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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의
김성수 교수
출애굽기 1장
첫 서두가 야곱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온 이스라엘 자손들의 이름이라 -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이주하게된 야곱의 열 한명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온 이들이 70인이었다고 한다. 역사를 기록하면서 이전의 역사를 언급하고 있다. 이전 역사와 단절된 무관한 역사가 아니라 이전에 일어난 역사를 바탕으로 계속되는 역사임을 암시하는 서술법이다.
출애굽 하면 어릴 때부터 자라온 사람들은 어떤 연상이 되는가? 모세가 물에서 건져짐, 막대기가 뱀이 됨, 열 가지 재앙, 십계명 받는 일등이다.
그러나 출애굽의 서두는 놀라운 하나님의 독립적인 사건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미 있던 어떤 일로 인해 이어지는 것이다. 출애굽기를 기록하면서 이 다음에 기록된 역사를 이해할 때는 반드시 이전의 일과 비추어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출애굽기를 이해할 때 이전 역사를 이해하지 않고, 연결을 생각지 않고 출애굽기만을 이해하려면 저자의 의도에 충실하지 못한, 경우에 따라서는 빗겨가는 왜곡의 이해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전 역사의 연결을 시도해야 하는데, 출애굽이 암시하는 역사는 무엇인가? 야곱 일문이 애굽으로 내려온 것이다. 야곱 일문이 애굽으로 내려오게 된 목적, 경위,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창세기에 명백하게 애굽 이주에 관한 내용들이 나타난다. 출애굽에 있어서 매개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요셉이다. 요셉이 어떻게 형들의 시기를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다가 어떻게 애굽에 흉년이 들어, 애굽의 이인자가 되었고, 흉년기간에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줄거리만 말하면 이런 이야기인데, 단순히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이렇게 되어버린 우연이 아니다.
창 46장 1절 - 7절을 보라. 8절은 출애굽기 1장 1절의 내용과 동일한 내용이다.
피상적으로 보면
하맛 어구에서 브엘세바까지 라는 표현이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남북경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현이다.
브엘 세바
① 일곱의 샘 - 아브라함이 염소 일곱 마리로 서약을 맺은 것을 가리킴
(블레셋과의 영토 경계를 확정하는 조약이다 )
② 맹세의 샘 -
농경사회에서는 저수지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지만 이스라엘은 산지에 살았다. 경사가 가파르기에 주로 과실수를 심거나 목축을 한다. 이런 곳에서는 강물이 없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솟아나는 샘물이다. 그러나 샘물이 많지 않기에 마른 우물을 많이 팠다. 샘이 그들의 생활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 사막에서 샘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 지역을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블레셋이 아브라함과의 조약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는다. 나중에 이삭이 그랄로 내려갔을 때 자꾸 쫓아낸다. 그래서 다시 조약을 했다해서 브엘세바 라고 한다.
브엘세바가 블레셋과의 경계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남쪽 경계를 의미하기에 이곳을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약속의 땅을 떠난다는 의미이다.
약속의 땅을 떠나 애굽으로 가는 중인데, 브엘세바에서 멈추었다. 하나님께 묻는다.
야곱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물었는가를 나타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에 대해 역으로 살펴보면, 야곱이 약속의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기근으로 약속의 땅을 떠나 애굽으로 갔다가 어려움을 당한 것을 알고 있다. 또 이삭에게도 이 땅을 떠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그랄에 머무른 것이다. 이 일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야곱은 약속의 땅을 떠나는 것을 상당히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 때문이다.
요셉이 자기가 애굽에서 총리대신 된 것을 무엇이라고 설명했는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이곳에 내려 보내셔서 남은 자로 하여금 살 수 있게 하신 것이라고 대답했다. 야곱은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요셉의 말을 듣고도 최종적으로 다시 확인을 했던 것 같다.
하나님의 대답은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왜냐하면 내가 그곳에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보면 애굽으로 이주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담겨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는 표현은 야곱에게 우연히, 갑자기 하신 표현이 아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 이유로서 하신 말씀이다.
그들의 약속한 땅은 가나안인데 그곳이 아닌 다른 애굽에서 그 약속을 실현하기를 원하셨다.
출애굽기의 첫 서두는 야곱과 함께 애굽에 내려온 자가 70인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러한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것을 토대로 연결되고 성취하는 역사인 것을 알아야 한다.
1-7절의 내용까지, 1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전 역사와의 연결에 대해 말했다.
1-7절에서 이런 요소 외에 또 다른 중요한 한 요소를 발견한다면 어떤 요소인가?
애굽 이주를 가능케 하고 실현케 했던 세대가 다 죽었다. 애굽 이주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 이후에 역사 진행은 어떻게 되었는가? (애굽 거주 역사진행)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이스라엘 자손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심히 창성 하였고 심히 강하였다. 그래서 땅위에 그들로 가득하였다.
저자가 이 부분에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창성 케 되었다는 것을 매우 강하게 말한다. 70이라는 작은 숫자가 이렇게 창성 하게 되었다는 대조는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이 창대 하게 된 것을 강하게 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창성 케 된 것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미리 알리신 예언의 성취를 뜻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 보낸 것은 그 땅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것은 하나님이 친히 어떤 땅으로 이끄실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말은 한 나라를 이루겠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의 약속이 성취가 된 것이다.
스데반의 사도행전 7장을 잘 이해하면 구약 역사의 전체 의미를 잘 볼 수 있다.
"약속의 때가 이르매"라는 표현이 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가까이는 브엘세바에서 물은 약속의 성취이다. 그런데 스데반은 그 이상을 보고 있다. 야곱에게 하신 약속의 때를 말함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약속의 때를 말한다. 스데반은 출애굽을 포괄적인 시각에서 보고 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1차적 성취를 말한다. 출애굽으로부터 성취된 이 역사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사도행전 7장 자체가 잘 이야기해 주고 있다.
그것은 본래 신구약의 관계를 다룰 때 취급하는 것이다.
애굽 이주의 세대가 끝나고 애굽에 거하는 동안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역사가 있었지만, 한편으로 애굽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애굽에 새 왕이 일어났다고 되어있다. 새 왕은 어떤 왕인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알지 못한다는 말을 그저 안다 모른다는 차원을 떠나서 때로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하면 애굽은 요셉이 애굽에 끼친 영향을 후대에 알고 있었으나 어느 때에 가서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새 왕조가 일어났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일어났다는 표현을 통해,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샘족 계통의 왕족이 좇겨 나고 새 본토의 왕족이 일어나서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가설을 받아들이면 출애굽 연대가 맞지 않는다. 출애굽이 14-5세기인데 비해 이것은 12세기로 받아들이게 된다.
어느 시기에는 요셉의 가족들을 후대하다가 어느 시점에서는 박해하였다고 볼 수 있다.
요셉을 알지 못한다는 새 왕조라는 말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이스라엘 대한 태도가 달라진 것을 말한다. (9,10절) 이런 표현을 볼 때 요셉을 알지 못 한다기 보다는 요셉이 끼친 공덕을 인정하지 않는 새 왕조라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애굽 왕의 태도 변화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무엇에 대한 반응인가?
이스라엘의 수가 많아진 것에 대한 염려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전체가 커지는 것에 대해서는 염려하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염려하는 것은 이질의식 때문이다. 소수일 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큰 수효가 될 때는 위협적인 것으로 작용했다.
애굽에 처음 와서 고센 땅에 거하게 해달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을 흩지 않고 한 지역에 살게 했다. 비록 애굽에 와서 거주하지만 애굽과 구별된 존재로 살겠다는 의도이다.
이스라엘 자신의 의도가 그러했고, 또 실제로 애굽과의 관계에서 이질적인 요소가 있었다. 이것이 소수일 때는 문제가 안되었지만 커졌을 때는 갈등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이질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민족간의 갈등인가?
왜 출애굽 첫 서두를 중요하게 여겨서 이전 역사에까지 소급해서 다룰려고 했는가 의도가 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보면 이민족간의 갈등처럼 보인다. 정치적인 박해, 소수민족의 서러움 등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출애굽의 첫 서두는 지금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을 무엇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지시하는가? 아브라함과의 약속과 연관을 짓는다.
애굽 가운데 존재하는 70인이 창성케 되어 있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우시려는 특별한 나라로서 큰 의미를 갖는 존재이다. 여기서 애굽과의 갈등은 이런 시각에서 봐야지 단순히 민족간에 생길 수 있는 갈등, 대립으로 봐서는 안된다.
단순히 피가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 이질감은 어디에 있는가?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약속의 성취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상속받은 자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나라를 상속하셨는데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가 이스라엘이다. 애굽과 이스라엘의 갈등, 이질성은 단순히 피, 언어, 거주지역이 다른 어떤 두 집단간의 갈등이나 대립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약속을 받은, 약속에 의해 형성된 집단과 그렇지 않은 일반 세상 민족간의 갈등이다.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갈등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본질에 대해 깊이 이해해야 알 수 있다.
2000년 9월 19일 화 (세 번째 시간)
온 땅이 내게 속하였다. 그러나 너는(이스라엘) 내게 있어서 특별한 의미에서의 소유이다!
애굽과 이스라엘의 갈등은 민족 갈등, 민족내부의 갈등이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적용 하냐면은 교회와 세상간의 갈등에 적용될 수 있다.
애굽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거대한 무시 못할 형편으로 자라게 되는데, 바로는 하나님의 백성의 창대 함을 막기 위해 노력을 한다. 노역을 통해, 산파들을 통해, 나중엔 노골적으로 이스라엘 유아들을 죽이게 되는데, 겉으로 보면은 이스라엘 백성이 당하게 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은 바로가 당하게 된다. 오히려 결과는 더 번성하게 되었더라! 그리고 모세를 들어 바로의 궁전에서 애굽의 왕자들과 통치자로써 함께 교육을 받게 한다. 그런 면에서 모세는 탁월했고, 기대와 선망의 대상이 된다.
출애굽기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히브리서에선 "애굽의 모든 좋은 것을 포기했다"라는 표현을 보면 그가 애굽에서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세는 어찌되었든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모세가 하나님의 어떤 상관하심과 섭리 등을 느꼈고, 나일강에 버렸을 때 미리암을 시켜 갈대 숲에서 버리고 지켜본 것은 어머니 요게벳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어떤 특별한 범상치 않음을 느꼈을 것이다.
