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사랑시에 열광하는가?
엄경희(문학평론가, 숭실대 교수)
언제부터 사랑이라는 감정 혹은 관념이 시작된 것일까? 아마도 인간이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기 시작한 때부터 사랑은 문제적인 것이 되었을 것이다. 나와 다른 한 존재를 갈망하고 그리워하고 기다리고 때로 그 존재를 잊으려 애쓰는 과정, 타인을 향한 육체적 충동으로 괴로워하며 모든 감각을 무방비 상태로 방출하고 싶은 욕망, 이 모든 알 수 없는 존재의 사태에 휘말린 자는 한동안 자신을 통제할 힘을 잃게 되며 자신의 의지와 자유를 의심할 겨를 없이 <너>에게 헌신한다. 이때 사랑에 빠진 <나>는 <너>의 가치를 끊임없이 시적인 언어로 칭송한다. 굳이 시적인 언어라고 말하는 이유는 연인들의 비밀스러운 대화가 근본적으로 비일상적 미감을 좇기 때문이다. 되도록 상대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기 위해 연인들은 노력한다. 분별력과 판단력을 잃지 않은 사람에게 사랑에 몰입된 연인들의 언어가 이질감을 주거나 간혹 견딜 수 없이 유치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연인들은 객관 세계를 벗어나 자신들의 교감만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성채를 짓는 신비한 활동 가운데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여기에 있지만 여기와는 전혀 다른 눈짓과 언어와 육체의 세계를 탐닉한다. 칭송을 교환하는 일이 계속되고 사랑받는 자는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존재성을 인정받으며 그것이 거짓이든 진실이든 상관하지 않은 채 칭송의 떨림을 만끽한다. 이같은 존재의 상태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사건이 사랑이다. 사람들이 지치지 않고 사랑을 갈망하는 까닭은 사랑을 통해 최초로 자신이 미적인 대상이 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너>를 사랑하는 일이 곧 <나>의 아름다운 가치를 사랑하는 일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 인류가 영원한 사랑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담론화했던 것은 이 소중한 순간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진 역설이다. 타인에 대한 열정과 자신의 비밀한 가치의 확인을 계속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 그러한 과정은 다시 권태로운 반복이 되고 연인들은 자신들의 시들함을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한다. <나>와 <너>의 흐릿했던 구분점이 점차 선명해지기 시작하면서 연인들은 이제 시인의 상태에서 철학자의 상태로 내면을 옮긴다. 그들은 질문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예전의 그 감정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어떻게 완전히 나를 잊을 수 있었나?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왜 이렇게 다른가? <너>는 누군가? 진실은 무엇인가? 왜 모든 것을 탕진한 기분이지?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한 걸까? 왜 일상은 무미건조하기만 한 걸까?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등등. 사랑을 잃은 연인들은 빠르게 일상으로 복귀하지 못한다.
사랑의 가치는 한 존재가 자신을 망각한 채 타인에게 전폭적으로 헌신하는 그 도취적 아름다움에만 있지 않다. 사랑은 타자에 대한 사유를 가장 집중적으로 하게 하는 인생의 사태이다. 그것은 집중화된 광기의 시간이다. 사랑이 끝났다고 생각되는 그 허탈한 순간조차 상대에 대한 생강은 집요하게 이어진다. 이러한 생각들은 너와 나의 관계, 나아가서 인생을 진지하게 묻게 하는 통로가 된다. 깊은 사랑을 경험한 자는 그것을 경험하지 않은 자와 다른 내면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는 이전의 그가 이미 아닌 것이다. 그는 생의 아름다움과 상처를 동시에 내면화하고 막막하게 펼쳐진 일상으로 되돌아와야 하는 쓸쓸함 속에서 휘청거린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한 것이 사랑의 가치이다.
