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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의 경(景)을 이야기하며 제가 은평의 경을 이야기하는 까닭은 먼저 우리 아이들 때문입니다. 저는 고향을 가졌습니다. 가곡 ‘가고파’의 ‘내 고향 남쪽 바다’ 바로 옆이 제 고향입니다. 그 고향에서는 마당에 나서면 동쪽 봉우리 위로 떠오르는 아침해를 볼 수 있었고, 대문만 나서면 서쪽 저 산으로 지는 석양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린시절 여름에는 약쑥불로 모기를 쫓는 어머니 무릎을 베고 무거워지는 눈 위로 폭포처럼 쏟아지는 별들을 안고 잠든 기억이 숱합니다. 비오면 조그만 개울에서 고기잡느라 난리를 쳤고, 여름이면 동네 보에 하루에 열 번 스무번을 팬티만 입고 쫓아다녔습니다. 서울에 온지 햇수로 이십육년째, 정들기 쉽지 않은 서울에서 버티고 산 것은 어린시절 고향의 추억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날 안양 친척집에 아이들하고 놀러갔다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어디에 사느냐고 해서 서울 은평구에 산다고 하니 '은평구는 안양보다 못하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나 어안이 벙벙했지만, 저는 이 말을 빨리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판단 기준이 무엇일까 나중에 생각하니 다른 것이 아닌 아파트 시세였습니다. 지역의 가치가 아파트 시세로 판단되는 시대에 아파트 시세에 둔감한 저는 빨리 판단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은평의 경을 쓰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이 말을 듣고 나서입니다. 한 지역의 가치가 아파트 시세로 모든 것이 도매금으로 넘어가서야 되겠나하는 심정때문이었습니다. 그동안 아이들 고향에 대해 별 생각없이 살았습니다. 아빠의 고향이 아이들 고향이 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빠 고향 ‘남쪽 바다’는 차로 가도 여섯 일곱시간을 가야 하는 먼 곳에 있습니다. 그곳이 어떻게 아이들 고향이 될 수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열 살, 일곱 살인 우리 아이들는 육년째 여기 이땅 은평구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빠의 ‘남쪽 바다’가 아빠의 고향일 수 있는 것도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에게 어린시절의 전부인 이곳 은평구는 아빠 고향보다 훨씬 가깝고 소중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이곳 은평구가 고향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은 은평구를 달리 보이게 했습니다. 이땅에 대해 가난한 아빠는 아파트 시세는 못 올려주지만 아름다움에 대해선 말해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은평의 경을 이야기하고 싶은 또 하나의 이유는 멀리 있는 아름다움만 아름다움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아름다움도 소중함을 가르쳐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멀리 경주까지, 해남. 강진까지 문화유산을 찾아 가지만 가까이 있는 은평구의 문화유산은 찾으러 다니지 않습니다. 일출을 보기 위해 동해안 멀리 정동진까지 가지만 가까이 북한산에서 떠오르는 일출은 보지 않습니다. 효경봉에 오르면 서해바다로 지는 일몰의 광경이 펼쳐진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그냥 살고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매일매일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삶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부끄럽게 생각하고 언제든지 떠날 생각만 합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이 자신이 사는 지역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아이로 자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들 자신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이 갖춘 아름다움에 대해 자각할 수 있도록 아빠는 도움을 주고 싶을 뿐입니다. 은평의 제 1 경 - 수리조망(眺望) 1. 수리봉은 은평구의 주산 은평구 제 1 경은 무엇이 될까요? 저는 은평구의 주산(主山), 즉 주인되는 산 수리봉 바라보기를 은평 제 1 경으로 삼았습니다. 