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반려식물 >
나라가 온통 시끄럽다. 개 짖는 소리가 들릴 정도다. 어느 동물 보호단체가 개를 안락사 시켜서란다. 반려동물 천만시대에 터져 나오는 아우성이다. 그 반려동물 중에 개가 으뜸이다. 세계적으로 다 공통적인 현상이다. 세계적으로 공통적인 것은 가정에서는 가장(家長)이 반려견보다 훨씬 아래 서열이라는 것이다. 하기야 부모에게도 안 들어주는 애완견 실손보험이 생길 정도다.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던 반려견이 병 들거나 늙거나 치매에 걸리면 유기견이 되기 십상이다. 사랑이 떠났기 때문인가 보다. 요즘에는 사랑도 가성비를 따지는 세태이긴 하다.
하기야 인간사에서 개보다 못한, 개 같은 일들이 왕왕 벌어진다. 사람이 유기견(遺棄犬)이 아니라 유기인(遺棄人)되기도 한다. 외국 여행 가서 거기다 부모를 버리고 오거나 꽃동네 같은 유명한 사회복지시설에 유기하고 온다. 심지어 알랑방귀 끼어서 재산 다 가지고 부모를 홀로 남겨 놓고 외국으로 줄행랑을 치기도 한다. 늙기도 서러워라 커든 버림받기까지 할까.
개인적으로는 제일 더러운 욕은 ‘개새끼, 개년’이 아니라 ‘개만도 못한 연놈’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 욕은 사람도 아니다, 개도 못 된다는 것이다.
사랑도 움직이고 변한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현대사회는 여러 방면에 가성비가 낮거나 떨어지면 과감히 정리되는 사회다. 게다가 AI의 발전은 그런 현상을 더욱 부추길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의사한테 진료를 받을 때, 그 진료실에 비치된 화초에 물을 주지 않아서 시들거나 죽어있으면 그 의사한테 다시는 가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런 의사는 생명을 경시하는 의사라는 것이다. 누가 그랬다. 모든 생물은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이즈음은 가정이나 직장에 한두 개의 화분을 가꾸고 있다. 대개는 취미로 관상식물이나 공기정화 같은 실용적인 화분을 놓아둔다. 더구나 미세먼지 때문에 야단인 지금은 집에서 화초를 기르는 집이 늘어나고 있다. 가정에서 많이 기르는 고무나무, 산세리비아, 행운목, 스킨답서스, 야자나무나 관음죽 등이다. 자그만 다육식물을 기르기도 한다. 그래서 반려동물, 반려석에 이어 ‘반려식물(伴侶植物)’이라 불리운다.
영화 레옹에서도 자기분신처럼 들고 다니던 ‘아글라오네마’라든자,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IQ84’에 나오는 여자 킬러가 아끼는 ‘고무나무’, 박완서의 소설에 나오는 ‘행운목’, 퇴계 이황이 죽으면서 유언한 “매화에 물을 주어라” …. 하기야 드라마에서는 화가 치솟으면 내던지는 것이 화분이기 하지만. 아마 강아지나 고양이를 내던졌다가는 동물애호가들한테 초토화가 되고, 동물학대죄로 걸리기 십상이다.
인류의 생존권을 쥐고 있는 생명체는 반려견이 아니라 식물이다. 녹색식물의 광합성이 없이는 이 세상에 어떤 동물도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녹색식물을 생산자라 한다. 공기가 없으면 죽으나 살가운 대접을 못 받는 것처럼 식물도 그 가치에 비해서 마땅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 마치 다이아몬드가 흙보다 대접을 더 받듯이…….
어찌 보면 한 마리 개를 키우는 것도 화초 한 그루를 키우는 것도 한 생명체를 책임지는 일이다. 아기를 잉태하면 그 아기를 키우는 것을 책임지듯이…….
아주 오래 전에 한 초등학교 교장선생은 교실에서 버려져 쓰레기장에 나오는 화초를 주어다가 교장실에서 보살펴 살렸다. 그리곤 다시 교실로 돌려보냈지만 다시 쓰레기장으로 나오기 일쑤였다. 사실 나비 한 마리, 민들레 한 포기도 살려고 나온 존재다. 보도블럭 틈바구니에서도 생명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민들레의 끈질긴 생명력에 생명의 외경을 금할 수가 없다.
대부분 식물은 1년을 기다려야 그 꽃을 볼 수가 있다. 하찮은 꽃 한 송이도 그 식물은 1년의 모든 힘을 다해 피운 꽃이다. 엄마가 아기를 10달을 고생하여 낳듯이 말이다. 우리 집에는 남이 버린 군자란을 주어다 몇 년째 키우고 있다. 키운다기보다 그저 물만 제 때 줄뿐이다. 그런데도 이 군자란은 이른 봄이면 어김없이 산호색 꽃대궁을 화사하게 피워 올린다. 2019년의 트렌드 컬러가 산호색(coral)이란다.
반려견은 물만 주어가지고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수많은 손이 가고 보살펴 주어야 한다. 사람이나 개나 다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아마 애완견을 그렇게 보살피고 사랑하듯 식물에게도 소소한 사랑을 주어도 식물은 반응한다고 한다. 어느 인디언 부족은 보기 싫은 나무가 있으면 베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그 나무 앞을 지날 때마다 저주를 퍼 붓는다고 한다. 그러면 그 나무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병에 걸린 것 같다’라고 하면 당사자는 정말 병에 걸리는 것 같이 시름시름 아픈 사람이 될 수 있다. 식물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말이 정설인가 보다..
그저 한두 화분이나 비교적 고고한 난은 아니더라도 수수한 화초 몇 그루 키워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저 물만 제대로 주거나 혹가다 거름이나 주면 그 생명체는 늘 말없이 여러 분을 반길 것이다. 설사 애완동물처럼 꼬리를 흔들고 끙끙 거리지 않을지라도 묵언(默言)의 아름다움을 전해줄 것이다. 반려식물은 똥오줌을 안 치워도 된다. 사료나 동물병원에 갈 필요도 거의 없다. 거기다가 반려석 몇 개 갖다 놓으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한다.
얼마 안 있으면 입춘이다. 아마 그 때가 되면 먼 남쪽에서는 복수초의 화신(花信)이 이어달리기하듯 올라올 것이다. 그러면 우리 집 베란다 군자란도 산호빛 꽃을 아름지게 피울 것이다.
인간 백세시대라 한다. 그러나 나무는 몇 백 년, 몇 천 년을 산다. 그런 나무에 정령(精靈)이 없을 수 없다. 그들은 숱한 세월을 보듬고 살아왔다. 그런 나무들을 함부로 베는 것은 동물학대죄와 같이 식물학대죄가 아닐까 한다.
어디서 무우석(無隅石) 하나 주어다가 군자란 옆에 놓아야 하겠다. 그도 친구인 자연이 필요할 테니깐.
첫댓글 아멘
좋은 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