이 같은 사랑의 상승과 하강의 곡선은 마약처럼 또 다시 사람들을 유혹한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그 알 수 없는 감정 속에서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다시는 반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절체절명의 사랑을 우리가 또 다시 갈망하다니! 인간의 진화를 불식시키는 이 같은 행위에는 인간의 본질적 국면이 내포되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외롭기 때문이다. 개체의 고독을 가장 확실하게 넘어서게 하고 가장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것이 사랑의 양가성이다. 사랑은 외로움을 잠재우고 반대로 증폭시키는 역설을 내포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과 외로움은 한몸의 쌍생아다. 인간에겐 사랑만큼 고독을 추구하는 마음도 있다는 사실. 사랑은 고독을 가장 깊에 알게 하는 매개이다. 누군가를 절박하게 사랑하다 무참히 버려지는 환상을 꿈꾸기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편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환멸이다. 아름다움이 환멸로 돌아섰을 때, 그 상처가 지나치게 깊게 새겨진 자는 더 이상 사랑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모두가 사랑을 갈망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사랑은 자유의지를 빼앗고 사람을 수동화한다. 연인들은 상대와의 동일화를 추구함으로써 <너>와 <나>의 고유성을 포기한 채 공동으로 제삼의 존재 상태를 고수하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나>라는 주체를 빼앗기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식이 강해지면 매번 동일하게 전개되는 사랑의 상승과 하강의 시나리오를 거부하거나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사랑을 거부하는 자에게 사랑은 낭비이거나 부질없는 환상일 뿐이다. 이 또한 사랑에 대한 하나의 태도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은 여전히 사랑을 원한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쓰디쓴 고통일지라도.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는 『사랑의 단상』에서 <너>의 부재가 안겨주는 고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떠나는 것은 그 사람이고 남아 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 사람은 끊임없는 출발, 여행의 상태에 있다.
그의 천직은 철새, 사라지는 자이다. 그런데 사랑하고 있는 나, 나의 천직은 그 반대로 칩거자. 그 사람
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는 미결상태로 앉아 있는, 마치 역 한구석에 내평개쳐진 수
화물마냥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는 그런 사람이다. 사랑의 부재는 일방통행이다.(……) 가끔 부재를 잘
견디어낼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정상적>인 사람이 된다. '소중한 이'의 떠남을 감수하는 <모든 사람>
의 대열에 끼게 되는 것이다. (……) 이 잘 견디어낸 부재, 그것은 망각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간헐적으로 불충실한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망각하지 않는다면
죽을 것이기에. 가끔 망각하지 않는 연인은 지나침, 피로, 기억의 긴장으로 죽어간다(베르테르처럼).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은 <젊은 베르테르>의 절박한 심경을 바탕으로 한 사랑에 관한 에세이다. 사랑에 빠진 자의 고통과 기쁨, 슬픔, 충동, 후회, 미움 등을 이처럼 잘 해명한 철학적 저술도 드물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 학생들에게 나는 언제나 이 감동적인 에세이를 권하곤 한다. 위에 인용한 부분은 연인의 부재를 견디는 자의 외로움과 고통을 설명한 대목이다. 바르트는 <가끔 망각하지 않는 연인은 지나침, 피로, 기억의 긴장으로 죽어간다>고 말한다. 망각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는 강렬한 끌림이 사랑이다. 그러니 사랑을 <늪>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늪은 우리를 끌어당긴다. 운명적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자는 사랑의 늪에 빠진 사람이다. 불가항력적 끌림은 사랑의 비밀한 힘이다. 사람들이 사랑에 관한 이야기에 지치지 않고 귀 기울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랑시에 열광하는 이유 또한 이 불가항력적 끌림을 확인하고픈 욕망 때문이다. 이때 인생은 더 이상 시시하지 않다.
