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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야곱의 우물가 원문보기 글쓴이: ♡겨자씨♡
너희 믿음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고후 13:5) 오늘 믿음이 주제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무게가 얼마나 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그 깊이와 길이와 무게가 얼마나 될 것인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문제를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 무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모든 것을 재고 측량하고 무게를 달아볼 수 있는 장치들이 있습니다. 몸에 열이 나면 온도계를 사용하면 얼마나 심각한 열인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키가 얼마인지, 음주운전자의 음주량이 얼마인지, 자동차가 달릴 때 속도가 얼마인지 계측기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X-Ray로 몸 속의 상태도 자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지구둘레의 길이도, 땅속의 깊이도, 바다의 깊이도, 태양열도, 빛의 속도도 잴 수 있습니다. 세상엔 무엇이나 재고 세고 달아볼 수 있는 기계들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은 재보고 달아볼 수가 없습니다. 자로 잴 수도 없고 저울로 달아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너희 믿음을 달아 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겉모습만 보고 믿음이 좋다 안 좋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모두가 믿음이 좋은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이 되니까 그는 넘어졌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께 찾아왔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중생도 모르느냐고 핀잔만 듣고 돌아간 사람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결정적인 순간에 나서서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해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겉에서 보고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자로 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신앙의 행위에서 그 사람의 신앙의 무게를 달아볼 수가 있습니다. /믿/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 후서를 끝내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시험의 척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시험의 척도는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자신의 믿음을 시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짧은 본문 한 절에 '너희'가 라는 단어가 여섯 번이나 들어가 있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너희 자신을 시험하고/너희 자신을 확증하라/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그러니까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를 '시험해 보라(test), 찾아 보라(to see), 확증하라(to find out)'는 것입니다.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점검하라는 뜻입니다. 삶에 필요한 물건들 중에는 한번 구입하고 계속 사용하다 버리는 것도 많지만, 어떤 것은 쓰면서 점검하고 확인하면서 써야 하는 것이 많습니다. 만약 확인하고 점검해야 되는 것을 하지 않으면 쓰는 사람에게 생명의 위협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 같은 경우에는, 자동차를 구입해서 폐차 할 때까지 그냥 쓰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엔진 오일, 냉각수, 자동차 타이어의 압력을 점검해야 합니다. 브레이크를 점검해야 합니다. 가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밸브가 새는 곳은 없는지, 연결 고리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 기구가 안전한지 늘 점검해야 합니다. /할/ 물건만 점검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도 점검해야 합니다. 부부간에도 서로의 사랑을 점검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정말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지, 사랑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서로 무관심한 것은 아닌지, 서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할/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도 늘 점검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잘못 되었을 때 부모들이 쉽게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 애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부모가 알고 있는 아이와, 실제의 아이가 다르다는 뜻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기가 알고 있는 아이들이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친구를 통해서, 학교를 통해서, 배움을 통해서 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런 달라져 가는 여러분의 아이들을 얼마나 점검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자식들의 친구들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자식들이 취미가 무엇이며, 어디에 잘 가는지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잘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믿/그것뿐 아닙니다. 