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2차 총공세
지하에 숨겨둔 일본군의 150mm 거포
5월 4일 일본군 32군은 다시 최대의 반격을 실시하였다. 사령관 우시지마는 선박 공병 제 23, 26연대로 하여금 미군의 후방 해안에 우회 상륙을 시도하게 했다. 일본군은 이 날 가미카제 특공대를 대폭 출격시켜 이를 지원하였고 일본군 포병이 전면에 나서 무려 13,000발의 포탄을 발사하였다.
그러나 항공 정찰에 나선 미군이 일본 포병의 위치를 파악, 압도적인 포병 화력으로 대포병 사격을 가해 일본군의 포 59문을 파괴하였고, 포병의 지원을 잃은 우시지마의 32군은 7,000명의 인명 손실을 입고 퇴각하고 말았다.
분수령이 된 슈리 전투
일본군의 공세를 물리친 버크너 사령관은 5월 11일 다시 총공세를 취했다. 10일 간의 치열한 전투가 뒤따랐다. 5월 13일 763 탱크 대대의 지원을 받은 96 사단이 요나바루 해안 평야를 굽어보는 높이 145m의 돗토리 산을 점령했다. 이 곳은 일본군 방어선의 동쪽 요지로서 1,000명의 일본군이 방어하고 있었다. 반대쪽 해안에서는 해병 1 사단과 6사단이 ‘슈가 로프’ 산을 점령하였다.
슈가 로프 산
미군이 두 개의 요지를 점령하면서, 슈리를 방어하는 일본군의 양 측면이 노출되었다. 버크너 중장은 슈리를 완전히 포위하여 일본군 주력을 섬멸할 결심을 하였다.
5월 말, 장마철에 접어들면서 엄청난 비가 내려 전장은 진창이 되었다. 병사들은 진흙 속에서 살아가야 했고 도로는 물에 잠겨 보급과 후송이 극도로 힘들어졌다. 미군과 일본군의 전사체는 진흙더미 속에 방치된 채 부패되어 갔다. 이런 상황을 극복한 1 해병 사단의 1개 대대가 드디어 슈리 성을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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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슈리 성에 깃발을 꽂는 해병 1대대장 리차드 R.로스 중령 |
슈리 성의 점령은 미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고 반대로 일본군의 전투 의욕을 꺾어버리면서 오키나와 점령 작전의 분수령이 되었다. 슈리 성은 해병 공격 3일 동안 미 전함 미시시피의 거탄을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미시시피의 포격을 피해 일본 32군이 남쪽으로 후퇴해가서 미 해병은 비교적 손쉽게 슈리 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미 포병의 집요한 추격에도 불구하고 주로 폭우가 내리는 야간을 틈타 성공적으로 철수하였다.
32군은 남은 잔존 병력 30,000명을 기얀 반도에 설정한 마지막 방어선으로 이동시켜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였다. 일본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 3만 명 중 80%는 전투력을 상실한 병사들이었다. 이 기얀 반도는 오키나와 전투 중에 최대의 혈전장이 되었다.
일본 해군 육전대의 궤멸
오타 미노루 소장. 육전대의 전문가였다.
32군이 마지막 방어선으로 이동하는 동안 9천 명의 해군 육전대와 현지에서 징발한 1,100명의 의용대가 오로쿠반도 언덕의 지하 진지에서 저항하고 있었다. 말이 육전대지 해군의 공병인 설영대 요원들을 급히 육전대로 전환 편성한 부대여서 전투력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6월 4일 미 해병 6사단이 오로쿠반도에 상륙하여 일본 해군 진지를 공격하였다. 이들은 격렬히 응전하다가 힘이 다하자 6월 13일 사령관 오타 미노루 소장을 비롯한 4,000명이 집단으로 자결해 버렸다.
오키나와 저항의 소멸
버크너 중장의 전사 하루 전 모습
6월 17일 우시지마 사령관이 지휘하는 32군의 잔존병들은 오키나와 최남단 이토만의 동남쪽 포위망으로 밀려 들어갔다.
오키나와 전투가 막바지를 향하고 있던 6월 18일, 미군측 총사령관 버크너 중장이 전선 시찰 중 일본군의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그의 사령관직은 임시로 미 해병 사령관 로이 가이거 중장에 승계되었다. 그러나 닷새 뒤에 그는 중국 전선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육군 조셉 스틸웰 중장에게 사령관직을 인계하였다.
