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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샬과 소현세자
소현세자가 가톨릭을 접했다는 기록은 예수회 소속 아담 샬 신부의 회고와,
북경 남당의 신부였던 황비묵의 회고에서 나온다.
두 사람은 아담샬이 소현세자와 친교(親交)를 나누고
그가 천주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고 회고한다.
아담 샬 신부는 1619년 마카오에 상륙해 1623년 북경에 입성하였다.
1627~1630년까지 서안에 파견되었던 것을 제외하면 1666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 북경에만 머물렀다.
그는 1622년부터 1658년까지 자신과 중국 가톨릭에 관련한 사건들을 적은
라틴어 회고록 〈Historica Relatio〉를 남겼다.
북경 남당의 신부였던 황비묵의 회고에 따르면,
1644년(인조 22년) 9월, 소현세자와 아담 샬이 처음 만났다.
소현세자는 만나는 사람과 갈 수 있는 사람을 제약받아,
실권자 도르곤의 허가를 받아야 했을 가능성이 높은 인질의 신분임에도,
아담 샬 신부와 꽤 여러번 교류했으며,
주로 역법을 배운다는 핑계로 학자들을 대동하고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소현세자가 직접 성당을 찾기도 하고,
때론 아담 샬이 세자가 거처하는 곳(심양관)을 자주 방문해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자는 아담 샬을 통해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지동설이나 지구 구형론을 접하게 되고
수하의 사람을 보내 아담 샬로부터 서양 천문학과 역법을 전수받도록 하였다.
또, 황비묵의 목격담에 따르면, 소현세자와 아담 샬,
두 사람 사이에는 깊이 뜻을 같이 하는 바가 있었다고 한다.
세자도 자못 듣기를 좋아하여 자세히 묻곤 하였다 한다.
그러다 세자가 조선으로 돌아가게 되자, 아담 샬이 선물로서
그가 지은 천문, 산학, 성교정도 등의 여러 서책과 지구본, 그리고 천주상을 보냈다.
세자는 이를 받고 손수 한문으로 편지를 써서 감사의 뜻을 밝혔다.
그 편지 내용에 감동한 아담 샬은 그것을 라틴어로 직접 번역해 회고록에 첨부했다.
이 아담 샬의 기록속 소현세자 서신을 맨 처음 발견한 것은
일본인 학자 야마구치 마사유키다.
다만 야마구치는 소현세자의 서신 중 일부만 번역했으며,
이후 아담샬의 회고록의 라틴어 원문과,
소현세자의 서신 번역본은 한국 학자들에 의해 심도있게 연구되어 왔다.
아담 샬의 회고로 간접 기록된, 소현세자가 개인적으로 보낸 서신은,
소현세자의 내면이 솔직하게 드러난 매우 희귀한 사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현세자에 관한 기록들이 아무리 방대하다 한들,
그것들은, 국본으로서의 모습을, 성리학적 필터를 거쳐 담은 공문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현세자는 아담샬의 서신에서 이런 말을 한다.
동궁일기나 심양일기에서 성리학 사관들이 본 소현세자의 모습이
비록 분량면에서는 압도하나
소현세자의 전부가 아니라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아담 샬의 서신 때문이다.
소현세자는 원자로 책봉된 이래,
평생 시강원 스승들에게 둘러싸여 성리학적 덕성 교육을 받았고,
그것에 따라 훌륭한 국본의 모습을 보이려 노력해왔다.
소현세자는 자신이 평생 받았던 가르침이 '거짓으로 가득찬 것'이었다고 단언한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그간 소현세자가, 동궁일기나 심양일기의 화자들이 강조하는 성리학에 줄곧 회의를
느끼고, 심리적으로 경계하거나, 최소한 방황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이는 소현세자가 기회만 닿으면 학문 경연을 중단해 버렸던 모습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만약 소현세자가 이런 서신을 양이에게 보냈다는 사실이
조선에 있는 누군가에게 들어가면,
소현세자는 조선의 뿌리이자 근간인 성리학에 도전하고자 하는 마인드를 지닌 국본으로, 숙청 대상이 되고도 남았을 수준이다.
그만큼 아담 샬의 서신에서 읽히는 소현세자의 태도는 급진적이다.
아쉬운 것은 조선측 기록에 이 아담 샬 신부의 회고록과
크로스체크가 될 부분이 없다는 점이다.
북경으로 떠나기 2일 전인 8월 18일이 심양일기의 마지막 기록이다.
소현세자는 8월 20일 심양을 출발해 1600리 떨어진 북경으로 향했으며
9월 19일 북경에 도착했다.