친구들도 잘 점검해야 합니다. 자신이 알고 판단하는 친구와 변해 가는 친구를 확인해야 합니다. 여러분, 살면서 누구에게 제일 배신당합니까? 가까운 사람에게, 친구 같은 사람에게 당합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누구에게 당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친구 때문에 당합니다. 친구도 확인하고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아멘!/ 물론 이렇게 주변 사람들을 점검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점검하는 일입니다. 건강을 점검해야 합니다. 자기의 일상을 점검해야 합니다. 배우는 학생들은 실력을 점검하고, 돈을 버는 사람들은 경제 상황을 점검해야 합니다. 성취하는 것, 지금 하고 있는 일, 인생의 위치가 어디쯤 왔는지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아멘!/ 그런데 이렇게 여러 가지들을 우리가 점검하며 살아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 말씀대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보고 확증하는 일이 가장 귀중한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할/왜 믿음이 중요합니까? '버리운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왜 우리는 구원을 얻어야 합니까? 왜 모든 사람은 구원을 얻어야만 합니까? 성경에 보면 세 가지 운명의 선언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롬3:23).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6:23).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다(히9:27).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대단히 가까웠습니다. 같이 손잡고 산책하고 대화하고 참으로 가까이 지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끼여들게 됩니다. 그래서 이 죄가 인간을 하나님 편에서 멀리 떼어놓게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가까이 할 수도 없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리 떠나게 되었습니다(롬3:23).다면 죄를 지으면 끝입니까? 아닙니다. '죄의 값은 죽음이라' 죄의 결과로 인간에게는 죽음이 왔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필연적으로 죽음이 옵니다. 그리고 성경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히9:27절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합니다. '죄와 죽음과 심판' 이 세 가지 운명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①그렇다면 믿음이 무엇인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몇 가지만 알아보겠습니다. 오늘 본문도 '예수께서 너의 안에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그 분이 내 안에 성전 삼고 계십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신 줄 믿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예수를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행하는 믿음이 내게 있어야 합니다. /아멘!/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데는 문제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회교도 유대교도 천주교도 통일교도 하나님을 믿는 일에 이의가 없습니다. 모두 똑같은 신앙으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문제가 나오면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종교들 간에도 이 예수 때문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일에 우선 몇 가지 신비한 내용을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아들 됨, 나의 구주가 됨, 동정녀탄생,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 재림 등입니다. 한결같이 이성적으로 믿기 어려운 조건들이고 영적인 도움이 없이는 믿기가 불가능한 일들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믿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부모의 은혜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보다 높다'고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알기는 뭘 압니까? 그것은 아는 차원을 고백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자식들이 부모의 심정을 아주 깊이 알 때가옵니다. 그것이 언제인가 하면 애 낳아서 길러본 후입니다. 그것도 낳은 자식으로부터 지지리 속을 썩어보아야 실감나게 알게 됩니다. 그때 흘리는 눈물이 진짜 부모의 마음을 깊이 아는 고백의 눈물입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체험할 때가 오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우리가 예수를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고백하고 믿게 됩니다. /아멘!/ 카톨릭 신학자 '칼 융'이 '오늘 신앙 인들은 너무 추상적으로 예수를 믿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가 나를 구원하시고 나의 구세주 됨을 지식으로만 알뿐 체험되고 고백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할/ ②이제 우리가 '시험하고 확증하고 정검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내가 바른 예배 자인가?'를 정검해야 합니다. ㉢'나는 기도하는 사람인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를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할/ ⑸전도자에게 따르는 표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심판'을 누가 받아봤습니까? 경험했습니까? 심판이 있는지 없는지 누가 압니까? 그러나 심판이 있습니다. 심판은 분명히 있습니다. 사람이 한 세상 산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세 가지 세상을 삽니다.