모세는 노예의 신분이고 강에 빠져죽어야 될 신분임에도 바로의 공주가 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삶이 보통 삶이 아닌 특별한 삶일 것이다! 라는 사명의식이 있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어머니 등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늘 생각하는 것을 보면 느낄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고역 한 상태를 보러갔다"(단순히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깊은 관심으로 보든지, 더 나아가서는 참여하는 것이다)
동족이 애굽인에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주저함 없이 애굽인을 쳐 죽이는 것은 단순히 어떤 신앙적 분노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하는 것을 동족들이 알아주길 원했다. 행 7장의 스데반의 설교 중에 보면 알 수가 있다.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애굽의 학술을 배우고 말과 행사에 능한 탁월한 지도자로 성장하게 된 것은 모세가 생각하길 하나님께서 나를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한 방법일 것이다. 즉 나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하길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에 대한 사명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세의 시도는 거부 즉 이스라엘 백성 자체들에게 거부를 당하게 된다.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즉 그는(모세) 하나님의 섭리로 이스라엘을 구할 지도자로 알고있었는데,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이 지도자임을 알길 바랬는데,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은 그가 지도자임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분명히 하나님의 섭리로 자신은 지도자인줄 알았는데..., 그리하여 그는 미디안으로 도망갔고, 그곳에서 결혼하여 게르솜(내가 이방 땅에서 객이 되었다)을 낳는다. 그런데 미디안의 생활은 별 중요함이 없을 것 같은데 왜 출애굽이라고 하는 중대사를 다루면서 모세의 사소한 家庭史를 다루고 있는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이방 땅의 객이 되었다" 는 미디안의 거주를 어떻게 볼 것인가? 를 나타내주고 있다. 모세의 이런 참담한 실패는 40년 동안 지낸 것과는 정반대인 미디안에서의 40년의 생활은 좀 더 살펴봐야 된다.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써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한 모세는, 은혜를 베푼 자에게 가장 혹독한 평가를 받는다"
누가 당신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써 인정하는가?" 라는 지적을 받고, 이스라엘을 구했다고 행동한 애굽인을 죽였는데, 오히려 이것은 살인행위라는 동족이스라엘백성의 평가를 받았다! 애굽인을 죽이듯 나를 죽이려느냐? 정당한 권세와 권위 없이 나를 죽이려는가? 시내산에서 모세를 불러 모세를 지도자로 부른 것과는 다르다. 모세는 스스로 자신의 생각으로 지도자로 나선 것이다. 그가 한 행위는 살인자의 행위였다. 그가 배운 40년 동안 배운 방법으로 즉 그는 세상권력의 법칙의 원리로 배워왔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했을 때 그가 배운 세속법칙으로 구원하려고 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배웠던 전부였다. 그러나 그가 구원해야될 그 나라는 세상 나라와는 다른 것이었음을 그는 몰랐다.
모세는 스스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했던 것은 세상 원칙에 의한 방법으로 구원하려 했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진정한 지도자의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에, 그는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받은 훈련 결과는 모세를 모세답게 만들었다.
2000년 9월 26일 4번째 시간
동족이 박해 당함을 보고 칼을 들어 살해하는 행위. 누가 너를 세웠느냐?
그 한마디에 완전히 망연자실한 모세! 모세의 결정은 자신 스스로의 결정이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하려는 행동은 세속적인 행동이었다. 애굽에서 배운 실력, 우연히 배운 방식이 아니었다. 세속적인 방식이었고, 그 시도는 실패와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만약 실패하지 않았다면, 그 모세는 계속적인 민중 공격 등을 시도하였을 것이다.
"네 목숨을 찾는 자들이 다 죽었다" - 모세가 등장할 때의 암시.
"그 언약을 기억하사"가 또 나온 이유는? 이 말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차이가 달라진다. 단순히 고통 당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다음에 일어나는 일들이 언약과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불에 타지 않는 떨기나무)
하나님의 강림 : 특별한 땅의 역사 함을 이루기 위함.
가나안 땅이 특별한 의미를 갖게 이유는?
창 12장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 통하여 약속하신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은 어떤 미지의 땅에 가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세겜에 도착할 때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 땅을 주리라!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이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말하고 있다. 가나안 땅이 물질적으로 대단한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 가나안 땅은 못살 것이다.
애굽 땅- 사람이 물을 대는 곳이다! 사람이 관계수로를 열어 발로 물을 움직이며 어느 정도 물 공급을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땅 - 비 내리면 땅이 흡수함, 마른 우물을 파서 비가 오면 비가 올 때 받아둠,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제대 오고 안 오면, 즉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관계성이 있다.
모세의 반응!
구원자로 자임하고 나섰다가 실패한 경험이 그는 애굽의 학술과 지혜의 필요가 없음을 깨닫고, 한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자신이 배운 모든 것들이 다 쓸모가 없이 다 쓸데없음에 대한 무력감.
내가 기대하고 의지하고 애타게 기대했던 모든 것들이 하나 하나 무너짐을 깨닫게 될 것이며,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 목회가 아니고, 하나님 그가 하시는 것이 "목회이구나"를 하루빨리 깨달아야 한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은 모세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와 함께 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분명하게 하기 위한 일이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표현하면서(출3:13절)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말할 수 있는 준비와 자세가 되어있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이런 모세의 변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는 '에헤'라는 이름과 그 이름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십니다. 두 다른 형태의 문법적인 상관 관계는 무엇인가?
6:3절엔 엘 샤다이(전능의 하나님)로 가르치셨으나 는 새롭게 알리신 새로운 이름임을 가르친다.
(나는 나이고 자 하는 자일 것이다!, 나는 나일 그러한 존재일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자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동시에 하나님의 새로운 모습일 것이라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
70역은 이것을 이라고 번역함. (한글 번역은 존재론적인 의미로 설명이 되어있다.)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가 이전의 계시와 무관하진 않았다. 이름이 바뀌는 것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지만, 그러나 "너의 조상의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나를 보내셨다". 라고 전하라 라고 이야기하심으로 너의 조상의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고, 계시와 언약의 동일 선상의 하나님이심을 이야기한다.
니팔은 수동과 재귀적 뜻이 있는데, 자기를 나타내는 의미로 재귀형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출애굽을 어떤 정치적 압박에서의 자유로 논하는 것은 참 무식한 논함이다.
이것이 자유의 전부가 아닌 자유의 소극적인 자유인데, 이 자유는 하나님 섬김에서의 자유임을 알아야 된다. 이것이 적극적인 자유이다. 자유에서 적극적인 면이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 정치적 압박에서 풀려난 우리 사회에서 생겨난 것은 전부 유흥업소의 난립을 볼 수 있다. 성경은 자유를 이야기 할 때 무엇으로부터 보다도 무엇을 위한, 무엇을 향한 즉 적극적 의미의 자유를 이야기한다. 애굽은 하나님의 섬김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성경은 규정한다.
이러한 영적 자유를 얻는 일이 평화롭게 순탄하게 일어나진 않는다! 애굽의 바로는 강한 힘으로 막고 저지하는데, 결국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편 팔로 영적 자유를 얻게 된다. 그만큼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더라면, 하나님의 능력이 없었더라면 자유 치 못함을 보여주고,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이 세력이 얼마나 끈질김을 보여준다. (3;19-20)
모세는 하나님의 권유함에도 나서지 못한다.(4:1)
모세의 이런 태도를 어떻게 봐야하는가? 부모 말을 듣기 싫어하는 이런 성격의 거절일까? 아니다. 모세의 거절에 하나님은 모세의 그런 답변에 긍정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시인하시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비록 내가 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들을 믿게 할 수 없다. 즉 모세의 입장에선 그 답변이 거절됨이 타당함을 볼 수 있다. 자신은 자기가 맡은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임을 그는 알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순수한 동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처절히 등을 돌렸는지 그는 깨달았기에 하나님께 "못 간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표적을 행할 능력을 주심으로 보내신다.
뱀이란 지혜의 상징이기도 하며, 애굽에선 뱀이 신격화 되어있었다!
문둥병이 생기다 낫게됨 - 성경에서 문둥병은 부정함의 대표적 질병이다.
하나님께서 문둥병을 모세에게 보여줌은 모세를 통해서 나타낼 이적이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부정케 하기도 하시고, 정결케 하심을 보여주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결케 함을 보여 주기도 한다.
2000/10/10
4장
이스라엘의 구별됨. 세속적인 축복 강성해지고, 부유해지는 그런 구별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구분, 타 이민족과의 구별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민족과 많은 부딪힘이 있었는가?
그것은 그들의 구분됨이었는데 바로 죄와의 분리라는 이질감이 형성되었기에...그리고 그들의 갈등은 세상나라와 세상나라 가운데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갈등이었고 그 갈등은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을 바로가 말살하고, 힘이 없게 하려 하지만, 노역을 가중시키고, 유아학살을 하지만 오히려 강성해지는 것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한 대적과 핍박이 아니고 위협세력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그들을 보내지 않았다. 애굽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으려는 것이 애굽의 목표였다. 애굽은 단순히 핍박하는 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나안 땅(하나님의 나라)으로 인도하려는 대적, 방해 세력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약속의 땅에 가게되는데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다.
약속의 땅에 가기 위해서 한 지도자를 세우는 것을 볼 수 있다.
미디안에서의 할 일없는 삶을 모세는 보내게 되는데, 그러나 이 40년간의 생활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은 아니었다. 모세의 부름에서 볼 때 알 수가 있다. 40년이 지난 후 하나님의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정한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데 모세는 매우 뜻밖의 자세를 보인다. 전에 자신이 구원코자 했던 모습과는 다른 상황을 보여준다.
그는 하나님께 '나라는 존재는 무엇입니까?' 이런 나를 당시 최대 세력인 바로와 맞서서 어떻게 싸우겠습니까? 거기에 비례한 자신의 무가치함, 왜소함에 대한 말인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너의 힘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모든 일을 하겠다는 것을 말한다.
내가 어떤 존재이며, 어떤 능력을 갖춘다는 것은 아무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식이 분명히 해야 된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겸손해진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해도 좌절하지 않는다. 이런 믿음을 가져야 된다. 바울의 고백에도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서 되었다."(고전)
두 번째로 모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다 라고 말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라고 요구하게 될 것인데, 뭐라 말할까요?
모세의 이 물음은 무슨 물음인가? 하나님께서 너를 무엇 때문에 보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그러한 물음에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말하셨다.
모세에게 알리신 하나님의 이름의 뜻은 이름은 출애굽의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은 자기백성을 종 자리에서 그가 예비하신 곳에 인도하여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계시사((啓示史)에서 하나의 신기원이 되리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출4;1)"
저들이 그 말을 들을 거라는 자신이 없다. 라는 모세의 좌절된 말이고, 아울러 저들이 믿을 보장을 요구하게 된다. 하나님은 표적을 행하시는데 지팡이가 뱀이 되고 문둥병을 발함으로 모세를 믿게 하신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표적이라는 것은 뱀, 문둥병, 나일강을 피로! 저것은 단순히 변하게 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을 가르키는데 그것은 상징의 기능인데, 성경에서 애굽을 뱀 모양의 괴수로 비유되고 있다. 뱀을 지팡이로 만드는 것은 애굽이라는 권력 세력이 모세의 힘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을 암시한다. 나일강은 또한 애굽에서의 생명의 젖줄이며 그 나일강은 신격화되는 것인데, 그것이 피로 변하는 것은 나일강이 갖는 긍정적인 기능을 모든 기능을 상실하게 됨을 말한다. 생수로서 관개수로 역할로서 기능을 상실함을 의미한다. 또한 문둥병을 발하고 낫게 됨 또한 예표를 나타내는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하실 능력이 부정한 것에서 정결한 것으로 바뀜에 대한 예표 임을 알 수가 있다.
