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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한 설 야
1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태양이었다.
그가 그 ‘붉은빛의 도성(都城)’을 무거운 철문을 나온 것은 달도 없는 어두운 밤이었으나 오랫동안 어둠에 잠겼던 그의 머리는 ‘아! 여기에는 태양이 있다’ 이렇게 부르짖는 것이었다.
사실 그렇다. 여기에는 낮 동안 마음껏 햇볕을 받은 공기가 있지 않은가.
그는 밤하늘의 별들을 헤면서 그 잊을 수 없는 남쪽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는 그 밤을 한잠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긴 밤을 지나서 맑은 아침을 맞이하려는 행복된 시대의 사람같이 그의 머리는 회고와 흥분과 전망(展望)으로 떨리고 있었던 것이다.
겨울이 되었어도 이 남쪽 하늘은 마치 가을철같이 하루에도 몇 번씩 흐렸다 개었다 하곤 하였다. 줄곧 흐리고 있는 것보다도 이러한 변덕스러운 날씨가 저 안에서의 생활을 한결 더 괴롭게 하였다. 환히 밝아지다가도 금시 어두워지는 때마다 눈과 마음이 함께 괴로워지는 것이었다. 빛에 대하여서 눈은 사뭇 바늘 끝같이 예민해졌고 그리고 머리는 빛을 찾기에 마치 달마(達摩)와 같이 기껏 팽대(膨大)해졌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끔 몸뚱이 없는 커다란 머리만 가진 한 개의 괴물을 그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것이었다. 이 괴물은 철창을 새어서 싸늘한 회벽을 건드리는 가느다란 햇발에서도 너른 세상을 찾으려고 애써보았고 그리고 그 커다란 머리에 깃들인 공상의 소금쟁이들은 가끔 창살 밖에 엇보이는 파아란 하늘에다가 희비의 교향보(交響譜)를 고속도로 그리곤 하였다.
밖에 나와서 처음으로 맞이한 그날도 날씨는 좋지 못하였다. 조각구름이 붓다사스려이¹ 하늘을 오고 가고 한다. 그러나 엷은 구름에 사로잡힌 태양이 마치 1년 감빛같이 붉어지며 훨씬 지구에 가까이 내려오는 것 같은 생각이 그를 어린 애같이 기쁘게 하였다.
“바로 동산 위에까지 내려온 것 같구나” 하는 해님을 노래한 동요와 같은 감흥에 잠기며 그는 정거장으로 결어 나왔다.
맨머리 바람으로 낡은 보자기에다가 책자 몇 권을 싸서 든 그를 정거장에 모인 사람들은 어느 먼 나라에서 온 사람같이 구경들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상관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병정들 구두같이 딱딱해진 구두 소리를 높이며 플랫폼을 활보하고 있었다.
작년 여름에 처음으로 이 정거장에 내렸을 때에는 비록 제 손이나마 마음대로 활개를 칠 수 없는 몸이 아니었던가! ――비록 내 발이나마 내 걷고 싶은 곳을 걸을 수 없는 몸이 아니었던가!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일어나며 보라는 듯이 걸음과 활개를 될 수 있는 대로 길게 뽑으며 이 잊히지 않는 C정거장 플랫폼을 일부러 여러 번 오고 가고 하였다. 태양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 때마다 그의 발 앞에는 저로 보여도 우스운 자기의 그림자가 나타나곤 한다. 만일 거울이 있어서 제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면 자기로도 웃음을 금치 못하였을 것이다. 저 안에 있을 때에는 거울 대신에 알루미늄 밥그릇에다가 얼굴을 비춰 본 일이 있다. 며칠에 한 번씩 이발하러 나가면 붉은 옷 입은 소제부가 무슨 나무나 깎듯이 함부로 면도를 하기 때문에 늘 얼굴에서 피를 내어가지고 들어와서는 밥그릇에 비춰 보곤 하였는데 그 어스름한 그림자도 그렇게 우스웠거든 하물며 지금 태양에 비친 꼴이야 말하여 무엇하랴. 남들이 구경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에는 조금도 상관하지 않았다. 옛날 학교 한문 선생(그 선생은 발자국을 늦게 떼는 것으로 유명하였고 입청² 사나운 학생들은 그가 걸을 때면 엉덩이가 땅에 닿는다고 웃어들 주었다)같이 다리는 느리게 옮기며 이 첫날의 기쁨을 혼자서 향락하고 있었다. 저 안에 있을 때에는 날마다 다만 2,3분에 지나지 않는 운동 시간마다 될 수 있는 대로 짧은 시간에 많은 분량의 태양 광선을 가슴에 다져 넣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애쓰지 않아도 자연히 그렇게 된다. 마음대로 그것을 마실 수가 있다――이 생각이 얼마나 가슴을 유쾌하게 흔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누구와든지 말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심상한 사람들은 그의 마음을 이해할 리가 없었다. 그가 문득 일어나는 정다운 충동으로 곁 사람을 쳐다보면 그들은 도리어 놀란 듯이 이 수상한 사람을 피하여 물러서는 것 같았다. 아니 사실 그의 시선을 받으면 그들은 이 뼈만 앙상한 아귀와 같은 인간이 자기에게 무슨 해나 끼칠 것같이 몸을 피하였다.
