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와 시인의 편지 / 임보
<어느 농부의 편지>
성님,
나도 막내아들 한 놈은 꼭 정치를 가르칠라요.
어떻게 신나도록 적들을 엎어칠 수 있는가를 가르칠라요.
다리를 걸든지, 배꼽을 물어뜯든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눕힐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칠라요.
아니, 엎어쳐 눕혀 놓고 다시 또 짓밟아 주면서도
가슴을 펴는 그 배짱을 키워 줄라요.
말하는 법도 가르칠라요.
달콤하고 고소한 말씨로 놈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
진실은 절대로 말하지 않는 법을 가르칠라요.
양파의 껍질처럼 속마음은 싸고싸고 깊이 감추어 두었다가
때가 오면 어두운 밤 독사처럼 아가리를 몰래 들어
적의 발꿈치를 물어뜯는 그 교활한 예지를 가르칠라요.
맹세 같은 것이 다 뭐 말라 비틀어진 거다요?
그런 건 백 번을 안 지켜도 상관없다고 가르칠라요.
성님, 어떻게 하든지 목만 틀어 잡으면 안 되것소?
그리하여
나도 대원군이 되면 원 좀 풀어 볼라요.
사둔네 팔촌 눈먼 꼽추면 어떻것소?
八道 내 친척 오둥이잡둥이 다 모아 놓고 잔치잔치 벌일라요.
우리집 개새끼도 호강 좀 시킬라요.
뼈다귀 한 개도 못 얻어 먹고 그동안 고생만 한 우리집 개새끼에게
그린벨트 몇 천 평 띠어서 개장도 하나 크게 지어 줄라요.
성님,
나도 중동에 간 내 막내아들놈 어서 불러다가 정치공부 시킬라요.
나도 이젠 이 웬수놈의 땅좀 그만 파고 살아 볼라요.
<詩人의 회신>
농부여,
땅을 파는 일
그것이 그래도 아직은 제일 낫네,
헛된 꿈 꾸지 말고
자네 아들에게
그 땅의 정직을 가르치게.
세상살이는
어차피 훔치는 일이지만
고기를 낚는 어부보다
사냥을 하는 포수보다
풀과 나무들을 속여
그 씨를 훔치는 그 일이
그래도 아직은 제일 낫네.
농부여,
자네의 그 솜씨로
고기도 새도 못 속이는 그 솜씨로
어이 저자의 사람들을 속여 장사를 하며
그것도 못하는 주제에
어이 천하의 민중들을 밟고
그들의 매운 땀을 훔치겠다는 것인가?
농부여,
보기에는 자네가 세상의 제일 아래 있어서
가장 춥고 배고픈 듯하지만
우리들 순수의 자(尺)로 세상을 고쳐 재면
이 지상의 맨 위에
제왕처럼 그대의 자리는 그렇게 높네,
농부여, 제왕이여,
자네 아들에게 어서
그 왕도를 가르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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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신에 관하여 / 임보
시정신이란 말이 시를 논하는 자리에서 자주 거론된다.
그런데 막상 무엇이 시정신인가를 따져 물으면 그 대답이
석연치만은 않다. 시정신이란 작게는 개별적인 시 작품들
속에 내재해 있는 정신을 가리키기도 하고, 크게는
다른 문학 장르와는 달리 시를 시 되게 하는 시문학의
정신적 특성을 이르는 말로 사용하기도 한다.
편의상 전자를 협의의 시정신 그리고 후자를 광의의
시정신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개별적인 작품들 속에
담겨 있는 협의의 시정신들이 모여 한 시인의 시정신을
형성하고, 동시대를 살고 있는 시인들의 시정신이
그 시대의 시정신을 형성하게 되며, 시공을 초월해서
시인들이 지닌 보편적인 시정신이 시문학의 특성을
드러내는 광의의 시정신이 된다.