소현세자는 11월 11일 귀국 허가를 받아 11월 26일 조선으로 떠났으니
북경에 머무른 기간은 70일 남짓인데,
천주교를 접하고 아담 샬 신부와 교류할 수 있었던 시간이 이 기간이기도 하다.
이는 황비묵의 회고와도 일치한다.
그런데, 세자가 전쟁터에서 막사에 포탄 맞는 장면까지 따라다니며 기록한
기록덕후인 사관들은 심양일기는 남겼으면서 하필이면 <북경일기>는 남기지 않았다.
단순히 기록되지 않았거나,
후대에 우연히, 혹은 의도적으로 훼손되어 소실되었을 가능성을 추정해 볼 뿐이다.
5.1. 아담 샬의 회고의 신빙성에 대한 회의론
소현세자의 태도가 너무 급진적인 데다,
기존의 동궁일기, 심양일기에서는 암시조차 안 되던 속내이기 때문에,
오히려 아담 샬의 과장적 기록이 아닌가 의심하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아담 샬의 회고록엔 트집이 잡힐 만한 부정확한 부분들이 있다.
일단 아담 샬은 선교사였다.
따라서 자신이 했던 포교의 업적을 과장하면 과장했지, 축소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아담 샬은 용어적 오류들을 별 생각 없이 회고록에 남겨놓았다.
요동에 포로로 잡아온 '조선 왕'이 역법을 익히려고 조선 역관들을 대동해 찾아왔고
아담 샬 신부 자신은 이를 성심성의껏 도와주며 조선 왕과 우정을 쌓았다는 것이다.
또 분명 라틴어에도 '인질'이라는 용어가 분명 있음에도, 그는 대신 '포로'라는 용어를 쓴다. 또, 소현세자의 서신엔 구원자 하느님(Salvatoris Dei) 상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마테오 리치 신부 이후 중국에 간 선교사들은 'Deus'를 '천주(天主)'라는 용어로 번역해
'신명(神名)'으로 사용했다.
크리스토교를 처음 접하는 세자가 이런 용어를 썼을는지는 의문이다.
또 위에서는 '조선'이라고 첨삭했지만, 아담 샬은 소현세자의 한문 서신에서 단순히
'우리나라'정도로 썼음직한 부분을
'나의 왕국(=즉 나는 왕)'이라고 라틴어로 번역해 놓았다.
무엇보다 아담 샬의 기록이 트집 잡히는 부분은 순치제 관련 내용이 과장된 것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말에 따르면, 크리스토교에 대해 일말의 사전 지식도 없던
순치제가 예수 생애화집을 보고 "우리의 성현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대한 분이라며 경배를 드리고 황후가 예수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언급이 있다고 한다.
5.2. 아담 샬의 회고의 신빙성에 대한 회의에 대한 반론
아담 샬의 기록을 평가절하하는 주장은,
순치제의 반응을 과장했다는 점을 주요 근거로 삼는데,
그럼에도 순치제의 반응과 소현세자의 반응은 분명 차이가 있다.
일단 순치제는 아담 샬을 신하로서 총애했다.
아담 샬의 서양 역법(시헌력)이 기존 달력보다 정확하다는 것이 증명된 후부터이다.
순치제는 아담샬의 성당 건축을 허가했으며,
성당의 이름까지 하사하고, 심지어 성당 건축은 물론 미사에도 많은 비용을 보태주었다.
게다가 순치제가 성화를 보자마자 천주교에 대해 하나도 모르면서도
경배를 드렸다는 위의 주장과 달리, 순치제는 성당이 지어지기 이전부터
도교와 불교와 비교해 가며 천주교 교리를 아담 샬로부터 조금씩 공부해 왔고,
성당이 지어진 후,
성당에 있는 예수의 생애화를 보며 훌륭한 성현이라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이런 순치제도, 표현은 과장되었지만,
결국 천주교를 종교로 받아들이진 않음이 아담 샬의 회고에서 드러난다.
순치제에게 있어 천주교는 유교, 도교, 불교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수신과 수양지침이었다.
자신이 후원해 돈들여 지어놓은 성당의 성화를 보고 찬탄하는 순치제의 태도는
웅장한 사찰을 건립해 놓고 칭찬하는 군주의 태도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또한 순치제에게 있어 아담 샬의 본질은, 전도사이기보단,
서양 철학과 학문을 전해준 기특한 신하였다.
때문에, 중국에서 서양 학문과 서양 종교를 분리하여 받아들이는 일관된 태도의 원조가
순치제였다는 시각도 있다.
반면 아담 샬이 회고한 소현세자는 아담 샬을 신하가 아닌 친구 혹은 형제에 가깝게 느꼈으며, 천주교를 기존 철학을 대체할 종교, 혹은 더 나은 사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담 샬 회고 속 순치제의 반응은 귀하고 충성스러운 신하를 황제가 공개적으로 칭찬할 때 쓰는 미사여구에 가까웠던 반면, 소현세자가 아담 샬에게 보낸 서신은 마치 내밀한 친구에게 쓴 것처럼 담백하고 허심탄회하다.
