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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우리가 자주 빠져들게 되는 무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확대해석, 침소봉대, 과잉 일반화입니다.
한 가지 기억이 떠오릅니다. 나름 최선을 다해 준비한 강의 시간인데, 제일 앞에 앉아 계신 분이 강의 시간 내내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만지작만지작하고 계셨습니다.
시종일관 그러시니 점점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강의 시간에 도대체 뭘 그렇게 열심히 검색하십니까? 게임 하고 계십니까? 그랬더니, 그분께서 화들짝 놀라면서, 하시는 말씀! “
그게 아니라 스마트폰 메모장에 강의 내용 열심히 적고 있었습니다.” 저는 즉시 깨갱 하며 그랬습니다. “아! 네 알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계속 적으세요.”
또 다른 제 착각이랄까, 과잉 일반화 증세가 떠오릅니다. 특강을 끝내고 나오는데, 한 자매님이 유튜브 강의 잘 활용하고 있다고 너무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셨습니다. 어깨가 우쭐해졌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자매님은 잠 안올 때면 즉시 제 유튜브 강의를 트신답니다. 잠 오기 적절한 목소리라 불면증 치료제로 최고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적당히 알이 맺히기 시작한 밀밭 사이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격무에 무척이나 굶주렸던 제자들은, 그것으로라도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밀이삭을 좀 뜯기 시작했습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켜보던 바리사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큰소리로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코 복음 2장 24절)
바리사이들 역시 저처럼 확대해석 내지는 침소봉대를 한 것입니다. 이미 꼬일대로 꼬인 바리사이들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어제에 못지않은 강펀치 하나를 시원하게 날리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코 복음 2장 27~28절)
안식일과 관련된 세부적이고 지엽적인 규정 하나 하나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안식일 제정의 근본 취지를 망각해버린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책이 참으로 뜨끔합니다.
안식일은 원래 인간을 비롯한 이 세상 모든 창조물, 심지어 무생물에게까지 휴식과 평화를 누리게 하려는 의도로 생겨났습니다. 주인도 쉬지만, 종도 쉬게 합니다. 사람도 쉬지만, 가축도 쉬게 합니다. 농부도 쉬지만 경작지도 쉬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안식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창조물인 백성들과 모든 피조물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생명과 자유를 경축하는 날인 안식일을 속박의 날, 억압의 날로 변질시켜버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절대 원치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을 위해서라면서 안식일과 관련된 수많은 규칙과 관습들을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39가지 노동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곡식을 추수하는 일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따진 것은 제자들이 밀 이삭 몇개를 건드린 것인데, 그것을 지나치게 확대해석 및 과잉 일반화를 시켜버린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결정적인 실수는 하느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시는 인간에 대한 소홀함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동료 인간 존재의 가치를 무시했습니다.
신앙 행위 안에서 하느님 사랑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모상인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그 안에 하느님의 손길이 닿아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 인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인간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규정의 적극적인 준수보다도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을 더 강조하신 것입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4년 나해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부부임을 자주 잊을 때 더 부부가 된다>
복음: 마르코 2,23-28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먹는 제자들을 두고 예수님께 따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두둔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 법은 상당히 엄격합니다. 하루 동안 걸을 수 있는 발걸음 숫자가 정해져 있고 엘리베이터 층 수도 누를 수 없으며 에어컨이 꺼져도 다시 켤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집중하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백성이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집중할수록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법에 집중할수록 법을 지키지 못하게 되고 결혼에 집중할수록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힘들어집니다. 경계에 집중할수록 차는 경계선 밖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만약 물고기가 자기를 바라보는 고양이가 무서워 어항 유리가 튼튼한지만 집중하고 있다면 그 안에서 다른 물고기나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까요? 법은 이 어항과 같습니다. 그냥 그 안에 머물면 되지 그것에 신경 쓰면 정작 법을 주신 분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왓챠 드라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의 줄거리입니다. 창욱은 40대입니다. 그는 번역가와 인문학 강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출판사 사장이고 남편은 아내의 글 솜씨가 맘에 안 들고 남편은 아내가 가정에 소홀한 것 같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둘은 얼마간의 별거를 하게 되었고 남자가 아내 없이 사는 것이 너무 편했는지 먼저 이혼장을 들고 왔습니다. 아내도 도장을 찍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때 아내는 말기 대장암 판정을 받습니다. 소화기 문제로 먹는 것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녀는 창욱에게 매일 요리를 해달라고 부탁하는데, 창욱은 라면밖에 할 줄 모릅니다. 창욱은 의리 때문인지 당분간 아내를 위해 요리를 배워가며 하기로 합니다. 창욱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요리해보지 않았지만, 오직 아내의 소중한 한 끼를 위해 좋은 식재료와 건강한 레시피를 개발하는 데 온 힘을 쓰며, 서투르지만 조금씩 가족의 소중한 의미를 깨달아가기 시작합니다. 물론 아내는 죽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해주는 남편과 아들을 바라보며 슬프지만, 괜찮게 죽습니다. 이 모든 것은 부부임을 잊고 사랑에 집중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부부라면 여자가 음식을 하고 남자가 돈을 버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평소 삶은 이 반대였습니다. 남편이 가정 일을 열심히 한 것은 아니지만, 바깥 일에만 열중하는 아내에게 불만을 품었었습니다. 아내도 자신보다 돈을 못 버는 남편에게 불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부부는 이래야 한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부부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선일 뿐입니다. 차의 양쪽 차선에 집중하면 차가 뒤뚱거리다 결국엔 차선을 넘습니다. 운전을 잘하려면 차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중앙을 봐야 합니다. 그러면 차선을 넘는 일이 없습니다. 부부가 되었다면 더는 부부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만 생각하면 됩니다. 상대를 어떻게 행복하게 해줄까 만을. 결혼은 왜 하는 것일까요? 더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어떨까요? 사람은 결혼이란 틀에 맞추기 위해 살아갑니다. 이것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모든 것은 사랑을 지향합니다. 이 지향을 잊으면 안식일 법을 위해 사람이 희생하다 결국엔 지쳐 그것마저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율법은 금붕어에게는 어항과 같고 운전자에게는 차선과 같습니다. 그 안에 들어와 있다면 그것을 만들어준 이유, 곧 사랑 만을 생각하며 행복하게 살면 됩니다. 