일본군의 조직적 저항은 6월 21일 막을 내렸다. 우시지마 중장과 참모장 조 이사무 중장은 89 고지의 참호에서 할복 자살했다. 참모였던 야하라 대좌가 우시지마의 할복 전에 함께 순사(殉死)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우시지마는 근엄한 표정으로 이를 거부했다. 그는 결연하게 이야기했다. “자네까지 죽으면 오키나와 전투의 실상을 후세에 전해줄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게 된다. 포로가 되는 일시적인 수치를 참아내고 살아남아라. 이것은 상관으로서의 명령이다.”
야하라 대좌는 전투에서 살아남아 포로가 된 최고 계급의 일본군 장교였다. 그는 전후 ‘오키나와 전투’라는 책을 써서 오키나와 전투의 참상과 비극적 최후를 알렸다.
양측의 피해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 전투 중 가장 피를 많이 흘린 전투였다. 오키나와 현청은 평화 공원에 세운 추모비에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사한 일본인 민관군의 희생자 이름을 새겨두고 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사한 일본군은 77,166명이었고 전쟁에 휘말려 희생된 오키나와 현민은 149,193명이었다. 미군이 14,009명이 전사했고 영국군도 82명이 전사했다. 우리 민족인 조선인들도 희생자가 많아 남한 출신이 365명이었고 북한 출신이 82명이었다.
오키나와 주민 전사 중에 약 40,000명은 일본군에게 강제 징집 또는 징용으로 끌려가 전투에 투입되어 죽은 경우였다. 미군의 인적 피해는 부상당하거나 사고로 죽거나 병으로 죽은 사람까지 합치면 약 82,000명이었다.
미군이 세운 피난민 수용소
미국 항공대가 잃은 전투 항공기는 768 기였는데 이중에 전투 피해는 458기였었고 나머지는 운용상의 사고로 인한 것이다. 가미카제 특별 공격대의 내습으로 미 해군들도 큰 피해를 입었다. 368척의 연합군 선박이 파손되었고 28척의 구축함과 15척의 수륙 양용정이 격침되었다.
오키나와 주민의 희생
오키나와의 피난민 어린이들
오키나와 전투에서 오키나와 주민들이 겪은 참화는 일반의 상상을 넘는 것이었다. 미군 침공 당시 오키나와에는 30만 명의 주민들이 있었는데 전투 중에 이중 3분의 1이 넘는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은 중일 전쟁 때 적국 국민인 중국인들에게 자행했던 끔찍한 학살과 약탈을 자국민들인 오키나와의 주민들에게도 해댔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징병되고 징발되어 전투에 투입되고 노동에 혹사당했다. 전투가 벌어지자 일본군은 민간인들을 전선으로 끌고 다니며 총알받이로 사용하였다.
더 큰 범죄는 주민들에게 내려진 집단 자살령이었다. 수많은 주민들이 군의 강압에 의해서 가족 자살을 했고 이러한 집단 자살을 택하지 않은 무리는 군대가 수류탄을 던져 학살하였다.
오키나와 점령의 다음 작전- 원자탄 투하
오키나와 점령 작전이 완료되면서 이제 다음 차례는 일본 본토 공격이었다. 규슈 공격을 목전에 두고, 미 군부 내에서는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일단 과달카날 전투 때와 마찬가지로, 전멸하기 전까지는 제압할 수 없는 일본군의 지독한 저항은 오키나와에서 재확인되었다. 만일 일본 본토에 들어가면 그 이상의 군과 민의 합동 저항을 각오해야 했고 이는 곧 천문학적인 미군의 피해를 감수한다는 뜻이었다. 이 시점에서 원자탄이 논의에 등장했다. 민족이 멸살되기 전까지는 항복하지 않을 것 같은 일본인들에게 항복을 받을 수 있는 강한 충격을 주려면 원자탄밖에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미군은 본토 상륙 전에 원자탄을 먼저 사용하기로 했다. 준비 기간을 거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고 이어서 소련군이 참전해서 만주로부터 파죽지세로 몰고 내려왔다.
이 정도의 절망적 상황에서도 일본 군부 내부에서 끝까지 싸우자는 의견이 우세하게 주장되었다고 하니 일본 군부의 지독함은 광기 어린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 9일 후인 8월 15일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했고, 9월 2일 마침내 태평양전쟁과 2차대전이 종전을 고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