하나님은 어떠한 방법으로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뢰케 됨은 홍해 사건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런 보증 등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못 가겠다고 말한다. "말의 능력의 부족함" 때문에 그는 이러한 대답에서 그의 사역이 어떤 것에 중요함을 암시한다.
스데반은 모세에 대해 증거 하는 것을 보아도 애굽의 학술에 능한 모세이지만, 과거에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데 그 세속적인 애굽의 학술은 전혀 무능하고 필요 없음을 깨닫고 있음을 말한다.
그럼으로 그는 어눌하다고 스스로 알게되었다. 또한 그는 말씀의 능력에 대해서 깊은 특별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라고 볼 수 있다. 광야 40년의 생활을 통해서 그는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없음을 뼈져리게 알게 된다. 세속적인 방법으로는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모세의 과거가 분명히 지금도 기억되고 있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데 얼마나 부족한지를 그는 깨닫고 있었다는 것이다.
말의 능력이 없다라고 고백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는데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출 4:11)
즉 말씀의 사역이 모세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어서 하나님은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하는 모세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모세를 책망하신다.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으로 선포된 말씀을 직접 모세에게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자신의 말씀이 될 것이다.
베드로사도가 성전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난 후 사람들이 벌떼같이 그를 붙잡고 그를 바라볼 때에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경건으로 이룬 것 같이 왜 우리를 바라보느냐? 나사렛 예수의 능력으로 행하였다. 이런 고백의 목회자가 필요하다.
목회 일을 내 능력으로 할 것이다 라고 하면 늘 불안하고 짖 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같이 되리라(출 4:17)
모세가 하나님의 입이 되어 전하듯이 아론은 모세의 입이 되어 말하는 의미는 모세가 계시사에서 독특하고 중요한 위치임을 알 수 있다. 수 천년이 지난 지금도 모세 율법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보면 계시역사에서의 중요한 위치임을 밝히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구원자로 부르심에 모세가 거듭 사양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모세가 애굽에서의 한번의 실패와 광야에서의 생활을 통해 겸손해짐을 볼 수 있지만,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출애굽은 모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능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과 이적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애굽의 구원역사가 이루어질 것임의 재확인이 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친히 하시는 것이 누가 감히 나설 수 있겠는가? 그러나 속박된 하나님의 백성을 구하는 것은 순탄하지도 쉽지도 않을 것이라 말을 한다.(출4:21-23)
모세를 통해 이적적 능력을 행함에도 바로는 놓아주지 않는다! 표적이나 이적이 결코 신자를 만들지 못한다. 예수님 당시에 얼마나 많은 이적을 행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쫓아다니지만 그들은 기적과 이적을 쫓았지 예수를 쫓지 않는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 대적하는 세력들이 금방 굴복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대적을 통해 무엇인가를 분명히 나타나게 하심이 있다.
출 4:24의 난제 해석
왜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는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돌발사태이고, 이 사건에 대해 설명하는 24,25절 역시 너무나 짧은 표현이기에 참 해석하기가 힘들다. 어떤 이는 귀신과 결부시키지만 너무 이상한 말이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아들의 양피를 베어 할례( )를 행함으로, 모세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음으로, 당신은 나의 피의 남편이라는 십보라의 말도 참 애매 모호하다.
이 말은 결혼에 의해 맺어지는 관계를 뜻하는데, 아마도 십보라는 결혼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모세는 가정을 이룸에 있어 신앙인의 가정의 규범을 따르지 않음을 본다. 대표적인 예로 아들이 할례를 받지 않았다.
사라가 왜 아브라함과 이름이 함께 바뀜은 영생의 유업, 아브라함의 유업을 공동으로 받는 것을 의미함. 이삭의 결혼도 이삭의 아내의 발견도 엘리에셀은 기도를 통해 섭리를 간구하며, 리브가의 선택도 하나님이 선택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암시한다. 바로 그 다음날 떠나는 것을 봐도 관례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리브가도 이 부름은 하나님의 부름으로 인정하고 아브라함의 떠남에 동참하는 것을 말한다.
5장
출애굽은 애굽이 대표하는 세력 그 세력은 재앙을 내리면서 억 매임에서 자유 케 하시는 것이 첫째 단계 소극적 자유이며 이렇게 되어 자유케 됨으로 나를 섬기게 하라 적극적 자유. 풀어내어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라. 이 자유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섬김의 자유임을 볼 수 있다.
이 자유가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가 나타나게 된다! (5장1절)
애굽 권력 상징의 대표인 바로와 어떤 면에서는 이면적(번성케 하고 강성케 함, 바로 딸에 의한 모세 양육)으로 역사 해 왔지만, 이젠 표면적으로 하나님과의 대결이 나타나게 된다.
뱀의 변함에 대한 대결은 물리적 싸움 대결이 아니라. 영적 싸움. 영적 대결임을 보여준다.
악한 영들과의 대결이다.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신들을 벌하리라 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될 것인가? 어느 정도 대결을 벌이다 애굽의 술사들이 이것은 신의 손가락이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나타나셔서 그 능력을 나타내신다" 라고 이해될 수 있다.
뱀의 변함- 하나님의 권력의 장 중에 있다.
나일강의 피 - 생명의 젖줄.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우박 - 그들의 생명이 하나님에게 있다.
이와 같이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드러나는 것이 있는데 애굽의 신들은 거짓임을 알게된다.
그러므로 애굽인들은 자신들의 신들의 정체를 알게된다
하나님은 장자와 初胎牲을 죽임으로 우상 신들의 거짓됨을 결정적으로 드러내신다.
마술사들의 사술을 통해 영적 차원의 전쟁이 상당히 광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정치적 구원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출애굽의 배경이 광범위하고 포괄적임을 알 수 있다. 우상 숭배에 억매임에서 벗어나게 함을 볼 수 있다.
악한 영들의 역사를 우리 실생활에 매우 광범위하게 실제적으로 침투해있다.
출애굽은 얼핏 읽고 지나면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참으로 광범위한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
이스라엘이 경험한 출애굽은 단순히 외적인 것이었다 라고 말하면 곤란하다. 제사라는 것이 외적인 것이 있지만, 영적인 부분이 지배적이다. 구약의 이해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2000년 10월 17일
지난 시간에 10가지 재앙으로 알고 있는 사건이 실재로는 이스라엘을 억류해서 자기를 섬기는 노예로 섬기고자 하는 애굽에서 그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일종의 영적 전쟁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 대응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은 강한 영들의 영적 싸움이며, 이 전쟁의 차원이 광범하며 포괄적임을 보여준다. 애굽이라는 정치적 물리적 세력에서의 벗어남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하나님께서 왜 단번에 바로와 애굽을 굴복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10가지 재앙을 하셨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충분히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다. 첫째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함이고 둘째로 애굽에겐 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애굽의 생사와 모든 것을 다룸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일반적으로 각 나라마다 민족의 종교가 다스리는 것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무너뜨리는 것이며,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또한 이러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천지를 지으시고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만 자신을 알리셨다.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에게 열방들이 하나님께서 오직 네 안에만 계신다. 라고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출애굽의 의도가 단순히 이스라엘과 애굽의 대조적인 면만을 보기 쉽지만 이런 하나님을 본다면 애굽을 친 하나님은 간접적으로 애굽에게 하나님을 알리시는 수단이 되었다. 열방들의 깨달음은 자연히 하나님 앞으로 오게된다. 하나님의 진정한 힘을 느낀 자들은 술사였다. 그들은 친히 하나님과의 영적 싸움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깨닫게 된다. 나중에 우박재앙에서 모세의 말을 듣는 애굽인들이 생겼고,
이스라엘 60만 장정들과 더불어 잡족( . 섞여있는)들이 함께 떠나왔음을 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출애굽이 피상적인 것만으로 볼 때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 같이 보이지만, 애굽에 대해서 하나님을 알리는 애굽을 위한 배려도 보인다.
이스라엘의 부르심의 궁극적 부름을 오해한 대표적 예가 요나이다. 니느웨가 회개하자 요나는 이럴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회개시킬 줄 알았기에 내가 다시스로 도망갔습니다.
11장에서 하나님께서 한가지 침(타격)이 남아있다 라고 말하신다.
사람과 짐승의 초태생을 쳐죽이실 것이다라는 말을 하신다.
바로의 결정적인 타격으로서 애굽의 모든 초태생을 친다 하신다면서 이 달로 달의 첫 시작 즉 정월로 삼으라 하신다. 바로를 결정적으로 굴복시킨 유월적 사건의 해의 첫 달로 삼는 명령의 의도는 무엇인가? 간접적으로는 신기원적인 획기적 사건일 것임을 의도하고 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시작을 말하며 유월절, 출애굽은 새로운 시작이다. 모세를 부름에 하나님은 조상들에게 알리지 안으신 이름을 가르쳐줌의 의미가 상통함을 볼 수 있다. 유월절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애굽의 장자 초태생을 죽임으로서의 그런 의미로만 끝나지 않았다. 유월절과 관계해서 추가적인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절기 의식을 추가하셨다. "1년 된 흠 없는 숫염소를 저녁 무렵에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칠하라" 이 피를 보고서 넘어가시리라 라고 말하신다. 이것은 상당히 복잡한 문제를 야기 시킨다. 하나님께서 죽음의 사자를 보내어 애굽의 초태생의 범위는 사람과 짐승의 모든 범위가 들어간다. 우리는 이런 것을 단순히 "이스라엘에 억매여 있다"의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사람장자를 죽임은 이해되는데 짐승은 왜 죽이시는가? 왜 확대되었는가? 이것은 뭘 말하는가? 하나님 백성을 억류하여 저항하는 대적세력인 바로는 심판의 대상이 포괄적인데 그 대적의 범위가 상당히 넓음을 말한다. 애굽의 신들을 포함하여 전체를 대적세력으로 여기심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범위가 아무리 넓고 포괄적이라 할지라도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냥 보내시지 그런 특별한 의식과 그 피를 보고 넘어가겠다고 하시는가? 그 피로 인해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았는데, 이스라엘도 함께 죽어야 되는 사람들인데 즉 애굽인과 다르지 않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양의 대속적인 죽음을 얘기할 때 곧 바로 예수님을 말할 수 있지만, 왜 바로와의 싸움에서 이것이 시작, 개입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당시의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과는 잘 맞지 않는다. 유월절 의식에 관련된 의미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초월하는 어떤 의미가 있었다. 이것은 역으로 생각하면 이렇게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앞으로 궁극적으로 행하실 일을 보여 주신 것이며 출애굽 자체가 일종의 표적, 즉 상징적인 사건이다. 당시 역사적 상황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일이었음을 보여준다. 성경 곳곳에서 이런 유사한 일은 많다. 유다 지파에게 치리권을 약속하시면서 실로( )가 오시기까지 로 통하는데 그 뜻은 "그에게 속한"이라는 뜻. 유다 지파에 속한 왕권이 진정 그의 것이다 라는 뜻
7일 동안 지킴의 의미는 언제까지나 항상 지속적으로 지킴을 나타낸다.
