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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산아동문학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문홍
영화 에세이 (8) |
현대인의 이기심과 편견에 대한 블랙코미디
루벤 외스트룬드의 <더 스퀘어>
신뢰와 배려가 사라진 현대사회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이 현대사회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은 불가사의한 영역이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은 모두가 이중성을 처세의 수단으로 삼는다. 내 앞에 앉아서 웃고 있는 저 사람은 정말 속도 웃고 있는 것일까. 겉은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울거나 분노하고 있을지 모른다.
또한 현대는 불신시대이다. 신뢰가 사라진지 이미 오래이다. 섣불리 믿었다간 내가 손해를 보기 때문에 쉽사리 믿으려들지 않는다. 그리고 타인을 위한 배려는 찾아보기 어렵다. 모두 다 잇속을 챙기려 하기 때문에 신뢰와 배려로서의 타인에 대한 예의는 기대하기 어렵다. 타인의 일에 휘말려들지 않으려 하고, 모든 것은 이기심의 차원에서만 고려할 뿐이다.
실존주의 문학가 싸르트르는 일찍이 ‘타인은 지옥’이라고 했다. 내 자신도 믿을 수 없는데 어떻게 타인을 믿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는 이미 신뢰와 배려가 사라진지 오래이다.
스웨덴의 신예 감독 루벤 외스트룬드가 연출한 〈더 스퀘어〉(2017, 151분)는 현대사회와 현대인의 속성에 대한 일종의 사회학적 임상 보고서에 가깝다. 현대인의 속성에 대한 야유와 풍자로서의 블랙코미디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영화를 보내 내내 마치 감추어 두었던 자신의 민낯을 보는 것 같아 몹시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어떤 인물을 중심으로 한 메인 플롯으로 전개된다기보다는, 서브플롯으로서의 현대인의 이기심과 편견에 관한 에피소드로 점철되어 있는 일종의 사회학적 리포트를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2017년 제70회 칸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여, 그다지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던 스웨덴의 신예감독인 루벤 외스트룬드는 부러움과 찬사로 집중 조명을 받았다. 루벤 외스트룬드 감독은 전작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으로 제67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심사위원상을 수상한데 이어, <더 스퀘어>로 두 번째 칸영화제의 트로피를 거머쥐며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들어섰다. 이 작품은 제70회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추가로 뒤늦게 초청되었는데, 몇몇 거장들의 작품을 따돌리고 최우수 작품상의 영예를 안았으니 그는 분명 기린아이다.
이 작품은 스웨덴 스톡홀름의 현대미술관 수석 큐레이터인 크리스티안(클라에스 방 분)의 지리멸렬한 일상을 중심으로, 미술관 전시기획과 개인적 일상을 중심으로 한 에피소드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크리스티안의 허위와 위선의 일상은 곧 현대인의 이기심과 편견을 은유하고 상징하는 것이다. 배경적 공간 역시 현대미술관 전시실이나 사무실, 그리고 그의 집과 거리에 국한되어 있다.
영화의 제명은 현대미술관이 야심차게 전시 기획하고 있는 프로젝트인 ‘더 스퀘어’에서 따온 것으로, 그 프로젝트의 의도는 “스퀘어는 신뢰와 배려의 성역이다. 이 안에서는 모두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라는 목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바로 이 전시 목표에 어긋나는 현대인의 이기심과 편견에 초점을 두고 있다.
편견은 자존심을 멍들게 한다
이 영화의 서두 부분은 인간의 편견에 대한 일종의 기폭제이다. 크리스티안은 출근길에 황당한 사건을 접하게 된다. 웬 여인이 남자에게 쫓기며 구조를 요청한다. 지나치는 행인들은 오불관언의 이기심으로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그는 웬 중년남자와 함께 여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그런데 그것은 일종의 사기 행각이었다. 두 남자가 쫓아오는 사내를 저지하는 사이에 여자는 크리스티안의 지갑과 핸드폰을 소매치기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선의의 행동이 악재를 만난 것이다.
크리스티안은 핸드폰의 위치 추적으로 한 아파트를 찾아낸다. 그는 부하 직원의 제안으로 협박 편지를 써서 아파트 편지함 투입구에 집어넣는다. 그런데 그는 얼마 후에 적수와 맞닥뜨린다. 웬 소년이 그를 느닷없이 찾아와 자신의 가족에게 사과하라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깽판을 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자신이 부모에게 죄인으로 지목되어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다.
크리스티안은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그를 돌려보내려 하지만 소년은 막무가내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크리스티안은 두 딸을 데리고 소년의 아파트를 찾아 수소문해 보지만, 이웃 남자는 아마 그 소년이 이사했을지도 모른다고 대꾸한다. 크리스티안이 그 아파트를 지목하여 협박 편지를 보낸 것은 그의 편견 때문이다. 그러한 편견 때문에 약자인 그들은 인간적 모멸감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게 된 것이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발 속에서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소년의 집 주소가 적힌 쪽지를 찾는 크리스티안의 남루한 모습, 소년에게 보내는 사과 메시지를 녹음하는 장면, 두 딸과 함께 소년이 있는 아파트의 계단을 오르는 크리스티안의 모습은 이기적인 편견의 굴레를 벗어나 도덕적 각성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크리스티안의 윤리적 태도를 선명하게 각인시키는 장면들이다. 또한 크리스티안의 귀에 연이어 들려오는 “도와줘요.”라는 정체불명의 소리는, 이기심의 편견에 사로잡혀 ‘지금 이곳’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무감각한 도덕성을 일깨우는 양심의 소리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더 스퀘어’ 전시 기획의 유투브 광고로 인한 파문이다. 전시 기획팀 멤버들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광고 아이디어로 영상을 제작한다. 누더기를 걸친 금발의 소녀가 스퀘어의 사각형 공간으로 진입하는 순간 “얼마나 잔인한 일이 벌어져야 인류애가 발휘될 것인가?”라는 선정적인 문구와 함께 소녀의 형체는 폭발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영상을 내보낸다. 결국은 사회적 약자를 광고에 활용했다는 비난 여론으로 크리스티안은 기자회견을 통해 사의를 표명하기에 이른다. 이는 자신들의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업의 비윤리적 행태에 대한 상징적 은유이다.
