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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산아동문학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문홍
영화 에세이 (9) |
시계제로의 청춘에 보내는 진혼곡
이창동 감독의 <버닝>
보편적 설득력을 잃은 상징과 비유
청년 실업자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예부터 백성들이 등 따뜻하고 배불러야 호시절이라 불렀고, 또한 그것을 군주의 치적 중 으뜸으로 삼았다. 오죽했으면 가난 구제는 나라도 어려운 일이라고 하지 않던가. 지금 이곳의 우리 청년들은 올바른 직업을 찾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지만, 나라 안팎의 경제 불황으로 그들의 절박한 꿈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비정규직도 수요 공급의 불일치로 경쟁이 치열하다.
우선 먹기가 곶감이라고 그들이 먹고 사는 일에 매달리니 꿈과 비전 같은 형이상학적인 미래적 지평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몸이 영양실조로 부실하니 생각이나 영혼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젊은이들은 이런 현실에 분노하지만 그 대상이 분명하지도 않아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비루한 현실을 견뎌낼 만한 의지와 의욕도 없다. 공격해야 할 대상이 불분명하니 좌절감과 분노가 자신들의 내부로 향할 수밖에 없다. 이창동의 〈버닝〉(2018, 148분)은 그러한 청춘들에 보내는 진혼곡이다.
소설가 출신의 이창동 감독은 과작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데뷔작인 〈초록물고기〉(1997),〈박하사탕〉(1999), 〈오아시스〉(2002), 〈밀양〉(2007), 〈시〉(2010)에 이어 이번의〈버닝〉(2018)까지 20여 년 동안 단 6편의 영화를 연출했을 뿐이다. 평균 3년에서 5년에 1편 꼴로 영화를 만들었으니 보기 드물게 과작이다. 그리고 〈밀양〉(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과 〈버닝〉(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 두 작품을 제외하고는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했다. 그만큼 그는 완벽주의자에 가깝다. 제목 역시 모두 명사인 것도 특징이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영화들이 현실을 반영하는 리얼리즘 형식으로, 인간의 본성과 어두운 사회현실을 정공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작품 〈버닝〉은 리얼리즘 형식이지만 그만의 독창적인 시적인 상징과 비유의 감각적인 연출로 이전의 작품들과 차별성을 보인다.
〈버닝〉은 현실을 부유하는 비루한 청춘을 다루고 있지만, 이창동 나름의 독자적인 비유와 상징이 작품의 곳곳에 매설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비유와 상징이 보편적인 설득력을 잃어 관객의 이해와 공감을 쉽게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이 영화 속의 그것들은 비닐하우스, 우물, 마임, 그레이트 헝거의 춤 등의 이미지로 문학적인 수사에 머물러 관객들의 이해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이 영화는 ‘지금 이곳’을 살아가고 있는 세 젊은이를 주축으로 이야기와 사건이 전개되고 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발표되지 않는 소설을 쓰고 있는 종수(유아인 분), 종수의 초등학교 동창이며 신분상승을 원하는 해미(전종서 분), 부유한 환경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늪처럼 고여 있는 권태와 안락함에 짓눌려 부유하고 있는 벤(스티븐 연 분) 등이 그러한 세 젊은이들이다. 그들 세 사람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시대의 청춘들을 비유하며 상징하고 있지만, 그들의 행위와 정신을 은유하는 오브제와 현상 등이 보편적 의미를 내세우지 못해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이 작품의 한계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적인 비유와 상징을 걷어내면 근육이 없이 골조만 남은 형국으로 이 영화에서 윤기가 사라져 작품으로서의 형태 또한 잃을 수밖에 없다.
예술작품이 독자나 관객의 보편적 이해와 공감을 전제로 하고 창작되거나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는 대중예술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아무리 예술영화라고 해도 관객의 이해와 공감을 도외시할 수는 없다.
시적 상징과 비유의 코드 읽기
이 영화에는 문학적 수사로서의 상징과 비유가 곳곳에 숨겨져 있는데, 그것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인물들의 내면과 행위들의 개연성을 파악할 수 없다. 벤과 종수, 그리고 해미가 종수의 시골 집 마당에서 술을 마시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거기서 벤은 자신은 가끔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토로하는데, 그가 이야기하는 비닐하우스 오브제는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
비닐하우스는 시골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겉과 속은 다르다.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그것은 더욱 그렇다. 겉은 번드르르하게 생겼지만 실상 그 속을 들여다보면 남루하기 그지없다. 여기서의 비닐하우스는 무엇을 상징하고 있으며, 벤은 왜 그것을 태우는 것을 하나의 놀이처럼 즐기고 있는가.