누룩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누룩은 하나님 백성의 자격을 상실하는 매우 심각한 것임을 암시한다. 첫날부터 칠일 마지막까지는 일주일 내내 누룩 없는 상태를 말한다. 고전 5장에서는 무교절이 죄 없는 상태를 말한다. 누룩은 발효 즉 부풀게 하는 것인데 긍정적으로는 천국의 확장임을 말하지만 대개는 부정적으로 사람의 영혼을 부패하고 변질케 하는 죄악을 가리킨다. 유월절 은혜는 지속적으로 누룩 없는 상태 즉 새 존재로 된 새로운 상태가 언제까지나 유지해야됨을 말한다. 죄악이라는 것이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것을 불가능하게 말하는 것이다.
유월절 참여 조건에 대한 규례에 대해서 살펴보자.
12장 43절 이하에 "모든 외국인은 유월절 음식을 먹지 못한다"라고 말하는데 유월절을 먹지 못함은 무엇인가? 고전 10장18절에 이 말씀은 제물을 먹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임을 말하는데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임을 말한다. 유월절에 이방인들의 먹지 못함은 그 은혜에 참여하지 못함을 말한다. 그렇다면 외국인은 어떤 대상인가? 돈으로 산 종도 유월절에 참여했는데! 여기서의 외국이라는 말은 단순히 육적 혈통에 의한 것에서 외국인이 아니 임을 말하고 있다. 육적 혈연적으로는 이스라엘과 무방하고, 할례자는 참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외국은 할례와 관계한다. 할례가 상징하는 영적 새 존재가 진정한 이스라엘에 속한 자인가 아닌가가 유월절 참여 조건에 든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찬 참여자도 세례 받은 자가 참여한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고백하는 자만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듯이 유월적 행사도 할례 받는 자만이 참여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자꾸 초태생, 장자가 나오는 의미는 이스라엘이 아이가 태를 터치듯 새로운 자가 됨의 최초로 경험하는 자이며, 이런 은혜를 경험함에 있어서 장자적인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은 그들 자신의 초태생을 하나님께 받침으로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나타내고 있는가? 이러한 새로운 존재됨이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소유가 됨을 말한다. 이스라엘의 애굽에서 경험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이스라엘이 세계의 모든 민족가운데 새로 태어난, 첫 열매, 첫 경험자가 되게 하셨는데, 이런 새로운 존재로 태어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소유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출애굽의 이야기가 상당히 복잡한 듯 보이나 모든 것들이 긴밀히 연결되어있고 연합되어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됨은 신약에 그대로 나오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미 계시하였던 것이 신약에 나옴을 말하고 있다.
이제 이스라엘은 애굽의 소유에서 벗어나서 자유의 땅으로 가게된다.
하나님이 어디로 인도하지 않고 어디로 인도하셨는가? 저들을 블레셋의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다(출13:17) 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쉽고 편한 해변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백성들이 전쟁을 보게 보면 애굽으로 돌아갈까 우려해서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게 되면 귀찮고 싫어서 가기 싫다 라고 보기 쉽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조금 어려운 것은 그 이후에 진행된 일이 이런 해석을 하게 허용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홍해에서 결정적인 심각하고 무서운 전쟁을 하게 된다. 홍해사건과 관련된 서술을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 싸우셨다". 분명히 이것은 하나님께서 실질적인 전쟁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전쟁을 겁내고 두려워하는 이스라엘에게 가장 무서운 전쟁을 보였고 승리함으로 그들에게 전쟁 두려움을 벗어나게 했다. 그 두려움을 벗어나게 하는 것은 승리하는 방법밖에 없다. 이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크게 이기심을 보여줌으로 앞으로의 전쟁에 담대함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치기 위한 미끼이기도 했다. 곧장 바로 안가고 엉뚱한 홍해 길로 되돌아오는 것은 바로 애굽과 전쟁을 하기 위함이다. 그들이 보기에 이스라엘이 헤매고 있구나, 어쩔 줄을 몰라 헤매고 있구나,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하나님께서는 가깝고 어떤 면에서 쉬운 블레셋 길로 인도하시지 않고, 홍해 쪽으로 고난의 길을 걷게 하심은 첫 시작부터 홍해라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장벽에 부딪히게 한다. 앞에는 물, 뒤에는 세계 최강 애굽의 전차부대가 있는데 이런 위험을 극복하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을 경험하게 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무서운 대적과 전쟁을 벌이신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어떻게 나오는가? 쯔바오트 짜바오는 만군(군대)과 관련된다. 즉 이스라엘이 군대로 나왔다. 즉 일종의 군대로써 나왔음을 말한다. 그들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을 하기 위해서 애굽에서 나온 것이다.
광야 끝에 진침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지금부터 광야여행이 시작됨을 말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로써 시작되었고 가장 혹독한 환경인 광야에서 전쟁을 수행하게 된다. 비록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는 하나. 거칠고 황량한 광야 길을 100만이 훨씬 넘는 큰 무리를 인도하심은 백성이 전쟁을 보고 돌아감은 단순한 염려가 아니다! 정말 홍해사건이 없었다 면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이스라엘은 홍해의 사건을 경험했기에 광야의 길로 갈 수 있었다. 이제 이스라엘이 수 백년간 전쟁을 해야됨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홍해의 전쟁은 그들의 전쟁을 대비한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팎케 하시니 그가 의기 앙양하게 이스라엘을 치러 왔고 바로가 접근하자 부르짖지만, 원망의 부르짖음과 불평, 회의를 마음에 품고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흔히 힘들 때, 우리 마음에서 솟아나는 원망과 불평과 불신이다. 이런 불신앙의 원인은 애굽을 떠나기 전에 있었던 뿌리깊은 것이다. 그들은 광야생활을 두려워했고, "차라리 애굽을 섬기는 종으로 남겠다" 라고 하는 말은 아직도 뿌리깊은 불신앙 남아있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앙을 처리하고자 저들에게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하고자 진정한 하나님의 군대로 연단 하고자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전쟁에 참여하여 눈앞에서 세계 최강의 군대를 물리침으로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의 확신함을 얻게 함을 위한 것이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추스려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생기는데 여러 번 당하다 보면 이골이 나지만, 그러나 이 힘든 일은 죽을 때까지 일어난다.
그런 혹독한 시험을 경험한 1세대들은 다 죽고, 새로운 세대들이 약속의 땅으로 가지만 그 다음세대는 당장 무너짐을 알 수 있다.
이 메마르고 혹독한 광야 여행은 이스라엘의 홀로 걷는 여정이 아니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먼저 앞서 걸으시는 하나님. 낮엔 구름기둥으로 밤엔 불기둥으로 물과 만나 메추라기는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은혜를 새롭게 경험하는 날들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여행은 끝없이 계속된 여행이 아니라. 가나안이라는 목적지가 있었고 이 여행은 소망의 여행이었다.
신자에겐 무사 평안이 없다. 죽을 때까지 싸워야 됨을 말한다. 평안은 혼란과 고통가운데 누리게 하시는 이상한 평안을 하나님을 누리게 하신다.
2000/10/24
홍해사건은 어떤 의미에서는 출애굽의 마감이면서 동시에 광야여행을 시작하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한다.
애굽의 장자를 치시면서 이스라엘이 나오지만 그 기세가 꺽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홍해사건에서 완전히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애굽의 최강의 군대와 치열한 전쟁을 벌인다. 겉 보이기엔 일반전쟁 모습과 달라서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지만 여러 가지 여호와의 격렬하고 치열한 하나님의 전쟁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 길(해변길)로 가지 못하게 함은 이스라엘이 전쟁을 보면 되 돌이킬까봐 블레셋 길로 보내지 않으시는데 왜 하나님은 그들을 돌아가게 해주었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셨을 때 군대로,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는 자들로 부르심을 받았다 라는 것을 보여주며 이것은 교회의 성격(전투하는 교회)를 보여준다.
15장
홍해에서 놀라운 구원을 경험함을 모세가 노래한다.
이 장을 잘 보면 홍해사건에 대한 바른 이해를 알게 된다.
15장 22절에서 보면 마라 에 대해 이야기한다.
광야여행에서 흔히 겪는 일인데 여러 가지 방법들을 통해 물을 마시게 하신 방법들을 우리가 생각해 보는데, 이곳에서 그들을 "시험하셨다"라는 말을 생각해보도록 해보자.
이 말씀은 반복되는 유사한 사건들이 무슨 의미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로 모신 이유를 알게되는 중요한 말씀이다. 혹독한 조건의 광야여행은 하나님의 시험하심이었다.
물이 없는 것은 광야의 혹독한 내적인 조건이며 그들을 "시험하셨다"를 덧붙임은 하나님의 의도가 "한층 더 깊은 의미가 있었다" 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데에 대한 시험이 핵심임을 말하고 있다. 그들을 연단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순종하면 그들을 하나님은 치료하실 것을 하나님은 약속하신다.(출15:26절)
애굽의 재앙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의 심판이었고 '하나님은 치료하심'이란 말은 영. 육간의 치유함을 말한다.
신자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갈급함을 느끼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광야를 여행하면서 기갈을 경험하는 것은 정상적인 것인가? 비정상적인 것인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난을 받지 않겠다 라고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영적 기갈이나 굶주림을 당할 때 당하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그러할 때 우리가 어떤 믿음의 자세를 가지느냐가 중요하다.
16장 만나 이야기
이스라엘의 불평을 위해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의 역사적 배경이 여기에 있다.
만나는 그 날 쓸 것을 거둔다는 것은 내일도 하나님께서 그날에 필요한 것을 주시리라는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을 말하며, 하루하루 사는 것을 믿음으로 살 것임을 요구하신 것이다. 날마다 약속하신 대로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은 믿음의 연단을 위한 조처인 것이다. 날마다 그 은혜를 새롭게 체험하므로 믿음이 견고해 준다. 근본적인 믿음의 자세를 가르쳐준다.
이스라엘의 저녁과 아침마다 하나님의 구원의지를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나타나시며,
저녁마다 고기를 먹음으로 구원하신 하나님을 새롭게 보고 체험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용할 것만 거둬라 했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고 더 많이 거둬들여 하나님은 분노하셨고, 6일엔 두 배를 거둬도 벌레가 생기지 않아서 안식일을 지킨다.
그러나 어떤 백성들이 안식일 날 만나를 찾아간다. 이러한 사실을 보게 될 때 만나가 매일 아침에 있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간과한 불신앙인으로 그날그날 만나를 찾아 먹는 것이었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그 은혜는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17장 므리바 물 사건
모세를 백성들이 시비하는 일은 실제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불신앙에서 그와 쟁론하는 말이다. 이 시비가 모세를 괴롭게 한다.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 앞에서 그대로 행하였는데, 그 시험의 내용인즉 여호와께서 우리가운데 계시는가? 안계시는가?를 시험한 것이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셨는데 왜 물이 없는가? 그래서 과연 여호와께서 우리가운데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 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도 이러한 일이 많이 일어난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나아갔는데...원망과 불평을 하게 된다.
