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서론을 간단히 살펴보겠다. 요한복음은 우리가 익히 아는대로 아주 독특한 책이다.
사실 구약성경이나 내용들이 아주 독특하고 기묘한 책이다. 그 중에서도 요한복음이 제일 기묘한 책이라고 본다.
왜 그러냐 하면 요한복음은 우리가 처음 전도할 때, 이제 예수를 처음 믿기 시작한 사람에게 제일 먼저 주는 책이
대개의 경우 요한복음일 것이다. 성경을 읽기 위해서 겨우 한글을 깨우친 할머니도 또 이제 막 그리스도인이 된
초신자도 요한복음을 읽으면 요한복음으로 부터 직관적으로 얻는 것이 있다.
뒤집어서 이야기 하면 요한복음은 어떤 지적 수준에 있는 사람들에게나 직관적으로 Communication하는 quality가
있다. 요한복음은 사실 비례적으로 말하면 신약성경 내에서 어휘가 가장 적은 책이다.
또 헬라어로 말하면 가장 쉬운 헬라어로 쓰여있고, 어휘도 가장 적다.
그래서 처음 헬라어를 배우는 신학도들에게 처음 읽히는 신약의 Text가 대개 요한복음이다.
요한복음에 있는 많은 상징어들 가령, 빛, 어두움, 양떼, 목자, 포도나무, 물, 떡 등의 상징어들이
직관적으로 Communication하는 quality가 있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대로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도 요한복음을
읽으므로 은혜를 받는다(감동을 받는다). 은혜 받는다는 말은 옳은 말이 아니다. 자꾸 은혜 받는다
은혜 받는다 하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값싸게 되가지고 문제가 많다.
요한복음을 연구하면 할수록 사실은 이 보다 더 심오한 책이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요한복음은 아주 심오한 책이다.
어쩌면 신약 성경내에서 가장 심오한 책일 것이다. 빛, 어두움, 물, 떡, 목자, 양떼, 목자, 포도나무 등의 상징어들은
보편적인 종교사적 Symbolism으로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Communication하는 quality도 있지만 사실은 그것을
좀 더 깊이 연구하면 깊은 종교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이러한 Symbolism
을 주려하는 요한복음의 예수에 대한 그림은 학자들에게 상당히 깊이 연구하게 하는 아주 심오한 책이다.
그래서 우리가 요한복음을 연구할 때 얼마만큼 깊이 묵상할 것이냐? 이것을 결정해야 한다.
우리가 깊이 하기로 하면 한이 없다. 그래서 요즈음 새로 나오는 요한복음의 주석들을 보면 대개 어느 정도의 선을
긋고 있다. 가령 가장 큰책 독일의 루돌프 쉬나켄부르크의 주석인데 4권으로 되어 있다. 또 이보다는 작지만 훌륭한
레이몬드 브라운의 주석은 한 권이 8-900 페이지로 되있는 책으로 2권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냐 하면 요한복음이 방대한 주석을 요할 만큼 심오한 책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요한복음 전체를 봄으로 바르게 제시하여 양떼를 가르치는 틀을 제공할 수 밖에 없다. 요한복음의 구조, 사상,
가르침이 이렇다 하는 것을 깨우쳐 줌으로서 스스로 더 깊이 연구할 수 있는 실력을 길러주고자 한다.
1. 서론
요한복음에 있어서 서론적인 문제는 간단히 3가지만 할려고 한다.
1) 요한복음의 역사성 문제
2) 요한복음의 사상적 배경
3) 요한복음의 저작 목적 등을 간단히 다루고자 한다.
1) 요한복음의 역사성 문제
이 문제는 왜 발생하느냐 하면 물론 복음서 전체에 있어서 역사성 문제가 발생을 한다.
복음서들이 얼마만큼 신실하게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우리에게 기록하고 있느냐?
이 문제는 복음서 전체에서 다 발생을 한다. 그런데 복음서가 신학적인 관점에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후 ‘예수가 그리스도다’는 신앙고백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해석해서 우리에게 예수가 어떻게
그리스도 노릇을 하셨나? 예수가 어떻게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하나님이 구원했나를 천명하는 책이
복음서이다. 그래서 복음서가 신학적인 책이다. 즉 설교이다.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서 발생한 신앙고백의 빛 아래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사건으로
해석해서 설파(설교)한 책이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서는 신학적인 책이다. 문제는 복음서가 신학적인 성격을
다 가지고 있는데 얼마만큼 역사적인 신실성이 있느냐? 예수를 그리스도, 주, 하나님의 아들로, 곧 예수를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사건으로 설교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신학적인 프리테이션(Preterition생략)과 신학적인
인터프리테이션(Interpretation해석)을 위해서 역사를 좀 바꿔쓰고, 심지어 예수의 말을 지어 내기도 하고 예수의
행적을 지어 냈느냐? 만약 이렇다면 역사성이 적어지는 것이다.
아니면 진짜 예수가 역사적으로 가르친 일, 하신 일을 신학적으로 해석을 해서 그 당시에 예수가 그 말씀을 할 때에는
깨닫지 못했으나 이제 십자가와 부활의 빛 아래 보았을 때 그 의미가 환히 드러났을 때 그 의미를 환히 드러내는 일만
했느냐? 이런 것으로 우리가 복음서에서 역사와 신학의 관계가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토론한다.
보수 신학자들은 복음서들이 전부 역사책이면서 신학책이라고 한다.
복음서에는 역사성과 신학적 해석을 같이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는 바와 같이 불트만 식의 실존주의적
해석학에서는 역사성을 부인하고 복음서나 신약의 모든 책들을 신학적인 책으로만 이해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문제가 요한복음에 와서 더 심각해진다. 그렇게 역사성과 신학성의 문제가 더 심각해지는 이유는
공관복음과 비교해 볼 때에 이 문제가 심각히 제기된다.
우리가 공관복음을 읽다가 요한복음을 읽으면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고, 어휘도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공관복음은 그래도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에 충실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고 있는데 역사적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을 통해서 예수의 그리스도, 주, 하나님의
아들됨을 선포 즉 케뤼그마(κηρυγμα)를 표방하는데 요한복음에 있어서는 이런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에는 별 관계 없이 순전히 설교 또는 신학 또는 케뤼그마(κηρυγμα) 만을 선포하고 있다.
이런 신학적 해석 또 케뤼그마(κηρυγμα)를 위해서 역사적 예수가 마치 가르친 양 또 마치 한 양 그의 가르침과
행적을 만들어 낸다고 사람들이 보았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역사성은 별로 없는 책이고 주로 신학적인 설교
또는 케뤼그마(κηρυγμα)가 중요한 책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보았다.
특히 지금도 독일학파 쪽에 있어서는 주된 사상이다. 이 문제가 아주 심각하게 발생하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요한복음과 공관복음과의 비교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1)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공통점
기본적으로 둘 다 예수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경력에 대한 즉 크게는 outlin이 되었다.
‘예수가 갈릴리 출신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종말론적인 운동을 하다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재판을 받고 빌라도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그의 제자들이 그가 부활했다’고 믿었다.
