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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모래 한알●
줄곧 일등으로 달리다가 42.195km 완주를 불과 얼마 남겨 놓지 않고
갑자기 멈춰 선 마라토너에게 기자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잘 달리다가 왜 갑자기 포기하고 말았습니까?
무엇이 당신을 가장 힘들게 했습니까? 더운 날씨인가요?
높고 가파른 언덕 때문인가요 아니면......?"
그 질문에 마라토너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대답했습니다.
"반환점을 막 지났을 때 운동화 안으로 들어온 '작은 모래알 하나' 때문입니다."
질문한 기자의 예상과 달리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더운 날씨도,
가파른 언덕도, '마라톤 벽'이라 불리는 30km지점도 아니었습니다.
대수롭지 않을 것 같은 모래 한 알이 그토록 그를 괴롭혔던 것입니다.
살다 보면 아주 사소한 작은 것이 삶을 힘들게 할 때가 있습니다.
입술의 30초가 가슴의 30년 된다고 하듯,
일상에서 아주 사소한 것 같지만 어떤 말은 상대에게 꿈과 용기와 희망을 주기도 하고,
어떤 말은 분노와 오해와 절망을 주기도 합니다.
공주처럼 귀하게 자라서 부엌일을 거의 안 해본 여자가, 결
혼해서 처음으로 시아버지 밥상을 차리게 되었답니다.
오랜 시간이 걸려 만든 반찬은 그런 대로 먹을만 했는데, 문제는 밥이었습니다.
“식사준비가 다 되었느냐?”는 시아버지의 말씀에 할 수 없이 밥같지 않은 밥을 올리면서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며느리가 말했습니다.
“아버님, 용서해 주세요!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닌 것을 해왔습니다 다음부터는 잘 하도록 하겠습니다!”
꾸지람을 각오를 하고, 있는 며느리에게 시아버지는 뜻밖에도 기쁜 얼굴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가야, 참 잘됐다! 실은 내가 몸살기가 있어서 죽도 먹기 싫고,
밥도 먹기 싫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닌 것을 해왔다니 정말 고맙구나!”
이 사소한 말 한 마디가 며느리에게 깊은 감동으로 남아서,
시아버지 생전에 극진한 효도을 다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친정에서 뭘 배웠냐, 대학은 폼으로 나왔냐...’등등으로 상처를 줄 법도 한데,
그러지 않으시고 오히려 무안해 할 며느리에게,
따뜻한 말씀을 하신 시아버지는 정말 지혜로우신 분입니다.
이렇듯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주는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기도 하고,
상처 주는 말 한 마디로 평생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자신의 불행한 운명은 바로 자신의 입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입은 몸을 치는 도끼요,
몸을 찌르는 날카로운 칼날입니다.
인간 관계는 유리 그릇과 같아서 조금만 잘못해도 깨지고 사소한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원수가 되어 버립니다.
우정을 쌓는데는 수십년이 걸리지만, 그것을 무너뜨리는데는 단 1분이면 족합니다.
우리들도 항상 하는 말이지만, 가려서 하고 남을 배려하고
따뜻하게 위로하는 마음으로 대화를 이끌어 가시기를 소망합니다,
늘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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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있는아침>
【落 葉】
개옹㝏翁 장봉한張鳳翰
(1566~1644)
着樹君無賴
離鄕我作囚
愴恨還羨意
春色未幾周
낙엽,너는 다시 붙을나무가 없고
고향떠난 이내몸은 죄수가 된듯
너를슬퍼하다 도리어 부러워함은
머지 않아 봄이 돌아올 테니까
※ 羨 부러워할 선
☞ 감상
이 시는 소제의 23대조 개옹㝏翁선생 휘 장봉한張鳳翰 공이 읊은시입니다.
임진왜란 때 처가곳인 성주에서 창의했으나 고향 仁同으로 돌아 가지 못하고
100여리 떨어진 星州 집실에 살면서 고향에 가지 못함을,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슬퍼하다가,
봄이 다시 오면 새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데 희망을 품고 시를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아서 지금은 뺄갱이 세상이 와서 슬프지만, 곧 새세상이 와서 저들을 물리칠 것을 생각하면 희망이 전연 없는 것도 아닙니다.
◆ 마산국화축제 명칭
마산에서는 해마다 가을 국화축제가 성대하게 열린다.
2018년까지는 <마산가고파 국화축제>라고 했는데
마산 무슨 연대니, 시민단체니 하는 사람들이 떠들어서 가고파를 빼고 <마산국화축제>라고 이름을 고쳤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하보니 마산은 가고파 노래가 탄생한 곳으로 가고파를 넣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나머지 창원시의회는 창원시조례로 <마산가고파 국화축제>라고 이름을 특정하고 앞으로 영구히 그 이름을 사용하도록 정하였다.
