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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k by Faith
믿음으로 걸어라
블레이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성경은 왜 다른 책들보다 흥미롭고 교훈을 주는가? 그것이 영적인 감각인 우리의 상상력을 이해하게끔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성경은 66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실 때, 영혼 깊은 곳에서 표면 위의 마음에게 울려 퍼지는 소리라고 생각해보세요. 마치 깊은 내면의 마음이 인간의 마음에게 말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렇다고 여러분의 분별하는 마음이나 이성적인 마음에게 말하는 것이라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다음의 말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고린도서 후편을 보면 바울이 말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에 의존해서 걷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존해서 걷더라.”
눈에 의지해 걷게 되면 보이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길을 인식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마음 안에서 보이는 것에 의지해 삶의 방향을 정하라고 말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렇습니다. 가고 싶은 곳이 있거나 원하는 모습이 있을 때 환경을 바꾸려 하지 말고 마음속의 환경만을 변화시킨 채, 이것만 보면서 믿음에 의지해서 걸어 나가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의식의 상태를 바꾸고 그것에 믿음을 유지한다면, 마음 안에서만 보이던 것이 외부적인 세상 속에서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한 가지 일은 내 뒤에 놓여 있는 것들을 잊고, 내 앞에 놓인 것들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이라.”
바울이 원하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높은 부름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그런 목적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사업이 성공하는 것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단지 상상력일 뿐이고 하느님은 인간이기에, 모든 것들은 상상력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다른 것은 상상력의 강렬함에서만 차이가 납니다. 자신을 낮게 조율한 채 육체의 눈이 보고 있는 것에 의지해서 걷든지, 아니면 상상력 안에서 믿음에 의지해서 걸을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의지해서 걷는 것은 쉽습니다. 왜냐하면 주변의 건물들은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의지해서 여러분이 걷는다면, 마음의 눈을 통해 보이는 것 역시 육체적인 눈으로 보는 것처럼 견고하게 자리를 잡아야만 합니다.
제 형 빅터는 성공한 사업가가 되기 원했습니다. 빅터는 상상력에 믿음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지 알았습니다. 1924년에 우리 가족은 돈 한 푼 없었습니다. 그 때 빅터는 마음의 눈으로 빌딩의 이름을 우리 가족이 소유한 것처럼 바꾸었습니다. 2년 동안 이렇게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계속했습니다. 2년이 지나도 처음 시작했을 때처럼 돈이 없었지만, 그때 그냥 알고 지내던 사람이 50,000달러를 아무런 담보도 없이 빌려주어 그 빌딩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8년 전에 우리는 이 빌딩을 850,000달러에 은행에 매각했습니다. 게다가 바베이도스에는 이렇게 얻은 소득에 관해서 세금이 없습니다.
매일 빅터는 믿음에 의지해서 걸어 나가면서, 그 건물을 지날 때면 빌딩의 간판에 ‘로츠 상회’라고 쓰인 자리에 ‘고다드 상회’라고 쓰인 것을 보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그 건물이 다른 이의 소유라고 말하고 있지만, 빅터의 믿음은 자신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2년 동안 매일같이 마음의 구조만을 바꾸어가자 우리 가족의 운도 바뀌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이니,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로부터 이루어졌음이라.”
오직 저의 형 빅터만이 상상력을 통해 사물을 봤습니다. 다른 이들은 ‘로츠 상회’라는 간판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보았지만, 빅터는 ‘고다드 상회’라는 간판을 믿음에 의지해서 보았습니다.
어떤 이가 블레이크에게 그가 태양을 볼 때 무엇을 보냐고 물었습니다. 블레이크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천사들이 무리지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이라고 노래 부르는 것을 봅니다.”
우리 모두 하나의 나무를 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똑같은 나무를 각자 다르게 봅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둘 다 같은 힘을 사용하면서도, 한 명은 그를 궁핍한 사람으로 볼지도 모르고 다른 이는 부유한 사람으로 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에게는 믿음으로 살거나 아니면 육체의 눈에 의지해서 살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눈에 의지한 채,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여러분 세상의 환경이나 사건을 바꾸지 못한 채 자동기계처럼 살게 됩니다. 믿음에 의지해서 살기 시작할 때만이 인생을 변화시키게 됩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그가 이룬 일이나 이루지 못한 일이든 관계없이 모두를 뒤에다 떨쳐버리고 앞에 놓여있는 것을 향해 손을 뻗는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바라던 것은 하느님의 가장 높으신 곳까지 부름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이상을 갖게 되기를 바라지만, 아마 지금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문제들이 여러분을 짓누르고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돈이 필요하다든가 하는 것 말이죠. 그렇다면 그것을 여러분의 목표로 삼으시고 바울이 썼던 것과 같은 방법을 쓰도록 하세요.