이렇게 큰 outlin은 비슷하다. 또 비슷한(공통점) 것으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있었고, 또 적대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적대자들(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과 예수가 큰 논쟁을 벌리고 그들에 의해서 배척을 당했다.
또 논쟁의 Issue들이 대개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이다. 왜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했는가?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친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적을 행했다. 병자를 고쳤다. 그것도 안식일에 고쳤다. 안식일에 고쳐서 당시 유대의 종교적인
지도자들과 굉장한 갈등 속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음모로 예수가 제거된다는 것은 비슷하다. 또 구체적으로
비슷한 것은 이적들 중에 한 두 가지가 있다. 가령 치유의 기적이 있다. 또 오천 명을 멱인 사건 들이 비슷하다.
(2)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차이점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주로 비유로 가르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다르다. 물론 요한복음적인 비유가 있다.
가령 요한복음15장에 포도나무의 비유나 선한목자의 비유가 있다. 그런데 비유가 약간 다르다.
공관복음의 비유는 대개 짤막 짤막(가끔 긴 것도 있다)한 비유들로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들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긴 설교이다. 나중에 다시 살피겠지만 요한복음의 구조가 대개 어떻게 되어 있느냐면
예수께서 이적(표적, sign)을 하나 행한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이적을 표적(sign)이라고 한다.
이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가령 안식일날 병자를 고치고 또 오천 명을 먹이는 기이한 일을 한다.
그것이 이제 보통 청중들에 의해서 오해된다. 청중들이 세상적인 사람들이라 세상적으로 해석한다.
물질주의적으로 해석을 해서 오해를 한다. 그러면 예수께서 긴 설교를 통해서 자기가 한 이적이 진짜 나타내는,
계시하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길게 설교로 해석해 주는 식으로 요한복음의 구조가 되어 있다.
이것과 더불어 말해야 될 것은 공관복음에서 예수의 중심 가르침이 하나님 나라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거의 안 나온다. 그 대신 요한복음의 중심 주제인 영생, 생명이 나온다. 전혀 어휘가 다르다.
또 다른 차이점은 예수의 신성이 요한복음에 노골적으로 강조 되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가 ‘내가 뭐다’하고 주장하는 것이 적다. 그 주장들은 대개 간접적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보면 아주 직접적으로 되어 있다. 일곱개의 ‘내가 무엇이다’라는 말이 있다.
소위 γ θμθ 이른바 I AM 말씀들 즉, ‘내가 세상의 빛이다.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다.
내가 영생의 떡이다. 내가 선한 목자이다. 내가 포도나무이다.’ 등의 자기 주장이 요한복음은 아주 직접적으로
되어 있고 공관복음은 간접적으로 되어 있다.
또 차이점은 사역의 중심지가 공관복음은 주로 갈릴리에서 예수가 활동하시고 마지막으로 유대 땅으로 가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해서 그곳에서 소란을 피우고 그것 때문에 체포되고 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가 공관복음만 가지고 있다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그의 사역 기간 동안 한 번 방문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의 전체의 메시야적 사역이 일년 안에 다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예수가 예루살렘을 적어도 세 번 방문(유월절에 초막절에 또 유월절에 방문한다)하고
예수의 유대(북:갈릴리, 남:유다)에서 활동과 가르침을 많이 적고 있다.
그래서 사역의 중심이 공관복음은 주로 갈릴리 지역인 반면에 요한복음은 유대(남부 팔레스틴)에서의 예수의
활동을 많이 그리고 있고,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여러번 방문한 것으로 되어 있다. 요한복음대로 하면
예수의 사역이 3년 정도 걸린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외에도 차이점이 많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공통점과 차이점들을 보았을 때에 앞에서 언급한 역사성이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느냐면 요한복음이 공관복음 중 적어도 한 복음서를 보고 썼느냐 아니면 요한복음이 전적으로
독자적인 자료를 근거로 쓰여진 책이냐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요한복음의 쏘스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만약에 요한복음이 공관복음들 중 어느 한 복음서(마가, 누가)를 근거로 쓰여졌다면 앞에서 열거한
공통점과 차이점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겠는가? 공통점이 어떻게 발생하는가?
요한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보고 썼으니까 큰 outline은 같다는 말이다. 그렇나면 차이점은 어떻게 해석되느냐?
그것은 요한이 그의 신학(케뤼그마, κηρυγμα)을 위해서 공관복음을 고쳐 썼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은 그 만큼 역사성이 없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의 한 복음서(마가, 누가)을 보고 썼다면 요한복음과 그 복음서(누가복음)와의
차이점들은 요한이 그리스도를 선포하기 위해서 누가(역사에 충실한 책)의 자료를 고쳐 썼기 때문에
이와 같은 차이점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은 순전히 설교의 책
(신학적 책 케뤼그마(κηρυγμα)의 책)이지 역사성은 없는 책이다.
앞에서 말했듯히 대부분의 비판적 학자들이 이러한 견해들을 최근까지 따랐다.
그런데 1957년 이래 이른바 요한복음에 대한 새로운 견해 즉 New Look라는 운동이 발생했는데
이 운동은 C. H. Dodd 학파에서 나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1957년에 C. H. Dodd의 제자인 J. A. T. Robinson이
요한복음을 새롭게 관찰해 보자(New Look) 혹은 The New Look on the Fourth Gospel 이라는 paper를
옥스포드에서 읽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캠브리지 신약학자였던 P. Gardner-Smith라는 학자의
조그마한 책(1930년)에 자기의 이론적인 기반을 쌓은 것이다. P. Gardner-Smith는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관계를 정확히 규명하기 위해서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공통점들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가령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 이것은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공통점이다.
그런데 공통적인 자료에도 자세한 정도에 있어서는 차이점들이 발생한다. 가련 사람들 이름이라든가
또는 풀이 났다든지 하는 주변적인 것에 차이가 발생한다.
이름이라든지, 주변 상황 들에 대한 자세한 점들에 있어서 공통점 내에서 발생한다.
그러면 앞에서 이야기한 Old Look 즉 요한복음의 옛 견해에 의하면 차이점들은 어떻게 해서
발생했다고 해야 되는가? 그것은 요한이 그의 신학적인 이유로 고쳐 썼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아무리 보아도 신학적인 무슨 의미가 없다. P. Gardner-Smith는 적어도 여기서 무엇을
발견하게 되느냐면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차이점들은 요한이 신학적인 이유로 공관복음을 고쳐서
발생한게 아니라 요한은 이 자료에 있어서 공관복음과 전혀 다른 전승을 근거로 쓰여진 책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을 보고 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으로 부터 독립된 전승에 근거한 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의 역사성을
그것이 공관복음과 다르다는 이유로 무조건 배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New Look의 운동
즉 C. H. Dodd 학파는 요한복음이 공관복음과는 독립된 예수에 대한 독자적인 자료를 가지고
쓰여진 책으로 보고 요한복음의 역사성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과 더불어 일어난 것이 소위 ‘솜 크리티시즘’과 ‘일레이션 크리티시즘’이 이제 점점 일반적으로 받아
들여지게 되면서 공관복음도 순전한 역사책이 아니라 이것도 역사적인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빛 아래 재해석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포하는 역사책이면서 케뤼그마(κηρυγμα)의 책
곧 신약의 책이라는 말이다. 요한복음만 신학적인 성격을 가진게 아니고 공관복음도 신학적인 성격을
가졌다는 깨달음이 점차 학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신학적인 심오함이 더 많다고 해서
요한복음은 전적으로 신학적인 책이고 공관복음은 전적으로 역사적인 책이다 라는 아주 단순한
옛 견해는 포기되고 모든 복음서들이 역사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신학적으로 재해석 되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포하는 케뤼그마(κηρυγμα)의 책이다, 신학의 책이다 라고 깨달음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역사성을 뒷받침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성서고고학이다1).