그러자, 이번에 무슨 연대니 하는 사람들이
<마산가고파 국화축제>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무효확인청구소송및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청구했다는 소식이다.
가고파를 넣는 것이 좋아서 <마산가고파 국화축제>라고 했는데
노산 이은상선생을 폄하하는 무리들이 무단히 이런 소동을 벌이고 있는것이다.
국회는 범법자들이 다수를 차지하여
특검법과 탄핵을 4일에 한번꼴로 남발하고 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줄 아십니까?
선거관리위윈회가 부정선거로 국회의원을 뽑았기 때문입니다.
다음 대통령선거도 부정선거를 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데
윤석렬 정부는 그런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공산주의로 가고 있는것을 방치하고 있으니 그 얼마나 무능한 정부입니까?
이것이 정부냐?
공산주의자들을 두들겨 잡아야 합니다.
다음은 <경남연합신문>에 난 기사입니다.
【마산가고파 국화축제 부활마땅】
마산사람치고 노산 이은상 선생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인으로서 명성을 떨친 이은상 선생의 가고파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마산하면 이은상 선생을 말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런데 마산국화축제 명칭이 마산가고파국화축제로 변경 시켰다고 하여
지역민주화 운동 단체에서 명칭을 변경 하면안된다고 명칭변경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는 것은,
민주화 운동단체가 주제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월권행위를 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산가고파 국화축제하고 민주화 운동 단체가 무슨 관련이 있기에 법정소송으로 소란을 떨고 있는지 이해가 안간다.
마산가고파국화축제 조례를 개정한 창원시 의회 손태화의장을 상대로 명칭변경 무효확인소송과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창원지방법원에 했다는 것인데
3.15 의거 기념 사업회와 부마민주항쟁기념 사업회, 6월 항쟁정신 계승 경남사업회 공동으로 소송을 제기했다는 것은 더더욱 이해를 할 수 없다.
창원시민의 대표기관인 창원시 의회에서 개정한 조례를 민주화운동 단체라는 이름으로 월권적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은 지역민의 규탄을 받아 마땅하다고 하지않을 수 없다.
마산가고파국화축제행사가 반민주행위를 하는 것도 아니고
지역민을 위한 순수한 문화축제 라는 것을 감안할때 민주화운동 단체 이름을 앞세워 간섭한다는 것은
오히려 민주화 운동 정신에 역행 하는 행위라 하지 않을수 없다.
지난 2018년 까지는 마산가고파 국화축제로 거행했던 것을
2019년 부터 마산의 상징인 가고파 를 뺀 마산국화축제로 한것을 이번조례 개정으로 정상화 시킨 것인데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민주화운동단체가 태클을 걸고 나서는 것은
어느모로보나 정당성이 있다고 할 수 없다.
최근 몇년 동안 걸핏하면 민주화 이름을 앞세워 곳곳에서 태클을 걸고 나서고 있다는 자체가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가요황제 칭호를 받고있는 남인수 선생에 대해서도 친일이니 뭐니 하면서 남인수 가요제를 못하겠금 태클을 걸더니
이번 마산가고파국화축제역시 이같은 단체들이 나서는 것을 보면
민주화 운동단체가 얼마나 편협적 이고 왜곡되게 국민을 우롱해 왔는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지 않을수 없다.
이제부터는 그냥 민주화 운동이라 하면 안 되고 반드시 자유 민주화 운동이라 해야 한다.
이 나라는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 헌법으로 건국되었기 때문에
자유를 뺀 그냥 민주주의라 하면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자유민주주의의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므로 민주화 운동 단체라는 이름을 앞세워 아무 데나 개입 하려는 사고방식을 개선하여
진정한 나라 발전과 국민 생활안정 을 위하여 솔선수범해야 할 시대적 상황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각성해야 한다.
경남연합신문kj7627800@daum.net
이 기사는 사회운동을 주도하시는 전경남도 의회 진종삼의장(86) 님께서 보내온 글입니다.
오늘도 찌는듯한 무더위,
어찌들 지내시는지 안부를 여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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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의 밭 전(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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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이 계유정란(癸酉靖難)을 도모하려던 당시 한양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판자술사로 홍무광(洪武光)이라는 맹인이 있었다.
그는 밥상 넓이 정도의 나무판에 부드러운 흙을 담아 점을 보러 온 손님이 마음내키는 대로 글자를 쓰면 손으로 더듬어 읽고 길흉을 예언하였다.
수양대군은 역모거사(擧事)전에 일의 성패를 알기 위해 거리에서 판자술을 하고 있던 홍술사를 찾았다.
"점을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오?"
"거기 앞에 흙판에다 아무 글자나
생각나는 대로 쓰십시오"
수양대군이 밭 전(田)자를 썼다.