첫 번째 세상은 모태에서 한 세상 삽니다. 모태에서 살 때는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세상에 나간다는 것도 모릅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무것도 모른 체 무의식의 세계에서 한세상을 살아갑니다. 얼마동안 삽니까? 280일 동안 아주 짧은 기간이지만 대단히 편하게 살았습니다. 완벽한 수세식 변소, 완벽한 환경 속에서 그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마음껏 먹고 마시고 놀고 운동하고 살다가 두 번째 세상인 지금의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현실의 세계로 나올 때는 죽는 줄 알고 악을 쓰고 웁니다. 안 울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의식의 세계에서 의식의 세계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알고, 부모를 알고, 이웃을 알고, 사랑을 아는 인간의 의식을 배우고 알게되는 더 긴 세계로 나오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80년-100년의 세계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을 살다가 그 다음 세계로 들어가는 때가 옵니다. 죽음이지요. 그때도 울게 됩니다. 형제와 자식, 이웃까지도 와서 울어 줍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와 의식의 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똑 같이 웁니다. 다를 바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 끝난 줄 알고 다 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다음 세계로 다시 들어간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계는 280일, 100년 보다 훨씬 긴 영원한 세계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세계는 영원한 세계이면서 의식마저 뛰어 넘는 초월의 세계입니다. 말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보면 알고, 옆의 사람을 탁 보면 아는 세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이 필요 없는 초 의식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할/ 그런데 성경은 말씀하기를 이 제3의 세계로 들어갈 때에는 인간들이 두 쪽으로 갈라진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는 영원한 천국의 세계,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세계입니다. 또 하나는 영원한 멸망의 세계인 지옥의 세계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입니다. 갈라지는 그 시점이 바로 '심판'입니다. /할/ 세상의 재판에서 '죄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처럼 그런 심판입니다. '예수를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가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아멘!/
㉠우리의 생명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를 깊이 알고 바로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잘 믿는다는 것과 바로 믿는다는 것은 개념 상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잘 믿는 것은 형식상의 문제라면 바로 믿는 것은 본질상의 문제입니다. 바로 믿으려면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가 누구인가?교회가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야 바로 믿을 수 있습니다. /할/최불암 시리즈에 나오는 유머가 있습니다. 최불암, 유인촌 두 사람이 미국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각각 자동차를 빌려 타고 미국 각 도시를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고속도로마다 번호가 붙어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10번, 105번, 405번, 605번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최불암씨가 105번 고속도로를 시속 100마일로 달리다가 교통 경찰에게 걸렸습니다. 미국의 고속도로는 65마일이 제한 속도입니다. '면허증을 보여 주십시오. 왜 제한 속도를 위반했습니까?' '속도를 위반하다니요 저는 표시대로 운전했는데요' '이 도로는 제한 속도가 65마일입니다.' '저는 105마일이 제한 속도인줄 알았는데요' '아닙니다. 그건 도로 이름입니다.' 이 말을 듣고 난 최불암씨가 잠깐 망설이더니 하는 말, '허허 큰일났네 유인촌 그 친구 405번 도로로 들어갔는데...' 웃기느라고 만든 유머입니다만 그러나 뜻하는 바가 있습니다. 바로 알아야 살기도 편하고 바로 믿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할/
▶'예수께서 너의 안에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뭘 묻고 계십니까?
⑴'주님이 내 인생의 구주이시며 내 생명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있느냐?'를 묻고 계십니다. 이 물음 속에는 주님의 십자가를 온전히 믿는 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죄 사함의 은혜와 구원에 감격을 누리고 있느냐?'를 묻고 계십니다.
⑵이런 믿음이 확실하면 우리에게 먼저 기쁨이 있습니다. 시16:11절에 보면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증거는 기쁨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증거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교제가 있는 곳에는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사랑을 할 때는 그 마음속에 큰 기쁨이 있고 그 사랑만 생각하면 즐거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 묻습니다. 삶에 기쁨이 있습니까? 아니면 권태와 짜증, 원망과 미움이 있습니까?
⑶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평강이 옵니다. 요14: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또 요16: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할/
㉡믿음은 '빛'으로 오신 예수를 품고 사는 것입니다.
빛은 생명입니다. 믿음은 그러니까 생명입니다. 요1: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이 말씀은, 예수 안에 생명이 있고 이 생명은 사람들 속에 빛으로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할/ 요8:12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이 빛 되신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빛은 '생명이고, 사랑이고, 길이고, 진리'입니다. 요한복음의 주제입니다. 이 빛을 받아들여서 빛을 품고 살아가면 그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빛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영의 양식을 주고, 은혜를 주고, 믿음을 더해 줍니다. /아멘!/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들이 이 빛을 품고 살아갈 때 불의를 멀리하게 되고, 죄를 멀리하게 되고, 멸망에서 멀어지고, 심판에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을 빛의 자녀라고 합니다. 그러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을 '어두움의 자식'이라고 합니다.세계에서 가장 맛 좋은 사과는 미국 캘리포니아산 사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일조량이 아주 풍성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곡식도, 과일도, 식물들도, 햇빛이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께로부터 나오는 이 빛을 받고 살아갈 때 성숙한 신앙, 열매맺는 신앙 인이 됩니다. 그래서 이 빛을 '믿음의 빛, 생명의 빛'이라고 말합니다. /할/
㉢사랑의 사도 요한은 이 믿음을 '질'(품격)로 비유했습니다.