앞에서 말했듯이 공관복음은 예수의 갈릴리 활동을 많이 보고하는 반면에 요한복음은 남부 팔레스틴
(유대)에서의 예수의 활동을 많이 보고한다. 요한복음에 있어서 지리적 장소와 이름을 살펴 보면
요한복음이 남부 팔레스틴(유대) 지방을 아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 판명이 된다.
고고학적으로 요한복음이 언급하고 있는 지역들이 많이 확인이 되었다. 가령 요한복음 5장에 솔로몬의
행각이 있는 베데스다 못이 고고학적으로 발견이 되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못은 신학적인 이유로
요한이 창작해낸 정도로 알았는데 그것이 고고학적으로 발굴이 되었다. 이런 지리적 장소와 이름들이
고고학적으로 많이 확인이 되었다. 이 말은 요한복음이 예수의 남부 팔레스틴(유대) 지방에서의
활동에 대한 상당한 신빙성 있는 자료들을 근거로 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래서 고고학적인 발견도 요한복음의 근본적인 역사성을 확인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이다.
분명히 요한복음은 설교의 책이다.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에 대한 깊은 묵상(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빛 아래)
끝에 완성된 책이다. 그래서 묵상의 겹이 여러 겹이 있다. 그래서 묵상의 겹을 하나씩 하나씩
양파 벗겨가듯이 벗겨가면 그곳에는 우리가 아주 부인할 수 없이 아주 단단한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이와 같은 역사성과 신학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책이라는 것이다.
(3) 요한복음의 사상적 배경
요한복음의 배경은 세 가지이다. 하나는 구약과 유대교적 배경 그리고 헬라적 배경. 요한복음의 세계는
분명히 유대교적 세계이다. 요한복음 전체에 이방인의 세계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의 활동 무대는 유대인의
세계이고 요한복음에 계속 언급된 것은 구약이고, 유대교의 제도이고, 유대교의 율법이고, 유대교의 관습들이다.
가. 구약적 배경
요한복음에 있어서 구약의 사용이 아주 독특하다. 공관복음에 있어서 구약의 사용이 대개 비슷하지만 특히
마태복음에 있어서 현저하다. 예수의 어떤 가르침 또는 어떤 행적을 기술하고는 ‘곧 그것은 성경의 이 말씀을 응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예수의 말씀이나 행적이 성취한 구약의 장, 절을 말한다. 그래서 특히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가 어떠한 구약의 예언을 성취했다고 확실히 밝힌다. 예수가 성취한 구약의 말씀 중 장, 절을 말한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그런 것이 거의 없다. 요한복음에 있어서는 예수의 십자가에 달릴 때 몇 번 나온 이외는
마태복음 처럼 예수의 행적 하나를 기술하고, 가르침 하나를 기술하고는 이것이 구약의 무엇을 성취하기 위해서
한 것이다 라고 구약 장, 절을 기술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있어서 예수의 가르침이나 행적을 기술함에
있어서 우리가 조금만 깊이 연구해 보면 예수의 가르침이나 행적 뒤에는 엄청난 구약의 사상들, 또는
구약의 예언, 전승 등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가령 예수께서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가서 ‘내가 세상의 빛이다’고
선언한 것은 구약의 한 절을 예수가 성취하기 위해서 이렇게 선언했다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구약에 면면히 흐르는 중요한 사상, 초막절의 신학 전체를 예수가 성취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나. 유대교적 배경
유대교적 배경(구약에 근거하고 있지만)이라는 것은 요한복음에 있어서 성경 해석에 있어서 일부 랍비들의
토론 양식과 상당히 비슷한 점도 있고, 또 Targum랍비들이 구약을 아람어로 번역할 때 구약을 많이 해석을 했는데
그 해석과 비슷한 것들이 꽤 많이 나타나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쿰란 문서2)와 요한복음이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 이 문서에 보면 빛과 어두움 또는 진리와 거짓 또는 영, 생명 등의 어휘가 요한복음에도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전에는 이런 어휘들이 헬라적 배경에서 왔다고 했는데 분명히 유대 문서인 쿰란 문서에 중요하게
나타난 뿐만 아니라 그런 어휘들이 대변하는 이원론(빛과 어두움, 진리와 거짓)적인 사고방식이 분명히 나타난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A. D 1세기 말에 순전히 헬라적인 배경을 가진 공관복음을 개작해서 쓴 신학적인 책이
아니라 아마 유대교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하는 공관복음과 전혀 독립적인 예수에 대한 자료들을 근거로 한 역사성이
상당히 있는 책일 것이다 라는 결론을 낳게 한다. 그래서 구약과 유대교가 요한복음의 근본적 배경이다.
다. 헬라적 배경
요한복음의 배경이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헬라적 배경도 있다. 그런데 헬라적 배경은 여러가지로 나눈다.
플라톤주의와 스토아 사상 또는 영지주의(Gnosticism) 또 신비종교, 헬라 유대사상3) 코티스 코메티콤이라 해서
허메스(Hermetica) 책과 요한복음의 사상 그리고 그 어휘들을 비교해서 요한복음의 헬라적 배경을 규명할려는
많은 노력이 있었다. 가령 요한복음 주석 중 가장 중요한 주석이 불트만의 요한복음 주석이다4).
그러나 1950년대 이후로 영지주의나 신비종교들은 요한복음 이후에 실제로 크게 발전한 종교운동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가 되었다. 물론 신약시대(요한복음 동시대)에 영지주의가 점점 발전하기 시작하지만
그런 영지주의를 이제 막 발생하는 영지주의라고 한다5). 그러나 완전히 발달한 영지주의는 사실 A. D 2세기
중반이후라고 하는 컨센시스가 거의 이루어져 가지고 영지주의에 호소해서 요한복음을 해석하려는 운동은
많이 줄어 들었다. 이런 의미에서 불트만의 주석 책은 상당히 구식이 되어 버렸다.
특히 불트만의 주석 책에 있어서 요한복음의 역사적인 평가에 대한 것은 믿을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불트만의 책이 지금도 읽을만 하고 도움이 되는 것은 신학적인 묵상의 깊이와 통찰력은 누가 따라
잡을 수 없을 만큼 깊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불트만의 역사적 평가는 배울게 하나도 없다.
불트만에 의하면 요한복음은 역사성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불트만의 주석을 읽는다면 역사적 평가는
눈여겨 볼 필요가 없고 그가 신학적으로 요한복음의 말씀들을 묵상을 하는가? 여기에서 얻는 통찰력과
그가 어떻게 요한복음을 근거로 설교하는가 하는 것은 배울게 참 많이 있다.