이런 합리적인 온도차 때문에라도 아담샬의 회고는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 긍정론자들의 주장이다.
군주들이 치하하기로 작정한 신하에게 평소 어떤 오글송을 늘어놓는지를 감안해 볼 때,
아담 샬은 심지어 순치제 관련 내용조차 그리 과장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또 조선왕조실록이나 동궁일기 등에서 드러나는 소현세자의 인성 총평을 고려해 볼 때,
소현세자의 서신 역시 과장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천주를 크리스토로, 조선을 나의 왕국으로, 성상을 구원자 하느님의 상으로 하는 등,
한문을 라틴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아담 샬 본인에게 익숙한 용어로 되돌리거나,
오해한 부분의 용어적 첨삭을 제외하곤 거의 그대로 인용했단 합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아담샬 회고의 신빙성에 대해 아무리 평가절하한다 한들,
그것을 완전한 허구로 간주해야 할 근거가 없는 한, 소현세자가 조선 최초로 크리스토교를, 그것도 성리학 등 기존 가르침을 추후 대체할 그 무언가로 받아들이려 시도한 '왕위 후계자'였단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5.3. 소현세자가 선교사나 성물을 조선에 들여왔는지 여부
아담 샬의 회고에 등장한 소현세자의 첫 서신에 따르면,
소현세자는 역법과 기타 서학서는 물론 성상과 천주교 서적들을 선물받았다.
다만 첫 번째 서신을 보면 소현세자는 성상이 아직 천주교를 모르는 대다수 조선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져 멸시의 대상, 혹은 잘못된 숭배의 대상이 될까 두려워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돌려주는 게 안전하다고 판단했고 처음엔 실제로 돌려보냈다.
다만 소현세자를 연구한 일본인 학자 야마구치 마사유키(山口正之)는
그에 대해 연구를 충분히 하진 않아, 소현세자가 성상을 그냥 돌려보냈다는 첫번째 서신에서 결론을 내려버리고, 아담 샬이 성상을 지참하기가 불가능하다면 세례성사를 받은 환관을 데려가 주십사 청원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소현세자가 이를 허락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유럽 선교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해 명나라 출신 환관 이방조(李邦詔), 장삼외(張三畏), 유중림(劉仲林), 곡풍등(谷豊登),
두문방(竇文芳)과 궁녀들이 인조 23년(1645년)에 2월 18일 세자를 따라서 한양에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담 샬 회고록을 완역해보면 아담 샬 신부는
성상을 돌려보낸 것을 겸양으로 생각하고,
조선 왕의 환관 중 세례성사를 받은 이에게 교육을 시켜 성상을 다시 돌려보내자
결국 소현세자가 받았다고 한다.
또, 아담 샬 신부의 회고를 완역해보면 선교사를 먼저 청한 쪽은 아담 샬이 아닌 소현세자인데 정 안 되면 환관을 선교사로 활용할 생각을 했다.
아담 샬 신부는 "백방으로 손을 썼지만 윗선의 허락을 받지 못해 하지 못했다" 하였다.
일단 소현세자의 내관 중 갓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된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담 샬의 회고에서 확인되지만,
입문자가 아닌 선교사를 데려오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런 성과를 내었다면 아담 샬이 자신의 회고록에 적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야마구치 마사유키는 선교사를 대행할 명나라 출신 천주교도 환관과 궁녀들이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다 주장했는데, 이는 추측의 영역에 머문다.
일단 명나라에 봉직하던 환관들
중에 천주교 신자가 있었던 건 맞다.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중국인 환관을 데려온 것도 맞는다.
하지만 명나라 조정에 봉사하던 궁인들은 엄연히 청나라의 포로였으며
인질 신분이었던 세자가 임의로 특정인을 요구해 대동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아담 샬 신부가 임의로 명나라 환관을 조선으로 보내기 역시 어려웠다.
아담 샬 신부는 소현세자가 귀국하기 하루 전에야
청나라 조정에서 관직을 받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약 명나라 환관을 선교사로서 조선에 투입하는 데 만약 성공했다면,
조선 선교에 관심이 있던 아담 샬이 그것을 회고록에 언급 안 했을 리가 없다.
아담 샬 신부의 회고록뿐 아니라 동료 선교사들의 서한이나 보고서에도 전혀 확인되지
않고, <인조실록> 같은 조선 측 기록에도 이들이 천주교 신자인지를 확인할 만한 내용이 없다.