과거를 여러분 뒤에 던져 버리세요.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마세요. 뒤를 돌아보면 롯의 아내처럼 소금기둥이 되어버립니다. 소금은 부패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합니다. 부패를 방지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여러분은 그것을 소금에 놓고 보존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뒤를 돌아보고, 남겨두고 떠나길 원하는 상태 안에서 살게 된다면, 여러분은 그 상태를 소금물에 놓고 다시 한 번 그렇게 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만약 과거가 어떤 상태든 상관없이 그것에 돌아서서, 원하는 모습 또는 하기 원하는 것들에 손을 뻗고 그것에 믿음을 유지한다면 어떤 것도 여러분이 그렇게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그 상태에 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을 계속 해나간다면, 사실로 받아들인 존재가 될 것입니다.
저 역시 블레이크처럼 성경이란 것이 즐겁고, 흥미롭고, 교훈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읽기에 쉽지는 않습니다. 만약 성경이 쉬웠다면 저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명백히 뜻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 교훈을 주기에 알맞다는 것을 발견했었습니다.
히브리서에 있는 간단한 문장입니다.
“많고 다양한 방법으로 하느님은 예언자를 통해 오래된 것들에 대해 우리의 선조에게 말씀하셨더라. 그러나 마지막 날, 하느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고 그의 본성의 소인을 가져오는 그의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할 것이니라.”
하느님은 그의 말씀을 예언자를 통해 드러냈는데, 그들은 하느님이 말씀하신 비전들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선포하였고, 창공은 그가 하신 일을 보여주시었으니.”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하느님이 그의 아들 다윗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환상적인 계시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날에 하느님은 그 자신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이 되는 마지막 시간까지 저는 여러분에게 진리를 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오로지 다윗만이 그것을 여러분이 믿게끔 만들 수 있습니다. 파이크 주교(Bishop Pike)처럼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저자에 관해 질문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경험한 후에는 그런 질문을 다시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계시록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는 그의 말씀이 진리라고 선포합니다. 묻겠습니다. 진리는 경험될 때만이 그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제가 경험한 것들이 진실이라는 것을 압니다. 여러분은 제가 하는 말을 들었고, 저를 믿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것들을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제가 진리라고 아는 것만큼 그 진리를 알지 못할 겁니다.
어떻게 저의 형이 보이는 것에 의지하지 않고 믿음에 의지해, 바베이도스에 믿어지지 않는 사업을 일구어냈는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제 형에게 말하기를, 형의 이름으로 된 돈이라고는 한 푼도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형은 마음 안에서만 보이는 것들에 의지해 믿음으로 그의 삶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의 눈은 바로 앞에 있는 것만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는 여러분 안의 그리스도인 내면의 “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믿음을 통해서 삶을 통째로 바꿀 수 있는 마음의 힘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관찰해 보면, 여러분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할 수 있습니다. 혐오스러운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른다면, 여러분은 그 경험들을 현재의 삶 안으로 다시 불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뒤에 놓여있는 것을 잊은 채 과거에 등을 돌리고 앞에 놓여있는 것을 향해 손을 뻗는다면, 여러분은 올바르게 행동을 하는 것이고 여러분은 여러분이 마음속에서 응시하고 있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이 진리가 거짓이라고 입증할 수는 없을 겁니다. 여러분은 그 진리가 작용하고 있는 힘 자체이고 반드시 그 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어떤 외부적인 조건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여러분이 있는 그곳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상상력이 만들어 놓은 방향으로 여러분은 걸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이 간단한 질문을 던져 보세요. 만약 지금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되었다면 나는 어떨까? 그런 후에 그 느낌, 즉 그 영적인 감각을 느껴보세요. 그 느낌이 어떻습니까? 간단한 방법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유리잔 하나를 느껴보세요. 다시 야구공을 느껴보세요. 야구공이 유리잔처럼 느껴지나요? 테니스공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테니스공이 야구공이나 유리잔처럼 느껴지나요? 옷, 제비꽃, 피아노를 느낄 수 있습니까? 그것들이 모두 같은 것처럼 느껴지나요? 물론 아니겠죠. 바로 그것이 영적인 감각입니다. 바로 그것이 실체를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 생생한 방법입니다.