요한복음 해석에 있어서 불트만과 C. H. Dadd는 아주 쌍벽을 이루는 사람이다.
둘 다 틀린 것이 많이 있지만 이들의 묵상을 깊이, 신학적 해석에 있어서 통찰력 등은 우리로 하여금
요한복음을 훨씬 더 깊이 이해하게 하고, 오늘 우리 청중들에게 의미있게 설교하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보편화된 일반적 헬라 이원론(이것이 플라톤 사상에서 나옴) 사상이 당시 헬라 사람들에게 널리
퍼졌던 보편적인 세계관은 존재론적인 이원론(위에 세상에 속하는 Idea세계)과 Idea세계의 모조품 또는
그림자로 보는 이 세상을 위, 아래층으로 보는 현상의 세계를 가르는 것이다. Idea의 세계가 실제가 있는
그리고 본질적 세계(essence)이다. 그리고 현상의 세계(phenomena)로 가른다. 우리 눈에 나타날 따름이다.
마치 실제인 것처럼 나타날 따름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환상의 세계이다.
본질적인 것이 아닌데 우리에게 마치 본질적인 것같이 나타날 따름이다. 그리고 또 다른 세계가 있는데
그것은 영혼의 세계이다. 또 시간의 세계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영혼의 세계는 불변의 세계이다.
시간의 세계는 변화의 세계이다. 변화의 세계이기 때문에 낳고, 병들고, 죽는 고난의 세상이다.
영혼의 세계는 변화가 없다. 여기에는 낳고 늙고 죽는게 없다. 뿐만 아니라 이 세계는 빛의 세계이다.
그래서 이것은 진짜 세계이고, 시간의 세계는 가짜 세계 즉 암흑의 세계이다.
이런 식의 이원론적 세계관 이것이 플라톤 사상이라고 한다.
플라톤의 이름을 모르는 헬라 사람들도 대개 이렇게 생각했다. 이것이 당시 보편화된 사상이었다.
<보기1>
essence(본질의 세계) reality(실제의 세계) 영원 - 자기 본향
??????????????????????????????????????????????????????????????????????????????
가짜세계/모조품
phenomena
(현상의 세계) |
세 상
감옥,타향,변화,
물질,시간 |
←영혼(인간의 진정한 자아)
↑
지식, 지혜, 철학 |
이 사상이 유대교에도 영향을 많이 끼쳐서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쿰란 문서에도 일부 이런 이원론이 발생한다.
이것은 존재론적인 이원론인데 구약과 유대교적인 이원론은 원래 시간적인 이원론이었다.
이 세상, 이 세대, 오는 세대 등 하나님께서 종말에 개입하셔서 이 세대를 심판하시고 구원의 세대를 연다는
식으로 하는 시간적인 이원론이 원래 유대교적 이원론의 사상이었는데 알렉산더 대왕이 B. C 326년 팔레스틴을
정복한 이래 팔레스틴 유대인들은 예수님 당시까지(350년 정도) 헬라 사람들의 지배를 받고
헬라 문화권에 들게 했다. 그래서 헬라적인 이원론이 팔레스틴에도 많이 침투를 했다.
요한복음에도 두 가지가 나타난다. 그런데 세계관을 본질의 세계로 설정하면 여기에 상응하는 인간관은
인간은 Idea의 세계(빛의 세계)에 속하는 reality(실제)인 우리의 영혼이 물질의 세계에 속하는 몸에 타락해서
갇혀 있는 것으로 본다. 이것이 인간이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이다. 이른바 인간의 타락이다.
영혼이 어떻게 된 셈인지 몸 속에 갇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바 대로 헬라어로 소마(σωμα, 무덤)이다.
이것이 헬라의 인간을 대표하는 짧은 문장이다. 몸 곧 영혼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영혼은 진짜 Idea의 세계에 속하고 영혼의 세계에 속하는 진짜 생명력 있는 것이 죽음의 세계(환상, 어두움의 세계)에
속하는 물질인 우리 몸 속에 갇혀 있어 가지고 장소적으로 고정이 되고, 시간;변화의 노예가 되어서 낳고,
병들고, 늙고, 죽는 인간의 고난이 발생한다.
보기와 같은 세계관이 주어지면 인간간은 이렇게 설정이 된다.
그래서 인간의 고뇌는 진짜 우리 생명인 영혼이 우리 몸에 갇혀 버린 것이다.
위와 같은 사고 구조에서 인간관이 설정이 되면 구원론은 영혼이 몸에서 해방이 되어서 Idea의 세계(본향)로
복귀하는 것이 구원이 될 것이다. 영혼이 우리 몸에 갇혀 있는데 몸에서 해방이 되어 가지고 본향(Idea의 세계,
본질의 세계, 영혼의 세계, 빛의 세계)으로 복귀하는 것이 구원이다. 이러한 구원론이 교회의 신앙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쳐서 우리 한국에서도 구원론이 이런 식으로 되어 있다. 몸은 죽어도 영혼은 구원 받아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헬라적 사고를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헬라사상(플라톤 사상)은 몸에 갇힌 영혼이 몸에서 해방이 되어서 본향으로 복귀하냐면 철학을 함으로서
다시 말하면 지식, 지혜를 얻음으로서 구원 얻는다고 한다6). 그러면 누가 철학할 수 있는가?
누가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 모든 사람이 다 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이 등급이 매겨진다.
어떤 사람들은 물질(몸)적인 요소가 너무 강하다. 다시 말하면 영혼이 거의 죽어 버렸다.
그래 가지고 자기 본향이 본질의 세계라는 것을 모르고 환상의 세계(현상의 세계)가 진짜 세계인 줄 알고
그 속에서 가치를 추구하고, 무엇을 할려고 발버둥 친다. 이런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 철학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엘리트들만 이 세상이 사실은 그림자(모조품, 현상,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이 세상에 집착(attachment)하지 않고 자기 본향에 대한 기억을 하고, 이해를 가지고 본향으로 되돌아 가려는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철학을 하고, 지혜를 쌓아서 지식을 얻음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것은 대개 현 물질의 세계에 대한 부인을 동반한다.
그래서 윤리적으로 생각한다면 상당히 금욕주의를 동반한다. 왜 그러냐면 이 세상의 가치들을 추구하면 안된다.
이런 것은 다 환상에 불과하다. 이 세상에 자꾸 정을 주고 이 세상의 가치들을 자꾸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혼을 뺏기면 본향으로 못들어 간다. 그래서 플라톤적인 사고 구조에 의하면 상당히 엘리트주의적이고
금욕주의적인 도덕을 수반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식이 구원의 수단이다.
이 점에 있어서 플라톤주의 하고 인도 종교(불교, 힌두교)의 본질과 아주 비슷하다. 왜냐하면 둘 다
아리안 족속들의 사고 구조이고, 종교관이고, 세계관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이들도 일원론에서 이원론으로 넘어가지고 본질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를 나눈다.
그래가지고 현상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시간의 세계에 있으면 영원동안 회귀한다고 한다.
이런 것을 극복하려면 본질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인도 종교는 수레바퀴로 나타낸다.