그러면 선을 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자가 되지 맙시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2,23-28: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창조해 주셨다. 인간이 노력하면 그 결실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셨다. 본래 안식일의 의미는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감사드리고 계속 그 축복을 비는 날이었다. 생명의 하느님께 그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그 근본정신이다. 안식일이라서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여 생명이나 생명 유지에 필요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은 선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행을 베푸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이라는 것은 인간이 존재한 다음에 생긴 것이며, 그 법은 인간의 삶을 위한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법이 먼저 생기고 나중에 인간이 생겨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밀 이삭을 자르자 바리사이들이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항의를 하고 예수께서 그에 대한 답을 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27절). 이 말씀으로 바리사이들의 비난에 대해 대답을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다음에 안식일을 정하셨다는 천지창조 사화(창세 1,26-2,4)의 이야기와 같다. 이 말씀은 안식일의 의미 자체를 밝히는 원칙적인 답변이다. 법보다도 사람을 중요시하는 인본주의적 법이념을 내세우셨다. 법률 만능주의가 아니라 인권을, 안식일 법보다 인간애를 앞세우셨다(참조: 마르 3,1-6; 루카 13,10-17; 14,1-6; 요한 5,1-8; 9,1-41). 그리고 하느님의 전권을 받으신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다.(28절)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떤가? 주일을 안식일 본래의 의미대로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데, 주일을 지키는 것을 강박관념 때문에,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죄가 되고,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아무런 느낌이 없이 미사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현대적인 율법주의일 것이다. 진정으로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는 제사를 지내는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주일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은 사람이지 안식일 규정이 결코 아닙니다.
언제나 사람들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잃어버린 단 한 사람을 찾기위해 예수님께서는 먼 길을 나섭니다.
그 어떤 것도 사람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을 업고 가시는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예수님의 사랑법을 꼭 기억합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사람을 향해야 할 안식일입니다.
사람을 위한 안식일입니다.
안식일로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다 닮아 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소중한 하루되십시오.
5)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자기 SNS 계정에 사람들은 많은 사진을 올립니다. 맛집을 찾아가 음식 사진을 찍고, 예쁜 카페에 가서 인증사진을 찍는 것도 필수라고 합니다. 멋진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 역시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사진을 SNS 계정에 올려서 ‘좋아요’ 버튼이 눌러지면 기뻐합니다. 결국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사진을 올리는 것이 아닐까요? 즉, “나 이렇게 재미있게 살고 있다.”, “나 잘살고 있다.”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저 역시 2,000년 초반부터 인터넷 안에서 활동하며 많은 사진을 올렸습니다. 정보 제공이라는 목적이었지만, 요즘 사람들처럼 잘살고 있음을 알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비밀 없는 삶이 사제에게 필요하다면서, 사실은 저를 드러낼 수 있는 것만을 인터넷에 올리곤 했습니다.
지금은 제 사진을 잘 올리지 않습니다. 비밀 없는 삶은 사진을 올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냥 마음에 담는 사진이 더 중요함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를 내려놓으니 훨씬 편안한 마음입니다. 새벽 묵상 글을 올린 뒤에도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지 않습니다. 오탈자가 있다고, 문장이 이상하다며 사람들이 메일이나 쪽지 등을 보내시고 댓글에 글도 남겨주시지만, ‘뭐 어때?’라는 생각으로 잘 확인하지 않습니다.
편하게 사는 삶은 나를 드러내는 삶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면서 내면의 나를 성숙시키는 삶이 가장 편안한 삶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겸손을 강조하시고 또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 이유도 우리가 이 세상을 편하게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신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과감하게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드러내기보다 주님을 드러내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라고 항의합니다.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즉, 자기들은 이렇게 열심히 안식일 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고, 그에 반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형편없는 사람인 것처럼 취급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람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임을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안식일에서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열심’만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우리도 남은 틀렸고 나만 옳다는 식의 생각을 갖곤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편하게 살지 못합니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의 삶을 살 때, 주님과 함께하면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소통 방식을 바꾸면 사회가 바뀐다(클레이 셔키).
6)이병우 루카 신부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2,27)
'안식일의 본질!'
오늘 복음(마르2,23-28)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라는 말씀입니다.
인간 구원 활동인 예수님 공생활에 대해, 기득권 세력을 누리고 있었던 유다교 종교 지도자들의 본격적인 견제와 방해가 시작됩니다. 그 중심에 서 있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율법 논쟁'입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내려주신 율법과 또 이 율법에 근거하여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세부 율법 규정(613개 규정)들을 삶의 규범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안식일 논쟁'입니다. '안식일(주일) 규정'은 십계명 중 제3계명인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라는 계명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때문에 '안식일의 본질'은 '거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또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 곧 거룩한 주님의 날인 주일의 본질'입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자,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2,24)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함께 먹은 일을 상기시키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2,27-28)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낸다는 것'이 '단순히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가족이 함께 미사에 참석하고, 함께 사랑을 나누면서 지내는 거룩한 주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위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이 주인이다.“ (마르 2,2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