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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지노라 할 수 없는 것보다 빈지노니까 가능한 게 더 많다.
젊은 날의 한 토막을 담은 [24 : 26]이 발매된 직후였다. 그때 만난 빈지노는 맑고 아름다웠다. 그해 여름엔 유난히 ‘민트색 나이키 슈즈’를 신은 여자들이 많이 보였고, 포털 검색어창은 ‘빈지노 스타일’ ‘빈지노 머리’ ‘빈지노 패션’으로 채워졌다. 그의 영향력은 급기야 ‘곶감대란’으로까지 이어졌고, 수만에 알려진 눈 코 입은 [무한도전] 가요제로 대중에게 더 뚜렷하게 각인됐다.
1년 반 만에 발표한 싱글 ‘Dali, Van, Picasso’는 발매와 동시에 차트 1위에 올랐다. 그리고 뒤이은 논란. 샘플링과 표절, 단어 선택 자체에서 혼선이 빚어질 정도로 힙합 음악 작법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못한 한국 음악계가 안타깝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이제 어느 정도 대중성을 누리는 힙합 음악이 장르의 특수성을 이해받길 바란다는 건 사려 깊지 않은 이들에겐 억지스러워 보일 수도 있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 거라 무조건 그의 편을 드는 입장이 아니어도 ‘Dali, Van, Picasso’는 곡 자체만으로 창작의 경계를 의연하게 지켰다는 평을 받기에 충분했다. 내가 주목한 건 빈지노의 대응이었다.
그는 신속하게 입장을 밝히고 잘못된 점은 인정하고 깔끔하게 클리어를 진행했다. 이 모든 일들이 두 해가 채 지나기 전에 일어났다. 모두에게 같은 시간이 흘렀지만, 빈지노에게만은 그 시간의 질량이 결코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시간의 질량이 빈지노의 삶에, 그리고 현재의 모습에 끼친 변화가 궁금했다. 두 해가 바뀌고 마주한 빈지노는 조금 피곤하고 예민해 보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를 둘러싼 세계로 인한 피로감이 아닌, 내면에 집중하느라 스스로에게 부여한 묵직한 기운이었다. 여전히 변함없는 소년의 웃음과 말투였다. “나는 아직도 프레시맨이고, 여전히 자괴감과 자존감 사이를 오가며 작업 중이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엔 분명 이전엔 느낄 수 없었던 강단과 확신이 들어차 있었다.
‘Dali, Van, Picasso’ 반응이 좋았다. 기분이 어땠나?
이런 소재와 주제로 쓴 노래, 친구들이 함께한 아트워크가 세상에 공개되어, 그것도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으니 기분이 좋았다.
화제가 된 만큼 샘플링 논란도 컸다. 그만큼 영향력이 커진 거고, 기획사 없이도 솔직하고 의연하게 대처했다.
잘못된 점은 인정하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나에게 필요한, 긍정적인 경험이었다.
싱글 한 곡으로 많은 일을 겪었다.
나뿐 아니라 피제이 형, 고현정 엔지니어, 아트워크를 함께 작업한 친구들과 모델 원중이의 에너지까지 모두 들어 있다. 원래 ‘Dali, Van, Picasso’ 마스터링을 영국 애비로드 스튜디오에 맡겼다. 확실히 선명하고 화려한 느낌이었는데 내 마음에 살짝 들지 않는 점이 있어서 한국에서 다시 했다. 물론 그래서 비용은 두 배로 들었지만. 아트워크 작업도 IAB 친구들과 직접 한 거다. 원중이가 걸고 있는 목걸이 펜던트도 우리가 직접 디자인했고. 반 고흐의 자화상, 달리의 시계, 피카소 작품 ‘아비뇽의 처자들’에 나오는 여자, 이렇게. 싱글 한 곡에 들어간 제작비가 이전 EP 한 장에 들어간 돈보다 더 많다.(웃음)
하나부터 열까지 여러 사람들의 열정이 축적된 곡이라 에너지가 강한 것 같다. 크루 이름이 IAB라고?
‘I Always Been….’ 나는 언제나 무언가를 창작해왔고, 또 그걸 좋아했다, 변하지 않는 건 이런 본질이다, 하는 의미다. 예고 시절부터 알던, 미술 작업하는 친구들과 함께하고 있다.
본인도 미술학도잖나. 음악이 미술보다 재밌어서 더 집중하게 된 건가?