본질은 우주의 중심이다. 그래서 수레의 기하학적인 축으로 나타낸다. 수레의 기하학적인 축이 안도는 것처럼
변화없는 세계이다. 그런데 본질이 이렇게 투사되어서 또는 본질로 부터 멀리멀리 소외되어서 존재하는 것이
현상으로서 우리들의 자아이다. 그러면 수레바퀴의 겉은 돌고 돈다. 그래서 변화한다.
그래서 인간의 낳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뇌가 시작이 되고 영원한 윤회의 괴로움이 시작이 된다.
이렇게 인간관, 세계관이 설정이 되면 여기서의 구원은 현상의 세계에서 강력히 탈피해서 본질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이다. 이런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이것은 자아를 없애는 것이다.
그래서 열반의 세계를 몰아경지, 무아경지(자아가 없어짐)적별된다. 그런데 지식으로 한다.
힌두교나 플라톤 제일 중요한 구원의 방법이 지식이다. 시간의 세계에서 변화가 없는 영혼의 세계로
영혼이 회귀해야 하는데 그것은 지식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보편적인 헬라 사상이었는데
요한복음에 이러한 사고 구조를 표현하는 어휘들이 꽤 많이 나타난다.
가령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가 위에로 부터 오신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니고데모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가? 우리 말로는 거듭나야 한다7). αγωθεν이라는 말이
위로부터 나야한다는 말도 되고, 다시 난다는 말도 된다. 둘 다 된다. 또 영생이라는 말이 얼마나 많은가?
또 본질(진리, αληθεια, reality)이라는 말도 많다.
또 요한복음에서 강조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강조되었다.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계시한다. 그리스도를 알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된다.
아는 것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영생을 가져온다. 요한복음에 영생이 무엇으로 정의되어 있는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러한 어휘들과 사고 구조는 보는 바와 같이 플라톤의 사고 구조와 아주 유사하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제일 첫 머리에서 부터 그런다. 요한복음 1:1-18 까지가 λογο?의 찬송시라고 할 만큼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λογο?로 그리고 있다. λογο?는 플라톤 철학이나 스토아 철학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플라톤, 스토아의 세계간, 인간관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1:1-18 까지의 λογο?개념을 플라톤 사상으로 또 스토아 사상을 염두에 두고 읽어도
아주 일관된 의미가 있다. 그런데 사실은 λογο?라는 말을 구약과 유대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혜 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으로 대치해 읽어도 일관된 의미가 있다.
사실은 정확히 말하면 요한복음 1:1-18까지를 구약과 유대교의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말씀 사상에 비추어서
읽으면 일관된 의미가 있다. 그런데 λογο?를 플라톤적인 스토아적인 사상을 염두에 두고 그 빛 아래 읽으면
어디까지 일관된 의미가 있느냐면 요한복음 1:13까지 의미가 있다. 14절에 와서 파격적이다.
14절 λξ-γξζ가 σαρξ가 되었다. 플라톤적인 세계관에 의하면 육신(σαρξ)은 무엇인가? Matter(물질)이다.
이런 존재론적인 이원론의 구조 아래서 reality(Idea)에 속한 λογο?가 물질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물질에 잠겼다. 체포되었다. 몸 속에 갇혔다 하는 것은 있을 수 있으나 영적인 것이
육신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여기에 있어서 우리가 무엇을 알게 되냐면 요한의 진짜 근본적인 배경은
구약과 유대교의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말씀 사상이고 이 사상을 예수 그리스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되었는가를 이제 헬라말을 쓰는 헬라적인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선포함에 있어서 그들의 사고 구조와 그들의 중요한 어휘를 빌려서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약과 유대교적인 바탕 위에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구원의 사건을 헬라적인
사고 구조와 헬라적인 Category들과 헬라적인 개념들로 번역한 것이다. 그 번역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파격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사건은 어쩔 수 없이 헬라적인 이원론을
깨뜨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λογο?가 육신이 되었다 하는 것은 헬라적인 이원론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 구조와 어휘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사건을 설명할 때
진정으로 설명할 때 헬라 사상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을 깨뜨리기도 한다.
사실은 항상 헬라적인 어휘와 구조로 설명을 하지만 결국 헬라적인 사고를 요한복음 전체가 깨뜨리는 것이다.
이게 이른바 복음의 토착화에 가장 중요한 모범이다.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들 가운데서 구약과
유대교 전승 빛 아래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구원을 헬라 사람에게 선포함에 있어서 어떻게
번역을 하고 어떻게 선포하느냐?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대표적으로 예를 볼 수 있다.
요한복음 1:1-18 까지의 예를 보면 요즘 선교학자들이 열심히 이야기하는 토착화에 아주 귀중한 예가 있다.
그래서 선교학을 하고 토착화 논의하는 사람들은 요한복음을 연구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배경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근본적인 배경은 구약과 유대교이다.
구약과 유대교의 전승사적인 맥락에서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구원의 사건을 헬라적인 사고 구조와
개념들을 일부 이용해서 이러한 사고 구조와 개념들로 번역해서 선포한 것이다.
그러니까 헬라적인 배경은 구태여 말하자면 2차적이고 피상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이런 현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과 유대교적인 근본과 그것이 헬라 사람에게
선포되었다는 것 그래서 헬라적인 사고 구조와 개념들을 일부 이용해서 선포되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4) 요한복음의 저작단계
레이몬드 브라운 같은 사람은 다섯 단계를 거쳐서 요한복음이 저작이 되었다고 그런다. 그런데
영국의 복음주의 신약학자인 스티븐 스몰리(Stephen S. Smalley)는 단순화 해서 3단계로 저작 단계를 설명한다.
간단히 소개하면,
첫단계; 요한복음에 예수가 사랑하는 제자로 나오는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그의 제자 또는 그의 제자들에게
예수의 행적(이적)들과 예수의 가르침(말씀)과 그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들을 구전으로 전해 주었다.
사도 요한이 전해 주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사랑하는 제자, 예수로 부터 사랑받는 제자.
두번째 단계; 이 요한의 제자 또 제자들이 이 전승(사도 요한으로 부터 받은 전승)을 처음 썼다.
이것이 요한복음 첫판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우리가 전형적인 요한적 사상이라고 하는 신학적
특성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사도 요한 자신이 전달해준 신학적인 사상들을 발전시킨 것이었다.
세번째 단계; 사도 요한의 죽음 후에 에베소의 요한 교회가 복음서의 최종판을 출판했다.
최종판에 요한복음 1:1-18에 서문(서시)을 덧붙이고 예수의 긴 설교들을 약간 편집하고 요한복음 21장의?
부록을 덧붙였다. 그리고 요한복음 21:24-25에 요한복음의 신빙성을 확인하는 부록을 덧붙였다.
이런 식으로 3단계로 설명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궁극적인 저자는 사도 요한이었고, 사도 요한이
증거한 예수의 말씀들과 행적을 사도 요한의 제자들과 사도요한의 에베소 교회가 더 깊이 묵상하여
좀 더 발달시킨 상태로 첫 판, 최종판의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5) 요한복음의 저작 연대
요한복음 9:22과 16:2에 보면 예수를 믿는 유대인을 유대인들이 유대회당에서 축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축복기도라는 유대인들의 기도 가운데에8) 랍비 가말리엘 2세(A. D 85-100)가 그리스도인을
이단자로 규정하고 축출하는 조항이 나온다. 그래서 요한복음 9:22과 16:2이 바로 이와 같은 가
말리엘 2세의 이런 축출 조항을 반영한다면 요한복음은 A. D 100년 이전에 쓰였지 이후 까지는 넘어갈 수가 없다9).
