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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락당 어서각은 왜 굳게 닫혀 있었나? -조선 서자들의 500년 도전사 |
▣방송 : 2010. 12. 16 (목) 22:00~22:50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연출 : 김장환 PD ▣글 : 김세연 작가 ------------------------------------------------------------------------
아비의 자식이되, 집안의 대를 이을 수 없는 아들!
조선의 무수한 집안에서 나온 눈물의 낙인, 서자(庶子)
역사스페셜에서는 시대의 불운아 조선시대 서자(庶子)들의 삶을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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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자(庶子), 실상을 엿보다 |
-서자(庶子) 이전인, 양자(養子) 이응인 조선시대 주리 성리학을 주창한 회재 이언적. 이언적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이응인과 이전인. 이전인은 이언적과 후실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고 이응인은 5촌 조카로 이언적이 양자로 들인 아들이다. 양자 이응인은 가문의 제사를 맡은 적자가 됐으나, 이전인은 뛰어난 학행과 효심에도 불구하고 회재의 대를 잇지 못했다. 그가 서자였기 때문이다. -태종(太宗), 서자들의 손발을 묶다. 조선시대 서자들의 손발을 묶었던 태종! 태종은 고려시대 만연했던 병축(아내를 여럿 두는 풍습)을 금지하고, 적첩을 철저히 구분했다. 서자들의 과거시험을 제한하고 관직등용도 막았다. 이는 양반가 자제들에게 매우 가혹한 조치였다. 과거를 보지 못하고 관직에 나가지 못한다는 것은 양반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의미했는데... 태종은 왜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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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통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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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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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서얼허통의 물꼬를 트다. 선조 16년에 일어난 니탕개란. 당시 병조판서였던 율곡 이이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획기적인 제안을 했다. 전훈을 세우거나 군량미를 내면 서얼에게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것. 서얼차대에 집착했던 양반들의 반대에 부딪치기는 했으나 이것은 서얼허통의 물꼬가 됐다. 바로 이 때 이전인의 아들인 이준도 납속허통을 받아 자신과 후손들의 과것길을 열었다. -서얼들의 연대와 상소 현재 남아있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서얼들은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들끼리 마음을 합하고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함께 노력했다. 그 중의 하나가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할 때, 즉 왕이 자신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힘을 모으고자 할 때 주로 상소를 올렸다. 왕은 서얼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들은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활용하고자 했는데, 이러한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숙종을 거쳐 영정조 시대에 서얼허통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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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얼들의 도전, 200년에 걸친 향전(鄕戰) |
조선시대 왕과 사대부는 끊임없이 대립했고 서자 문제는 그 요소 중 하나였다. 조선 초 태종은 본인의 뜻으로 서얼차대를 본격화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임금은 서자에게 점점 더 많은 것을 허용하고자 하고, 사대부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세력을 합해 더 강하게 반발했다. 특히 영남 남인들은 노론에 밀려 중앙권력에서 밀리게 되자, 지역에서의 특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더욱 똘똘 뭉치면서, 서얼들을 배척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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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의 청원서 |
-지역사회의 거부, 향원이 되지 못한 이준의 청원서 서자 신분으로 부사직까지 역임한 이준은 관직에 관한 한 여한이 없었다. 그러나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갈등에 직면하게 된다. 서얼차대가 유독 심한 지역 양반들이 서원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면서 서얼들의 진입을 막았던 것이다. 조정에서의 허통은 이루어졌지만 삶의 기반인 지역 사회에서는 거부당한 이준은 71세의 나이에 다시 붓을 들고 청원서를 쓴다. 그의 절절한 호소는 그러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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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 현판 |
▲옥산서원 |
-1884년, 오랜 갈등의 마침표를 찍다. 서얼과 지방 사족간의 향전을 마무리하는 옥산서원사건. 옥산서원에서는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 서얼과 지방 사족과의 장기간의 향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1884년 서얼들의 승리로 서얼소통이 되었고, 이러한 옥산서원의 서얼소통은 당시 영남의 서원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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