요1:4절에 보면 '그 안(빛/예수)에 생명이 있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생명이라고 모두 똑같지 않습니다. 어두움에 묻혀서 살아가는 생명도 있고, 그 빛 가운데 거하는 생명도 있습니다. 어두움에 묻혀서 살아가는 생명은 살아 있으나 실은 죽은 영혼이고 무의미한 생명입니다. 사람도 보면 변화 받은 사람이 있고 변화를 받지 못한 옛사람 그대로의 사람도 있습니다. 그 생명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우선 질이 다릅니다. 모양이 다릅니다. 내용이 다릅니다. 색깔이 다릅니다. 품위가 다릅니다.예수 안에 있는 영혼은 질이 다릅니다. 고품격입니다. 여러분, 질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질이 좋아야 합니다. 물건도 질이 좋아야 합니다. 그래야 값이 있습니다. 우리가 질을 따질 때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품질입니다. 이것을 '아가도스'라고 합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신앙이든, 사랑이든, 불문하고 품질이 좋아야 합니다. 거짓말하고 사기 치고 허풍떠는 사람들을 가리켜 '질이 나쁜 사람'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품질이 좋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국산품이 자꾸만 외면을 받는 것도 이 품질이 좋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자꾸만 위태위태한 것은 믿음의 품질이 나빠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믿음 생활을 하면서도 변화를 받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도 믿음의 품질이 좋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든, 사람이든, 물건이든, 품질이 좋아야 합니다.다음은 '모양'입니다. 이것을 '칼로스'라고 합니다. 질을 말할 때는 품질만 좋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 모양도 좋아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씨가 곱고 품질만 좋다고 모두 인기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새 젊은이들은 마음씨만 보지 않습니다. 품질도 좋고 모양새도 아름다워야 그게 고루 갖춘 미인으로 봅니다. 그래서 얼굴 짱, 몸 짱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신앙도 '질'입니다. 여기서 질이 좋다는 말은 품질과 모양이 다같이 좋다는 말입니다. /할/ 우리가 예수를 알고 변화를 받게 되면 먼저 질적인 면에서 변화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 속에 모든 믿음의 행위가 다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질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멘!/
㉣예수가 내 안에 있는 사람은 '고난의 과정을 믿음'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평소 믿음을 보고 우리가 그대로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성격이 평소에는 좋을 수가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그 사람의 성격이나 인격을 알 수가 없습니다. 손해보는 일을 당하던지 불이익을 당해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 평안할 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그 믿음을 좋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려움을 당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때 물러나는 사람이 있고 더 다가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은 시련기를 맞아보아야 측정될 수 있습니다. 요셉을 보세요!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합니다. 누명쓰고 옥살이하며 10년 세월을 하염없이 고뇌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다 그는 어느 날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형들이 그 앞에 나타났습니다. 순간 요셉의 눈에서 불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요셉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팔았다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당신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당신들을 통해서 나를 먼저 이곳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우리 주님이 우리들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할/
㉤예수가 내 안에 있으면 '형제를 사랑하는 일'이 즐겁습니다.
