로에 빠졌던 것은 양식이 끊겼기 때문이다.-310쪽
책속으로
그러자 또다시 한신을 조롱하며“네가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면 그 검으로 나를 찔러 봐라. 그러나 죽는 것이 두렵다면 내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거라!”라고 말하고 경망스럽게 웃어댔다. 한신은 청년 백정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장검으로 찔러 죽이고 싶은 충동을 누른 채 머리를 숙여 백정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나갔다. 구경꾼들이 한신을 겁쟁이라고 조롱하였다. 한참 혈기왕성했던 스무 살이었고 장검까지 휴대했기 때문에 분을 삭이지 못했다면 자칫 인명 사고를 낼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굳센 의지와 원대한 포부가 없었다면 결코 해 낼 수 없는 일이었다.---p.35
그렇다면 어째서 걸출한 인재는 격렬한 투쟁의 사회적 환경에서 나타나는가? 격렬한 투쟁의 사회에서 개인은 반드시 노력하고 시대의 조류에 순응해야만 비로소 생존하고 발전할 수 있으며, 개인의 투쟁은 항상 집단 속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태평성대는 이와 달라서 사회는 조용하고 질서정연하며 사람들은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으므로, 개인은 평온한 일상에서 활동하고 제한된 범위와 집단에서 실천한다. 따라서 성세의 인재는 재능은 탁월할지 몰라도 담력과 식견이 결여되어 큰일을 감당하기 어렵다.---p.58
유방은 군대의 수에서는 항우에 미치지 못했지만 참모진의 능력은 이미 항우의 진영보다 우세하였다. 역이기와 육가라는 뛰어난 외교가가 있었고 장량이라는 지략가가 있었으며 소하라는 정치가가 있었다. 항우에게도 한신이나 진평과 같은 인재가 있었지만 쓰이지 않았고 범증과 같은 뛰어난 책사가 있었지만 항백의 제재를 받았다. 먼저 관중으로 들어가는 자가 관중의 왕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유방과 항우의 진영은 시간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유방이 장량의 계책에 따라 지혜롭게 적지를 취했다면, 항우는 모든 것을 무력으로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에 번번이 저항에 부딪혔다. 기원전 206년 10월 유방이 함양으로 진격하여 진왕 자영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을 때 항우의 군대는 여전히 하남 땅에 머물고 있었다. 이후 유방이 신속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장량의 계책에 크게 힘입었다.---p.104
항왕이 성내어 고함을 지를 때면 천 사람이 다 놀라 엎드립니다. 그러나 어진 장수를 믿고 병권을 맡기지 못하니 이는 필부의 용맹일 따름입니다. 항왕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공경하고 자상하며 말씨도 친절하고 부드럽습니다. 누군가 병에 걸리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누어줍니다. 그러나 부하가 공을 세워 마땅히 작위나 식읍을 내려야 할 때에 이르면 인장이 닳아질 때까지 만지작거리며 차마 내주지 못합니다. 이는 이른바‘부인지인婦人之仁’일 뿐입니다. ---pp.145-146
하읍획책은 기원전 205년 4월에 수립되었는데, 당시는 한나라 군대가 패전하여 도주하던 시점이었다. 그러나 정확한 책략이 있었기 때문에 군대의 사기가 크게 진작되었다. 유방의 군대는 최선을 다해 항우의 추격부대를 저격하여 1단계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5월에 한나라 군대는 저격에 성공했고 성고에서 초나라 군대와 대치하였다. 기원전 203년 9월까지 29개월 동안 대치했는데 이를 일러 성고대치라고 하였다. 이어 해하에서 결전을 치르고 항우의 주력부대를 섬멸하였다. 전쟁은 장량이 예견했던 대로 전개되었다.
초한전쟁에서 인간의 지혜와 책략을 시연했던‘한중대책’과‘하읍획책’은 지모로 천하를 삼분했던 제갈량諸葛亮의 ‘융중대책’보다 4백년이나 앞섰다.---p.173
항우는 약속을 지켜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갔다. 유방도 군사를이끌고서쪽으로돌아가려고했으나 장량과 진평이만류했다.“ 지금 한나라는 천하의 거의 절반을 소유했고 제후들도 모두 귀의했습니다. 그런데 초나라 군사들은 이미 지치고 식량도 떨어졌으니 이것은 하늘
이 초나라를 망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기회를 틈타 공격하여 빼앗지 않는다면 이것은 이른바‘호랑이를 길러 스스로 화를 남기는 꼴’입니다.”(한서·고제기) 유방은 이를 받아들여 항우의 군대를 맹추격하였다.---p.200
항우는 제후왕을 봉함으로써 스스로 무덤을 팠지만, 유방은 제후왕을 봉해 그들의 충성을 얻어냈으니, 상황에 따라 책략의 효과도 크게 달랐다. 장량은 유방에게 여섯 나라의 후예들을 왕으로 봉하지 말 것을 권유했고, 가장 중요한 시기에는 세 영웅을 왕으로 봉할 것을 권유했다. ‘장막 안에서 작전을 짜서 천 리 밖의 승부를 결정’짓는 데서는 아무도 그를 따르지 못했다.---p.212
그러나 진여는 송양공宋襄公처럼 인의도덕을 강조하면서 모든 군대를 정형으로 집중시켜 한신과 당당하게 겨루려고 하였다. 진여는“정의로운 군대는 사특한 계략 따위를 쓰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좌거를 훈계하였다. “내가 들으니, 병법에 아군이 적군의 열 배가 되면 포위하고 두배가 되면 맞서 싸우라고 하였소.”(손자병법·모공謀攻) 그는 한신의 군대가 적은데다 수천 리를 달려왔기에 이미 지쳐있다고 보았다.“ 지금 이를 외면하고 치지 않는다면 나중에 대군이 쳐들어올 때는 어떻게 싸우겠소? 그렇게 되면 제후들이 우리를 비겁하다고 여기고 함부로 쳐들어 올 것이오.”그래서 이좌거의 계책을 채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한나라 군대에게 소모전을 강요하자는 전술마저 외면했다. 한신의 군대가 정형으로 진입하도록 내버려 두고 오직 요새만 지키며 전투태세를 취했다.---p.226
대치 초기에는 항우 쪽이 우세했다. 나중에 유방은 장량과 진평 등의 계책을 받아들여 항우의 병력을 분산시키는 전략전술을 펴서 초나라 군대를 피로하게 만들었다. 한나라 군대가 반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정확한 전략적 지도가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소하가 관중과 파촉을 지키면서 양식과 병력을 넉넉히 공급하여 장기전을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방의 군대가 기운찼던 것은 양식이 풍부했기 때문이고 항우의 군대가 피로에 빠졌던 것은 양식이 끊겼기 때문이다. ---p.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