마침내 말을 건네볼 길동무를 발견하지 못한 그는 자기 팔에 오래간만에 매어진 손목시계를 새삼스럽게 의식하였다. 그는 이 시계를 그의 귀에서부터 눈으로 눈에서부터 귀로 여러 번 거듭 옮기었다. 귀는 똑똑히 이 시계의 속삭임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눈은 분명히 이 시계의 표정을 보았다. 똑딱거리는 소리와 한가지로 조그만 바늘이 쉴 새 없이 돌아간다. 가장 사람에 가까운, 아니 생물에 가까운 표정을 그는 거기서 발견하였다. 1년 반 동안 생명의 정지를 받았던 시계와 그는 누구보다도 속 깊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일종의 사랑〔愛〕을 이 조그만 ‘생물’에게서 느끼고 있었다.
2
기차 안은 몹시 더웠다. 겨울바람이 살을 에코 쇠 밥그릇에 손끝만 조금 닿아도 뼈까지 저리는 그 생활에서 별안간 이 무더운 기차 속에 놓이매 한시를 견디기가 어려웠다. 더욱이 냄새에 주린 코라 먼지와 석탄과 사람의 냄새가 뒤범벅이 되어 몰켜오르는 몹시 불유쾌한 악취에 배겨내는 수가 없어서 그는 차창을 훨씬 높게 열어놓았다.
그러나 맞은편에 앉았던 사람이 눈살을 찌푸리며 아무 말 없이 닫아버린다. 차 안의 사람들은 거의 다 이 더위와 냄새를 알지 못하는 상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기들의 주위를 싸고 있는 공기를 제 손으로 바꿔놓는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는다. 모두들 태연한 상이다. 뿐만 아니라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웃기도 한다. 이런 공기에 인이 박힌 모양이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발에 누런 먼지가 수없이 많이 아물아물하는 것이 보이나 아무도 그것을 꺼리는 일이 없다. 그는 이 무감각한 인간들에게 일종의 증오까지 느끼었다. 그리하여 그는 견디다 못해서 승강대로 나갔다. 바람은 찼지만 그래도 거기에는 맑은 공기가 있었다. 먼지와 냄새가 훨씬 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한 시간에도 몇 차례씩 나갔다 들어왔다 하곤 하였다. 그러나 차 안은 갈수록 더 냄새가 고약해지고 또 더 더워졌다.
“후 ― 더워.”
하며 그제야 한 사람이 아까 그 열어놓은 문을 닫아버린 그가 일어나서 차창을 연다. 그러자 건너편에서도 잊었던 듯이 차창을 여는 사람이 있었다.
증오를 느끼리만치 질둔하던 승객들이 마침내 더위와 냄새를 배겨내지 못해서 차창을 열고야 마는 것을 그는 유쾌한 듯이 바라보았다.
점심시간도 되기 전에 그는 ‘벤또’ 하나를 샀다. 흰밥 구경하는 것이 꼭 1년 반 만이다. 그 안에서도 돈만 있으면 쌀밥은 물론이거니와 고기, 우유, 광계란, 실과 같은 것을 마음대로 사 먹을 수 있다. 청구해본 일이 없고 따라서 남은 음식을 그들에게 주어본 일이 없는 그는 따라서 그만치 소제부들의 호의를 받을 수 없었다. 소제부들은 면도를 할 때마다 소홀한 부주의의 자국을 그의 면상에 적지 않게 남겨주는 것 이었다.
