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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생명 말씀(2010.8.8)
말씀/ 요 19:2-3, 고후 12:7,
가시가 주는 의미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 (요 19:2-3)
요한복음을 보면 군병들이 가시로 왕관을 만들어 쒸우고 조롱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 머리에 쓰신 가시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가시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가시 면류관과 그 머리에서 흘리는 피가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우리는 예수님의 전 생애를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로부터 받으신 수많은 멸시와 천대는 하나님의 아들을 찌르는 가시였습니다. 3년 반의 공생애를 마치실 무렵 주님은 제사장들에게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하실 것을 아시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 때 이 쓴잔을 할 수 만 있다면 피하게 해달라고 세 번 기도를 하셨지만 결국은 아버지 뜻대로 마실 것을 결단을 하셨습니다. 그리도 채찍에 맞고 가시면류관을 쓰고, 양손 양발에 못이 박히고, 창에 찔리고 조롱과 멸시를 받으며 십자가에 매달리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망의 쏘는 고통이셨습니다. 이사야는 이 예수님의 찔리신 가시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주님은 가시에 찔리는 고통을 당하셨지만 우리는 그로 인해서 나음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가시? 위대한 사역자로서 수많은 사람들은 고치며 복음을 전했던 바울에게도 가시가 있었습니다. 어떤 질병의 가시였는지는 모르지만 한번은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네 은혜가 족하다”는 말씀만 듣고 가시는 그대로 몸에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생 가시를 몸에 달고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그 가시로 인해서 약한 자신이 주님의 은혜로 인해 더 강한 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시라는 것은 정말 아프고 성가십니다. 손가락 끝에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가시 하나만 박혀도 고통스러워서 아무 것도 하지를 못합니다. 교회 화단에 풀을 제치다가 벌에 한방 쏘였는데 얼굴이 얼마나 얼얼하던지 누가 이모는 벌침 세 방을 맞고 병원으로 직행하셨습니다. 이런 가시는 별것이 아닙니다. 주사 한 대 맞으면 됩니다.
우리에게는 이보다 더 살아가면서 아킬레스건으로 찌르고 고통스럽게 하는 여러 종류의 가시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대게 기도 할 때에 대게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이런 가시들을 제거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병을 낫게 해 주십시오. 사건처리를 해결케 하여주소서. 가난의 고통을 제거해 주십시오.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을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 나를 힘들게 하는 환경을 평탄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나의 삶에 질병도 가시가 될 수 있고, 가난도 가시가 될 수 있고, 힘들게 하는 사람도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아주 좋아졌지만 가난이란 가시가 얼마나 찌르는 아픔입니까? 필요를 채우지 못하는 구차함에 자존심도 상하게 됩니다. 하고 싶은 일들이 있어도 못합니다.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못 사먹습니다. 아파도 치료 받지 못합니다. 제 막내 동생은 어릴 때 미스 월드는 아니지만 초등학교 때 미스 여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을 잘 못 만나 재산 다 말아먹고 50이 넘어 작은 방 얻어 살며 밤샘 야간작업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재산 모아놓고 여기 저기 등산에 여행하며 살 때 가난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찌르는 가시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가난에서 속히 벗어나 풍족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가난의 가시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주님은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셔서 그 가난으로 인해서 우리로 부요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 가난은 빼 내어내야 할 가시이기도 하지만 또한 천국으로 인도하는 축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평생 가난한 심령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질병도 가시입니다. 조카 예선이가 어릴 때부터 대 수술을 시작으로 아픈 삶을 살았습니다. 