가말리엘 2세의 규정을 반영한다면 85년 이전에는 쓰여질 수 없다. 이 후에 쓰여진 것이다.
그러면 요한복음 마지막 판이 A. D 85-100년 사이에 쓰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대개 비판적인 학자들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판이 90-100년 사이 쓰였다고 본다. 그런데 앞에 이야기한 J. A. T. Robinson은
A. D 30-50년 사이에 요한 전승이 확립이 되고 예루살렘에서 요한의 첫 복음서 형태가 형성이 되었다.
50-55년 사이에 소아시아(에베소)에서 우리 복음서의 첫판이 출판되었다. 60-65년 사이에 요한 제 2서,
제 3서 요한 제 1서 순서로 쓰여졌다. 그리고 65년 직후에 오늘의 요한복음의 형태
(1장의 서시와 21장의 부록을 겸한 오늘의 복음서의 마지막 판)가 되었을 것으로 본다.
J. A. T. Robinson은 그래서 요한복음 뿐만 아니라 신약의 모든 책들이 A. D 70년에 전에 쓰여진
책으로 주장을 한다. 요한복음도 65년 직후에 쓰여진 책으로 본다. 왜 그러냐면 신약성경 내에 70년 전에
일어난 엄청난 사건(예루살렘이 망하고 성전이 불타버린 사건)이 직접 언급이 안되었다는 이유로
그렇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하나의 큰 획을 긋는 분수령인데 이 엄청난 사건이
신약성경에 직접 언급이 없다는 이유로 그렇다는 것이다. 언급이 안된 것은 그 사건 전에 쓰여졌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도 그전에 쓰였다. J. A. T. Robinson은 독특한 의견의 소유자인데
4복음서에서 요한복음이 제일 먼저 쓰였다고 한다. New Look 운동 전에는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을 보고
썼으니까 4복음서에서 제일 나중에 쓰였고 신학적으로 제일 발달된 것으로 그러기 때문에 역사성이 제일
적은 책으로 보았는데 J. A. T. Robinson은 정반대로 요한복음이 제일 먼저 쓰여진 (65년 직후) 책으로 주장한다.
(6) 요한복음의 저작 목적
요한복음 20:30-31 에 기술 목적을 밝히고 있다. 문제가 되는게 거기에 헬라어로 ινα πιστευ[σ]ητε로 되어 있다.
어떤 사도들은 ινα πιστευητε를 넣고 이렇게 되면 현재 가정법이다. 어떤 유명한 사본들은 ‘σ’가 없이 현재
가정법 그 시제가 가정법으로 되어 있다. 어떤 사본에는 ‘σ’가 삽입된다. 즉 ινα πιστευ[σ]ητε 이렇게 되면
이것이 aorist 가정법이 된다. 이렇게 되면 의미가 달라진다. 만약에 요한복음 20:30 ινα πιστευσητε(현재)로
번역한다면 ‘여러분이 계속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가도록 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독자들은 이미 믿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의 믿음을 북돋우기 위해서 썼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저술 목적이 이것을 강화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만약에 aorist 가정법 즉 ‘σ’를 넣으면
aorist가 되는데 ‘σ’를 넣을 때 번역은 ‘여러분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게 되도록
(믿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요한복음 저술 목적이 전도의 목적이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일차적으로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책이냐 아니면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냐? 목적에 따라 학자들 간에 논란이 있다. 그런데 사본학적으로는 두 가능성이 팽팽히 맞서 있어서
어느 하나를 택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내용들을 간추리고 특성들을 개괄함으로써 혹 전도의
목적이 강한 책인지, 아니면 믿음을 강화하려는 책인지를 살펴 보고자 한다.
가. 전도의 목적 : 요한복음이 전도의 목적이다고 하는 주장
이 주장을 말하는 사람들은 요한복음의 다음과 같은 특성들을 들어서 전도의 목적이 있다고 한다.
대상이 헬라인들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요한복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헬라적인
어휘들과 앞에서 이야기 한 플라톤의 이원론 사상적인 것들이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또 헬라의 종교적인
의식들과 상당히 유사한 용어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가령 λογο?라든지 또는 진리라는 말, 또는 위 아래라는
말, 영, 육신, 몸, 빛과 어두움 등의 이원론들이 헬라적인 이원론들과 비슷하다. 또 요한복음에 보면
메시야라든지 랍비라든지 하는 아람 말들은 꼭꼭 헬라말로 번역을 한다. 또 유대의 절기라든지, 유대의 관습들은
꼭 설명을 해준다. 이런 것을 보면 분명히 요한복음이 헬라사람들을 독자를 삼고 그들을 전도할려고 했던 것이다.
또 요한복음 안에 이른바 보편주의 즉 예수가 세상의 모든 사라에게 비추는 빛으로 오셨다(1:9).
또 1:29에는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표현하고 있다. 3:17에 그는 세상을 구원하시려 오신 것이다.
12:32에 보면 ‘자기가 십자가에 못박혀서 높이 들림받으면 모든 사람들은 자기에게 인도한다.’
이렇게 요한복음에서 세상 전체를 예수께서 구원하시려 한다는 것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자기가 구원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구원의 보편주의를 상당히 강조했다. 그래서 7:35에 예수를 적대하는 유대인들이
냉소적으로 예수가 아마 Diaspora 세계에 가서 헬라인들을 가르칠 모양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요한복음 역설의 비법상 올 날을 말하려는 것이다.
또 예수의 공생애 사역의 클라이막스가 12:20에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헬라인들이 예수를 보겠다고
찾아온 걸로 해서 예수의 공생애 사역이 클라이막스에 이른다. 또 사마리아 사람들이 4:42에 보면 예수를
세상의 구원자라고 선포하고 마지막 예수가 십자가에 달릴 때에 로마 병정들이 예수를 왕으로 놀릴 때
예수의 죄목이 있는데 그것이 전 세계의 모든 언어로 쓰여진다. 당시 공용어로 쓰여진 헬라어로 쓰여졌고,
또 제국의 공식 언어였던 라틴어로 쓰여있고, 또 하나님 백성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쓰이고 해서 세상의
대표인 가이사의 대표인 빌라도가 예수를 온 세상의 언어들로 왕으로 선포하는 것으로 요한복음이
클라이막스에 이르른다. 이런 점들을 두고 요한복음에 있어서 구원을 보편주의라고 하는데
이런 것 보면 헬라 사람들을 전도하려고 요한복음을 썼다는 설이 있다.
(가) 헬라 사람들을 전도할려고 하려는 것이 아니고 헬라 유대인들에게 전도하려고 했다는
설이 강력히 제기된다.화란의 Von 유닉 같은 사람 또는 J. A. T. Robinson 같은 사람들이 강력히 주장한다.