성경은 '형제를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들어와 있는 모든 사람은 주안에서 형제 된 사람들입니다. 그 형제들을 뜨겁게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믿음이 있는가 재어볼 수 있는 척도입니다. /할/ 여러분, 누구를 사랑해 보셨습니까? 누군가를 사랑해서 그를 위해서 물질을 나누고 수고해 보고 헌신해 보셨습니까?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누구를 위해서 수고하고 희생하고 나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요14:23절을 보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를 사랑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듭남의 표적입니다. 하나님을 닮아 가는 모습입니다. 신앙의 표징입니다. 또 사랑은 관심입니다. 영혼에 대한 관심, 하나님 자녀 되게 하려는 관심, 구원의 관심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전도도 불가능합니다. 전도는 영혼사랑의 결과이고 열매입니다. /아멘!/
㉥예수가 내 안에 있으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승리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요일5:4-5절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할/ 그렇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의 배경입니다. 빽입니다. 힘입니다. 뜻입니다. 의미입니다. 우리의 생존의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이 믿음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인하라 너희 안에 예수께서 계신 것을 모르느냐 모르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믿/
여러분, 건강한 신앙 생활의 제일 조건은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분명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고 있습니다. 사43:21절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 예배가 찬송입니다. 그렇게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은 예배로 시작하여 예배를 드리다가 하늘 나라에 가서도 영원히 예배를 드리는 존재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호흡이 끊어지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예배가 중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수가성 우물가에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것은 예배입니다. 예배는 히브리어로 '아바드'인데 이 말은 '섬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일 좋은 방법은 예배입니다. /아멘!/ 이스라엘이 출애굽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잘 살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들이 고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바른 예배자로 살겠다는 목적이 출애굽의 사건입니다. /아멘!/ 우리에게 예배처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오틀런드'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예배는 인간이 하는 일 중 가장 숭고한 것이요, 가장 가치 있는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인데 예배가 바로 그것입니다. 출3:12절에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예배)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할/
㉡'내가 바르게 헌금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정검해야 합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는 곳에 보물이 있습니다. 특별히 십일조는 하나님이 눈여겨보시는 헌금입니다. 드리나 안 드리나 보시려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쌓을 곳에 없도록 주시려고 점검하시는 헌금이 십일조입니다. /할/
▶성경에는 중요한 열쇠 네 가지가 있습니다.
⑴천국에 들어가는 '믿음'의 열쇠입니다. 믿음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 그 믿음이 열쇠가 되어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마16:19절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⑵어떤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는 '기도'의 열쇠입니다. 기도는 지금도 역사를 일으킵니다. 기도는 지금도 응답됩니다. 마7:7절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⑶말씀을 잘 지킴으로 하늘 보고를 여는 '순종'의 열쇠입니다. 신28:12절에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찌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⑷물질 축복의 문을 여는 '십일조'의 열쇠입니다(말3:10-12).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말씀 중에 두 마디가 우리를 흥분시키고 있습니다. '하늘 문을 열고' 그리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는다' /할/ 그렇습니다. 십일조 이야기는 돈 이야기가 아니라 축복의 이야기입니다. /믿으시기를 소원합니다/할/ 어부는 절대로 그물을 팔지 않습니다. 농부는 아무리 어려워도 종자 씨를 먹지 않습니다. 화가는 아무리 살림이 어려워도 붓을 없애지 않습니다. 목수는 망치와 대패는 어디를 가든지 가지고 다집니다. 어떤 이발사는 6.25때 가위 하나만 들고 다니면 먹는 문제를 해결했다고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가위는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성도는 십일조만은 절대 건드리면 안 됩니다. /할/