선정적인 광고로 인한 책임을 통감하고 사과하는 기자회견장에서 한 여자가 크리스티안에게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라고 질책하는 장면, 또한 한 남자가 표현의 자유를 거론하며 반론을 제기하자 크리스티안이 거기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응수하는 장면 등은 편견에 의한 현대인의 이기심을 상징적으로 은유하고 있는 대목이다.
주체적 자기 결정 없이 부화뇌동하는 현대인
이 영화는 현대인의 이율배반적인 속성을 경쾌한 터치로 풍자하고 아유한다. 전시 기획을 설명하고 난 뒤에 크리스티안이, 다음에는 요리사가 식사 메뉴에 대해 설명할 것이라고 말한다. 요리사가 몇몇 음식을 열거하기가 무섭게 모인 사람들이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우루루 몰려가기 시작한다. 요리사가 냅다 고함을 내지르며 요리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은 희화적 풍자이다.
백화점에서 크리스티안은 인파에 밀려 그만 두 딸을 놓쳐 버리고 만다. 그는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그들은 일언반구도 없다. 그러자 크리스티안은 엎드려 구걸하는 걸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런데 그 걸인은 조금 전에 크리스티안에게 현금이 없다고 배척당한 바로 그 사내이다. 자신이 도움을 외면하고 거절했던 사람에게 다시 도움을 청하는 아이러니컬한 장면 역시 인간의 이기심과 무관심에 대한 역설적 풍자이다.
전시 작가로부터 작품 설명을 듣는 장면은 현대예술에 대한 야유로 일관한다. 담당자가 전시 작가에게 질문을 할 때마다 관중석에서 듣기 거북한 성적인 욕설이 튀어나온다. 틱 장애가 있는 남자는 성적인 모욕감을 내비치는 욕설을 거침없이 내뱉으며 인터뷰를 방해한다. 그는 말끝마다 ‘쓰레기’, ‘좆 염병할’, ‘젖을 보여줘’ 등 듣기 거북한 욕설로 인터뷰를 방해하고 말을 끊는다. 이는 곧 그 난해함으로 관객들에게 유리된 현대예술에 오만한 태도에 대한 역설적인 풍자이며 야유이다.
후반부의 퍼포먼스도 현대인의 부화뇌동을 상징한다. 유인원 역할을 맡은 한 사내가 등장하여 앉아 있는 관중석을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으르렁거리거나 괴성을 질러대며 관중을 위협하거나 장난을 걸기도 한다. 그런데 자신의 역할에 너무 몰입된 유인원 사내는 여자를 바닥에 드러눕혀 폭행하려고 한다. 여자의 비명소리를 듣고 한 중년의 남자가 부리나케 달려와 이를 제지한다. 그러자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남자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유인원 사내를 폭행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장면은 정작 위기의 순간에는 이기심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 한 사람의 행동에 주체적 자기 결정 없이 부화뇌동하는 현대의 군중심리를 야유하고 풍자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믿지 못하는 현대인의 왜곡된 사랑에 대한 은유도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크리스티안을 인터뷰한 방송 기자는 어느 날의 파티 후에 크리스티안과 자신의 집에서 몸을 섞는다. 얼마 후에 방송기자는 느닷없이 미술관으로 크리스티안을 찾아와 재우쳐 묻기 시작한다.
“당신이 날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날 당신이 내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난 당신이 좋다. 그런데 당신은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날 유혹한 것은 아닌가?”
“내 이름을 알고 있기는 한가? 내 이름이 뭔지 아는가?”
그러자 크리스티안은 ‘앤’이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곧 사랑을 하고서도 그 사랑을 믿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는 현대인의 왜곡된 사랑의 풍속도를 희화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것임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 혹시 우리는 편견에 사로잡혀, 아니면 이기심에 눈이 어두워 내 앞의 사람들의 실체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부화뇌동하지 않고 자신의 주체적 결정에 의해 매번 행동했는가? 신뢰와 배려로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 했는가? 아무런 선입견 없이 사랑한 적이 있는가? 자신의 편견으로 사회적 약자의 자존심과 인권을 짓밟은 적은 없었는가?
루벤 외스트룬드의 〈더 스퀘어〉는 이러한 우리의 의문과 회의에 한줄기 시원한 바람을 보내고 있다. 앞만 보고 내달리는 우리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 뒤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도 한다. 모든 행동과 의사 결정에는 주체적인 자기 결정의 태도가 뒤따라야 한다고 넌지시 일러주기도 한다. 또한 오직 사랑 그 자체의 본질에만 탐닉하여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가르침을 주기도 한다.
첫댓글 잔돈이 없다고 한 푼도 주지 않았던
걸인에게서 도움을 받다니 아이러니네요.
영화가 시사하는 점이 큽니다.
김문홍 선생님의 평을 보니
이 영화 꼭 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