더욱이 이 사람에게 대한 붉은 옷 입은 소제부들의 존경은 놀랄만하다. 그러니만치 일찍이 한 번도 그러한 기름진 음식이 있고 없는 차별이 그 안에서는 더욱 분명히 보인다. 있는 사람에게 따라다니는 존경이라고 할지 선망이라고 할지가 결코 철문에 의하여 막히지 않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일종의 공포를 느끼었다. 그가 아는 어떤 문인의 아들이 조그만 상처로부터 병균이 들어가서 마침내 패혈병으로 죽은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쌀밥이 혓바닥 위에 놓이자 그 몸서리나던 생각은 어디론지 가버리고 말았다. 우엉잎 국물에 뜨는 쌀알만씩 한 기름 덩어리나마 혀에 닿기만 하면 고소한 감각을 느끼리만치 예민해진 혓바닥이었다.
그는 차가 정거장에 정거할 때마다 내려서 으레 한참씩 거닐곤 하였다. 작년 여름 생각이 치밀 때마다 그는 거의 반동적으로 활개를 크게 내흔들었다. 그 사이로 늘 이날이 올 것을 생각하였거니와 지금 그날을 맞이한 그는 오고야 말 날이 오고야 만 통쾌한 생각을 새삼스러이 느꼈던 것이다.
3
그날 석양에 그는 경성역에 내렸다. C의 형제가 나와 있었다. 이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던 일이다.
맨머리 바람에 두루마기도 입지 않고 적지 않은 보따리를 쳐들고 사치스러운 서울의 거리를 혼자서 헤맬 것을 생각하며 미상불 창피한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던 차다. 의외의 동무가 곁에 있게 되어 한결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는 그제야 아무리 행색이 누추하더라도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슬기가 나서 일부러 목소리를 놓아가며 그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그다지 오래 계속될 이야깃거리가 없었다. 동시에 그는 이 고마운 동무를 앞에 두고 자기 자신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는 이상한 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아무 할 일이 없는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천생 무능한 인간이다. 그러므로 다소의 촉망과 기대를 가지고 그를 사귀어주는 대부분의 동무들은 하나씩 둘씩 그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을 아무리 둔감한 그이지만 깨닫지 못하는 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인연이 깊지 못한, 그가 일부러 나와준 것은 미안하다는 것보다 차라리 부끄러운 일이다.
그는 C와 갈라진 후에도 이런 생각이 가끔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C 이외에도 여러 동무와 또 일찍 친하지 못하였던 새 벗들이 그가 서울에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준 것이다. 그를 무능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던 동무 중의 몇 사람도 정을 새로 하여 가지고 반가이 찾아주지 않는가.
“고생 했네. 그래 몸이나 과히 상치 않았나?”
이렇게 묻는 친구도 있었다.
“여러 가지 미안하이.”
하고 무심 했었다는 듯이 사과하는 사람도 있었다. 무엇을 사과할 일이 있으랴?――그는 이렇게 생각하였으나 그렇게 말하는 동무들의 얼굴에는 다만 인사에 그치지 않는 어떠한 진실한 빛이 있는 것을 그는 발견하였다. 책 한 권이나마 마음대로 얻어보지 못하고 편지 한 장이나마 정으로 던져줌을 받아보지 못한 그는 세상과 인심이 너무도 악착하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은 바가 아니다. 인심의 차고 엷은 것을 그 안에서처럼 뼈에 사무치도록 느껴본 적은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무들의 얼굴과 말이 주는 그 인상은 다만 우정에만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어떠한 감사――개인에게 대한 우정보다 훨씬 크고 높은 양심의 표현을 발견하였을 때에 그는 그 안에서 가졌던 그러한 생각――세상을 원망하고 동무를 미워하던 그러한 혼자의 생각을 완전히 일소할 수가 있었다. 온 지구를 포용하려는 커다란 마음의 극히 조그마한 토막이나마 하잘것없는 제 몸에 와서 부딪치는 것을 그는 희미하게나마 깨달았다.
서울에서의 며칠은 유쾌한 날이었다. 자기를 반성할 기회를 얻고 자기를 잘 살릴 방법과 계시를 얻었을 때같이 기쁜 때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어둠 속에 있던 사람이 태양을 쳐다보는 것 같은 일이요, 오랜 겨울을 지나서 움트는 봄을 맞이하는 것 같은 일이다.
4
그가 그의 고향인 H읍으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한 4, 5일 후이다.
고향이라야 그다지 반가울 것은 없었다. 거기는 말라가는 늙은 어머니와 처자가 있다. 납부일에 뛰어들 빚쟁이가 잔뜩 눈을 붉히고 있다. 이런 것을 미리부터 점치고 있던 그의 마음은 서울에서처럼 단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고향의 동무들을 만나는 것이 한 큰 반가움이 되었다.