구름과 불기둥을 눈앞에 보며, 이 때까지 수없이 저들을 먹이시고 보호하심의 은혜를 망각하고, 조금 어려움이 오자, 당장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악한 불신앙의 모습을 이스라엘은 보여준다. 이것은 광야 여행 중에서 이스라엘인이 보여준 다양한 모습이며, 이스라엘 자신의 실상이 드러나며, 또한 광야여행이 어떤 것인가의 본질과 성격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아말렉과의 전투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내리면 짐. 모세의 높이 들린 손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사건의 의미를 나타내는 두 가지 표현
모세가 아말렉과 싸워 이겨 제단을 쌓고 여호와 닛시라 말한다. 닛시는 군기(군대깃발)를 말한다.
(하나님의 보좌를 향하여 (모세)손이 들렸다.)
높이 든 모세의 손은 어떤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에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것과 또한 그 높이 든 손은 하나님을 향해선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손을 듦은 간구 기도의 의미를 표현한다. 즉 기도는 믿음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지팡이라는 것은 모세를 통해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상징을 말한다.
그것을 높이 들었다! 높이 들고 내릴 때 전쟁이 이기고 짐은 무슨 뜻인가? 이스라엘이 무엇을 의지하고 전쟁했다는 것을 의미하냐면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전쟁했다 라는 것을 말한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하였다( )그러한 믿음의 반영을 보여준다.
비유컨대 하나님의 능력이 손이 올리고 내리움에 따라 이스라엘의 승패가 좌우되었고, 이것은 이스라엘이 치르는 전쟁이지만,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그의 전쟁임을 말하며 또한 이것을 상징하는 것이 여호아 닛시 즉 여호와의 군기를 말한다. 나의 전쟁의 이기고 짐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있다.
이스라엘의 전쟁의 특성은 군대가 많고 적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승패원인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따라 승패가 좌우됨이 특성이다.
18장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방문내용을 기록하고 있고 전체적으로 2부분으로 나누는데, 첫째부분의 내용은 이드로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행하시고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대하여 들었다. 라고 이야기하며 이드로는 모세의 아내 십보라를 취하고
(보내다). 그녀의 보냄이 이혼을 뜻함인지 친정에 돌아감인지 뜻이 분명하지 않다.
아내와 아들을 대동하고 가다가 하나님은 모세를 죽이려하였고 그 문제가 할례였던 것 같은데 그 일이 직접적으로 관련되지는 않았을런지 모르지만 모세는 아내와 아들을 친정에 보내었던 것 같다. 이것이 이혼이었다고 해도 왜 하나님이 그렇게 모세에게 행하심은 정말 난제이다.
출 18:12절에 모세의 장인에게 일어나 한 행동은 단순히 사적인 일이 아니라 번제나 화목제사의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로가 참석함은 사적인 참여가 아님을 암시한다.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가 하나님께 대하여 11절을 보면 "모든 신보다 위대한 신이다"라 인정한 것을 보면 이드로의 행동과 제사행위는 그의 회심을 나타낸 것을 보여줄 수 있고, 그 이드로의 행위는 한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일족이 함께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수기에 호밥에게(처가쪽 사람) 이미 광야에서 길을 알고 진을 칠 줄 아니까 우리와 동행하자라고 하며 사사기에 호밥 자손의 정착모습을 말하고 있는데, 이드로一家가 모세와 함께 움직임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드로의 제사는 일종의 회심차원의 제사임을 알 수 가 있다.
이드로의 방문은 미디안 족(이스마엘)의 일부가 이스라엘에게 들어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다른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져준다.
그것은 모세의 재판을 충고하게 되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모세에게 백성들이 찾아오는 것은 하나님께 물어오는 것이었다. 즉 실제적으로 하나님 뜻을 물어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세의 재판, 통치 다스림은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공동체가 얼마나 독특한 공동체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다스리는 백성임을 보여주며,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통치가 어떤 통치(신정통치)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원칙은 목회 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지켜져야 될 일인 것이다. 성도가 목회자에게 어떤 일을 물으려 올 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물으러 온 것이다. 이것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영적 사기를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원하신는데로 기뻐하시는 것을 성도에게 말할 자격이 있다. 저 사람은 그래도 하나님의 뜻을 알 것이다 라고 찾아오는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책임이다. 정 모르겠다면 개인적인 생각이라 밝히고 말하라!
교인은 목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하고 있고, 목사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줘야 한다.
적당히 달래고 어르고 마음을 푸는 것이 아니다.
백성들이 하루종일 모세를 왜 찾았는가? 그 땡볕에 수 천명이 하루종일 서 기다리는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알길 원해서 기다리는 것이다. 모세는 왜 기진맥진하면서도 왜 그 일을 하는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길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드로는 좀 다른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제안한다.
자격을 갖추고 진실한 자를 뽑자! 그러면서 제안하면서 하나님이 인가하면 이란 단서를 붙인다. 이드로 역시 자신의 생각만이 아니었다.
진실한자라는 '이(利)'를 싫어하는 자라고 말하는데 그 이(利)는 물질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명예와 여러 가지 자신을 나타내지 않는 자를 가리켜 진실한자라 한다. 지도자로써 갖추어야 될 것이다.
모세의 짐을 들어 이런 사람을 중용 하여 사소한 일을 맡기는 것을 건의한다.
모세가 통치한 것은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제도화해서 일을 분배될 것을 말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율례와 법도 즉 통치 규범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곧 시내 산에서 주어질 십계명을 의식하고 있다. 즉 십계명이라는 것을 미리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가 주어진 율법의 순종의 여부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19장
출애굽 한지 석 달만에 시내 산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과 의미를 이 산에서 밝히신다. 내게로 오게 하는 것 즉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이다.
출애굽의 궁극적인 목표는 애굽에서 구원하여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하는 것이었다. 나아오는 것은 그 자체가 "구원이며 생명이다" 라는 말씀이며, 이것은 나중에 언약관계에서도 중요함을 나타낸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옴의 부르심이었다! 이 일이 좀더 구체적으로 하신 말씀이 19장 5-6절에 밝히 드러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란 말은 여러 창조물을 지칭하는 일반적 소유라는 말 보단 특별한 의미의 소유임을 말한다.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케 함으로 즉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심으로 열국 가운데 제사장 나라가 되며 상당히 구체적으로 부르심의 의미를 말한다.
2000/10/31
출애굽기의 사건의 흐름에 따라 큰 제목들을 정리해 본다.
하나님의 전쟁이 마무리 된 사건은 유월절 사건이다. 이스라엘과 애굽으로부터 구분하기 위해 양을 잡아 피를 보는 제의적인 일들을 하게 한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이 제의식이 이해가 안되지만 하나님은 일종의 표적을 통하여서 그리스도를 내다보고 한다.
약속의 땅에 가게 될 때 첫 시작은 애굽과의 결전이 벌어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전쟁에 대한 위협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전쟁의 승패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께서 저들로 승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홍해사건이다.
이것은 앞으로 이스라엘의 여정에 보여주는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남을 보여주는 사건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실 때 그들을 군대로 부르셨고, 이 군대는 전쟁을 위해 준비되어진다.
그 이후에 일어나가 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 바로 시내산에서의 사건이다.
시내산에서 ①율법을 주심 ②언약을 맺으심 ③성막을 건설하게 되심.
25장 이후엔 성막 건설이 마지막까지 차지한다. 분량만 봐도 성막 건설이 너무나 중요하다.
똑같은 내용의 반복. 25장엔 이렇게 해라 명령하는 것이고 두 번째 나오는 것은 그대로 행하는 것으로 인해 반복된다. 그 중간에 금송아지 사건이 있다. 왜 성막 건설을 명하시고 그 중간에 금송아지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가를 고찰해보겠다.
18장 이후에 이드로가 모세에게 제안했는데 통치 조직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는데, 그 조직의 필요성을 말하면서 그 통치의 본질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재판 받으러 나왔는데 그 것은 하나님께 물으러 나왔다. 라고 말한다.
실제로 백성들에게 말한 결정은 모세의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이다. 이것은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백성들도 하나님의 통치를 바랐기에 일이 생기면 모세에게 나왔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다.
천부장, 백부장등을 세우는 것은 이 통치 조직 자체보다. 이 통치 조직의 구성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자격과 어떻게 수행해야 될 것인가가 문제였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진실무망한 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매우 암시적인 것인데, 이것은 자기 주관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에 엎드림을 말 할 수 있다. 진실함도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맡겨진 일에 대한 그 사람의 자세인데, 실제로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율법이 가능케 한다. 진실무망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데 그들의 자기 뜻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에 따라 행함으로 실제로 다스림은 하나님이 다스림을 말하며, 통치 기반을 지탱하는 것이 바로 율법을 말하며, 이 율법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 수단을 말하고 있다. 그 계획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한다. 율법의 이런 의미를 그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
출애굽한지 3개월만에 시내 산에 당도했는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제일 처음 하신 말씀은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에 대해 말씀하신다. 앞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 바로에게 보내실 때 출애굽의 목적을 말씀하신다. "내 백성을 보내라 나를 섬기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섬김이 구체적으로 어떤 뜻을 말하는지 지금 여기에서 말하고 있다.
단순히 이곳까지 오게 하지 않으시고 "내게로 나오게 하였다" 출애굽은 결국 이스라엘을 자기에게로 나아오게 하시는 부르심임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특별한 소유로 삼으시기 위함이고 이것과 함께 "너희가 정녕 내 언약을 지키면" 이라는 말을 첨부하신다.
이스라엘의 언약은 이곳에서 처음 하신 것이 아니다. 창 17장에 아브라함과 함께 맺으신 이전에 언약이 계속적으로 진행되고 발전됨을 말한다. 그런데 언약을 지킴을 대가로 소유로 삼는 것임에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창세기 등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그들을 특별한 소유됨은 하나님의 소망된 행위이다.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겠다는데, 제사장 직분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은혜이다. 열국 가운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섬기는 자로서 요구되며 마땅히 나타나야 될 것을 하나님을 거룩이라 말씀하고 계신다.
내게 가까이 나의 것으로 나아오는 것으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 행하는 특별한 존재(제사장의 나라)로 삼으시겠다는 것은 바로 부르심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성별(거룩)되게 하길 원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의 성별을 요구하신다.
여기에 하나님은 일시적으로 성생활을 금하게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고전 7장에 보면 기도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성생활은 그 자체가 나쁨이 아니라. 영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금함이다. 너 나은 영적 유익을 위해 절제하는 것이다.
성결을 명하시고 "스스로 정결케 하라"의 명하심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시기 위해 성결케 하라 명하심이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여 이스라엘에게 찾으러 오시는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이 그 백성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맞으러 오심에 요구되는 것이 정결이고 성결케 됨이다.
출애굽기 20장부터 23장은 십계명과 율법이 기록되어 있다.
율법이라 기록된 이것이 출애굽기 뿐만 아니라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도 나오는데 왜 이렇게 되었나? 전체를 살펴보면 잘 이해가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고하심인데,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다" 라고 했다. 18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시는데,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과 위엄을 유형적 표현을 한다. 그런데 19절에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게 될까 하나이다. 그러므로 십계명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하심을 알 수 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음성의 형태로 직접 말하심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죽을 까봐 모세에게 대신 말씀하길 원한다. 이 십계명이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심으로 이 것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지 잘 알 수 있다.