몇 년 전에 뉴욕에서 지금과 비슷한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강의에 참석했던 한 여성분께서 제가 드린 이론을 시험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있는 동안 큰 장미 다발을 앉고 있는 상상을 하였습니다. 장미 냄새를 맡고, 부드러운 꽃잎들을 만져보고, 그 아름다운 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침묵이 깨지자 모임을 떠나서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음 날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를 위해 2천명의 환영인파와 함께 파티가 벌어졌습니다. 환영식이 끝난 후, 호텔 집사는 꽃을 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장미 세 다발을 그 숙녀 분의 방에 갖다놓게 했습니다. 그날 밤 그녀가 집에 돌아 왔을 때, 향긋한 장미 향기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름다운 장미를 안고 있다는 생각 속에 빠졌고, 보이는 것에 의존해서 걷지 않고 믿음에 의지해서 걸어 나가자, 그 다음 날 그녀의 방은 천상에서나 맡을 수 있는 장미 향기에 꽉 차 있었습니다.
어쩌면 기억이란 것에 사로잡혀, 예전의 모습들을 향해 계속 뒤돌아보고 있어, 원하는 모습 안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올바른 방향으로 잘 통제한다면 믿음이 현실을 창조하는 진리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현실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제가 아는 의상 디자이너는 돈을 원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상상력을 이용해서, 자신이 봉투를 들고 있다 상상했고, 봉투를 열 때 들리는 소리를 마음속으로 들었습니다. 봉투를 흔들어 내용물을 꺼냈고, 돈을 동전까지 정확하게 세었습니다. 7일 밤 동안 이것을 계속했습니다. 8일째 되는 날, 한 여자가 그녀를 불러 일자리와 함께 돈을 내놓았습니다. 그 돈은 그녀가 상상 속에서 보았던 돈과 동전 한 닢까지 정확하게 일치 했습니다. 그녀는 더 많은 돈을 세는 것을 상상할 수 있었고, 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지만 그 디자이너는 마음속에서 보았던 그 돈에 만족을 했습니다.
보잘 것 없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녀가 경험했던 진리는 성경과 필적할 만합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마음 안에 그리고 있는 것을 어떻게 믿었습니까? 그녀의 모든 감각들을 동원하여 믿게 만들었습니다. 듣는 감각을 이용해서 그 봉투가 뜯어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봉투를 흔들어서 내용물이 테이블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봉투를 만졌고 그 안에 있는 돈을 보았습니다. 돈은 그것만의 독특한 냄새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만약 그녀가 돈이 있다면 어땠을 것인지 결정한 후에 그 상상을 했습니다.
어떤 숙녀 분은 뉴욕에 있는 스턴스 백화점에 가서, 혼잣말을 했습니다.
“네빌은 상상하고 믿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고 말했어.”
그녀는 돈이 없었지만, 모자 가게에 가서 자신의 모자를 벗고 새것을 하나 써봤습니다. 그 주위를 돌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의 모자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가 백화점의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제야 그 직원은 그녀의 모자가 실수로 팔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담당 매니저가 와서 죄송하다며, 그녀에게 스턴 백화점의 선물이니 원하는 모자 아무거나 하나를 집으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아까 썼던 모자를 골랐고 새 모자와 함께 백화점을 떠났습니다.
이것과 유사한 내용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여성은 밤의 일을 하는 분입니다. 그녀는 제가 하는 강연을 모두 참석했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제게 말했습니다.
“있잖아요, 네빌, 재밌는 일이 일어났어요. 상상력을 이용하면 제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어느 날 브로드웨이에 있는 백화점 쇼윈도우에서 예쁜 모자 하나를 봤어요. 그게 18달러였거든요.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그 모자를 쓰고 있는 제 모습을 마음속에 그렸어요. 길을 걸으면서 매장 윈도우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면서, 그 모자를 쓰고 있다고 상상했어요. 집에 도착해서도 옷장에 제 낡은 모자가 걸려있는 것 대신 새 모자가 걸려있다고 상상했어요. 거의 열흘이나 제 낡은 모자를 쓰고는 새 모자를 쓰고 있다고 상상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전화를 걸어 자기를 만나러 오라는 거예요. 그곳에 갔더니, 친구가 모자 상자 하나를 꺼내더니 말했어요. ‘내가 미쳤나봐. 이 모자를 샀다니. 속상하지만 나한테는 안 어울려. 그런데 이상하게 네가 이 모자를 쓰면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지 뭐야.’ 그러면서 상자를 열어 모자를 꺼냈는데 다른 모자도 아닌, 바로 제가 원했던 그 모자가 들어있는 거예요.”