즉, 소현세자가 데려온 중국인 환관과 궁녀는,
설령 우연히 천주교 신자가 끼어있었다 한들,
어디까지나 청나라 조정이 임의로 뽑아 보낸 이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1645년(인조 23년) 7월 22일 청나라 사신을 따라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성물의 경우, 아담 샬 신부가 전해주었다는 성상이나 서학서는 현재 실물이 확인되지
않고, 아담 샬 신부의 회고록에서만 구체적으로 언급되며,
조선 측 기록에선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가져온 물품들을 보고 사람들이
소현세자에게 실망했다는 언급이, 크로스체크로 간주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아담 샬 신부가 남긴 교류 기록에서 종교 관련 부분들을 빼놓고 보면
소현세자가 가장 관심을 쏟은 문물은 역법인 듯하다.
아담샬을 만날 핑계로 소현세자가 종종 역법을 배울 신하들을 대동했다 회고되기 때문에 이는 앞뒤가 맞는 사실이다.
6. 평가
소현세자가 조선인 포로 쇄환이나 각종 외교적 현안에서 조선의 입장을 대변하며,
조선의 세자로서 부끄럽지 않고 현명하게 처신한 것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더 나아가 볼모 생활 중 보인 변화를 통해 계몽군주의 씨앗을 가지게 되었을 수도 있다.
성리학적 가치에 회의를 느꼈고, 아담 샬과 교류하며 가톨릭에 호의를 가졌으며 호기심을 보였다. 《심양일기》, 《동궁일기》, 《승정원일기》 등이 번역된 오늘날에도,
이런 평가는 대중들에게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반면 《심양일기》나 《동궁일기》, 《승정원일기》를 파고 드는 사람들 중 일부는 소현세자의 이런 기존 이미지들이 과장이나 허구라고 여기는 수정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이 내린 결론에 따르면 기묘하게도 소현세자는 조선과 청나라 간의 입장을 조율하는 본인에게 버거운 임무를 수행한 나머지, 스트레스를 못 이겨 지병을 달고 사는 허약 체질의 환자였으며, 세자로서의 할 일은 했지만, 딱히 기존 질서에 대해 반감을 드러낸 적도 없는, 매우 심약하고 수동적인 존재였다. 여기에 희한한 확증 편향이 붙기도 한다.
아버지 인조는 이 심약하고 못 미더운 데다가 청나라의 앞잡이가 될 것 같은 아들이 결국 골골거리다 죽자, 건강하고 장성한 봉림대군을 계승자로 확정짓기 위해, 조선의 200년 미래를 위한 단호하고 현명한 정치적 결단을 했으며 그것이 소현세자 가족의 숙청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인조가 맏아들을 사랑하지 않아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방대한 기록들이 새로이 연구되면서 기존의 학설을 뒤집어보기 위해
가장 첫 번째로 공격 목표가 된 인물이 대중적인 이미지가 좋은 소현세자이고,
그만큼 피해를 본 것도 소현세자인 것 같다.
실제로 소현세자의 일기는 여러 세자들의 일기 중 가장 먼저 번역된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심양일기》나 《동궁일기》, 《승정원일기》만 진짜 자료이고,
기존의 《조선왕조실록》이나, 아담 샬의 《회고록》은 무시하거나,
허구라고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은 《승정원 일기》를 토대로, 당시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록들을 발췌해, 《심양일기》나 《동궁일기》, 《승정원일기》만 읽어서는 알 수 없는,
당대 사람들만이 아는 팩트나 분위기, 맥락을 첨가해 정리한,
어떤 의미에선 더 본질에 가까울 수도 있는 사료이다.
실제로 1차 사료인 《승정원일기》엔 간략히 나온 사건이 《조선왕조실록》에선 맥락을 설명하기 위해 《승정원일기》에 없었던 일까지 덧붙여 훨씬 자세히 소개되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기존 사료는 틀렸고, 새로운 사료가 진실이다라는, 뭔가 극적 반전을 갈망하는 흑백논리로 접근하는 것 보단, 양자를 모두 사료로 인정하고 상호 보조하며 보는 것이 소현세자의 실체에 더 정확히 다가서는 길로 보인다.
이런 수정주의의 두 번째 허점은, 소현세자의 《동궁일기》나 소현세자의 《심양일기》를
소현세자 개인이 쓴 일기인 양 여긴다는 것이다.
만약 이 사료들이 정말 소현세자의 개인 저서이고,
《조선왕조실록》에서 다루지 않는 다양하고 시시콜콜한 주제에 관해 솔직히 이야기한다면, 충분히 소현세자의 철학이나 내면, 실체를 파악하는 데 있어 《조선왕조실록》을 우선해도 좋을 만한 공신력을 가질 것이다.
