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성
어릴 때 밤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게 빛났다. 시골에서 여름밤 모닥불을 피워놓고 모기를 쫓으며 살평상에 누워서 별을 세다 잠이 들곤 했다. 새벽녘에 동쪽 하늘에 빛나는 별은 금성이며 북쪽 하늘에 빛나는 북두칠성과 북극성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북극성은 늘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어 이정표였다.
그 시절에는 문인들의 시작(詩作) 노트에는 별을 소재한 내용이 많았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등을 읊조리며 감상에 젖곤 했다. 1970년대에 윤형주의 ‘두 개의 작은 별’은 대학가에 많이 불리었던 노래였다.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소원을 담아 기도하고 때로는 하소연을 늘어놓기도 했었다.
‘차쿠의 아침’(이종태 지음)이라는 소설에서 1830년대에 세 소년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다. 한 소년은 풍토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고 두 소년이 십여 년의 공부로 조선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 소년은 김대건과 최양업이다. 그들은 부제품을 받고 서로 떨어져 있었다. 서로가 그립고 보고플 때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저 별은 ‘양업’의 별, 저 별은 ‘대건’의 별이라며 속삭였다.
맑은 날 밤에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별이 북극성이다. 항해하던 배들은 북극성을 보고 방향을 감지하여 항해했다. 낯선 곳에서 방향을 잃었을 때 당황하지 말고 하늘의 북극성을 찾으면 방향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많은 별을 지금은 볼 수 없으니 어찌 된 일인가.
오늘날 지구의 온실효과에 따른 대기오염으로 밤하늘을 가리어 별을 쫓아버렸다. 언젠가 수많은 총총한 밤하늘의 별을 보기 위해 몽골에 갔었다. 그곳은 하늘이 맑아 밤하늘의 별이 쏟아지는 것처럼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내내 흐린 날씨로 물거품이 되어 지금도 아쉬움이 남아 있다.
‘하늘의 별’ 하면 북극성, 커피 하면 스타벅스, 스포츠 하면 나이키, 마라톤 하면 이봉주, 야구 하면 이승엽을 떠올린다. 그러면 하늘의 북극성처럼 나의 트레이드마크는 무엇일까? 뭐 하나 내세울 것이 없으니 밋밋하게 살았나 보다. 아니다. 나도 한때 ‘마라톤 선생’이라 불리었다. 외부에서 학생들에게 나의 신원을 물으면 내 이름은 몰라도 ‘마라톤 선생’ 하면 나인 줄로 인식했다.
최근에 또 다른 트레이드마크가 생겼다. 뭔가 변하고 싶어 머리 모양을 바꾸었다. 그랬더니 지인들이 ‘민토벤’이라 불러주었다. 음악에서 작곡하면 베토벤인데 왜 나에겐 민토벤이라 할까. 그가 곡을 창작했듯 나도 글을 쓰는 어찌 보면 크리에이터라 할 수 있을지.
칭찬의 의미를 부여하면 펭귄도 춤춘다고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김춘수의 시가 떠오른다.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최인아 저)는 말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북극성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