십계명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을 선언하므로 시작된다. 이스라엘과 독특한 관계를 말하시고 시작한다. 네 하나님이다라는 표현은 많이 들은 내용인데, 이것은 바로 언약의 내용이다.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다. 바로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언약관계임을 알 수 있다.
노예 된 애굽 땅에서 구출함으로 언약관계가 되며, 출애굽은 언약관계의 토대가 된다.
너는 내 앞에 다른 신이 있게 하지 말라! 라는 배타적인 표현을 사용하신다.
다른 신의 의미가 무엇인가? 다신교적 종교상황을 전제한 뜻인가? 그렇지 않다면 당시의 일반적인 종교상황이 다신교인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1계명, 2계명 나누는데, 사실은 연결되어 있다.
쪼아 내 가지고 만들어 낸. 쪼아서 만든 신상을 가리킴.
하늘, 땅, 물에 있는 형상 즉 땅에 속한 어떤 피조물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라라는 뜻이다.
참 하나님이 아닌 거짓 신을 섬기지 마라! 피조물을 신격화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피조물 수준으로 하나님을 격하시킴과 동시에 피조물을 신격화시킴과 맞물려 하나님과 피조물을 동류로 취급한다. 우상숭배는 어떤 면에서 하나님을 피조물로 끌어내어 인간이 하나님을 만들어내는 신이 된다. 하나님의 유일하신 형상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 만이 참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신 형상이다. 하나님을 피조물 형상으로 만든 후에 절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신을 경배의 대상으로 섬김의 대상이며 이러한 것을 금지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질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경배 받으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임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 마땅히 해야 될 일들에 대한 책임을 말하시고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진정한 방법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러한 계명 순종은 의무적이고 기계적 순종을 말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 마음에서부터 존재의 근원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이러므로 바리새인의 율법 지킴이 잘못됨을 말하고 있다. 영생 얻는 대가 지불을 위해 지키고 애를 썼지만은 하나님을 섬김에 대한 차원이 다르다.
하나님을 헛되이(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우상에게 나의 거룩한 이름을 붙이지 말라 라는 뜻도 되지만 앞의 내용과 중복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무의미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지 말라! 라고 이해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죄가 더 가중된다. 망령되이 일컫는 말보다 더 가중된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라 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말하는 것은 이 계명의 수준을 말한다. 행위로만 이 아니라 말도 조심하라는 굉장한 엄격을 나타낸다.
안식일을 지켜라!
거룩한 날 일을 하지 마라! 에 대한 오해가 많다. 하나님께서 보내어 행하신 일!
우리가 생각하는 사명과 직분과 이해해도 좋다. 6일 동안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어진 일을 충성 되이 일하라! 지나치게 이야기하면 6일 동안에 충성 되이 일하지 않으면 안식일도 필요 없음을 말하고 있다. 제7일에 일하지 말라는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것 때문에 그 날을 복되다 선언하시고 거룩하게 구별하신 그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심으로 우리도 안식하는 것인데, 6일과 7일의 차이는 하나님의 경우에 보면 그가 계획하고 모든 것을 이룬 것을 6일이며 그 완성된 상태에 대해서 복되다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것이다. 그가 계획하신 것을 완성하심을 말하고 있다.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라 완성과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타락한 다음에 죄의 결과로 모든 것이 왜곡되어졌는데, 안식은 회복시키고 고치심이 추가된다. 신 5장은 안식을 출애굽과 관련됨을 말하는데, 죄로 인한 억압에 대한 해방과 온전한 회복에 대한 소망함과 관련됨을 볼 수 있다.
예수는 안식일이 사람 때문에 있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인간의 가치가 최고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의 안식의 개념은 직역함으로 무조건 일을 안 해야 된다고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온통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율법을 해석한다. 그 날은 일하지 않음을 감당함으로 하나님께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겐 율법이 짐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그런 바리새인에게 충격적인 말을 하신다. 안식일은 사람이 먼저다. 하나님께서 안식을 주신 것은 사람을 위해 주신 것이며 사람을 위한 적극적인 안식일을 참여함으로 하나님이 안식일을 주심을 기억하고 풍성하게 누리기 위해서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안식일에 대한 이해는 율법 전체와의 이해와 맞물려 있다.
나는 네 하나님이다. 거짓 신들을 만들지 말라.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그런데 왜 갑자기 안식일 계명이 나오는가 이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전후 내용과 상관이 없음에도 중간에 있음은 무엇인가? 어떤 의미에선 선포되어지는 십계명과 율법의 성격을 잘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식년, 희년 등이 함께 어우러진다.
2000/11/14
1-4계명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경배하고 섬겨야 할 도리.
5-10계명 내 형제와 더불어 함께 살아야 될 규범을 말하고 있다.
안식일 계명은 즉각 파악하기 어렵지만은 아무 의미 없이 기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십계명 중심적 위치에 두셨는가 하는 것은 율법을 제정하면서 안식이란 것이 어떤 의미와 위치인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십계명의 첫 3계명을 요약하면 오직 한 분 하나님 만 계시다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유일성에 관한 말씀이다. 신명기의 유대인이 애송하는 "아도나이 에하드" 즉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다신교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고 "그 분만 섬겨라" 가 아니다. 오직 하나이신 참 하나님을 알기 위함이다.
두 번째 계명은 어떤 신상, 형상을 만들지 말라! 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말한다. "피조물의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낼 수 없다"를 말하고 있다. 피조물과 하나님과의 무한한 차이와 초월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피조물간에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다. 피조물의 현상으로 하나님을 표현하지 말아라!
이런 초월적인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와 방식이 구체적으로 설명하시는데 그를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또한 그를 경외하는 자세에 대해서 말하는데, 하나님에 관한 말을 하는 것도 조심해야 된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법도가 이러하다 면은 사람끼리는 백성이 되어 이스라엘끼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형제가 된 도리는 제일 처음 부모를 공경하라! 라고 말한다. 즉 부모의 존재는 하나님의 권위와 질서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동양적인 도(導) 와는 다르다.
요즘 세태를 보면은 지금은 너무 한쪽으로 기울여져가고 있다. 모든 권위를 부정하고 인간적인 평등을 주장하고 나서고 있다. 물론 인간 사회는 평등 됨이 근본적인 동등성이 있다. 남녀의 위치에 있어서 동등성과 더불어 상하질서를 하나님은 주셨고, 이것이 조화를 이루어야 되는데 너무 상하질서가 극단적으로 나가면 권위주의가 도래하고 평등주의가 극단적으로 나아가면 무질서해지고 공동체의 삶이 무너진다. 사람들이 살아가려면 평등과 권위와 질서를 주셨다. 이러한 것이 잘 조화되어야 한다. 사람이 사람과 더불어 지켜야 할 규범 즉 부모를 섬김은 즉 권위와 질서를 존중해라! 를 가르치고 있다.
살인이나 간음이나 절도는 한마디로 사람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틀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그 사회의 평안과 안식을 파괴하는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즉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또한 살인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없애는 극악한 죄이다. 살인 행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고귀함을 파괴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인격적인 모독 등도 포함된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어떤 감정과 연결 시키냐 면은 미움으로 연결시키다. 행동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포함하고 있음을 말하신다.
간음은 배신이라는 것과 함께 표현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신의를 지키지 않을 때 음란죄로 비유되듯이 신의를 저버린 행위를 말할 수 도 있고, 또 더럽힘을 말하고 있다.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을 더럽히는 죄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과 관계가 있냐 면은 정당하지 못한 성적욕망을 해결하는 것인데, 예수님은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 말하셨다. 바울은 이런 욕망하고 더러움과 많이 연결시키고 있다. 스스로 더럽혔다 라고 로마서 1장에서 말하고 있다.
도적질은 남의 수고에 얹혀 살려는 것이다.
거짓증언은 말로써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를 말하고 있다. 이 순서를 죄악을 더 철저하게 그 깊이와 뿌리를 드러내고 있고, 밖으로 현저하게 드러나는 것에서 시작해서 은밀히 행하는 죄악을 말하고 있다.
거짓 증언은 선악의 근본적인 원칙을 파괴하는 아주 무서운 죄이다.
마지막으로 탐심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 탐심은 마음인데 이 탐심이 마음의 죄악으로 근본적으로 탐심부터 시작됨을 말하고 있다.
십계명은 온갖 차원의 범죄들을 포괄하여 간략하게 요약 드러내고 있다. 행동에서 마음의 죄까지 다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말한 것은 이미 십계명 자체가 마음의 죄를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도 그의 말씀은 구약의 율법의 정신의 본질을 잘 드러낸 말씀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다 있는 표현된 말씀을 다시 새로운 것처럼 말하시냐면은 유대인의 잘못된 전통, 신앙교육과 유전의 잘못됨을 지적하는 말씀하고 있다.
출 20:18-21절에 하나님의 이런 정도의 영광을 나타낼 때 사람들은 견뎌내지 못함을 볼 수 있다(이사야 6장에서도 비슷한 표현)
이러한 표현으로 볼 때 모세가 십계명을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기 보다도 하나님이 직접 인간들에게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강림하심은 평생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하여 범죄치 않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들에게 시험을 허락하신다.
여기에서(출20:22) "하늘에서" 라는 표현은 초월 영역을 가리킨다. 이런 일을 경험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은 땅에 속한 분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분임을 깨달음을 함축하고 있다.
23절 :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왜 사람들이 우상을 금, 은으로 만드는가? 금이나 은은 고귀함, 영원성, 불변함 등의 성질을 갖추고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귀한 재료로 만들면 이 물건이 피조계의 한계를 뛰어넘어 신적인 영역에 갈 수 있음을 말한다. 피조성을 극복한 신성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 땅에 속한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불변성이나 귀중성 하고는 참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것과는 비교가 될 수 없고, 나타내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함을 말하고 있고, 2계명의 보조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귀하고 귀해도 피조성의 영역에서 벗어 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대신 흙 재단을 만들어라 명하신다. 흙은 인간의 근본이다. 흙이란 인간의 피조를 드러낸다. 모든 생물의 근본이 다 흙이다. 일반적으로 이방종교에서는 제의(CULT)라는 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holy time, holy place, holy riturl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 제의적 순간에 시공간을 신화적으로 이해한다. 신화적이라는 말은 왕이 행하는 제의적 행동들은 자연계에 관한 신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그런 신화적인 사건과 맞물려 돌아간다고 생각했고, 그 제의적 장소에서 왕이 행한 행동은 두 영역이 맞물리는 특별한 장소와 시간을 말한다. 그러므로 신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왕이 대변하는 행동을 신화적이라 표현한다.
