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석의 전설 호석은 현재 광한루원 완월정 뒷편(서문쪽)에 위치해 있는데 본래는 광한루원 경내에 있지 않았으나 1986년 확장 공사시 편입 되었지요. 이호석은 조선조 영조때 전라감사 이서구의 명에의해 만들어 졌다고 하는데 석오와 비슷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수지면 고평리에 있는 견두산을 속칭 개머리산이라고도 하는데 본래 이름은 호두산이였으나 이호석이 설치된 후로 견두산이라고도 한답니다. 옛날 이 호두산에는 들개들이 떼를 지어 살고 있어 호두산의 개둘이 한바탕 짖어 대면 그때마다 남원부 부중에 호환이 일거나 큰 화재가 일어나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는 괴변이 일어났다 한답니다. 이러한 호환을 막기 위하여 개는 호랑이라야 진압할수 있는지라 호두산을 견두산으로 개명하고 남원부중에 호랑이를 깍아 만든어 놓았으며 호두산의 들개 짖는 소리와 호환을 막을 있다고 생각하였지요.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전라감사 이서구는 남원부사에 명하여 호석을 설치 하도록 하였는데 그후로는 호환과 재난이 씻은듯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광한루원 경내가 확장되기 전에는 이 호석은 남원시장 장터에 있었으며 호석이 있던자리는 호석거리라고도 불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언제인가 이 호석을 강한루원 경내로 옮겼는데 또 다시 재난이 일어나 본래의 자리로 옮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으며 수지면 고평리 마을회관 앞마당에도 이와 똑같은 호석이 견두산을 향하여 놓여 있습니다. 광한루 서문쪽에 있는 호석은 규묘가 크고 머리부분에 주역이 파져 있니데, 이 주역은 3~4천년전에 청동기시대로 추정하고 있지요. 수지면에 있는 호석은 규모가 적고 꼬리 부분은 깨진상태입니다.
사람과 가장 가까이 근접해 사는 동물이 개라고 할수있고요. 먹는것도 거의 사람과 동일하게 먹으면서 살았지만 지금은 시대의 변천과정에서 개사료를 주로 이용하며, 여러 종류의 애완견이 도입되면서 사람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개에 비유하는 말은 비아냥대는 용어나 혹은 낮게 폄하하기위한 용어로 사용되고 있답니다. 개판, 개머리, 개소리, 개 같은 경우, 개×× 등등 낮게 평가되거나 사람이 행하는 행위에 대한 좋지 않은 평가에 비유하고 있지요.
남원시 수지면에는 견두산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말하면 개머리산이 된답니다. 형태가 개머리를 닮았으며, 풍수지리학에서는 성난 개머리가 남원시내지역을 공격하는 형상이라고 합니다.
일부에서는 일제가 호두산을 폄하하기 위하여 개머리산으로 고쳤다며, 호두산이란 이름을 되찾자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제시대 그 이전의 여러 가지 남원부도에서도 견두산으로 표현이 되어있으며, 1700년대의 남원부도에는 대두산이란 표기되어 있어 大-犬 의 오기가 아닌가 하는 의혹도 가져볼 수 있답니다.
하여간 이석우 관찰사가 보통분은 아닌듯 하다. 많은 곳에 그 이야기나 전설 들이 전래되는 것을 보면 산수지리나 풍수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그 학문의 깊이를 엿볼 수 있지요.
전라관찰사를 두차례나 하였으며, 우리고장 남원의 구석 구석에 그 어르신의 이야기가 전래되고 견두산이란 이름을 붙여 그로인해 남원의 재앙을 없앴다고 하며, 그 흔적이 오늘에 까지 남겨져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견두산에는 들개 떼들이 많이 살고 있으면서 민폐를 입혔다고 합니다. 민가에 내려와 피해를 입히거나 그로인한 재난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에 이석우 전라관찰사는 이를 막기 위한 비방으로 수지와 남원에 호석을 설치하였더니 그 이후로 들개떼들에 의한 피해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또 다른 전래된 이야기에 의하면, 남원은 관료들의 횡포가 심하여 민심이 흉흉하자 이를 막기위해서 견두산을 개머리에 비유하고 호석을 두어 견두산을 제압하자 관료들의 횡포가 자제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명확한 근거가 없으니 모를 일이지만 모두가 그럴듯하고 이를 입증할만한 근황이 동일시대 동일인의 제작으로 보이는 두 개의 호석이나 한의 소리라고 말하는 창이 남원에서 발상되었거나 또한 춘향전의 변사또, 그리고 광한루에 웬 공적비가 그리도 많은지..... 이에 그치는가 남원은 조선시대에 과거에 급제를 하고도 관직에 등용하지 못한 선비들이 많았으니 이들이 할 일이 무엇인가! 모두가 조건적으로 서민이나 양민들의 고달픔만 많을 소지를 담고 있다고 볼수 있지요.
남원은 예로부터 천부지지(天府之地) 옥야백리(沃野百里)라 했습니다. 「택리지(擇里志)」 생리조(生利條)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옥한 땅 중 전라도 남원(南原) 이 있다. 벼 한말을 심으면 가장 많이 나는 곳은 140두를 추수할 수 있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남원은 “하늘이 고을을 내려 그 속에서 사람이 고루 잘 살도록 정해준 땅”임에는 틀림이 없음에도 관료들의 횡포가 심했었나 봅니다. 아무래도 중앙정부로부터 여러관계상 관리가 쉽지 않았던 남원은 그러한 사례들이 많았다고 볼 수 있지요.
오늘에 이르러 어떤가! 우리시는 정치적 소외나 중앙정치에 휩쓸려 주민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 정치적 갈등과 권력의 남용, 이로인한 지역경쟁력 악화, 빈부의 격차 심화, 젊은 인재들의 수용불능, 심화된 경쟁력으로 인한 주민의 양분화 현상과 갈등, 상대적 박탈감, 등이 시민의 화합과 소통 그리고 남원의 발전을 크게 저해하고 있음은 아무래도 우리남원의 풍토 탓은 아닌가 하며, 이에 호석과 연관이 있는 건 아닌가 쉽습니다.
수지면 고정리에 있는 호석은 어느 집안의 뒷마당 밭골 속에 방치되어 있습니다. 옛 이석우 전라관찰사의 비방처럼 아무래도 호석의 위치를 바로하고 잘 관리하여 인위적으로 남원의 발전이나 행복한 남원을 가꾸는 일이 안된다면 호석이라도 바로해서 남원의 미래를 기대하여 보는 것도 지혜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