문제는 이런 사료들 역시 《조선왕조실록》과 마찬가지로 소현세자를 바라보는 사관이나 시강원 스승들의 눈으로 씌여진 것이며, 분량만 많다 뿐이지, 주제는 비슷하다.
세자의 공적 영역 언행들, 사관들 앞에서 한 말들을 발췌해 담고 있다.
게다가 《조선왕조실록》처럼 앞뒤 맥락을 부연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도 별로 없다.
마치 그날의 의무처럼, 날씨, 왕의 위치, 공식 행사등 정해진 주제에 대해
간략한 메모들만 나열해 놓기 때문에, 수백년 후 현대인이 자의적인 해석으로 맥락을 창조하다 보면 오히려 본질이 산으로 갈 위험도 있다.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서 나온 소현세자의 인성이나 성향에 대한 총평,
즉, 당대 사람들이 바라본 소현세자의 총체적인 인상이,
당연히 사료들을 해석하는 참고자료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 그와 동시대 사람들이
소현세자가 심약하거나 병약해서 국본(왕세자) 노릇하는데 지장이 있을까 걱정된단 식으로 보는 시선은 없다.
또한 소현세자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그의 졸기를 보건대,
머리는 좋지만 낯을 가리는 성격이었다.
특히 조선 사회의 주류층인 성리학자들과 거리를 뒀던 듯,
코드가 맞는 사람하고만 어울린다는 식으로 비판받았다.
그런데 실록에 따르면, 소현세자와 코드가 맞는 이들은 무인들 및 노비들이었다.
하지만 그 방대한 《동궁일기》나 《심양일기》의 화자들은 정통 성리학자인 사관이나 시강원 스승들이었다. 그들이 자신들과 정서적으로 거리를 두고, 필요한 말만 했을 소현세자의 속내나 실체를 온전히 파악했다고 보긴 어려워 보인다.
소현세자가 사관들에게 말을 아끼고 거리를 두는 성향은 볼모 생활 때만 나타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동궁일기》를 보면, 어린 소현세자는 성리학 교재를 반복 암기시키며 강압적으로 다그치는 스승들을 버거워했으며,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동공 대지진이 일어나거나 구토를 하는 정서 불안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사도세자처럼 막 갔다는 이야긴 아니다.
결국 소현세자는 스승들의 가르침을 어떻게든 따르며 훌륭한 국본(왕세자)으로 거듭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소현세자가 강압적인 스승들 앞에서
자신의 모든 생각을 편하게 털어놓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예컨대 《동궁일기》나 《심양일기》만 읽다 보면, 소현세자는 평생 강빈과 감정적인 교류가 거의 없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사관들이 그런 건 기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소현세자와 강빈이 1년에 손 꼽을 정도로만 말을 섞다가,
어쩌다 잠만 한번 자면 바로 아이가 떡 생겨버리는 이미지도 가능하다.
더군다나 《심양일기》는 소현세자의 눈병이나 감기에 대한 기록은 남겨도,
자녀 출생은 일절 기록하지 않는 바람에 《심양일기》만 보면
대체 군주와 왕손들이 어디서 왔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두 사람의 좋은 금슬은 《조선왕조실록》에 남겨진 일련의 기록과,
그들이 자식을 만든 숫자와 타이밍에서 유추된다.
《심양일기》나 《동궁일기》가 소현세자의 전부라고 여기다 보면, 아담 샬의 회고 같은,
소현세자의 개인 생각이 드러난 희귀한 자료는 어떻게든 허구로 몰아붙이거나 평가절하할 수밖에 없다. 《심양일기》만 보면 소현세자는 가톨릭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소현세자가 가톨릭을 처음 접했으리라 추정하는 북경에서의 70여 일 간,
《심양일기》는 쓰이지 않았다.
한편 소현세자와 강빈의 황무지 개척 사업은,
조선의 전통 농업 경영 방식이 청나라에서 대박을 낸 케이스이다.
청나라는 1641년(인조 19년) 12월부터, 심양관에 별도의 정착 비용을 지급하는 대신
토지를 주어, 심양관 식구들이 농사로 자급자족하게 했다.
사실 많은 대신들이 여기서 농사를 지으면
두 번 다시 고향에 못 돌아가리라 생각해 반대했지만,
강빈은 황무지 경영에 찬성하고 적극 주도했다.
사실 강빈의 황무지 경영은 사대부 여인들의 경제관리능력 중 하나였다.