이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요한복음의 세계는 유대인들의 세계이다.
요한복음에는 이방인들이 나타나질 않는다. 12:20에 헬라인들이 예수를 보고 왔다는 소리는 헬라 이방인들이
아니고 헬라 유대인들이다. 남부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들이 Diaspora에 사는 헬라말을 쓰는
유대인들을 헬레네스타인 또는 헬라인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요한복음 12:20에 나오는 헬라인들은
헬라 이방인들이 아니고 헬라 세계에서 헬라말을 하는 유대인들을 주로 말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전체 세계가 유대인이 누구다 하고 도대체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1:32에 세례요한이 온 것은 예수가 이스라엘에게 계시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또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베니게 여자 즉 이방인을 돕는 장면이 나오는데
요한복음에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다. 이것과 가까운 이야기는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자를 돕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마리아 여자는 적어도 아브라함을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반절 유대인이다.
요한복음의 세계는 완전히 유대인의 세계이다. 이 학자들의 강조하는게 요한복음에 있어서 강력한
신학적인 주제 하나가 ‘예수께서 구약과 유대교를 성취하고 그래서 능가하고 대치한다’는 주제이다.
이 주제가 요한복음에 아주 강력히 나타난다.
가령 2장 처음에 가나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져 흥이 깨어버린 상태에서 예수께서 포도주를 만들어서
흥을 다시 일으키고 그 잔치를 다시 생명력을 넣는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마치 유대교가 포도주가
떨어져서 흥이 다 깨지고 생명이 나가버린 잔치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구약과
유대교의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약속한 구원을 성취해서 그 유대교를 능가하고 유대교를 대치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약속의 성취의 시대, 종말에 구원의 시대를 예수께서 새롭게 시작한다는 주제가 요한복음의 내용이다.
그 다음 내용이 예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는 문제이다. 예수께서 ‘성전을 부숴라. 그러면 내가
사흘만에 성전을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신다. 이른바 성전청결은 하나의 표적이다.
예수가 성전의 진정한 의미를 성취하는 것이 표적이다. 성전의 진정한 기둥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Followship을 지탱하는 것이 성전의 기둥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못하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성전에서 제사를 드려서 속죄(용서)를 얻고, Followship을
다시 회복하고 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성전의 기능이다. 그런데 예수가 자기 목숨을 종말에
대속의 제사로 바칠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곧 성전의 진정한 의미를 성전의 속죄제사를
종말론적으로 반성한다. 그래가지고 예수를 통해서 또는 예수의 영을 통해서 예수가 새롭게 계시한 진리로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몸이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이
만나는 장소(처소)가 된다. 예수가 성전 자체이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께서 ‘앞으로는
예루살렘에서도 아니고, 그리심산에서도 아니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가 성전의
진정한 의미를 성취하고, 성전을 근거하는 새로운 예배의 처소(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처소)로 스스로 나타낸다.
그 다음에 3장에 유명한 니고데모 이야기가 있다. 니고데모는 유대교의 가장 고상한 형태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를 찾아와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물어왔다.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요구한 것이 무엇인가?
위에서 부터 난 또는 새로난(ㄶγ εν 하나님의 영으로 새롭게 난) 것에 대해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유대교 자체로는 가장 고상한 형태로도 하나님 나라로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생명으로
직결되지 못한다. 유대교가 인간의 모든 종교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업적의 정점이라면 그 정점의 가장
고상한 형태도 자연적으로 하나님 나라로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생명으로 진화(발전)하지 못한다.
완전히 예수가 계시하는 진리에 의해서, 예수가 가져오시는 영에 의해서 새롭게 나야한다.
유대인 자체가 새롭게 능가적으로 대치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 4장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정통 유대교라고 주장하는 사마리아인도 예수에 의해서
성취되고 능가되고 대치된다. 그 다음에도 5장에 나오는 안식일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께서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성취해서 안식일이 있게 하고 안식일이 안식일 되게 하는 분이다. 또 6장에 유월절 이야기, 7장의 초막절
의미도 예수께서 진정한 의미를 성취해서 능가하고 그런 것을 대치하는 분이라는 주제가 아주 강하다.
구약과 유대교에서의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과 구약과 유대교의 모든 제도들, 또는 종교적 이상들 등을 예수가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한다는 이 주제가 아주 강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헬라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구약과
유대교를 성취하시고 능가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전도용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는 분명히
헬라어로 쓰여있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헬라적인 Cathegory로 번역되어 있다. 그래서 대중적인
플라톤이즘의 체계(위 아래 이원론)를 도입해서 예수의 구약과 유대교의 성취하심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 것을
보면 일반 유대인들(팔레스타인)이 아니라 헬라 말을 쓰고 헬라 사람화된 유대인들을 전도할려고 한 것 같다.
이렇게 보면 예수께서 가령 10장에 자기 양 외에 또 다른 양이 있다고 하는데 다른 양들이 아마 Diaspora에서
흩어진 유대인들을 두고 말한 것 같다. 또 17장에 예수가 자기 양들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이것도
팔레스틴 유대인들 중에 예수를 믿는 자들과 Diaspora 세계에 흩어져서 앞으로 예수를 믿게 될 사람들을
Unity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 같다는 등등. . .
또 가령 요한복음 6장에 오병이어 사건에서 오천명이 먹고 나서 남은 것이 12 광주리나 된다.
여기서 의미하는 12의 상징성은 곧 새로운 이스라엘을 예수께서 구성하실려고 했다.
이런 것들을 들어 아마 요한복음은 헬라 유대인들을 전도할려고 쓰여진 것이다.
(나) 모든 사람을 전도할려고 쓰여졌다는 설.
그러면 이런 설이 있게 되면 마땅히 무슨 설이 나오느냐면 모든 사람들을 전도할려고 했다. 그러기 때문에 앞에서
잠깐 보았듯이 그런 사람들이 조금 있었다. 요한복음이 전도의 목적이라고 주장하는 설과 헬라 유대인들에게
전도하렬는 설을 지원하는 이유를 합쳐가지고 요한복음은 누구나 전도하려고 쓰여졌다는 것이다.
헬라 사람이 읽어도 이해할 수 있고 헬라 유대인들이 읽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그들을 전도 하려고
전술한 책인것 같다고 본다.
나. 믿음의 강화 목적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서 쓰였다 하는 것은 무슨 이유를 드는가? 물론 요한복음 20:30에 보면
현재 aorist 가정법으로 쓰였다(ινα πιστευ[σ]ητε). 그 외에 요한복음의 내용의 특징을 들어서
요한복음이 전도 목적 보다는 벌써 믿는 사람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라는 이유들이 있다.