그리고는 제게 질문을 했습니다.
“네빌, 근데 왜 하느님은 돈으로 주시지 않고, 이런 방법으로 모자를 주셨을까요?”
그녀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전 말했습니다.
“앤, 그런데 방값을 못 내고 있죠?”
그러자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네, 2주 정도.”
“일 주일에 17.5달러 정도인가요?”
“네”
“그럼 35달러를 못 내고 있는 거군요. 그럼 평소 쓰는 모자는 하나에 얼마정도 하죠? 3달러나 4달러 정도 하나요? 하나에 18달러짜리 모자를 샀던 적 있나요?”
“한 번도 없어요.”
“그럼 말해보세요. 만약에 100달러짜리 지폐를 주웠다면 그 모자를 샀겠어요?”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하느님이 얼마만큼의 돈을 당신에게 주었더라도 당신은 그 모자를 사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누군가가 그 모자를 대신사서 당신에게 주었어야 했죠.”
저도 예전에 옷을 산 적이 있는데, 집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무언가에 씌워서 이 옷을 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건 포도 짜는 기구를 갖고 있는 어떤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옷 한 벌을 마음속에서 그렸습니다. 그러자 제가 재단사에게 가서 옷을 한 벌 구입했고, 아내는 그 옷을 보자마자 질색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옷을 원했던 친구는 그것을 얻게 되고, 대가로 저에게 포도 짜는 기구를 주었습니다.
저를 믿으세요. 상상력은 영적인 감각입니다. 생생한 영상이고, 생생한 소리입니다. 베토벤이 귀가 멀었을 때 외부 세상의 소리와는 종말을 맞이했지만, 내부의 귀를 가지고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즐겨 듣고 있는 아름다운 음악들을 작곡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고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소리를 들을 수 없을 때, 또 다른 영적인 감각을 써보시기 바랍니다. 만지고, 듣고, 보고, 냄새 맡는 것 등을 해보세요. 수년 전에 저는 뉴욕의 할렘가를 걷고 있을 때 어떤 음식 냄새를 맡았는데 그 냄새는 곧장 저를 바베이도스로 데려다 놨습니다. 몸은 할렘가에 있었지만, 그 냄새가 깨운 후각은 이곳으로부터 200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제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소리, 감촉, 장면을 기억에서 불러낼 수 있고, 그것들은 우리를 그것들이 있었던 곳으로 데려다 놓을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에 의존해서 걷지 말고 바울처럼 믿음으로 걷는 법을 배우십시오. 뒤에 놓여있는 것을 잊고 앞에 놓인 것을 향해 손을 뻗으십시오. 빌립보서 3장을 보면 바울은 자신의 욕망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부름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여러분의 욕망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것에 한번 도전해 보길 적극적으로 권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삶은 영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것도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없습니다. 한 번 꽃피웠던 저 작은 장미는 영원히 꽃 피운 채 존재합니다. 어떤 것도 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가 이 작은 지구에 존재하는 것을 그만둘 때,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그 즉시 아름다운 여행을 다시 하기 위해 생명을 얻습니다. 그 여행은 하느님이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신의 아들을 통해 그에게 말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 때가 되어야만 그의 세상을 쓰고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의 여행은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의복을 벗을 때가 마지막 시간을 위한 때가 될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말합니다.
“나는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더라. 그곳은 훨씬 더 좋기 때문이기에. 그러나 내가 이 육체 안에서 너를 위해 있는 것이 더욱 필요하더라.”
바울은 이곳을 떠나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이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에 육체를 가지고 남아서 그의 가르침을 계속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처럼 말이죠.
제가 한 말을 가슴 속에 새기어 모든 바람을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보이는 것에 의존해서 걷지 말고, 바울처럼 믿음으로 걷는 것을 배워, 여러분이 성취해냈던 것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을 등 뒤로 던져버리시고 여러분이 세워놓은 목적을 향해 쭉 뻗어 나가십시오. 그 목적지에 다다랐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이 그곳에 있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시겠습니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그 상태 안에서 걸어 나가시면 반드시 성취해낼 것입니다.
이제 침묵 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