집을 그사이에 세 번이나 옮겼어도, 본래부터도 맨 떨어진 한쪽 끝이었지만 거기서 세 번이나 굴러떨어진 결과는 장내 유락을 옮기라는 예정지인 비습한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는 옛날의 양반이요 부자였던 사람의 놀랍게 큰 기와집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마을 끝에 마치 검은 이단자와 같이 높게 솟아 있다. 이 집주인은 가산을 탕진하고 어디론지 옮겨 갔으며 집만은 어떤 요리업자가 사서 장차 영업을 개시할 모양이나 아직 시기가 일러서 수선하지 않은 관계로 담이 퇴락된 채로 있었다. 그 집 뒷담 가에는 늙은 밤나무와 배나무가 한 대씩 서 있다. 이 나무 아래 즉 이 기와집 뒤에 잘방게같이 짜그리고 있는 초가가 그의 가족이 세를 얻고 있는 집이다.
바로 이 마을 뒤에는 이층집 높이만 한 철도 둑이 있어서 분잡한 H읍을 지음 치고 마을 동편에는 너른 밭이 있어서 야외의 풍경을 펼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처음으로 이 집으로 찾아올 때에는 ‘거 괜찮은 데로 옮겼구나’ 하고 야외의 새살림을 하고 이잖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막상 집이라고 들어서보니 집도 집이려니와 들악³이 손바닥만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다가 더군다나 앞 집 뒤에 있는 늙은 밤나무와 배나무의 수많은 가지가 그물같이 얽혀서 이 집에다가 늘 침울한 그늘을 던지고 있었다.
그놈의 나무를 잘라버렸으면――그는 이 집 마당에 떨어질 햇볕의 대부분을 가로막고 있는 그 나무들을 볼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였다. 북쪽의 겨울날은 쾌청이 계속되건만 이 집만은 그 나무 때문에 늘 음침하였다.
“저 나무 밑에 도깨비가 있대요.”
여자치고 미신 안 좋아하는 여자가 없거니와 한 개의 평범한 여자에 지나지 않는 그의 아내는 이런 의미에서 그 나무를 꺼리었다. 그는 아내의 미신을 그리고 제가 받을 광명을 잃어버리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둔감을 더욱 불쾌히 생각하였다.
“여보, 저 닭들은 왜 저기다 가둬두는 거요?”
그는 어느 날 마당 서쪽 한가 밤나무 아래에 있는 조그만 계사(鷄含)를 보며 놀란 듯이 이렇게 아내에게 물었다. 그러며 아내의 대답도 들을 사이 없이 그늘에 묻힌 계사를 열고 닭들을 밖으로 내어몰았다. 쪼그리고 앉아 있던 닭들이 웬 영문을 모르는 듯이 비슬비슬 밖으로 걸어 나올 때 아내는 이렇게 급한 소리를 질렀다.
“가만둬요. 남의 집에 가서 알을 낳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글쎄, 가만두라니까요.”
아내의 말을 들으면 닭들이 나락을 찾아서 이웃 농가에 가서는 그 집 허청이나 불 나뭇가리에 알을 낳기 때문에 그만큼 손해를 보게 되므로 위정 쇠 그물을 사다가 이틀 품이나 들여서 계사를 지었다는 것이다. 미상불 나락 한 알 없는 들악에 닭들이 있어줄 리가 없는 것이며 알을 낳을 만한 북덕이⁴조차 없는 이 집보다 나뭇가지며 허청이 있는 농가에 가서 알을 낳게 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아니, 계사에 잡아두고 먹이는 양식을 들악에다가 뿌려주면 남의 집으로 갈 리가 있소. 그리고 알도 낳기 편하도록 자리를 잡아주어야 하지 않소. 아무리 미물이라도 알을 낳는 것은 사람이 자식을 보는 것이나 일반인데.”
그는 놓여나와서도 그다지 반가울 줄을 모르는 듯이 계사 근방을 어청거리고 있는 닭들을 보며 아내를 핀잔하듯이 말을 이었다.
“에― 그래 자식을 둘이나 낳아본 사람이 그만한 소견도 없담·…‥ 거, 먹을 양식이나 좀 가져오우.”
“인젠 들악이 얼어붙어서 곁집에도 주워 먹을 나락이 없을 테니 내어놔도 안 갈 테지.”
하며 아내는 그 근방에 수수와 좁쌀을 뿌려주었다. 닭들이 그리로 모여들자 아내가 그중 큰놈을 잡으려고 하니까 이때까지 어청거리고 있던 닭들은 꼬꼬꼬·…‥ 하며 달아나버린다.
