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뉴욕시와 뉴저지주[7]
그 희망이 거의 이루어질 뻔했던 날이 있었다. 어느 날, 나는 한아름 마트에서 한식 재료를 잔뜩 사 온 바구니을 집에 풀어놓고 있었는데, 엄마가 숙주 봉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레이스! 나 생각나는 게 있어, 우리 장보러가자!"
"장보러 가자고? 밖으로 나가자는 말이에요?"
"그래! 여기 한인 마트에 데려다줘."
엄마의 부탁에 나는 충격을 받았고 마냥 신이 났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엄마는 잠옷과 목욕 가운을 갈아입고 화장을 하고 머리를 매만졌다. 그러면서 쉴 새 없이 월 사고 싶은지 얘기를 늘어놓았다. "미숫가루,미숫가루 맛을 본다니 너무 기대된다." 어렸을 때 곡물을 볶아 달착지근하게 물에 타 마시던 음료를 생각하니 엄만 군침이 도는 모양이었다.
방 안 공기는 기대감으로 한껏 달아올랐다. 그런데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첫걸음을 내딛기 직전, 엄마는 난데없이 마음을 바꿨다.
" 아, 신경 쓰지마. 안 가는 게 좋겠어." 엄마의 눈이 멍해지기 시작했다.
"에이. 같이 가요,재밌을 거야."
"아니야 안 갈래."
"엄마 제발, 내가 엄마 데리고 갈게, 다 괜찮을 거라고 약속해요."
"아니야, 됐어," 엄마는 웃음기가 가신 채로, 늘 앉던 소파 한 귀퉁이애 돌아가 앉았다.나는 속으로 오키를 욕했다. 실망이 크긴 했지만 엄마 안에서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국 음식을 먹고 싶다는 엄마의 열망일 점차 커지고 있었다.
오빠의 트라이베카 아파트에서 소고기국 한 그릇을 앞에 놓고 엄마는 내게 털어놓았다. 나는 국에 밥을 말아 소파 앞 커피 테이블에 상을 차렸다. 엄마는 바닥에 내려와 앉았고,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아 국밥을 떠 먹었다. 저녁 식사후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오래지 않아 익숙한 침묵이 찾아왔다.
"그레이스?" 엄마는 어렸을 때 이후로는 들어본 적 없는 따뜻하고 가녀린 목소리로, 평소보다 높은 톤으로 나를 불렀다. 예의 나를 다독일 때 내던 그 목소리였다.
"무슨일이에요?" 엄마가 나쁜 소식을 전할 것 같아 불안했다.
"이제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거 알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나는 엄마의 말에 감동했지만 상처도 받았다.
"날 미워한다고 생각했지."
"왜 그런 생각을 해?"
"네가 나를 감옥에 보냈잖아."
"엄마." 나는 숨이 턱 막혔다. "그래야지 엄마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거야." 울음이 터져나왔다. 우리 가족 중 누구도 그날 밤 있었던 일에 대해, 또 내가 그렇게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 까닭이 무엇인지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찰 신고 사건의 심각성은 사그라들었고, 엄마의 정신질환을 둘러싼 일련의 드라마에 편입되어버렸다.
"그리고 네 아빠 가고 나서 널 안아주려고 했을 때 말이야, 네가 날 밀어냈잖아. 나 더럽다고" 엄마는 마치 썩을 과일 조각을 뱉어내듯 더럽다는 단어를 입 밖에 내며 얼굴을 찡그렸다.
"뭐? 그런 거 아니야, 난..... 나는.....오키가 그렇게 말했어? 내가 슬프다는 걸 인정할 수 없어서 그랬던 거라고요."
엄마는 내 손을 잡고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이제 걔들이 틀렸다는 거 알아, 넌 진짜로 날 사랑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