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 울음 / 송재학
고라니 울음에 고라니가 없다
순한 눈을 생각한다면 나올 수 없는 소리이다
쿠웨웨엑 울음은 고라니가 제 몰골과 성대와 성격을 기이하게 변형시켜서 내는 신음이다
폭우가 심하던 날 몸 비비며 울던 고라니의 덩치가 고스란히 보였다
왜 그렇게 울었을까 짐작해보니 누군가 저렇게 울었다
일찍 죽은 동생을 두고 사촌 형이 저렇게 울었다
울지 않던 사람이 울었다
어떤 울음에는 네 발이 보인다
그는 종일 슬프기만 했는데도 짐승이었다
고라니 울음에도 육식동물이 기웃거리고 있다
고라니 / 남호섭
달빛 하얀 / 겨울밤 // 마당으로 / 고라니 한 마리 / 불쑥 들어온다. // 잠결에 오줌 누던 나하고 / 딱 마주쳤다. // 숨 막히는 / 0.5초 // 세상에는 / 우리 둘 뿐
고라니 울음 / 손진은
고라니 울음소리
사십하고도 석삼년이나 들으며 산다는 문수 고모
큰 콧구멍과
광대뼈의 협곡을 가진
고모 떠올릴 때마다 아프다
살점 뜯기고
뼈를 가는 순간에야
터져 나올
기어코 몇 죽어 나간 후에야 끝날 법한 울음
인공 치하에 부역자로 몰려
뒷산 굴에 숨은 고모부
끼니 갖다 줄 때마다
아직 살아 있다는 신호의 비명처럼
골짝에 떠서 흐르는 신음 떠올리게 한다고
그 후론 영 소식 없는 이녁 목구멍에서
나오는 울음 같아서
밤마다 몸에 칭칭 감으며
가슴 구멍 뚫리며 산 세월, 이젠 소풍이 됐다고
전화선 타고 급류처럼
건너오는 소리에
온밤의 늑골이 또, 아프다
고라니가 우는 저녁 / 이명윤
고라니가 운다 오래전
이불 밑에 묻어 둔 밥이라도 달라는지
마을의 집들을 향해 운다
사람의 울음을 고라니가 우는 저녁
몸속 울음들이 온통 애벌레처럼 꿈틀거린다
수풀을 혜치고 개울을 지나
울타리를 넘어 달려오는
울음의 발톱이 너무도 선명해서
조용히 이불을 끌어당긴다
배고파서 우는 소리라 하고
새끼를 찾는 소리라고도 했다
울음은 먼 곳까지 잘 들리는 환한 문장
지붕에 부뚜막에 창고에 잠든
슬픔의 정령이 일제히 깨어나는 저녁
나는 안다 마당의 개도 목련도
뚝 울음을 그치고
달도 구름 뒤에 숨는 오늘 같은 날엔
귀먹은 뒷집 노인도
한쪽 손으로 울음을 틀어막고
저녁을 먹는다는 것을
고라니 / 박성우
산마루 넘어가던 눈발들이
그만 쉬어가자 쉬어가자,
산마을에 든다
더는 못 가겠다고
절벅절벅 주저앉는 눈발들
가쁜 숨을
가쁜 걸음걸음을
산마을에 부린다
하루 건너 사흘 나흘 닷새
길은 끊기고
밤새 고라니가 다녀갔다
똥글똥글
콩자반 같은 똥을
상사화 지던 처마 밑에 찔끔 누고
무청도 언 배춧잎도
없는 사내의 집을
순하게 다녀갔다
까마득 고픈 눈빛만
말똥말똥
까맣게 두고 가서
눈발도 그만 순하게 지나갔다
고라니 뼈 / 박성우
강변을 걷다가 본다
살점이 죄 발라진 고라니뼈,
두개골부터 목뼈 등뼈 뒷다리뼈까지
흐트러짐 하나 없이 가지런하다
앞다리 두 개만 따로 으깨져 잘려 나갔다
뼈마디마다 박혀 있는 검붉은 핏기,
어젯밤이거나 그저께 적어도 그끄저께 밤쯤에
변을 당했다는 걸 증명해주고 있다
발자국 어지러운 강변을 따라
고라니털이 뭉텅뭉텅 수북수북 뽑혀 있다
필시, 고라니는 물 마시러 왔다가 당했을 것이다
하필, 어떤 산짐승의 끼니때와 겹쳐서 당했을 것이다
배고픈 살쾡이나 너구리나 담비 무리
혹은, 굶주린 여우나 늑대의 식사시간