사실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인생에 승리자가 됩니다. 기독교는 기도하는 종교입니다. 루터는 말하기를 '가장 작은 인간이라도 무릎을 꿇고 있으면 가장 강한 사람이 된다. 가장 약한 기도라도 가장 강한 마귀를 이길 수 있다.' /할/ 렘29:12-13절에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애인을 찾고, 중년들은 돈을 찾고, 노인들도 명예를 찾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인생의 의미는 애인도, 돈도, 명예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데 있습니다. /믿/ 여러분, 근본적인 인생의 갈증, 불안, 근심, 걱정이 어디에서 옵니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어디서 왔습니까? 나는 어디로 돌아가야 합니까? 이 인생의 근본문제는 하나님 없이는 절대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대상28:9절에 보면 다윗이 솔로몬에게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다윗 임금이신 아버지에게 이런 귀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은 솔로몬이 그 후에 그의 잠언서에서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외쳤습니다. /아멘!/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아예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기에 그들을 하나님은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하나님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은 만나지 못한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열심히 수십 년 간 교회에 왔다 갔다 하고 설교를 듣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했지만 하나님은 진정으로 만나지 못한 형식적인 성도가 많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하나님은 간절히 찾으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만나주십니다. 기도하다가 음성으로 만날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듣다가 말씀을 읽다가 하나님은 말씀 속에서 만날 수가 있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아는 '너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을 만나리라!'고 하셨습니다. /믿/ 기도하는 사람이 제일 먼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대통령에게 무슨 부탁을 하려면 우선 대통령을 만나야 합니다. 만나지 않고는 부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기도하는 사람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신년 새해 우리 모두 기도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나는 전도자로 살고 있는가?'를 정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전도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유언은 전도입니다. 마28:18-20절에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한 영혼이 구원받는 일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전도는 한사람을 교회로 데리고 와서 교회를 부흥시키자는 차원도 아닙니다. 여러분, 전도는 '진정한 사랑의 열매이고 관심의 열매이고 섬김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귀한 것을 배려하고 선물을 주고 섬기는 일이 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⑴상대방(이웃)의 운명에 깊은 관심을 갖는 일입니다.
내 가까운 친구가 지금 암에 걸려 투병하고 있습니다. 그때 내가 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기에 그냥 나만 알고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할/ 전도는 상대방의 운명에 관심을 갖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딤후2:10절에서 '택한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가 구원받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전도를 받게 된다면 나는 모든 어려움을 참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상대방에게 깊은 관심을 갖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관심이 중요합니다. 자식이라도, 부모라도, 형제라도 상대방의 운명이나 영혼에 관심이 없으면 전도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는다면 전도를 안 할 수가 없지요. 나의 배우자, 나의 사랑하는 사람을 그냥 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눈물로 기도하게 될 것이고, 이 눈물도 상대방을 사랑하고 관심을 가질 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4:3절에서 바울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하게 하시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할/
⑵상대방(이웃)의 마음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골4:5절에 보면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지혜롭게 행동하라'고 했습니다. 나의 행동이 때로 상대방에게 부정적으로 또는 긍정적으로 선입견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때로 나의 생각 없는 행동이 상대방에게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게 하고, 예수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신자들의 언행에 세심하게 관심 갖고 보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살면서 직장에서, 동네에서, 모임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멘!/ 그러므로 너무 인색하고 너무 무례하고 너무 말이 많음도, 무책임함도, 신용상실도 모두 전도의 문을 막는 걸림돌 역할을 합니다. 오늘의 섬김과 친절은 씨를 뿌리는 일이고 심는 일이고 언젠가 열매를 거둘 날이 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의 공동체의 삶을 이루는 데는 이 배려하는 삶과 정신을 발휘하는 삶이 절대 있어야 합니다. /할/ 예수 믿는 신앙 인들이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처럼 무책임한 삶도 없습니다. 그것은 생각 없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생각 없는 행동 하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의 문을 닫히게 만들고 전도의 문을 가로막는 거침돌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옥중에서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지혜롭게 행동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멘!/
⑶전도를 위해 모든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골4:5절에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헬라어로 '기회를 사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라'는 말씀입니다. /할/ 우리 주변에는 언제나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기회는 하나님이 주시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그리고 기회는 잡아야 열매가 열립니다. 기회가 왔는데도 그냥 놓치거나 잡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회를 사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할/
⑷복음을 전할 때는 확신 있게 전해야 합니다.