당대의 사대부 안주인들은 집안 살림은 물론 인력 고용과 품삯 지불 등 자산 운용과 경영에도 참여했다. 따라서 황무지 경영 능력을 만약 강빈만이 가지고 있었던 탁월한 능력이라고까지 해석한다면 분명 과장이다. 하지만 강빈의 능력을 심하게 과대평가하는 시각도,
애초에 그런 암담한 상황에서 황무지 개척을 시작한 차기 국모의 적절한 결단력을 좋게
보고, 실제로 부가 축적되어간 속도를 보고 놀라는 것이지,
무슨 조선시대 여자가 농사 스킬이 있느냐고 놀랄 정도로 무지한 게 아니다.
게다가 생산을 관리하는 게 주로 사내들의 영역에 해당하고,
안주인은 곳간 살림 같은 소비의 영역을 관리하는 것으로 나누어지는 게 전형적인 사대부의 패턴이었다면, 강빈은 직접 사내의 영역인 생산 영역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남자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사관 보고서에 손을 대는 바람에,
나중에 인조에게 꼬투리를 잡히게 된다.
또 하나의 특징은 이렇게 황무지를 경영하는 과정에서 조선인 포로들을 구출해 썼다는 점이다. 순전히 백성들을 구출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된 이 활동 역시,
나중에 인조에게 사병이라도 기르는 거 아니냔 의심과 미움의 구실이 된다.
《심양일기》, 《동궁일기》, 《승정원일기》가 사료로서 낸 성과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상술했듯, 소현세자의 죽음이 기존의 인식대로의 독살이 아닌 병사의 가능성이
강하게 제기되었다는 것. 두 번째는, 병자호란 이전 소현세자와 강빈 사이에 아이가 원손 하나가 아니고 셋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다만, 심양 생활이 길어지면서 소현세자가 골골거렸다는 주장은, 소현세자의 질병 사망설만 진실로 확증하고 타살설을 원천 부정하는 주장의 확증 편향으로 보인다.
《승정원일기》나 《심양일기》의 소현세자 진료 기록들이,
여러 논문들에서 적극 인용된 건 사실이지만,
이는 죽음의 진상 규명을 위한 심층적인 추적이었지,
소현세자를 허약체질 병약자로 몰아가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다.
앞의 두 사료에 더해, 《조선왕조실록》 기록까지 합치면,
소현세자는 볼모 시절 후기, 유목민처럼 말을 좋아하고 무인들과 노비들과 어울리며 사관들에게 까이는, 허약체질 환자하곤 거리가 멀어보이는 생활을 영위중이다.
게다가 심양관 생활이 후기로 갈수록, 현대의 대박난 사업가 마냥 생활은 여유로워지며,
소현세자와 강빈 사이에서는 금슬이 좋던지 아이들이 더 자주, 많이 태어나게 되었다.
사실 조선왕조에서 왕-세자간의 패륜적 갈등, 혹은 숙청에 준하는
현대인들의 흥미를 끌거나 감정 이입을 유발하는 사건들은 비일비재했다.
후계 문제를 둘러싼 선조와 광해군간의 정치적 대립이 그러했고,
영조가 학대 끝에 정신병자 살인마가 된 사도세자를 숙청한 일이 그와 같다.
하지만 최근 나름의 다채로운 해석이 이루어지거나 사건의 진상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광해군이나 사도세자의 케이스와 달리
소현세자의 케이스는 인조의 일방적 잔혹함만으로 알려지는 경향이 있는데,
인조는 역사적인 사례를 돌이켜보아도, 개인적인 정권 유지를 위해서도
소현세자에게 심대한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전후 상황이었다.
고려의 원 간섭기때 원나라의 영향으로 왕과 세자가 서로 파벌을 이루어 대립하던 경우나, 반원정책을 펴는 공민왕을 견제하기 위해 원나라에서 덕흥군을 왕으로 앉히려 한 것과 같이 중국이 왕위를 주장할 권리가 있는 왕족을 내세워 정권을 갈아치우려 한 전례가 있었다. 비 한족 계열 중원 제국에게 국권을 침해당한 조선의 군주 입장에서는 중국의 동향에 정국이 요동치거나 최악의 경우 중국의 황제가 군주를 다른 왕족으로 대신하려 들던 공포스러운 과거사를 상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청태종이 친서를 통해 직접적으로 유사시에 소현세자를 인조의 대체재로 삼을 가능성을 언급하며 은근한 위협을 가했고, 소현세자가 죽자 그 아들까지 확보하려 했던 것이 현실이어서 실록의 기술처럼 소현세자나 그 혈통의 말로가 좋지 않게 끝날 것이라는 건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던 결과였다.
이런 상황에서 귀국한 소현세자가 독살되고 가족들까지 연이어 살해당한 것은
비록 방법이나 과정이 잔혹하지만 인조 개인의 편집증 탓보다는 권력의 생리이며,
한반도에서 이미 수 차례나 벌어졌던 과거사를 돌이켜볼 때
충분히 예상된 비극이었다고까지 할 수 있다.