가장 큰 이유가 유대인들에 대항하는 논쟁이 많다. 앞에서 말한 ‘예수께서 구약과 유대교를 선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한다’는 사상(요한복음에서 아주 중요한 사상)이 평화스러운 어조로 제출된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과 아주 격렬한 논쟁을 통해서 제시된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가령 안식일 논쟁을 보면 요한복음 5장에 38년된 병자를 안식일날 고쳐준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다고 정죄한다. 그래서 예수가 자기를 정죄하는 유대인들과 긴 논쟁을 통해서 자기가 진정으로
안식일 의미를 성취하고, 안식일에 안식일 되게 하는 또는 새로운 안식일이 있게 하는 분이라는 것을 논쟁을
통해서 가르친다. 또 성전에 대한 것도 유대인들과 논쟁을 통해서 예수께서 진정으로 성전의 의미를 성취해서
성전을 대치하는 분으로 스스로를 나타낸다. 또 유월절 오천명을 먹인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중요한 사상(예수께서 구약과 유대교를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한다)
이 유대인과 논쟁하는 형태를 통해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① 이방인들과의 논쟁
그런데 요한복음에서의 유대인들이 누구냐면 예수를 분명히 매도한 사람들이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신령한 하나님 옆에 있다. 곧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이다.
반면에 유대인이라는 말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면서도 모세 율법을 신봉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율법에 호소하면서도 실제로는 모세 율법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모세 율법에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를 통해서 구약과 유대교가 성취되고, 능가되고, 대치됨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에게 적대하는 자들이다. 그러니까 스스로 하나님 백성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하나님께
늘 반대하는 세상의 백성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유대인들이 세상의 대조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유대인이라는 말이 욕설 같았다. 이런 유대인들과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을 이스라엘과 대조시킨다.
그래서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께서 소경을 안식일 날 고쳐 주었다. 그래서 소경은 빛을 받았다.
즉 보게 되었다. 알게 되었다. 예수께서 소경을 안식일 날 고친 것이 sign인데 이 sign은 예수께서 곧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계시를 가져오셔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빛을 가져오신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알게 해서 영생을 얻게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도록 하신 분이라는 것으 보여주는 사건이
안식일에 소경을 고쳐준 사건이다. 이것은 동시에 안식일을 성취한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소경을 고쳐준 사건의 sign 캐플을 이해 못한다. 이적을 통해서 나타나는 계시를 깨닫지 못한다. 그러니까 자기네들이 이해하는 모세 율법에 의해 예수를 정죄하고, 예수를 믿는 소경을 회당에서 축출한다.
여기서 축출한 상황이 중요하다. A. D 70년쯤 부터 묘한 현상이 일어난다. 원래 유대 회당 내에 당시 유대교사
단색채 유대교가 아니었다. 다양한 신학적인 한계성과 좀 다른 신학적인 입장을 표방한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도 나사렛파 또는 예수파 그리고 신메시야파(메시야가 왔다고 주장) 정도로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한 파 정도로 생각해 가지고 회당에 같이 있었다. A. D 70년 쯤(사실은 A. D 70년 전 부터이다)
부터는 여기가 분수령이었다. 이 때부터 유대인 다수가 예수파들을 이단자라고 해서 유대교 회당에서
축출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 당시 유대교에서 축출당하면(팔레스틴에서도 메너리즘이었다.
유대 민족과 유대교는 완전히 Identification동일시 되었다. ) 유대인으로 더 이상 취급 안받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사회에서 완전히 소외되는 불행을 겪게 되었다. 더구나 당시 로마 세계에서 유대교에서 축출당한
유대인은 상당히 핍박을 받게 되었다. 왜냐하면 로마법이 유대교에 많은 것을 양보를 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로마 황제 숭배에 참여 안해도 되고 또 군대 징집을 면제하는 등 많은 특혜를 주었다.
그래서 에수를 싫어하는 자들이 예수를 믿는 자들 즉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의 일파로 인정되는 한 로마법이
유대교에 허락했던 허용을 같이 누릴 수가 있는데, 유대교에서 이단자로 축출해 버리면 유대인이 아니라
이들은 일반 헬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자들로 취급되어서
로마의 국교를 숭상해야 되고, 군대도 가야하는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이게 쉽지 않은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의 은혜(계시)를 입어서 구원을 얻은 소경이 바로 축출당한 소수의 그리스도인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요한복음은 신앙에 흔들리지 말고 소경들 같이 축출당함을 무릅쓰고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을 끝까지 지켰다. 그러니까 독자 여러분도 이렇게 하라는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축출될 위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는 커녕 세상의 대표인 행악자들에게 굴복해 가지고 다시
유대인들과 같이 되어 버리고 신앙고백을 잃어 버리면 얼마나 바보 짓인가? 예수께서 구약과 유대교를
완성하고, 능가하고 대치해서 우리에게 완전한 계시와 완전한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분인데 유대인들의
이런 압력에 굴복하면 안된다. 그러니까 소경처럼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라고 한다.
이것을 결국 믿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과 논쟁을 통해서 예수께서 진정으로
유대교를 완성하고, 능가하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이 히브리서와 성격이 비슷하다.
히브리서도 이와 같은 사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요한복음이 이런 삶의 상황에서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서 쓰여졌다고 본다.
② 세례요한에 대한 논쟁
또 세례요한에 대한 논쟁이 있다고 한다. 가령 사도행전 18:24-19:7까지 보면 에베소에 세례요한을 아는
요한의 세례 운동의 추종자들이 있었던 것이 기록이 되어 있다. 그 다음에 주후 3세기 문서인 쑤도 클레멘타인의
레퀴메이션이라는 책에 보면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고 실제로는 세례요한이 메시야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사도행전 18장과 19장 그리고 최종 클레멘타인의 예를 들어서 역사학자(신약학자)들은 ‘원래 예수가
세례요한의 세례운동(회개운동)에 추종자(요한의 제자)로 시작을 해가지고 어느 싯점에서 요한으로 부터
독립해서 새로운 독자적인 종말의 메시야 운동을 예수께서 했다. 이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의 제자로
넘어왔는데(요한복음 1장 후반부에 있다) 요한의 제자 다수는 예수에게 넘어오지 않고 스승 요한을 선지자로
더 나아가 메시야로 생각을 하면서 요한의 세례운동을 요한이 순교당한 뒤에도 계속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제자들이 경쟁관계가 되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에베소에서도
쓰여진 것 같은데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아볼로까지 요한의 세례를 알게 된다. 아마 요한복음에 쓰이는
소아시아 지역에 요한의 추종자들이 더러 많이 있었던 모양이다’라고 가설을 설정한다.
또 요한복음을 읽으면 요한을 깎아내리고 예수를 추켜세우는 독특한 현상이 있다.
요한복음 1장 후반부에 보면 예루살렘 대표단이 요한에게 와서 ‘네가 메시야냐? 엘리야냐? 선지자냐?’
아니라고 하고 ‘한 목소리’라고 한다. 그 다음에 요한이 예수에 대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증거하고 제자들에게 ‘그는 흥해야 하고 자기는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있어서 요한을 깎아내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추켜 세우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것은 바로 이와 같은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이
진짜 선지자이고 메시야라는 것에 대항해서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헷갈리고 그러니까 이게 아니라
요한은 예수를 증거하는 증거자에 불과했고, 소개자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진짜로는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을 가르치므로 믿음을 북돋우어 주었다는 설이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진정으로 요한복음에 세례요한을 깎아내리는 논쟁이 있느냐? 요한의 증거가 세례요한을
깎아 내리려는 논쟁으로 보아야 되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요한복음에 예수께서 요한을 높이
추켜 세우는게 있다. 그래서 요한을 깎아 내리려고 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