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대통령실은 18일 미국 최고 군·안보 지휘부와 화상회의를 가졌다. 미국 측에서는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 마크 밀리 합참의장이, 우크라이나 측에서는 안드리 예르마크 대통령 실장, 올렉시 레즈니코프 국방장관, 발레리 잘루즈니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시르스키 지상군 사령관, 니콜라이 올레슈크 공군 사령관, '타브리야 그룹' 알렉산드르 타르노프스키 사령관이 참석했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나중에 합류했다고 한다.
지난해 11월 초 설리번 보좌관이 키예프(키이우)를 방문했을 때, 우크라이나 측 파트너가 예르마크 실장이었다. 두 사람이 미-우크라 화상회의를 주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설리번 미 안보보좌관이 지난해 11월 키예프에서 예르마크 대통령실장과 회담 후 기자회견 장면/사진출처:우크라이나 대통령실
회의가 끝난 뒤 예르마크 실장은 "주요 전선의 전황과 가장 어려운 지역(바흐무트) 상황, 우크라이나에게 필요한 부분 등을 미국 측에 자세히 알렸다"며 "무기와 군사 장비, 탄약 등의 추가 제공에 대해서도 협의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이날 미-우크라 최고 군지휘부 접촉 사실을 전하면서 "바흐무트 방어 문제와 우크라이나군의 향후 반격 작전도 논의에서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워싱턴 포스트(WP) 등 미국 주요 언론들이 우크라이나군이 바흐무트 전투에서 입은 상당한 병력및 탄약 손실로 인해 봄철 반격작전의 성공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전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군의 반격작전에 의문을 제기하는 주요 요인으로는 병력 손실과 포탄 부족이 꼽힌다. WP는 우크라이나군이 바흐무트 전투에서 훈련된 병력을 많이 잃어 반격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 병사들이 부족하다고 지적했고, 뉴욕 타임스(NYT)는 반격에 필요한 포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했다.
우크라이나군의 진격(위)과 휴대용 미사일 사격/사진출처:우크라 합참 페북
스트라나.ua에 따르면 NYT는 "우크라이나군이 바흐무트 방어를 위해 하루 수천 발의 포탄을 사용하는데, 이는 준비중인 춘계 반격작전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며 "미 국방부가 키예프 측에 포탄을 낭비하지 않도록 정확한 조준 사격을 강력하게 권고했다"고 전했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역시 병력 부족이다. 이 문제를 국제사회에 예리하게 일깨워준 이는 WP와 인터뷰한 우크라이나군 제 46공수강습여단 대대장이다. '쿠폴라'라는 암호명으로 활동하는 아나톨리 코젤 소령(대대장)은 지난 14일 WP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그동안 전투 경험이 풍부한 정예 병사들을 많이 잃었고, 새로 보충된 신병들은 아직 미숙해 봄철 반격작전 준비가 제대로 될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그의 WP 인터뷰는 국내외적으로 큰 파장을 불렀다. 그의 상관은 "잘못된 정보를 퍼뜨렸다"고 비난했고, 그의 부하들은 "현실이 훨씬 더 나쁘기 때문에 매우 신중하게 한 발언"이라고 옹호하고 나섰다.
그의 인터뷰 요지는 이렇다.
"100명의 새로운 군인을 받았지만, 나에게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들을 전투에 내보내라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새로 온 병사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친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총소리가 무섭다'고 했다. 그들은 제대로 수류탄을 던지지도 못한다. 전투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전투 경험이다. 지난 6개월 간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병사와 훈련장에서 갓 나온 병사는 하늘과 땅 차이다. 안타깝게도 전투 경험이 많은 군인은 이제 거의 없다. 이미 많이 죽거나 다쳤다."
WP는 '쿠폴라' 대대장의 발언 등을 근거로 "우크라이나군이 그동안 전투에 능한 군인들과 초급 지휘관들을 많이 잃었기 때문에 서방 측이 기대하는 남쪽으로의 반격 작전을 우크라이나군이 제대로 준비하지 못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또 EU와 미국 관리들을 인용, "우크라이나군은 지금까지 12만명의 사상자(러시아군은 20만명)를 냈다"며 "이를 보충하기 위한 신병들의 유입은 우크라이나군의 모습을 바꿨다"고도 했다. 미군 측도 새로운 군사 장비와 훈련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가 구축한 방어선을 뚫기엔 불충분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WP는 지적했다.
WP와 인터뷰한 대대장 '쿠폴라'/사진출처: 스트라나.ru
그의 인터뷰 발언으로 우크라이나는 벌집을 쑤신 듯 어수선하다. 그의 직속 상관 막심 미르고로드스키 소장은 "허위 정보를 유포했다"는 이유로 그를 직위해제했다. '쿠폴라' 대대장은 전역서를 냈지만, 군감찰관의 조사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스트라나.ua는 17일 "'쿠폴라' 대대장의 WP 인터뷰는 스캔들로 비화했고, 대대장 직위에서 쫓겨났다"고 전했다.
문제는 그를 따랐던 부하들이다. 제 46공수강습여단 소속의 한 병사(블라디미르 셰브첸코)는 "대대장의 인터뷰는 사실이고, 현실이 훨씬 더 나쁘기 때문에 그나마 그가 신중하게 발언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일부 정치인들의 비판을 겨냥해 "그는 사이비 전문가가 아니고, 현장 전문가로서의 균형 잡힌 의견"이라며 "존경받는 지휘관이자 똑똑한 대대장을 최고 군사·정치 지도부가 쫓아냈다"고 반박했다.
우크라이나군 전력의 현실 진단을 놓고 정치권도 술렁이는 모양새다. 알렉세이 아레스토비치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고문은 "우크라이나군의 규모가 급격하게 4~5배 커졌다"며 "제대로 훈련된 군인들이 충분하지 않고, 분대와 소대 등을 이끌 초급 지휘관들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현실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동원된 예비군과 신병들에 대한 훈련이 진행되는 동안, 희생을 감수하면서 최대한 버티고, 힘을 모을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고 촉구했다.
반면, 지난 대선에서 젤렌스키 후보에게 패배한 페트로 포로셴코 전 대통령 측은 '쿠풀라' 대대장 편을 들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를 더욱 위축시키는 것은 패배주의적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외신 보도다.
미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미 관리들을 인용, 러시아와의 전쟁 중에 우크라이나군 10만 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스트라나.ua는 16일 "이같은 사망자 수치는 우크라이나의 공식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거의 10배나 많은 엄청난 수치"라고 지적했다.
러시아 포병 부대 공격(위)와 수북히 쌓인 탄피들/현지 매체 영상캡처
NYT는 우크라이나군이 반격할 수 있는 '기회'는 실제로 단 한 번뿐이라며 전투로 단련된 정예 병사들이 너무 많이 죽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바흐무트 전투에서 러시아 측은 수감자 중심의 '와그너 그룹' 전사들이 희생되는 반면, 우크라이나 측은 정예병사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바흐무트 사수 작전으로 얻은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는 결론이다.
우크라이나군 지도부가 서둘러 '쿠폴라' 대대장을 직위해제 한 것은 전장의 군인들이 외신기자들을 상대로 전황에 대해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스트라나.ua는 분석했다. 동시에 우크라이나군 지휘관들이 앞으로는 더욱 입조심을 할 것으로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