이 작품 속에서의 비닐하우스는 종수, 즉 ‘지금 이곳’을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비루한 청춘들의 무기력한 삶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춘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갖지 못한 채 일상을 비루하게 살아가고 있는 종수의 무기력한 삶을 상징하고 있다. 벤으로 상징되는 있는 자들의 부유하고 안락한 삶에 의해 무기력한 청춘들이 짓밟히고 무시당하는 현실을 빗대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해미가 마약에 취해 나신으로 추는 ‘그레이트 헝거’라는 춤은 그녀의 신분 상승을 은유하고 있다. 해미에게는 먹고 입으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물신주의적 ‘헝거’ 춤은 그녀자신에게는 일종의 멍에일 수밖에 없다. 그녀는 그런 물신적인 춤보다는 보다 높은 꿈으로서의 춤을 통해 자신의 영혼과 정신을 고양하고자 한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거짓이다. 자신의 비루한 삶을 탈피해 벤과 같은 안락한 세계에 편입하고자 갈망하는 것을 ‘그레이트 헝거’ 춤으로 위장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물 역시 마찬가지다. 해미는 어린 시절 우물에 빠진 적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그녀를 종수가 발견하고 구해 주었다는 과거를 이야기한다. 여기서의 우물 역시 그녀의 비루하고 무기력한 현재적 삶을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현재적 삶에서 탈피하여 보다 안락하고 풍요한 삶으로의 편입하고자 하는 그녀의 잠재적 욕망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녀는 가족에게 카드빚이라는 부채를 안기면서도 자신만은 이기적인 신분 상승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녀는 어느 순간에 사라져 버린다. 어떻게 보면 그녀의 그러한 무분별한 욕망이 벤으로 상징되는 부르조아 세계에서 배척되어 존재 자체가 소멸되는 것으로 상징되고 있는 것으로 추론된다.
해미가 살고 있는 어둑한 방은 하루에 한 번 정도만 희미한 빛이 스며드는데, 그녀의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어둑한 방은 곧 무기력하고 비루한 오늘날의 청춘을 상징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종수가 그녀의 방에서 부유한 화려한 삶으로 은유되는 남산 타워를 바라보며 자위행위를 하는 행위 역시, 그러한 안락한 세계에 편입되지 못한 채 부유하는 자신의 눅진한 삶을 자조하고 학대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벤이 살고 있는 빌라는 항상 밝고 화려한 조명에 휩싸여 있는데, 해미와 종수가 살고 있는 곳은 햇볕 한 줌 들지 않고 눅눅하고 음침한 어둠 속에 잠겨 있다. 벤은 비싼 외제 포르쉐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데, 종수는 터덜거리는 소형 트럭을 운전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엔딩 시퀀스에서 종수가 벤을 살해하고 그의 승용차에 불을 지르는 것 역시, 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무기력한 청춘들의 출구 없는 분노와 좌절을 나타내는 은유적 상징일 수 있다. 불붙는 자동차에 옷가지를 던져 넣은 채 알몸이 되는 것도 좌절과 분노의 역설적 표현인 셈이다.
시계제로의 청춘에 띄우는 진혼곡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에서 ‘헛간’이 ‘비닐하우스’로 변형되어 나타나고 있지만, 이 영화는 비루하고 남루한 현실을 통과하는 이 시대 청춘들의 좌절에 관한 기록이다. 벤이 나른하고 권태로운 삶을 극복하기 위해 태우는 비닐하우스는, 벤 자신에게는 아무렇지도 않는 일이 될 수 있지만 종수와 같이 의식 있는 청춘으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고문이며 모욕감이다.