중학교 때부터 예고 입시를 준비했다. 어렸을 때부터 재밌어서 놀기 위해 했던 미술인데 이걸 학구적 수단으로 삼으니까 나중엔 전쟁이 되더라. 그때 마음을 많이 잃었다. 예고에 진학하고 나서 더 그랬지. 그래서 공부도 안 하고 꼴등 하고, 만날 음악만 듣고. 음악이 훨씬 더 재밌었으니까.
꼴등이라 딴 길로 샌 건가, 딴 길로 새서 꼴등이 된 건가?
아주 적절하게 밸런스를 잘 맞췄다.(웃음)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음악을 하고 싶었는데 항상 미술이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했거든. 예고, 미대 진학 같은… 그땐 하루 빨리 그런 게 없어지기만을 바랐던 것 같다.
그런데도 미대 진학까지 잘해냈다.
음악 하고 싶으니까. 대학 가면 내 세상이 열릴 거라고 생각했다. 음악 관련 전공을 찾아보기도 했는데 내가 원하는 음악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음악도 학습이 목표라면 전쟁이 될 것 같기도 했고.
순수하게 재미있어 시작했던 미술에 마음을 잃었던 것처럼 지금 상황엔 음악 역시 그렇게 되고 있는 거 아닌가?
앨범이 잘되면서 음악이 어느 순간 일처럼 되더라. 맞다. 음악 하는 게 전쟁이 되려고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작년 한 해 내가 정말 원하고 가고자 하는 방향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때가 되면 음반을 내고 활동을 하고 계획적으로 움직이기보단 속도가 더디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걸 직접 찾아 최대한 재미있게 친구들과 해보자는 마음가짐을 얻었다.
그 모습이 지금 구체적으로 실현된 거네. 각자 예술 작업을 하는 친구들과 한 공간에 모여 지내고 있다. 멤버마다 색깔이 다른 로브도 입고 있고….(웃음)
마음을 먹은 건 작년 여름쯤이었다. 그때부터 IAB 김한준과 여기저기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마치 떠날 사람처럼 인천공항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하고.(웃음) 작업실을 구해 함께 모인 건 올해 초부터다.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걸 느끼나?
가끔 당황스러울 때가 있긴 한데 한편으론 내가 발표하는 노래에 그만큼 귀 기울이고 집중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노래의 힘도 있겠지만 음악 외적인 호감형 조건들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만약 노래가 없는 상황에서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만으로 내가 잘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처음부터 사람들이 나에게 관심을 갖은 계기 자체가 노래였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다른 것도 보인 거고.
엄청난 관심을 받고 붐을 일으킨 뮤지션은 그게 거품이 아니란 걸 음악으로 증명해내면 된다.
그래서 나름 ‘Dali, Van, Picasso’에 대한 성취도와 만족도가 높다. 나 자신을 속이거나, 한 발짝 물러나 소극적인 자세로 내가 하고 싶은 게 아닌 다른 것, 사람들이 듣길 원하는 걸 했다면 자괴감이 엄청났을 거다. 음악을 하는 데 있어서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게 결국 나 자신을 지키는 길이다.
[24 : 26]이 오밀조밀한 잽을 날리는 느낌이었다면 ‘Dali, Van, Picasso’는 힘을 빼고 펀치를 쭈욱쭈욱 날리는 느낌이었다. 그림으로 말하면 크게 터치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들렸다면 내 의도가 잘 전달된 거다. 요즘 내가 좋아하는 느낌이 그렇다. 시원시원, 쭉 던지는 스타일의 플로(Flow). 곡을 쓸 때도 술에 취해 휘갈기는 느낌으로 작업했고, 그 상황의 분위기가 곡에 잘 표현된 거 같아 좋다.
래퍼는 자신의 가사와 동일시된다. [24 : 26]의 ‘Nike Shoes’ 가사에서 말하는 빈지노와 이후 피처링으로 참여한 곡들의 가사를 보며 “빈지노가 변했다”고 비꼬는 사람도 많다.
‘Nike Shoes’ 가사는 2011년에 썼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한다. 취향도 바뀐단 말이지. 그러니까 지금은 당연히 그때의 나와 다르다. 3년 전 사진을 보면 그때와 지금 변화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3년 전 그 가사를 쓰던 나로 계속 존재해야 하나,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잘못된 건가, 틀린 건가, 지금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야 하는 건가? 이건 단순한 취향의 변화에 대한 문제다. 내가 쓴 가사는 ‘다짐’이 아니다.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는 라인들은 그 노래의 주제도 아니고.
예전과 비교해 수입도 크게 늘었다.