그는 그 순간에 문득 생각이 난 듯이 아내의 손에서 나락을 가져다가 뿌려주며
“거,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야. 먹이기 전에 먼저 잡으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안 되는 거란 말이오. 사람은 제가 제일 영리할 줄로 알지만 닭은 사람의 동정을 사람보다 더 먼저 눈치챈단 말이오. 새나 짐승은 영혼이 없는 대신에 영혼보다 더 민감한 무엇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자아, 이것 보우. 이렇게 쉽게 잡히지 않소·…‥ 참말 마음으로 저희들을 먹여주려는 생각을 가져야 닭은 사람 가까이로 오고 손으로 만져주어도 상관이 없단 말이오.”
그는 일찍 어디서 얻어들은 지식을 이 자리에서 시험해보고 그 시험의 결과 자기가 얻은 지식이 틀리지 않는 것을 기뻐하며 이렇게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아내에게는 그런 지식보다 더 필요한 것이 따로 있다. 알을 굵게 낳고 많이 낳는 것을 아내는 희망하는 것이다.
“인 주세요.”
하고 아내는 남편의 손에서 닭을 받아다가 뒷배를 슬슬 어루만져보다가
“이것 좀 봐요. 여기 알이 들어 있지 않아요. 요새 며칠 안 낳았으니까 내일쯤부턴 또 시작하겠지요.”
하고 만족한 듯이 남편에게 만져보기를 권한다. 남편은 문득 불쾌한 생각이 났다. 남편과 닭을 관련시켜서――다시 말하면 남편의 건강 회복과 닭 알을 관련시켜서 생각하고 또 그러는 것을 무슨 아내의 자랑으로나 알듯이 기쁘게 생각하는 아내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속된 생각을 그는 몹시 불유쾌하게 여기었다.
며칠 동안 좀 불유쾌한 일이 있어서 닭의 생각을 가져볼 사이가 없이 지나온 어느 날 일이었다. 밖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닭이 요새는 한결 알을 많이 낳아요. 자아, 이것 좀 보시우. 전보다 크지 않아요.”
하며 아내가 반가운 듯이 웃으며 금시 낳은 듯한 닭 알을 조심스럽게 손바닥에 올려놓은 채 그에게 보인다.
“아, 그것 참말 크군 그래.”
그도 미상불 기뻤다. 제 마음대로 주워 먹는다는 단순한 사실이 닭에게 그만한 변화를 이루어준 그것이 기뻤던 것이다.
“같은 양식을 주건만 내어놓고 놔 먹이면 많이 낳고 크게 낳으니 참 조화예요·…‥.”
아내의 말.
“태양을 먹으니까 그렇지요, 하하하·…‥.”
그는 일부러 너털웃음을 치며
“그러기 다시는 가두지 말우·…‥ 참 인제는 남의 집으로 가지 않아요?”
하고 아내에게 물었다.
“안 가요. 이제는 문밖에만 사람이 어른하면 졸졸 따라다니는 데요.”
“구구구·…‥.”
하며 그는 다리에 감기는 강아지를 발등에 태워가며 햇볕이 비치는 마당 한가로 가서 닭을 불렀다. 닭들은 처음으로 계사에서 놓여놨을 때보다는 훨씬 빠른 걸음으로 그리고 훨씬 친숙한 태도로 조르르 따라 들어온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새어 오는 조그만 햇볕에서 자기가 뿌려주는 나락을 쪼아 먹는 닭들을 보며 그는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의 한 장면을――우거진 수목 사이를 흐르는 째지는 햇볕을 따라서 이름도 없는 여러 가지의 벌레들이 모여드는 그 장면을 연상하였다. 그리고 수도원에서 나온 ‘잔느’가 동쪽 수림 위에 금반과 같이 솟아오른 달을 바라보며 그리고 제방에 흐르는 그 달빛의 시내를 건너며 잠을 이루지 못하던 것과 처음으로 자기가 그 ‘붉은 빛의 도성’에서 나오던 날 그믐밤 하늘의 별들을 헤던 것을 비겨 생각하였다.
“만일 사람이 저만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 하기만 하면 이 조그마한 미물이라도 이 한 폭의 햇볕이라도 얼마든지 재미있는 얘기를 속삭여주는 거야.”
그는 혼잣말 모양으로 중얼거렸다.
닭들은 햇볕에서 나락을 쪼아 먹고 있다.
그는 이 닭들을 내려다보며 그리고 이 햇볕을 내려다보며 잃었던 광명을 찾은 기쁨을 느끼는 동시에 이때같이 아직도 얼마나 잃은 것이 많은지를 심각히 깨달은 적은 일찍 없었다.
-끝-
2016년 7월 8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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