이 영화에서 종수가 불에 탔거나 타고 있는 비닐하우스를 발견하기 위해 내닫는 행위는 어쩌면 있는 자들의 윤택한 삶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적 분노의 표현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어린 종수가 불타는 비닐하우스 안을 기웃거리는 꿈(판타지)은 어쩌면 있는 자들의 세계에 대한 적대감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무기력한 일상을 불태우고 새로운 세계로 발돋움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갈망의 표현일 수도 있다. 엔딩 시퀀스에서 종수가 알몸인 채로 트럭을 운전하며 불타는 벤의 자동차를 스쳐 지나가는 것도, 어떻게 보면 허위와 가식을 벗어던진 채 다시 출발점에 서서 살얼음판 같은 엄혹한 현실을 통과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일 수 있다.
이 영화는 우리 시대의 청춘들에 보내는 기성세대의 참회록이자 그들에 대한 격려의 메시지일 수 있다. 비루하고 고통스러운 청춘의 현실 극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엄혹한 현실을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그 표현 방법이 작가 이창동만의 독자적이고 개성적인 문학적 수사에 치중되어 있는 것은 이 영화의 한계이다. 과연 몇 명의 눈 밝은 관객들이 은밀하게 매설되어 있는 상징과 비유의 기호를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원작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이 묘사하고자 하는 삶에 대한 해석이 우리의 현실과 맞아 떨어지지 않는 현실적 한계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보편화되지 않은 상징과 비유는 아무래도 거슬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엔딩 시퀀스의 상투적 반전은, 마치 그러한 상징과 비유에 대한 해석일 수 있어 너무 작위적이다.
소설가 출신의 이창동 감독은 철저한 리얼리스트이다. 이전의 그의 영화들은 부조리한 현실과 비윤리적인 인간의 속성에 대한 일종의 리포트에 가까웠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제의식의 선명도를 놓치지 않았고, 빈틈없는 골격을 지닌 서사의 얼개에 보편타당한 문학적 수사로 작품에 윤기를 더했다. 그러나 아주 긴 침묵 끝에 내놓은 〈버닝〉은 마치 그의 소설 작품처럼 문학적 수사의 표현을 덧입혀 관객들의 이해와 공감을 얻지 못해 안타깝다.
그러나 시적인 유려한 카메라 워킹과 절묘한 풍광을 잡은 자연 묘사, 그리고 역할 인물의 섬세한 대비를 통한 앙상블, 특히 스티븐 연의 절제 속에 많은 여운을 포함한 연기, 빛의 오묘한 질감을 통한 인물의 내면적 감정의 차별화 등은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훨씬 더 오묘한 세공력을 발휘하고 있어 원숙미를 느끼게 한다.
〈버닝〉은 우리 시대 청춘들에 대한 진혼이자 희망과 격려와 메시지이다. 청춘이란 말은 긍정보다는 부정이 더 어울린다. 독일 낭만주의 시대를 ‘질풍노도’라고 불렀듯이, 지금 이곳 우리의 청춘도 몰아치는 광풍 속을 항해하는 선박과 같다. 청춘, 그것은 희망보다는 좌절이, 가대보다는 실망이, 도약보다는 좌절과 침물 등과 같이 부정적인 수식이 더 어울려 보인다. 장애가 있기에 극복이 가능한 것이며, 멈춤이 있기에 도약이 있을 수 있으며, 좌절이 있기에 희망이 더 가치 있게 보일 수 있다.
한 번 흘러간 물에는 다시 지금의 몸을 담글 수 없으며,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고, 분노와 절망의 대상도 분명하지 않지만, 지금 이 엄혹한 현실에 두 발을 굳건하게 딛고 알몸으로 달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청춘은 더욱 더 값지고 빛나 보이는 것이다.
첫댓글 상징과 은유가 가득한 영화입니다.
요즘 젊은이의 자화상이 비닐하우스로 비유되는 게
가슴아픕니다.
좋은 영화 평 잘 보았습니다.
안목 부족으로 영화를 보는 내내 도대체 무얼 보여주려는 건지 오리무중이었는데, 지금 여기의 청춘이 오리무중 속 비닐하우스였군요. 발가벗겨진 절망하는 청춘의 파국 역시 젊은 초상화였네요. 난국을 명쾌하게 풀어서 보여주시니 고맙습니다!
저도 남촌님하고 비슷했어요. 이 영화가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건지 공감이 안되었는데.. 선생님 글을 보니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술영화는 역시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