이번에도 목숨 건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완케 되었지만 온 몸이 수술 자국으로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잘 되지 않는 고통을 젊은 나이에 겪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옆에서 보는 이들의 마음에는 “속히 낫게 해 달라”는 것 외에는 다른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저도 질병의 치질을 몇 십년 달고 살았는데 얼마나 수치스럽고 자존심 상하고 불편하던지 평생에 찌르는 가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깨끗하게 치료되고 나니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그 질병의 가시가 오히려 유익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주신 능력이 너무나 많았는데 그 질병의 가시가 자고하지 않게 되었고, 약한 자 였지만 오히려 강한 자가 되어 주를 섬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자신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는 자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도 가시 중에서 제일 힘들게 하는 가시는 사람일 것입니다. ‘눈에 가시’같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찔러대면... 얼마나 힘들게 하면...사람은 가만이 있지를 않습니다. 말을 하게 되는데 혀에서 나오는 사람의 말은 가시인데 독을 품은 가시입니다.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저주와 학한 말, 비방, 조롱... 의존하여 힘들게 합니다. 이런 사람 가시는 먼 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론 부모가 되기도 하고, 때론 자식이 되기도 하고, 때론 남편이 되기도 하고 때론 가까운 이웃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 가시는 우리를 원망하게 하고, 불평하게 하고 힘들게 만듭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남편이 술만 먹으로 부수고 난리를 치며 살았는데 자식들은 상처를 한 아이는 학교도 못 다닐 정도가 되어 결국 이혼 수속을 밟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장 힘든 가시가 오히려 잘 극복하면 가장 유익을 주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삶에 삼촌 라반은 가시같은 존재였습니다. 야곱도 사기꾼 기질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라반은 단수가 더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틈만 있으면 야곱을 속이며 괴롭혔습니다. 야곱은 14년을 봉사해야 했고, 수고의 댓가를 얻기 위해서 6년을 더 봉사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나중에는 빈손으로 나갈 위기에까지 몰렸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순적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라반으로 인해서 야곱은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도움을 얻어 귀향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삶에도 사울이라는 큰 가시가 있었습니다. 사울은 상전이 되어 끊임없이 다윗을 괴롭히며 힘들게 하고 수차례 죽이려까지 하였습니다. 이런 사울 아래서 다윗 역시 약한 자가 되고 겸손한 자가 되고 영성이 깊은 사람으로 빚어질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가시가 우리를 괴롭게 해도 가시에 대해서 불평만 할 수 없는 것은 지내놓고 볼 때 오히려 유익이라는 깨달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가시라는 고통을 통해서 사람을 훈련하시고 영적인 사람으로 빚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나의 삶에 힘든 문제도 하나도 없고 힘들게 하는 사람도 한 사람도 없으면 정말 행복하고 평안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떤 농부가 하나님에게 요청을 하였습니다. “제게 1년만 시간을 주십시오. 딱 1년 동안만 내가 날씨를 주관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세상의 가난이 싹 걷힐 것입니다. 하나님은 농부에게 1년 동안 날씨를 주관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농부는 자기 생각대로 농사짓기에 가장 좋은 날씨를 만들었습니다. 심한 비 바람도 없고, 태풍도 없고, 천둥 번개치는 일도 없고, 따가운 땡볕도 없고 적당한 비 적당한 해빛만을 계속 내렸습니다. 농사가 아주 순적하게 되는 듯 하였고 곡식도 잘 자라는 듯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10년만 농사지으면 모두가 부자가 되고 가난이 퇴치 될듯 싶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윽고 곡식을 벨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모서 타작을 해보니 껍데기만 있을 뿐 알맹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깜짝 놀란 농부가 하나님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하나님이 말대답하셨습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도전이 없었기 때문이야. 혼란과 갈등. 시련이 없었기 때문이야. 방해가 되고 좋지 않은 것을 모두 피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껍데기만 있을 뿐 알맹이가 없는 거야. 곡식이 여물어 열매를 맺으려면 따가운 땡볕도 필요하고, 천둥번개, 소나기 같은 고난과 시련이 필요한 법인데 그래야 껍데기 속의 영혼이 영글지 않겠는가?”