신앙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에 확신, 응답의 확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의 확신이 있을 때 힘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할/ 내가 확신을 가지면 그 확신이 내 주위 사람들에게 전염됩니다. 옆 사람도 자신감을 갖게 만듭니다. 세일즈맨의 확신 있는 말과 태도 때문에 감동되어 돈을 풀고 상품을 사는 것입니다. 사기꾼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자신감 있게 말하고 확신 있게 말합니까? 거짓을 가지고도 그렇게 자신 있게 상대방을 설득하며 사기를 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할 때 자신감과 확신을 가지고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능력을 주십니다. 무기 없이 병사들을 전쟁터에 보내는 장군은 없습니다. 하물며 대장 되시는 예수님이 전도자를 그냥 보내지 않으십니다. 능력과 권세로 무장시키십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습니다(눅9:1). 뿐만 아니라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결과 전도자들이 가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막16:17-18절에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할/ 날마다 기적과 승리를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전도의 자리가 기적의 자리입니다. 전도의 현장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내 문제만 놓고 씨름하는 신앙은 힘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만 머무는 신앙은 귀만 커집니다.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으로 선 것은 전도현장에서입니다. 바울이 위대한 사도로 성장한 것도 선교현장에서입니다. 영혼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면 주님의 손이 함께 하십니다. /믿/아멘!/
㈁전도자의 삶이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이 납니다. 단12:3절에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할/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를 얼마나 가까이 하며 살았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예배를 위해 얼마나 교회를 찾으셨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배우기 위해 얼마나 교회를 찾으셨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얼마나 교회를 찾으셨습니까? 봉사하기 위해 얼마나 교회를 찾았습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참 행복한 교회의 이름으로 얼마나 일하셨습니까? 교회는 어떤 모임입니까? 교회는 법적인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와야 하기에 온 사람들의 구성 체는 아닙니다. 교회는 자유사회입니다. 자원하는 사회입니다. 누가 강요해서 되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모이는 곳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충성, 봉사할 수 있습니까?
⑴믿음의 분량대로 봉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각자 다 독특한 성격이 있고, 생활능력이 다르고, 학식이 다르고, 신체조건이 다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똑같이 평가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키가 큰 학생에게 높은 곳에 있는 유리창을 닦으라고 했더니 밑에만 닦아놓고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면 그 학생은 한 대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높은 곳이 잘 닿지 않는 학생이 어떻게든 더 많이 닦으려고 깡충깡충 뛰면서 중간까지 닦아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면 위에는 닦여지지 않았지만 그 학생은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일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분량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다른 사람과 비교할 것도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하는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할까'라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아시고 계십니다. /할/
⑵찾아서 일해야(봉사, 충성)합니다. 교회는 일을 찾아서 하는 곳입니다. 시켜도 하기 싫으면 그만 둘 수 있는 모임입니다. 그러나 '순종은 제사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맹목적인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기를 원하시는 일을 우리가 자진해서 해야 합니다. /아멘!/
⑶작은 일에 힘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는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어야 합니다.어떤 사람은 이름이나 내고 얼굴 내미는데 서는 잘합니다. 그런데 이름 없이 빛 없이 힘들고 어려운 일은 기가 막히게 알고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성경에 보면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큰 일을 맡긴다'고 했습니다. 목동에 최선을 다했던 다윗에게 왕을 맡겼고, 사환에 최선을 다했던 사람 요셉에게 총리를 맡겼습니다. /할/
⑷하나님의 일은 사람을 관계치 말고 위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일해야 합니다.
⑸충성, 봉사는 기쁨으로 하고 아낌없이 해야 참되며 값진 것입니다. 기쁨이 없이는 봉사가 아니라 복종이 됩니다. 기쁨이 없이는 헌금이 아니라 의무 금이 됩니다. 기쁨이 없이는 눈치를 보게 됩니다. 이왕 교회에 나와 예수를 믿을 바에는 하는 모든 일을 기쁨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는 일이 즐겁습니다. /할/
㉥'하나님이 세우신 목회자를 얼마나 도왔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목회자를 위해 얼마나 기도했습니까? 목회자가 즐거움으로 일하게 했습니까? 근심으로 일하게 했습니까? 히13:17절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믿음이 하나님을 끼쁘게 해 드리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2012년 11월 11일 대예배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