홍무광이 더듬더듬 손으로 글자를 읽고 나서,
"전(田)자를 쓰셨군요. 쌍일이 병립(雙日竝立-두 개의 태양이 나란히 떠 있음)하니 역적지사(逆賊之事)로소이다"
수양대군은 짐짓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무엇때문에 점을 치는지 말하지도 않았는데, 수양의 거사 계획을 미리 얘기하니 말이다. ㆍ
수양은 시치미를 떼고,
"에이, 여보쇼, 무슨 험한 말을 그리하는가? 아무래도 잘못 본 것 같으니 다시 한번 해봅시다"
수양대군은 전(田)자를 다시 한번 썼다.
"또 전(田)자를 쓰셨군요.
사방이 개구(四方開口)이니,
여론이 두렵습니다"
(전(田)은 입 구(口)가 넷이니,왕위를 찬탈하면
구설을 면하기가 힘들다는 뜻)
그제서야 수양은 홍무광의 두 손을 꼭 붙잡고서,
"그래, 이 사람아 그러니 어떻게 하면 내가 성공할 수 있겠나?"
"말 그대로이지요"
"말 그대로라니?"
"좌벌우벌(左伐右伐-전(田)자에서 왼쪽과 오른쪽 벽(ㅣ)을 떼어 냄)
하면 왕이 되지를 않사옵니까?"
수양대군은 이말을 듣고 당시 영의정이던 황보인(黃甫仁)과 좌의정이던 김종서(金宗瑞)를 좌,우로 판단제거할 결심을 했다고 한다.
거사 전날 수양은 최후의 결심을 굳히기 위해 다시 한번 홍무광을 찾았다.
당시 홍무광은 평소 그가 손님을 받던 거리에 없었기 때문에 하는 수없이 수양대군은 수소문하여 그의 집까지 찾아갔다.
대문앞에 쪼그리고 앉아 햇빛을 쬐며 무슨 생각인가를 골똘히 하고 있던 그의 앞으로 다가간 수양대군은,
"이 사람아 날세, 일전에 밭 전(田)자를 쓰고 묻던 사람인데 아무래도 앞일이 궁금해서 한번 더 물으러 왔네"
"예. 지금은 흙판도 없으니 마당에 아무 막대기나 주워 들고 이 앞에다 써 보시지요"
수양대군은 한일(一)자를 썼다.
글자를 더듬어 읽은 홍무광은,
"흙 토(土)위에 ㅡ획을 그으면 임금 왕(王)이 되니, 필시 제왕이 되실 것입니다"
하면서 벌떡 일어나 수양대군에게 큰절을 하여 임금을 배례하는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수양대군은 만족했다.
집으로 돌아간 수양은 자신의 심복인 권람(權擥)을 불러서,
"자네는 지금 홍무광의 집으로 가게.
거기 가면 대문 앞에 그가 앉아 있을 테니 점을 보러 왔다고 하고 한 일(一)자를 하나 쓰게.
반드시 한 일(一)자여야 하네"
그리하여 권람은 수양대군이 시키는 대로 홍무광에게 가서 한 일(一)자를 쓰며 자신의 운명을 물어 보았다.
"오늘은 한 일자를 쓰는 손님이 두 명째 오셨습니다"
"손님이 쓰신 일(一)자는 생자종획(生字終劃 )이요 사자시획(死字始劃)
(산다는 글자 生의 마지막 획이요,
죽는다는 글자 死의 첫획)
이니 당신을 낳으신 분이 돌아가시겠습니다"
권람은 깜짝 놀라 황급히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어머니가 마침 세상을 하직한 후였다.
상(喪)을 치르느라 권람은 다음날의 거사(계유정란-1453년 11월 10일)에는 참여하지 못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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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걸어가면 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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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수양대군은, 어떻게 하여 세운 나라인데 어린 조카에게 임금자리를 맡겨 사직을 위태롭게 할소냐? 하는 사명감을 갖고 계유정란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는 꿈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權氏)가 나타나서
침을 탁 뱉는꿈을 꾸고 나서부터 피부가 낫지 않는 문둥병에 걸렸는데
속리산 복천암, 오대산 상원암 등을 찾아 부처님께 기도하고 자신의 죄업을 참회하였습니다.ㆍ
그는 왕위에 오른지 7년만에 붕어하셨는데
그의 부인 정희왕후가 또한 보통인물이 아니어서,
선왕이 이루고자했던 <해인사 대장경 경판각 건립사업>을 기어이 완성해놓고 별세하셨습니다.
이때 공사감독을 맡은 스님은 학조대사로써
도인의 지혜로 경판전을 지은결과 600년이 흘러간 지금까지 끄떡없이 건물형태를 유지하고 있고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과 세계유일의 경판전(국보)을 유지하고 있는것입니다.
오늘도 건강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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