작년 초반부터 체감되더라. 그때는 못해봤던 걸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게 재밌었다. 돈 쓰는 재미를 안 거지. 친구들과 좋은 걸 먹거나 재밌게 놀 수 있고, 가족이나 자신에게 더 좋은 선물을 할 수도 있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게 내 음악과 작업 환경에 쓰일 때 제 역할을 할 수 있겠구나, 느꼈다. 내가 하고 싶은 작업에 아끼지 않고 비용을 쓸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그렇다고 이 환경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보다 내 생각대로 움직이면 돈이 알아서 따라오는 방식이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일 순위다. 무언가에 쫓기듯 작업하면 결국 나에게 리스크로 돌아온다.
은색 스타디움 점퍼·스키니 팬츠·반지 모두 생 로랑 파리, 프린트 티셔츠는 지방시 by 리카르도 티시, 시계는 본인 소장품.
그런 생각은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며 스스로 깨우친 거겠지?
자연스럽게 배우는 거지. 누가 가르쳐줘서가 아니라. 나만의 노하우, 삶을 살아가는 방식, 음악을 대하는 나름대로의 방식이 조금씩 생기는 거다.
최근 사이먼디와 박재범이 독립 레이블 AOMG를 설립했다. 힙합 인디 신에 일리네어가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도끼와 더 콰이엇, 나, 이렇게 셋이 사람을 살뜰히 챙기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자기 일에 열중하는 움직임만으로도 서로 영감을 주고받는 게 좋다.
일리네어 멤버들에 비해 빈지노가 작업량이 많은 편은 아니다.
곡을 발표하는 횟수보다 어떤 곡을 만드느냐가 더 중요하다. 결국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사람들이 듣는 건데, 막상 작업하다 내가 흥미를 못 느끼면서도 억지로 때가 되었으니 내야지,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렇게 낸 음반이 덜컥 잘 되기라도 하면 그땐 정말 ‘빈지노의 거품’이 시작되는 거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시작해 수만의 리스너가 생긴 상황에 음악적으로 영향받는 건 없나?
대중적이고 단순한 건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다. 누가 하래도 못한다. ‘너를 못 잊겠어 이런 게 사랑인가봐~’ 이미 누가 다 한 거다. 그런 건 재미가 없다. 의미가 없다. 이것보단 내가 흥미를 느끼는 신선하고 새로운 시도로 접근하는 게 내 방식이다. 그게 내가 잘하는 거고.
현실적인 여건이 받쳐주니 자신감도 생겼겠다.
자신감보단 재미가 붙었다. 지금 내가 가진 재원이나 친구들, 처음부터 내가 갖고 있었던 게 아니다. 음악 하면서 차곡차곡 모은 거지. 재지팩트 때 돈 없어서 엄마한테 1백50만원 꿔서 스튜디오 비용을 내던 때와 지금, 본질적인 건 변함이 없다. 언제나 그 상황과 환경에서 최대의 것을 끌어모아 음악을 하는 데 투자한다.
예술은 불확실성과의 싸움이다. 빈지노의 현재는 노력의 산물일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몸에 배어 있으면 자연스럽게 노력으로 이어진다. 그런 게 진짜 노력이지. 자기에게 맞는, 자기가 하고 싶은, 자기 삶의 모습을 계속해서 추구하고 노력하는 거. 그저 하나의 줄에 매달려 있는 것 그 자체.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가슴에 두고 살아왔다. 입시를 치르든, 공부를 하든, 학교를 다니든, 언제든 상황은 다르지만 계속해서 그걸 붙잡고 있는 게 노력이다. 당연히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렇게 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게 본질이다.
아이돌이나 연예인도 아닌, 그렇다고 언더 래퍼도 아닌, 확실히 기존의 한국 음악 신에 없었던 포지셔닝을 지금 빈지노가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언더그라운드에 한정되지 않고 여기저기 들락날락거리고 싶고, 더 큰돈을 벌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내 인생을 갖고 싶었고. 이 모든 것의 밸런스를 맞추고 싶단 생각을 예전부터 많이 했다.
어릴 적부터 생각해왔던 모습에 가까운가?
내가 생각한 완벽한 모습까진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원치 않은 모습은 아니라는 생각은 든다.
PHOTOGRAPHY 유영규
STYLIST 이진규
HAIR&MAKE-UP 이은혜
어줍잖은 헛소리하던애들 나이키슈즈가사갖고 비아냥거리던 애들
입다물기
첫댓글 11:11 숫자라임 개쩔었어
스타일 좋네
보지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