따라서 협의의 시정신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것이라면
광의의 시정신은 보편적이며 종합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시에서의 정신 같은 것을 아예 무시
하려고도 한다. 즉 예술은 기술이 문제니까, 언어 예술인
시도 언어를 잘 다룰 수 있는 기교적인 것만 중요시하면
된다는 것이다. 마치 나무를 잘 다루는 목수처럼 언어를
잘 다루는 기술만 있으면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그러나 목수가 만든 가구 속에도 정신이 들어
있다. 속된 정신이든 고매한 정신이든 정신적인 요소가
배어 있게 마련이다. 보통의 목수가 만든 가구와
인간 문화재급의 장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그것은
분명 풍격(風格)이 다르다. 기술의 수준에서 오는 차이
뿐만이 아니라, 작가의 인품과 정신력이 크게 관여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의미를 지닌 언어 구조물인 시가
작자의 정신적 세계와 무관하다는 생각은 납득할 수 없는
견해다. 하찮은 잡문 속에도 글쓴이의 넋이 서려 있거늘
하물며 언어 예술의 정수라고 하는 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는가.
무릇 모든 발언은 발화자의 의도에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인간은 무엇인가를 실현하고자 언어를 구사한다.
아무런 목적 의식이 없는 발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목적 의식을 욕망의 실현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시라는 형식의 언술도 분명 목적 의식을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시는 시인의 욕망 실현의 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를 통해 실현코자 하는 시인들의 욕망은
보통 사람들이 언술을 통해 실현코자 하는 욕망과는
같지 않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흉금을 울려온
좋은 시들을 살펴보건대 그 작품들 속에 서려 있는 시인의
욕망은 세속적인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맑고 깨끗한
승화된 욕망이다. 나는 이를 이상적인 시정신으로 삼고자
한다. 이 시정신은 진・선・미를 추구하고 염결(廉潔)과
절조(節操)를 중요시하는 선비정신과 상통한 것으로
나는 보고 있다.
나는 앞에서 개별적인 작품들 속에 담겨 있는 협의의
시정신들이 개인의 시정신을 형성하고, 개인의 시정신들이
모여 광의의 시정신을 형성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귀납적인 논리와는 달리 반대로 연역적인 논리도 가능하다.
즉 한 시대가 요구하는 시정신이 여러 시인들의 호응을
얻어서 그러한 시정신을 바탕으로 한 개별적인 작품들을
생산해 내게도 할 수 있다. 귀납적인 논리는 결과를
중요시하고, 연역적인 논리는 원인을 중요시한 사고다.
전자는 시에 대해 수동적으로 대처하는 자세라면 후자는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자세다. 오늘의 한국시단을 나는
부정적으로 진단한다. 시에서 감동성이 사라져 가고 있다.
시가 읽는 이에게 흥겨움과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답답함과 괴로움을 안겨준다.
시가 욕설인가 하면 말장난이요, 잡배들의 장타령처럼
난삽한가 하면 술 취한 자의 주정처럼 거친 푸념 같기도
하다. 시가 이처럼 퇴락하게 된 요인은 무엇인가?
나는 그 원인을 자유시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무분별한
모방 행위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지만, 여기에 하나를
더 첨가하자면 고매한 시정신의 상실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의 시에는 청렬한 시정신을 담고 있는 작품들이
흔치 않다. 고결한 선비정신을 지닌 시인들이 많지 않다.
오늘날 실추된 시의 위의(威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정신을 되살리는 일이 급선무다. 양질의
상품 생산을 독려하는 운동이 있는 것처럼 오늘의 시단에
청렬한 시정신을 불러 일으키는 운동이 절실히 필요하다.
어떤 이는 ‘자유’를 핑계삼아 청렬한 시정신으로 우리시의
정체성을 수립하자는 데 선뜻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현대시가 어디로 가든 오불관언 방관 방치
한다면 이는 태만을 넘어 자신의 소임을 저버리는 죄악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시가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해 갈 수 있도록 모색하는 것이 어찌 우리의 소중한
책무가 아니겠는가.
시는 언어의 정련 못지 않게 정신의 정련을 필요로 한다.
시인은 언어를 다루는 기술자이기 이전에 정신을 다스리는
수행자여야 한다.
/ 임보 시인 홈 페이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