저런 것에 비교해서 십계명의 말씀을 살펴보면 첫 마디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다. 땅의 차원이 아니며, 그를 섬김의 장소인 제단을 흙으로 만든다는 것은 섬김의 영역이 땅에 둔다는 것을 의미함으로 이방종교의 신화적 세계관이 끼어 들 틈이 없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림으로 그런 어정쩡한 신화적 인 것이 끼어 들 수 없게 만들었다. 제단은 피조성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흙으로 만듦은 하나님 섬김의 장소를 지상에 두며, 하늘 영역에서 지상영역으로 나오셔서 받으시겠다는 것을 말한다. 흙의 영역에서 일상생활의 것으로 이 땅에 속한 것으로 섬겨라 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하늘 영역에서 자신을 온전한 몸을 드린 것이 아니라 땅의 영역에서 제물로 드림에 연관되어 생각해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는 것을 말하는데 하늘로부터 친히 이스라엘에게 드러내는 것은 자신을 "땅의 것으로 형상화하지 마라" 라 명하시며 피조계와 초월영역을 구별하여 명확히 드러내시고 흙으로 제단을 만들라 하심은 이 땅에 속한 섬김의 장소에서 이 땅의 것으로 우리의 일상생활과 우리의 몸, 입술과 삶으로 섬김과 예배로 섬김을 받으시길 원하심을 볼 수 있다. 돌로 제단을 만들 경우에는 다듬은 돌로 하지 말라 하시는데 네 칼을 휘둘러 오염시킨 것 즉 인간의 재주로 만든 것으로 하지 마라. 하나님의 섬김의 장소는 피조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피조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임재 하심으로 그들에게 성별케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이다. 하나님을 섬김에 대한 것을 인위적인 인간 주동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섬김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임을 볼 수 있다.
편의상 우리가 십계명을 둘로 나뉘었지만 사실상 이 둘은 구별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1장
세속세계에서의 노예는 어떤 의미인가?
영구적으로 주인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이런 당시의 노예제도에 비춰본다 면은 6년 섬기고 내 보내라 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6년 후에 강제적으로 자유케 함으로 이스라엘 내에서는 어떤 한 사람이 절대적 소유를 나타내지 못한다. 이스라엘 내에서는 모든 사람이 형제이며,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절대적 소유를 나타내지 못함을 말한다.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이기에 소유권이 없음을 말한다.
제도적으로 회복을 만듦을 볼 수 있고, 근본적으로 동등 됨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섬겨라 함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종의 예를 드는가? 인간관계에서의 가장 극단적 관계이기에 이 관계가 인간적 관계에서 해결된다면 나머지 관계는 다 해결되기에 예증적인 표현이다. 모든 상하질서인 인간관계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이다.
남자 종과 여종의 차이가 있는데 상전이 아내를 줄 경우에는 아내와 자식은 주인의 소유가 됨을 말하는데, 만일 자유케 되는 종이 주인과 아내를 사랑함에 영구적 종이 되길 원함은 영구적으로 귀를 뚫어 그 사람의 소유가 됨을 말하고 있다. 강제로 인해 종이 되지 않고 자발적으로 이유가 있을 때(가족 때문에) 종이 될 수 있다. 여기서는 가정의 귀중함을 말하고 자한다. 노예라 할 찌라도 가정의 유대를 유지할 수 있도록 주인은 배려해야 됨을 말한다.
여종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여종의 경우 6년만에 나가면 곤란한 일을 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자기의 첩이나 아내로 살아야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그래서 나가라 하지 말아 라고 한다. 만약 나가게 될 경우는 주인이 종을 아내나 첩으로 사용치 않음을 말하고 있다. 출 21:8 여종을 자유케 하게 될 때 속전을 받지 않음은 타국인에게 팔지 말아라 함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쫓겨나서 이방우상종교와 타락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으므로 심각하게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인으로 독특한 정체성에 위험이 오기 때문에 외국에는 팔지 말라! 라고 말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비록 여종이라 할 찌라도 이스라엘인으로 영적 은혜와 권리를 박탈하지 말라는 보장을 한다.
정식 며느리처럼 대하고(21:9절) 주인이 다른 아내로 삼을 때도(21:10절) 세 가지 의무를 다해라. 먹을 것, 입을 것 잠자리를 거부하지 말라! 아내로써의 권리를 가짐을 말한다. 아내 권리에 대한 보장을 말한다. 이스라엘 내에서의 종을 품꾼처럼 대하라! 라고 말한다.
21:12-
과실치사와 고의적 살인을 구별하는데 악한 의도에서 고의적 살인은 제단에서 끌어내서 죽여라. 부모를 폭행하면 죽여라! 인신매매들도 죽여라! 어린아이들이 대부분이다. 이 어린아이가 겪는 위험은 여종을 타국에 파는 경우와 똑 같다. 영적 살인이다!
쌍방 폭력에 의해 일어난 여러 경우 중 돌이나 연장을 사용하면 죽지 않고 상해를 당해 불구가 안되면 사형은 면하지만 치료를 낫을 때까지 하며, 손해 배상을 해야된다.
종의 경우도 폭력의 책임을 못 면한다.
싸움 도중 임산부의 유산(21:22)했는데 아이가 살면 벌금형이며 죽으면 인간적으로 똑같이 대한다. 이것은 낙태시술과 관련되어 있는데 태아를 죽이는 것도 살인 행위임을 말한다.
2000/11/21
시험 : 율법 주심의 의의(출애굽과 관련하여)
치다. 폭력을 말하면서 정도가 지나치면 살인이 되는데, 과실 치사는 살의가 없기에 벌을 경감시키면서도 그러나 오살에 경우엔 제단에 끌어내어 죽이라. 보응을 받게 한다.
출21장 15절부터
살인자에게 처하는 형벌은 극형에 처하게 하는데, 폭력의 경우는 구분된다. 폭력의 대상이 부모일 땐 죽이라고 한다. 폭력의 대상이 누구인가에 따라 형벌의 가중이 정해진다.
유괴해서 파는 행위에 대해서도 극형에 처하게 한다.
연장으로 심각하게 상해를 함과 중간적으로 폭행이라 할 수 없는 것(유괴, 부모 저주 등)은 전체적 흐름 속에서 폭력의 이야기 중에 말하고 있음으로 이것도 일종의 폭력이라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이 짐작된다. 이러한 죄악은 예외 없이 사형에 처한다.
죽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언급된 범죄는 공동체 적인 삶 속에서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질서를 파괴하고 손상시키는 것들이다.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범죄행위는 공동체의 질서를 위태롭게 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살인, 폭행 등 이런 행위를 한 사람은 공동체의 존립을 위태하게 하는 심각한 자이기에 공동체에서 끊어야 한다. 신약에서는 출교로 설명할 수 있다.(고전 5장. 너희가운데 쫓아내라!)
종의 죽음에 대해서 종이 죽을 경우는 주인도 처벌을 당한다. 종도 근본적으로 보장함을 볼 수 있다.
아이 밴 여자의 생명을 잃는 일이 발생경우와 생명을 잃지 않는 경우로 나뉘는데, 잃지 않을 경우는 벌금으로 한다.
출 21:22에 아인 밴 여자 이야기
당시엔 어린아이들이 잘 죽었다. 그러므로 태아 경우에 생명을 책임지라는 것은 억지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죽음은 태아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서구 사회는 낙태에 대해서 강력히 행하다가 성의 개방으로 낙태에 대해 부드러워졌다.
낙태에 대해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강간을 당해 임신한 경우 등 여러 가지 난감한 경우는 죄로 인한 불행한 경우이다.
성의 목적을 쾌락으로 보기 때문에 성범죄가 생기게 된다. 이 중요한 목적은 부부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경건한 씨를 잉태케 하는 것인데, 지엽적인 목적인 성적쾌감이 앞서게 된다.
바울도 아내를 거룩하게 취하라! 성 관계를 정결하고 거룩하게 하며, 신자의 생활에 거룩한 부분으로 행해야 됨을 말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ojo por ojo, diente por diente)는 다른 사람에게 끼친 손해 정도만 끼치게 해라. 이 법을 다른 맥락에서 볼 필요도 있다. 말하자면 인간의 실제적 상황인 역사적 배경 속에서 볼 수 있는데 가인 계통인 라멕이 지은 시에서 자기에게 사소하게 가한 것을 77배나 갚겠다. 잔인한 복수심이 생기는 것이다. 잔인한 복수심에 대한 제어의 역할의 뜻도 있다.
22장
도적질이 경우는 4,5배로 변상케 한다.
22장 18절-19절 신접 한 자는 영적 간음자 이다.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자녀 신분을 더럽히는 것이며, 짐승과 행위 하는 자는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는 행위이다.
약한 자를 억누르고 착취하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준다. 약한 자의 관심에서 계속 보여주기를 형제에 대해 돈을 꾸어줄 때 받을 수 있는데 가난한 사람인 경우에 받지 말라고 한다. 당연히 받을 수 있는데 받지 않는 것은 긍휼의 마음이다. 그 다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웃의 겉옷을 전당 잡았거든 해지기 전에 주라고 한다. 맨 몸으로 추워 벌벌 떨 것인데 그런 사람의 처지를 돌려주라고 한다. 이것 역시 긍휼의 마음이다.
하나님 백성의 삶의 규범. 다른 사람과 함께 더불어 삶에 있어서 자세는 남의 삶의 원리를 인정해주는 것이고, 만일 그들에게 손해를 끼쳤으면 철저히 책임을 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삶의 규범은 남의 것 건드리지 않고,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사랑에까지 나아가야 됨을 말한다. 이것은 내가 반드시 해야 될 책임이 없기에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긍휼히 여기지 않으실 것임을 말한다. 그것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거짓 증언은 다른 사람의 해를 끼치는 것은 폭력에 해당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거짓증언은 히브리어로 폭력의 뜻을 가지고 있다.(폭력. 거짓증언) 약한 자들 중에서도 악한 자들도 많다.
제일 어리석은 것이 다른 사람이 악하게 한다고 내가 악하게 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 힘없다고 억울하게 죽이면 안 된다. 악한 자를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내어 버려 두지 않는다.
신자의 긍휼은 말 못하는 짐승에까지 확대 될 수 있다.
안식일에도 소와 나귀와 개까지도 쉼을 얻게 하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안식일의 적극적인 면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안식일 논쟁인 병자를 고치는 것의 합당한 것이냐? 예수님은 대답을 특별하게 하시는데 고쳐서 살리는 것이 안식일 정신이다! 라고 말한다. 안식일의 적극적 이해가 안되면 이해되지 않는다. 바리새인은 안식에 대한 오해로 '일을 하지 않아야 된다' 라는 편협적인 생각을 함으로 충돌이 올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십계명의 확대시킴을 볼 수 있고, 이 법을 어떤 맥락으로 관찰해야됨을 알 수 있다. 즉 안식! 하나님께서 만물을 선하신 뜻대로 모든 축복과 은혜를 누리게 하는 것이 교훈의 목표이다. 죄로 인해 파괴된 것을 복구, 개조하는 행위이다. 도저히 공동체에 속할 수 없는 사람들에 죽이라는 것은 소극적인 의미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행위이다. 이러한 법들은 깨어진 법들을 회복하는 것이며 안식을 회복하는 것이다.