우리 시의 역사를 보면 수많은 사랑시가 유산으로 남아 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한용운의 「님의 침묵」, 백석의「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서정주의 「新綠」, 윤동주의 「사랑의 殿堂」, 박목월의 「이별가」, 오규원의 「한 잎의 女子」, 정현종의 「그 여자의 울음은 내 귀를 지나서도 변함없이 울음의 왕국에 있다」, 기형도의 「빈집」, 허수경의 「폐병쟁이 내 사내」, 장석남의 「묵집에서」등등. 대부분의 사랑시에는 슬픔과 아름다움이 겹쳐 있다. 고약하게도 기쁨보다 슬픔이 겹쳐질 때 아름다움의 호소력은 강화된다. 사람들은 사랑의 기쁨보다 사랑의 슬픔에 더 끌린다. 쓸쓸함과 애잔함과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물든 서정을 확인할 때 감동이 더 커지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의 요소가 기쁨보다 더 보편적 지속성을 갖기 때문이다. 사랑시의 위력은 이 같은 보편성을 실감나게 관통할 때 발휘된다.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 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채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 박정대, 「음악들」전문(『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민음사, 2001)
우리가 몽상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빛깔은 어떤 것일까? 이 시의 화자는 청춘의 한때를 회상하는 자이다. 그의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린다. 적막하게 하얀 눈이 쌓여가는 밤 그의 돛배는 사랑의 기억을 따라 출항한다. <청춘의 격렬비열도>로 상징되는 이 섬의 공간은 세속을 차단한 아름다운 고립의 장소이다. 거기 <너>를 껴안고 잠든 불멸의 밤이 있다. 겨울 벌판의 쓸쓸한 바람소리를 듣기도 했던 그곳에는 아직 <몇 방울의 음악들>이 눈발로 내린다. 불면의 밤을 지나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그는 이러한 청춘의 사랑을 애잔하게 바라보다 그 끝에서 잠들 것이다. 사람들은 이 같은 아름다운 사랑의 기억을 갖고 싶어 한다. 아름다운 기억과 추억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다. 우리의 현존을 풍부하게 하기 때문이다.
山 보네 山 보네 밤낮 山 보네.
그대와 나 둘이서 바래 보기면
번갈아 보며 보며 쉬기도 할걸
그대 길이 잠드로 나 홀로 깨여
山 보네 山 보네 두 몫 山 보네
그대와 나 둘이서 맞추었던 눈
기왕이면 끝까지 버틸 일이지
무엇하러 지긋이 감고 마는가.
그대 감은 눈 우에 청청히 솟는 山
山 보네 나 혼자 두 몫 山 보네.
- 서정주, 「山査꽃」전문(『미당 서정주 시전집 1』,민음사, 1983)
위에 인용한 작품은 우리의 사랑시 가운데 백미로 꼽을만한 숨어 있는 수작이다. 박정대의 작품이 청춘의 사랑을 노래한 시라면 미당의 「山査꽃」은 지긋한 나이에 이르러 경험할 수 있는 사랑의 아픔을 노래한 시이다. 이 시는 미당이 이순의 나이에 접어들 무렵에 쓴 시이다. 님의 부재를 이 시만큼 절실하게 표현한 작품도 드물다. 사랑하는 사람을 저승으로 보내고 홀로 청청히 솟은 산을 바라보는 쓸쓸한 시모히를 이 시의 화자는 <山 보네 山 보네 두 몫 山 보네> <山 보네 나 혼자 두 몫 山 보네.>라고 고백한다. 두 몫을 보다니! 함께 바라보았던 그 눈빛의 빈자리를 이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 감은 눈 우에 청청히 솟는 山>에서 보이는 잦아듦과 솟아오름의 대비를 통해 우리는 이 화자의 서러움의 수직적 깊이에 공감하게 된다. 청청히 솟는 산의 여전한 생명감이 소멸의 아픔을 더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 『현대시학』2010.10월호 '엄경희의 경험의 시학' 중에서 발췌

* 엄경희 : 1963년 서울 출생. 200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저서로 『빙벽의 언어』『미당과 목월의 시적 상상력』『질주와 산책』『저녁과 아침 사이 시가 있었다』『숨은 꿈』『한국시의 미학적 패러다임과 시학적 전통』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