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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경장흥군향우회 원문보기 글쓴이: 일본정벌(안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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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불안했다.
신뢰할 수 있는, 그리고
필요하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수족이 필요했다.
공식적인 계통과 체계를 뛰어넘는, 측근들의 친위 조직은 그렇게 탄생했다.
비법과 탈법, 위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정적의 뒤를 밟고 약점을 캤다.
‘충성’이라는 이름 아래 뭉쳤지만,
비밀을 비밀의 영역에 가두려고 검은돈을 주고받았다.
세상에 그 실체가 드러난 순간,
아슬아슬하게 유지돼온 권력의 정당성도 함께 무너졌다.
<한겨레21>이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 유력한 대선 후보인
박근혜의 측근 리더십을 다시 주목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희끄무레한 장막을 걷어내고 그 리더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망하고자 했다.
여러 차례 ‘문고리 권력’으로 지목돼온 보좌진들과,
그 실체가 여전히 드러나지 않는 ‘그림자 실세’의 이야기를 추적했다.
물음표는, 여전히 물음표로 남아 있다.
판단은 12월19일 투표장으로 향할 유권자의 몫일 것이다.
목포(木浦)의 눈 물
사공의 뱃 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아씨 아롱 젖은 옷 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음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 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지나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성웅 "이순신" 장군의 동상>
유달산에 세워진 목포의 눈물 노래비
이난영이 처음 부른 뒤 오랫동안 애창되고 있는 한국의 트로트 곡이다.
와세다 대학 출신의 20대 무명 시인이었던 문일석은
1935년 조선일보가 오케레코드와 함께 향토 신민요 노랫말을 공모하자
<목포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응모하여 1등에 당선되었다.
흥행의 귀재로 불렸던 오케레코드의 사장 이철이 제목을 〈목포의 눈물〉로 바꾸고
작곡가 손목인의 곡을 입혀 대히트를 기록했다.
가수는 목포 출신의 신인으로 당시 나이 십대 후반이었던 이난영이었다.
이난영 특유의 비음과 흐느끼는 듯한 창법에는
남도 판소리 가락과 같은 한이 스며 있다는 평이 있었다.
결국 이 노래는 이난영의 대표곡이 되었고
이난영의 또다른 노래 목포는 항구다와 함께 목포를 대표하는 향토색 짙은 곡으로 남았다.
목포의 애국가'로까지 불리기도 하고
목포 출신의 대표적 정치인이었던 김대중의 애창곡 이기도 했다.
또한 호남 지역을 연고로 했던 프로 야구팀 해태 타이거즈의 응원가로서도 잘 알려져 있다
노래의 가사와 곡조는 매우 애잔하여 목포항을 배경으로 이별의 끝없는 아픔과 서러움을 그리고 있다
깊은 한과 울분이 숨겨진 〈목포의 눈물〉은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주는 상징적인 곡이었기에
국민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는 해석이 있다.
'한국가요사에서 불후의 명작'이라는 찬사가 있을 만큼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이 노래에는 삼학도, 유달산, 노적봉 등 목포의 지명이 나오는데,
이 중 노적봉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에 대한 일화 깃든 곳이다.
유달산 입구에 노랫말을 적은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첫댓글 이러한 글들 많이 올려주세요,,,,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하시는사업 번창하기를 기원 합니다,,,맛난 술 적당히 드시고요,ㅎㅎㅎ,,,,,
잘 보았습니다. 사진의 인물들을 소개했으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