수리봉 조망은 은평구 거의 전 지역에서 가능합니다. 은평구에 사는 시민은 누구나 보고자 하면 보이는 풍경입니다. 풍경의 평등성에서는 제일입니다. 요즈음 신도시 아파트를 찾아가면 여기가 저기같고, 저기가 여기같습니다. 어릴 때 아파트 여러 곳을 이사 다니면 아이는 장소 정체성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사람이 성인이 되기 까지 교육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정체성 확립입니다. 사람은 자기정체성이 있어야 자기를 사랑할 수 있고, 다름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정체성을 가지는데 있어 자신이 자라고 있는 지역의 장소 정체성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사람에게만 정을 주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바라보거나 느끼는 모든 자연에 정을 줍니다. 정을 줄 대상이 없을 때, 정을 줄 대상이 자주 바뀔 때 사람은 정을 줄 대상을 찾지 못해 결국 아파트 시멘트 공간에다 정을 준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이의 정서의 토대에서 자연성이 배제되고 가장 인공적이고 삭막한 시멘트성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을 정서적 메마름과 삭막함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자연과의 교감에서 생기는 자연성입니다. 인간의 자연성 자리를 시멘트성이 차지했다는 것은 인간에게 엄청난 비극입니다. 자연을 보고도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하는 인공성은 앞으로 많은 사회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은평구에 사는 시민들은 큰 복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은평구를 자기 양팔에 거느리고 있는, 은평구의 상징 수리봉이 있기 때문입니다. 은평구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수리봉을 바라보며 자랍니다. 100년 전의 은평구 아이들도, 50년 전 은평구 아이들도, 오늘날 은평구 아이들도 언제나 변치 않는 수리봉을 바라보며 자랍니다. 변치않는 상징 하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이들에게 세상의 온갖 어려움을 헤쳐갈 수 있는 튼튼한 기둥이 되어 줄 것입니다. 2. 수리봉 옛날 이름은? 북한산 비봉줄기를 타고 서쪽으로 내려오다 마지막 솟은 수리봉은 조선시대에는 저서봉(猪噬峯)으로 불렸습니다. 한자가 멧돼지 저, 물 서입니다. 멧돼지가 깨무는 모양의 봉우리란 뜻입니다. 지금 불광사거리에서 불광초등학교로 해서 독박위 전철역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조선시대에는 저서현(猪噬峴)이라고 했습니다. 이 저서현에는 옛날에 멧돼지들이 자주 출몰했다 합니다. 옛날에는 멧돼지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 지난 토요일 진관내동 못자리골을 가보니 멧돼지 발자국이 있었습니다. 북한산에서 내려온 멧돼지가 진관근린공원 어디에 숨어 있다가 밤에 먹이을 찾아 인적이 드문 못자리골로 내려온 것입니다. 현재에도 멧돼지 발자국이 보인다면 옛날에는 멧돼지가 얼마나 많았을지 상상이 됩니다. 멧돼지가 자주 출몰해서 저서현이라고 부르고, 저서현 위에 있는 봉우리니까 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이가 저서봉이라고 불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갈현동1동 쪽에서 수리봉을 쳐다보면 수리봉이 멧돼지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때문에 수리봉 모습이 멧돼지처럼 생겨서 저서봉이라고 불렀을 수도 있습니다. 수리봉은 또 족두리처럼 생겼다하여 족두리봉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북한산을 자주 다니는 남성분들은 수리봉이 여자의 젖꼭지처럼 생겼다하여 젖꼭지봉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기도 합니다. 수리봉은 수리봉, 저서봉처럼 억세고 남성적인 이름 두개와 족두리봉, 젖꼭지봉처럼 부드럽고 여성적인 이름 두개를 나란히 가지고 있습니다. 보이는 각도에 따라 남성적으로도 보이고, 여성적으로 보이는 봉우리, 남성적 모습과 여성적 모습을 두루 갖춘, 21세기 적으로 양성적 이미지를 다 가지고 있는 봉우리입니다. 그만큼 볼 맛이 많은 산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3. 수리봉의 다양한 모습. |
첫댓글 아름다운 북한산 이지요..........
진구 너 정말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