요즘 부모들이 아이들을 한둘 낳고 힘들지 않게 키웁니다. 선생이 아이 매 한 대 때리지 못하게 합니다. 금이야 옥이야 키웁니다. 아이들이 잘 되겠습니까? 인내심이 없고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 됩니다. 나중에는 자기 부모도 몰라봅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밑 바닥부터 인내하면서 투쟁하는 자세가 필요한데 어려우면 쉽게 포기하고 요행만을 바라는 습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우리 인생에 고난의 가시가 필요함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 119: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많은 가시를 품고 사신 분이십니다. 바리새인들로부터 수없이 비방과 시험을 받으시고, 사람들에게 싫어버림을 받고,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군병들에게 침뱉음을 당했고, 심지어 강도에게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셨습니다(벧전 2:23) 가시 찔린 머리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대 못에 박힌 손과 발은 뼈가 으스러지고 피가 줄줄 흘렀지만 주님은 저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결과 그 가시에 찔린 피는 대속의 피가 되어 우리를 살리는 능력이 되었고 우리는 그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그러한 조소를 참지 못하고 가시를 뽑아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 까요? 당장에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들이 내려와 조롱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순간은 아주 시원 할 수 있었겠지만 몇 천 년의 준비되고 계획된 하나님 구속역사는 실패로 돌아가고 우리는 구원에서 멀어졌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가시’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필요악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가시에 찔림으로 우리가 남음을 얻었고, 그가 상함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음을 생각 할 때 가시의 의미를 다시 새기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따듯한 봄만이 아니라 살을 에는 듯한 추운 겨울도 필요합니다. 선선한 가을 뿐 아니라 무더운 여름도 필요합니다. 배부름뿐 아니라 배고픈 쓰라린 경험도 것도 필요합니다. 건강만이 아니라 가끔은 아파보는 고통도 필요합니다. 그래야 배고픈 자의 심정도 알고, 배부름에 대해서 감사도 할 수 있고, 건강의 소중함도 알 수 있습니다. 자연 속에 불필요한 잡초들이 왜 그렇게 많은 가하지만 그 잡초는 거대한 나무가 지탱하도록 돕고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는 아름다운 숲을 이룰 수 있게 합니다. 사람이 성공만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실패의 아픔도 필요한 것은 그래야 더욱더 겸손할 수 있고, 계속적인 성공의 지지대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입 안에 사랑니도 불필요한 것 같지만 무조건 뽑아야 할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 사랑니가 다른 이들을 든든히 지탱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몸이 무균상태의 건강한 몸이 좋은 것 같습니다. 실제로는 적당한 세균도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야 항체가 형성되어 더욱 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생명의 경이도 보지만 죽음의 슬픔도 목격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에 한 두 사람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정에도 힘들게 하는 한 두 사람의 식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것만 없으면, 이런 문제만 없으면, 이런 사람만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가시만 없으면... 아주 편하고 평화롭게 되지 않을까? 만일 그렇게 되면 어떻게 주님의 사랑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가시같이 힘들게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면 어떻게 인내를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까? 힘들게 하는 사랑을 배울 수 있고, 힘든 문제가 있어야 인내심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넘어져도 봐야 겸손함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낮만 아니라 밤도 있어야 쉴 수 있고 에너지 재충전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좋고 나뿐 것 다 어울어져 살아가는 것입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 진기한 나무가 있었다. 메마른 황야에 오직 그 나무 한 그루만 넓게 가지를 펴고 있다. 그 나무의 나이를 아는 이도 그 열매를 맛본 이도 없었다. 