단지 그 과정에서 보여준 인조의 상상하기 힘든 수준의 패륜적 잔인성이 문제였다.
이것은 충분히 유교를 국시로 하는 국가의 군주로서 심각한 결격사유로 지적받을 수 있는 부분이었고, 사관들까지도 곳곳에서 증거도 없이
아들의 일가를 몰살하려 드는 인조를 힐난했다.
조선의 지배층들은 어디까지나 마키아벨리즘적 왕권 확립보다는 절차적 법질서와 도덕적 흠결 여부를 중시하기에 소현세자의 죽음에 얽힌 수상한 전후 정황과 그 과정에서의
지나친 잔혹성, 강빈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을 부당한 사법살인으로 여겼다.
인조의 목적론과는 별개로 그 과정에서 남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논란거리가 되겠지만 그래도 왕의 뜻을 존중하는 쪽으로 흘러갔을 있다.
그런데 소현세자 일가의 몰락 과정은 어느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였다.
즉 인조가 청나라의 입김을 받은 소현세자 일가를 처리하려고 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그럼 그 과정에서 최소한의 합리성이라도 갖추어야 했는데 인조는 이를 무시했다.
명분이야 민회빈 강씨가 자신을 독살하고 저주하려 했다는 것이지만,
조선 왕조의 기록을 보면 그 주장이 무색하게 만드는 구절이 가득하다.
가령 독살하려고 했다는 대목도 당시 강빈이 감금 중이었으므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후 김홍욱이 강빈의 사면을 청하는 글에서도 이 사건이 강빈의 잘못이라 했는데 당시 강빈의 사정상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저주 문제도 이는 강빈 사후 1년 뒤의 일로서 강빈을 모시던 이들 중 배신한 신생이 주도한 일인다. 정말로 강빈이 인조를 저주했다면 형벌을 따질 필요가 없는 대역죄인이므로 사후가 아니라 생전에 드러내서 강빈 사사의 명분으로 써먹으면 그만이다. 강빈이 죽은 후에야, 그것도 1년씩이나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니 목숨을 걸고 구명이나 복권, 재조사를 호소한 관료층이 나타나고, 점차 소현세자 일가 동정론이나 구명론이 형성되었다.
또한 양란 이후 급격히 교조화된 조선의 성리학적 사회질서에 답답함을 느끼거나
조선의 멸망에 유교가 책임이 있다고 보는 현대의 대중들의 상상력을 서양 문물과 접촉하고 다양한 경험을 했던 소현세자가 꾸준히 자극하는 바도 동정론에 기여한다.
고귀한 혈통에, 가혹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성공을 이루어냈고,
어떤 도덕적 결함을 보이거나 실책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분투했음에도 어디까지나 자신들과 관계 없는 주변의 정황 때문에 참혹한 운명을 맞이한 사람들을 대중이 영웅시하거나 동정함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흥미롭게도, 민담이나 야사에서는 소현세자에 대해 나쁜 이미지가 많다.
숙종 대에 손처경이라는 사이비 교주가
소현세자의 유복자라고 사칭하다가 덜미를 잡혀 참수형을 당했다.
사실 손처경도 뜬금없는 짓을 벌인 건 아니고 제자인 묘향으로부터 소현세자의 유복자 소문을 듣고 이에 편승한 것이다.
또 효종의 사위 정재륜이 지은 《공사견문록》과 조선 후기 야담을 집대성한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소현세자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야사들로 가득하다.
세조 때부터 동정론이 돌았던 단종이나 무속에서 뒤주대왕으로 받들어진 사도세자와
달리 소현세자는 민간의 동정을 샀다 볼 만한 흔적이 없으며, 아둔하거나 난폭한 이미지로 묘사되어 거의 실제 역사상의 양녕대군을 방불케 한다. 예를 들어 본다.
이중 1번은 강빈의 가례에 관련된 기술에도 나와 있듯, 야사가 아니고 진실일지도 모른다. 다만 이는 소현세자 본인의 매력이나 인성 문제이기보단, 당시 '인조의 큰아들'이 혼인 상대로서 인기가 없었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날 왕자 공주와 결혼한다는 이미지와 달리, 조선시대 왕실 간택시 단자를 기꺼이 내고자 하는 사대부는 별로 없었다. 왕실 인척은 도리어 출세에 제약을 받는 경우가 많고, 까딱하면 강빈 집안이 그러했듯, 본인 처신과 무관하게 친정 집안이 파멸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소현세자가 가례를 올릴 무렵, 인조는 여러모로 불안정해 보이는 왕이었다.