고라니가 물 한 모금 마시러 온 시간
어떤 산짐승이 끼닛거리를 노리는 시간
물 한 모금과 목숨이 아무렇게나 뒤엉킨 시간
끝내 고라니 편이 되어주지 않은 시간,
턱뼈에 붙은 송곳니가
이미 잘못 지나간 끔찍한 시간을 물고 있다
고라니 / 고영
마음이 술렁거리는 밤이었다
수수깡이 울고 있었다
문득, 몹쓸 짓처럼 사람이 그리워졌다
모가지 길게 빼고
설레발로 산을 내려간다
도처에 깔린 달빛 망사를 피해
오감만으로 지뢰밭 지난다
내 몸이지만 내 몸이 아닌 네 개의 발이여
방심하지 마라 눈앞에 있는 올가미가
눈 밖에 있는 올가미를 깨운다
먼 하늘 위에서 숨통을 조여 오는
그믐달 눈꼴
언제나 몸에 달고 살던 위험이여
누군가 분명 지척에 있다
문득 몹쓸 짓처럼 한 사람이 그리워졌다
수수깡이 울고 있었다
확보 / 신정민
고라니가 지나갔다
진흙은 발자국의 깊이를 가늠하고 있었고 나는
깨진 체온계의 수은이 구슬처럼 굴러다니던 아침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주워 담을 수 없게 된 날이었다
혹, 고라니의 발자국을 지워 버린 곳곳의 웅덩이가 사라진 숲의 홀로그램이라면 그날 아침 숲에서 사라진 건 고라니인가 알 수 없는 그림자인가 혹, 그날 그 숲의 흔적이 숲의 체온이라면 숲은 슬픔과 엇비슷한 감정에서 어떤 속도로 복원되는가
흙탕물이 가라앉는 속도
늪에 던져진 돌멩이를 잠시 피했다 모여드는 개구리밥의 속도쯤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미 지나가버린 고라니의 발자국은 알 듯 말 듯한 이곳과 저곳 사이에 나타나는 간섭무늬 그래서 고라니가 비가 내린 숲 여기저기 흔적을 남겼던 것일지도 몰라
밟힌 풀들이 일어서는
그만큼의 속도로 발자국은 아직도 고라니인가
생각에 잠긴 진흙 한 줌
그날은
삼백 년 전에 죽은 한 남자가
한 소녀의 꿈에 나타나 자신이 묻혀 있는 곳을 상세히 알려 주던 날이었는데 나는 체온을 재다 말고 까르르 까르르 달아나는 구슬을 따라다녔던 것이다
붙잡을 수 없는 아침 숲 어딘가에 본 적 없는 고라니가 있어 발자국은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며 그날의 적적함을 재현해 내고 있었다
*제17회 지리산문학상
노루 발자국 / 박성우
사흘 눈발이 푹푹 빠져 지나갔으나
산마을 길에 찍힌 건, 노루 발자국이다
노루 발자국 따라 산에 올라갔으나
산마루에서 만난 건, 산마을이다
아랫녘 산마을로 곧장 내려왔으나
산마을에 먼저 당도한 건, 산이다
먼 산을 가만가만 바라보았으나
손가락이 가리킨 건, 초저녁별이다
초저녁별이 성큼성큼 다가왔으나
밤하늘에 찍힌 건, 노루 발자국이다
노루 / 추프랑카
광대뼈가 꺼진 뒤꼍이 어둠을 밀어내고 있다
산 아래 것 잘못 먹은 모양이다 사지를 뻗고
노루가 버둥거리고 있다 구석에 말아둔 고무호스를 감고
흙바닥이 버둥거림을 다 받아 안는 동안
풀린 동공에 먼 하늘이 슬려
이른 아침부터 이른 봄비가 양수처럼 내렸다
내게는 지붕이 있고
비 맞지 않은, 침대와 식탁과 우산이
여럿
젖은 몸 감고 있던 탯줄을 푼다
뒤꼍의 발등이 식어간다
반은 하늘에 반은 산 쪽으로 뜬 노루의 눈을 쓸어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