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킨스의 소설 ‘어려운 시절’에 등장하는 한 노동자가 진흙구덩이에 빠져 죽어가며 한스런 세상을 향해 던지는 절망의 외침이다. 이 노동자는 마흔살이 되도록 한평생을 직물공장에서 일했지만 남은 것은 벗어날 수 없는 빈곤과 해고였다.아내는 집안의 위안을 주기는 커녕 술값으로 가재도구를 몽땅 팔아치우는 술주정뱅이여서 그의 절망과 한탄은 커지기만 한다.
집을 나간 아내 대신 뒤늦게 사귄 레이첼에게서 사랑을 느끼지만 이혼소송 비용은 먹고 살기도 힘든 노동자에겐 요원하기만 하다.사회제도란 가난한 노동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가 해나갈 일이란 진흙탕과 같은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 뿐이라는 공장장의 충고는 냉혹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답안처럼 들린다.
○40대 노동자 비참한 삶
19세기 산업사회의 틀에서 힘없는 노동자의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그린 디킨스의 사회소설은 당시의 중산층 독자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도시의 중심가를 한걸음 비껴 골목으로 들어서면 오물과 진흙으로 범벅이 된 거리에 노동자들의 빈민굴이 펼쳐지지만 대부분의 중산층은 타인의 세계처럼 이를 외면했다.
그들은 노동자를 기계의 한 부품으로 작동하다 버려지는 소모품으로 생각했다. 중산층의 비인간적 무관심과 책임회피가 결국 산업사회를 이끈 지배이데올로기의 산물임을 인식한 디킨스는 ‘어려운 시절’(1854년)에서 노동자의 비참한 삶을 그려가려는 본래의 창작의도에서 벗어나 그 당시 팽배했던 공리주의 이념을 비판하는 정면 시도를 꾀했다.이에 따라 노동자의 생활상은 부차적으로 돼버리고 작품의 초점은 공리주의를 신봉하는 그래드그라인드의 가정사로 향한다.
○공리주의 이념의 허상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명제를 내건 공리주의는 개인의 행복을 최대로 향상시킬 수 있는 사회적 효용성을 최고 가치로 내세웠다.공리주의는 행복의 척도를 산술적으로 측정가능한 물질적 효용성에 두었기 때문에 개인의 감정과 상상력의 가치는 도외시됐다.따라서 노동자를 생산원가의 한 부분으로만 고려하는 산업자본가들의 의식은 참다운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도덕적 단견에 빠져있음을 디킨스는 고발했다.
초등학교 교장인 그래드그라인드는 자신의 두 자녀를 철저한 공리주의 원칙에 따라 키워나갔지만 그 결과는 완전한 실패였다.
아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이기주의자가 되어 은행을 터는 범죄를 저지르고서도 이를 남에게 뒤집어씌우는 도덕적 파산자가 된다.
딸은 아버지의 교육에 따라 결혼의 효용성만을 중시하고 사랑의 감정은 무시한 채 결혼하지만 뒤늦게 남편의 위선을 발견하고는 별거하는 슬픔을 맛본다.
한편 아버지가 서커스 단원인 소녀 씨씨는 서커스단 내에서 이뤄진 상호 신뢰와 협조 분위기에서 성장했다.가난하지만 상상력이 풍부하고 아버지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간직한 씨씨는 그래드그라인드의 하녀로 일하면서 그 가족의 불행을 위로하는 따뜻한 마음씨를 보인다.절망이 있는 곳에는 항상 씨씨가 있어 새로운 생명력과 희망을 불어넣어준다.
○사회통합 방법 제시해
씨씨와 그래드그라인드의 두 자녀가 살아가는 서로 다른 과정을 통해 공리주의 이념으로 엮어진 산업사회와 그와 대별되는 서커스단의 이상적 공동체가 대조된다.
서커스는 서로간의 호흡이 일치되는 협동으로 이뤄지는 공동작업이다.어느 한 사람이 줄을 놓치면 그 줄 위에서 공연하는 사람은 다치게 된다.또한 공연하는 사람은 줄을 잡은 사람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있어야 한다.서커스단의 지도자는 단원들을 자식처럼 아끼고 보호하며 그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단원들은 지도자를 믿고 존경하며 따르는 상부상조의 집단이다.이들을 하나의 유기체로 만드는 힘은 서로를 아끼는 따스한 사랑의 감정과 믿음이다.
공동체 사회를 엮는 근원적 힘은 수리적 통계로 분석되는 가시적 산물이 아니라 대화로 연결되는 믿음과 신뢰다.
산업혁명이 가속화되면서 노사가 첨예하게 대립했던 어려운 시기에 디킨스는 분열된 사회를 다시 통합할 길을 순박하지만 진실된 마음으로 제시했다. 20세기가 저물어가는 현 시점에서 무차별적 경쟁력을 신봉하는 신자유주의 이념이 세계를 휩쓸고 있다.이 냉혹한 이념의 짐을 우리는 21세기 미래사회에까지 짊어지고 가야만 하는가.현 사회의 왜곡된 이념을 고발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새로운 디킨스는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