본인이 직접 일으킨 반정으로 집권하며 창덕궁 태워먹었지, 이듬해 반정 공신 이괄에게 뒤통수 맞고 창경궁까지 태워먹지, 그 다음다음 해에는 오랑캐가 쳐들어와 본인은 강화도로, 세자는 전주로 피난을 갔다. 이래저래 정통성도 체통도 안정성도 떨어져 보이는 불안한 왕실에 기꺼이 제 딸을 주고자 하는 사대부는 드물었을 것이다.
2번은 흥미롭게도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계몽군주의 씨앗을 가진 소현세자 이미지와도 겹쳐 보인다. 악의적으로 보면 저 모습은 게으르고 물욕이 있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소현세자가 줄곧 유교 가르침에 회의를 느끼다가 경연을 소홀히 하며 신문물,
혹은 실용적인 부 축적에 관심을 두는 모습이,
못마땅해 하던 이들 눈에 저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3번 역시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소현세자 이미지와 겹쳐보인다.
기술자가 아부를 해서 관직을 제수한 걸까?
아니면 기술자를 장인이라고 딱히 천시하지 않아서 관직을 제수하고 싶어한 걸까?
4번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일인데, 최소한 《심양일기》나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소현세자의 모습- 자제력이 뛰어났다거나, 외교 업무를 현명하게 수행한다거나,
온화한 성품으로 가마꾼들의 노고까지 세심하게 신경썼다거나,
남한산성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스스로 인질이 되겠다 자청했다거나,
봉림대군이 효종이 된 후 제 형을 강빈과 세트로 묶어 겁나 까면서도 '형이 성품은 착했지만'이라고 말하는 이미지와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 실록 기록을 근거로 소현세자가 천주교인이었다면
강빈이 무당의 말을 따를 이유가 없었다고 해석하는 의견이 있으나 저 실록 기록만 가지고 소현세자가 천주교와 무관했다고 단정하기엔 설득력이 떨어진다.
일단 이것은 소현세자가 죽고 정치적으로 숙청당하던 과정에 있던 강빈이 불안한 상황에서 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록 자체가 어떻게든 강빈을 사치하고 무당을 맹신하는 어리석은 여인으로 몰아가기 위한 악의적인 내용일 수 있는데,
실록 전체를 보면 애란이 인조에게 국문받은 이유가 좀 애매하다.
무당의 말을 곧이곧대로 강빈에게 전달해서인지, 아니면 무당과 손잡고 강빈이 내다버린 금수(錦繡)에 저주를 걸어 소용 조씨를 아프게 했다는 이유로 국문받은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저 일로 피해를 본 건, 본래 소용 조씨의 사람임에도 강빈을 더 좋아하게 된 바람에 소용 조씨의 눈밖에 난 애란 하나였다.
게다가 소현세자와 강빈은 천주교 교리를 제대로 배우거나 영세를 받은 것도 아닌,
이제 막 신앙에 대해 겉핥기로 배운 사람들이었다.
강빈은 당시 왕실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청나라에 볼모로 가기 전부터 습관적으로 민간 신앙에 잘 의존했으며 실제로 강빈의 언행을 보면 평소에도 소소한 미신을 잘 믿었다.
또다른 가능성은 여기서 말하는 금수가 실제로는 비단 따위가 아니라
성화 등의 천주교 성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천주교 성물을 갖고 있는 것이 또다른 정치적 공격의 빌미가 될 까봐 없애버린 것을 소용 조씨 측에서 어떻게 알아내어 오랑캐 사치품이라고 인조에게 모함했을 가능성도 고려해봐야 한다.
아무튼, 민담이나 야사에서 드러나는 소현세자의 나쁜 이미지는,
청나라 혐오가 고조된 사회에서, 대청 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룬 소현세자의 행보에 대한
당대인들의 몰이해와 반감에 효종·현종·숙종으로 내려오는 삼종혈맥의 왕실 라인에서 문제가 된 정통성까지 더해졌기 때문에 견제를 샀기 때문으로 해석가능하다.
실제로 《공사견문록》을 지은 사람은 다름아닌 효종의 사위였다.
그는 소현세자가 죽고 그 아들들이 죄인 자식이 된 덕에,
자신은 공주 아내를 얻어 창경궁에 별장까지 얻어 잘 살 수 있었다.
따라서 그로선 소현세자의 평판을 망칠,
즉 왕이 될 깜이 못되었다고 이미지가 망가지길 원하는 충분한 동기가 있었다.
요컨대, 소현세자에 대해 오늘날 대중이 가진 좋은 이미지가 허구이고,
민담이나 야사에 드러나는 이미지가 진실,
혹은 소현세자에 대한 나쁜 이미지와 반전을 열망하는 이들을 위한
새로운 대안이라는 근거는, 아직까지는 희박하거나 쌩뚱맞은 거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