여태까지는 일대일의 관계를 말했지만, 이젠 절기를 말한다. 절기는 이스라엘이 공동체로 하나님을 섬기는 교제의 형식이다.
절기와 관련해서 이야기 하다가 엉뚱하게 23장20절의 내용이 나온다. 갑자기 이 이야기가 왜 나오는가?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어떤 인물을 보내겠다" 앞선 인물을 우리를 이끌고 "길에서 보호하시겠다". 라고 한다. 이런 일을 하신 주인공을 보내겠다 라고 한다. 21절엔 그 앞에서 스스로 조심하라! 나보다 높은 분에서 조심하게 된다. 우리의 죄악을 묵인하지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내 이름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23장 20-22 하나님 앞에선 우리가 어떤 자여야 되는가? 를 말해주고 있다.
성령께서 하나님이심을 표현하는 신적 표현이다.
이때까지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셨는데, 이제부터는 하나님 사자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데, 구름기둥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앞에 임재하여 이스라엘을 인도하는데 애굽의 발길을 끊으심에 대해서 표현할 때 여호와의 사자로 구름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사자라는 분을 보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임하신 방식인데 이분은 인간도 아니요, 천사도 아니다.
2000/11/28
시내산으로 부르셔서 거기서 하나님께서 제일 처음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낸 목적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너희를 내게로 데려왔다." 출애굽의 진정한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었다. 이스라엘을 가까이 나아오게 한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으로 나오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하게 되길 원하시며,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다. 하나님을 만날 때 옷을 빨고,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말고 즉 자신을 성결케 하는 크게 얘기하면 자기에게로 부르시고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속한 현장인 시내산에 강림하였기에 이러한 만남 때문에 성결하라! 라 말씀하신다. 율법이란 명칭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성결의 법칙은 상당히 광범하다. 일반적으로 성결한 것은 제의적 형태인 의식들이었다. 일상생활과는 전혀 상관없는 신당과 제물 등 특별히 드리는 것과는 상반된 것을 요구하신다. 이중적인 신자의 삶이 나올 수 밖에 없는데 출 20장에서 말하는 거룩한 삶과 규범의 영역은 우리의 모든 생활영역을 다 포함하고 있다. 심지어 짐승과 농토까지 포함하고 있다. 물론 일반 종교의 제의적 성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제의의 의미는 다르다! 거룩한 삶의 영역이 한없이 포괄적이고 광범할 뿐 만 아니라. 굉장히 깊다. 마음속에 대한 것이 순종의 형태에 나타난다. 이것이 하나님 섬김의 거룩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이 23장까지 이야기되고 있다.
크게 얘기하면 1. 이스라엘을 구원한 목적. 2.하나님과의 만남에 있어서는 거룩한 성별을 요구 3. 거룩함이 무엇이냐 이 모두가 율법주심의 목적이다.
24장 언약체결
모세와 아론 그리고 나답과 아비후 그리고 70인 장로를 올라오게 하신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들을 올라 오라! 라고 명하시는 하나님. 이것은 어떤 내용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에게 오게 하심에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 올라오라는 명령을 듣고 순종치 않고 모세는 언약의식을 행한다. 구조상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들을 올라 오라 명하시고 언약의식을 행하고 명령을 따라 오른다. 바로 따르지 않고 언약의식을 행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나아가는 필수적 조건 가운데 언약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건을 붙이기를 모세만 나아오게 하고 나머진 근접할 수 없게 하는데, 무언가 이스라엘이 자유롭게 나아올 수 없게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언약의식과 깊은 관계가 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모든 율례를 고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출21장1절에 "네가 백성 앞에 세울 율례는 이러하니라" 이 제목이 23장까지 전체내용을 포괄한다. 하나님께서 그가 요구하신 성결의 선포를 모든 백성이 한 목소리로 '우리가 행하리이다' 라고 말한다.
제사를 드릴 때 뿌린 피에 대해 말하길 언약의 피라 말한다. 이것은 언약의 역할에 중요한 역할 함을 볼 수 있다. 모세는 언약체결의식을 행한 후에야 올라갔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함으로 나아올 수 없음을 보여주는데 이런 점과 관련해서 언약의 피의 의식에 관련되어 질 수 있다. 출19장에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시니 만날 준비를 하라 하시면서 요구하신 것은 성결이었다. 이 성결이 얼마나 엄중한 요구인가면은 어겼을 때에 죽임을 당 케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엄중한 것을 볼 수 있다.
언약의식에 피를 부각시키는 것이 많은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도 잔을 나누면서 언약의 피라 말씀하시는데 출 23장의 상황을 전제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피 뿌림이 있고 나서야 하나님께서 내게 가까이 오라는 명령을 따를 수 가 있었다. 24장 이 내용은 복잡한데, 율법의 기능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것을 말한다. 율법의 기능 중에 순종과 관련이 있고, 이것과 관계해서 언약의 피는 어떤 역할을 하며, 피를 제단과 백성들에게 반반 뿌림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께는 어떤 의미를 가지며, 백성들에겐 어떤 의미를 가지는 가를 말한다. 그때 그들은 이스라엘 하나님을 만나 뵈었는데 그들이 만난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어떤 의미를 말하는가? 하나님의 발 아래가 녹보석과 같았다는 것은 임재 영역이 지극히 아름답다는 것을 말하며, "하늘처럼 맑았다" 라는 의미는 하늘 영역 자체와 같이 순전하였다 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 땅에 속하지 아니한 영광을 말하는데 예를 들면 변화산에서의 예수님의 옷이 흰옷에 광채를 말하는데 아무리 사람이 세탁을 해도 그 보다 희게 할 수 없는 즉 그의 영광이 이 땅에 속하지 아니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를 상징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귀인들을 치지 않으셨고, 먹고 마시는 것을 행했다. 이것은 교제를 말하며, 하나님과 신령한 교통을 가졌다는 뜻을 말한다. 요한1서에서의 사귐은 이것을 배경으로 설명한 것이다.
언약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언약의 본질은 나는 네 하나님이고 너는 내 백성이 되라! 이것이 언약의 본질이다.
율법이 여기에 개입되는 데 율법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며,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율법은 가르치는 것 뿐 만 아니라 그들에게 행하기 위한 것이다. 제사행위에 의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 규범을 말하고 있다. 모세에게 제일 먼저 말씀하신 것은 "성막을 지어라" 라고 명하신다. 성소 공간은 하늘의 영적 존재들이 사방을 둘러싼 형태를 가지고 있다. 욥기에서 세계역사를 결정하시는 장소를 하나님 앞에 영들이 좌정한 모습을 설명한다. 비록 지상에 있지만 성막, 성소 이 공간은 하늘 영역을 설명한다. 히브리서는 성소를 하늘의 모형이라 말한다. 모세에게 내가 네게 보인 식양(설계도)대로 해라. 성소라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보좌를 말하며 그 진정한 보좌는 하늘에 있음을 말한다.
성막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 보좌에 대한 상징이라 보면은 이 것이 언약과 밀착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언약은 부르심과 교제함, 통치함을 이루기 위함. 성소도 통치와 부르심과 교제함을 볼 수 있다. 성소의 진행 과정을 보면은 중앙에 성소가 위치하고 3지파씩 나누어 나아가고 있다. 외인이 가까이 가면 칼로 쳐죽이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영적 원리를 상징하고 있다. 성소를 건설해서 봉헌하는 것으로 출애굽기는 끝이 난다.
25장부터 31장까지의 내용이 35장부터 마지막까지 거의 중복된다. 그 중간에 특별한 사건인 금송아지 사건이 기록되어있다.
금송아지 사건의 발단은 모세가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돌판을 받기 위해 40주야를 머무는 동안에 산아래 사람들이 지쳐서 아론을 위협하여 우리를 위해 신을 만들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왜 그렇게 하냐면은 우리를 인도한 모세가 40일 동안 아무소식이 없자! 모세 대신 인도할 신을 만들어내라! 이런 백성들의 요구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그들의 요구 속에 영적 상태를 암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신상을 만들어내라는 요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세가 없어졌기 때문인데, 이것은 어떤 형태의 신을 요구하는 것인가? 눈으로 볼 수 있고 감각할 수 있는 신을 요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모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행해서 그와 상의할 수 있었음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충족이 되었는데, 우선 이들의 이런 요구는 이들의 신앙의 성격이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모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영이라는, 육적인 감각 차원을 초월하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인다'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생각했고, 이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깨닫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영적인 존재에 대해서 전혀 무지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영적 임재도 실제적 만지고 보는 것 보다 더 깊음 체험임을 몰랐던 것이고, 하나님도 자신들이 볼 수 있는 모양으로 나타내 보이길 원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축소시키고 그 안에 가둬버리는 한계가 있는 것으로 내려 버리는 것이다. 피조물의 한계 속에 가둬버리는 것을 말아라! 라는 명령을 간과하고 만다.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모습을 본 모세는 돌판을 던져버린다. 그 돌판은 언약의 증거 판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깨뜨린 것은 언약이 파기되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사실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책망하시지 않는 것이다. 이 모습을 통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하신 약속을 다시 원점으로 돌려 모세로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한다. 모세는 하나님께 탄원한다. 모세의 탄원으로 하나님은 돌이키시고 용서하겠다고 한다.
금송아지 사건은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오해 때문에 나오는데 그런 오해를 풀기 위한 가르침이 33장에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가라 하면서 "나의 사자를 너 보다 먼저 보내어 그 땅의 백성들을 축출하리라!" 말씀하신다. 그것은 회복하신 것을 말하며 이 사자의 동행이 출애굽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를 알 수 있다. 이 사실로 이스라엘은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회개한다. 하나님은 이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의 회막을 진밖에 놓도록 한다. 이것이 나중엔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로 성막을 둘러 외인이 접근하지 못하는 형태로 바뀌게 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무(無)로 돌리시겠다는 계획을 철회하시고 다시 역사를 재확인하는 것과 사자를 보냄은 사자의 역할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모세는 마지막 부분에서 중요한 요청을 하는데, 나와 함께 보내실 그 분에 대해 알기를 원했고 또 한가지는 나로 주의 길을 알게 하여 주를 알게 해달라고 한다. 이 것은 이스라엘을 위한 요청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육적 감각을 벗어난 하나님을 제대로 몰랐기에 모세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하신 사실에 대해서 깊이 알려달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사자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나의 얼굴이라 말하신다. 하나님의 은혜의 핵심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동행하는 것이 핵심이라 말한다. 다른 이방과 구별된 것은 하나님의 동행이다!
그와 동시에 내가 은혜를 베풀자에게만 베풀겠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며 자신을 나타내심에 대한 한계를 보여준다. "네가 내 얼굴은 보지 못하고 내 등만을 볼 것이다" 뒷모습은 제대로 구별하지 못함을 말하는데 모세가 경험하는 하나님은 뒷모습에 불구함을 나타낸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영광을 다 나타내시면 그 영광을 감당할 자가 아무도 없음을 말한다. 사람으로서는 신적 본질에 접근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말한다. 이와는 달리 말씀이 육신 되어 예수께서 역사 안으로 오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얼굴이다. 완전히 나타낸 형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