열매는 황금빛을 띄었는데 아주 탐스러웠다. 그런데 절반은 먹을 수 있고 절반은 맹독성을 갖고 있었다. 두 개의 가지 가운데 하나는 생명을 하나는 죽음을 담고 있었다. 그렇지만 알 수가 없기에 아무도 그 나무의 열매를 맛보려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 나라에 무서운 기근이 몰아닥쳤다. 나라 안에 먹을 것이라고는 그 나무 열매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굶주린 사람들은 그 진기한 나무 아래로 몰려갔지만 아무도 선뜻 먼저 따먹지를 못했다. 그 때 한 사내가 요기를 내어 나무 아래로 갔고 그 중에 한 가지에서 열매를 따먹었다. 그 사내는 죽지 않았고 사람들은 너두 나두 그 가지의 열매를 따 먹게 되었다. 아무리 먹어도 가지는 계속 열매를 맺기에 사람들은 여드레 동안 잔치를 벌였다. 그리고는 이제 어느 쪽 가지가 독을 갖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 후부터 그 가지에 증오의 눈빛을 보내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그 목 먹을 가지를 잘라버릴 것을 결정했다. 사정없이 왼쪽 가지를 베어버려 독을 품은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날 오른쪽에 달려 있던 가지의 열매들이 다 떨어져버리고 나무는 시들시들 죽어가고 있었다. 그 나무에 앉아 지저귀던 새들도 날아가 버리고 나무는 더 이상 살아 있는 나무가 아니었다. 사실은 독성의 나뭇가지가 있었기에 탐스러운 열매 맺는 가지도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좋은 것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교훈입니다. 때론 안 좋은 것들도 정말 우리를 위해 필요한 것들이 많습니다. 정말 없었으면 하는 사람, 정말 없었으면 하는 것들 ... 늘 나를 찌르는 가시들 ...그들이 있어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나의 성숙 나의 행복을 위해 있는 고마운 가시입니다. 가시가 우리를 성숙하게 하고 있는 것을 감사하게 하고 알찬 사람이 되게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번 나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어떤 가시가 있는가? 하나님이 바울이 요구하는 가시를 제거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두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왜 제자들이 가라지를 뽑지 않느냐고 할 때 그대로 두라고 하셨는가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주님 보실 때는 나의 가시는 어떤 점에서 유익한가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저도 돌아보면 가시라고 생각했던 것이 주는 유익이 참으로 큽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누가는 어릴 때부터 자폐아로 힘들에 하였습니다. 누나들도 힘들게하고 저도 처음에는 정신적으로 바라볼 때마다 힘이 들었습니다는 왜 다른 사람들은 잘 난 아들 두고 자랑을 하는데 나는 장애 아들을 두어서 일생 짐이 되어야 하는가? 그런데 지내놓고 보니 누가는 복덩어리였습니다. 누가 때문에 누가 이모도 구원을 받았고, 저도 하늘의 소망을 두며 영적으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덕에 책도 출판하게 되고, 성숙한 신앙을 배우기도 하였고 우주적으로 교회를 섬길 수 있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앞으로도 삶에 여러 가시가 찌를 수 있겠지만 감사하면서 가시의 의미를 새기며 살아야겠습니다. 필요 없는 가시는 주님이 제거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필요한 가시는 나를 위해서 남겨두실 것입니다. 주님은 가시로 고통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라” 가시는 하나님의 주시는 고통보다 더 큰 은혜입니다. -김해영
첫댓글 감사합니다. 너무나 은혜롭게 읽었어요. 제게도 이런가시가 있습니다. 우울증을 앓고 계신 엄마인데요.. 벌써 몇번째 치료되었다가 다시 우울증이 찾아오곤 합니다. 지금도 2달째 불면증과 두려움으로 고생하는 엄마로 인해 마음이 무겁고, 외국에서 도움도 드리지 못하는터라 고민하였거든요
이 문제만 없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었는데.. 오늘 주일설교를 읽으며 제게 가시를 주시는 의미를 배웠습니다. 제가 더 겸손해지고 성숙한 열매를 맺기위해 필요한 과정인가 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그 문제를 위해 기도하며...문제 자체만 아니라 그 가시를 통해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새긴다면 오히려 그 고통 중에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주 안에서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
삶의 가시~온전히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 은총의 풍성함을 주님께 간구합니다.
필요치 않는 가시는 제거해주시고.. 두실 것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필요한 가시는
네 은혜가 족하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가시라는 것이 묘합니다.
가시의 아픔도 있지만 찔린 손가락의 존재를 강하게 느끼게되지요.
그런데 가시가 없으면 고통도 없지만 손가라의 존재를 또 잊어버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