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의 역사와 문화 I
◎프랑스 제 4공화국
재건의 프랑스(La Ⅳe Republique : la France de la renconstruction): 1945∼1958
1945.10.21 의회선거의 결과: 제 1당으로 프랑스 공산당이 성장한다 (500백만표) 제 2정당은 사회당 4.7Mil표 MRP(1944.11.창설), 극우세력은 110만표를 획득하였다. 1945년 11월 6일 드골은 만장일치로 임시정부 수반으로 추대된다. 1946. 1월 드골은 정당간의 대립으로 사퇴하며 Govin수상으로 교체된다.* 드골은 1940년 6월 프랑스 국민위원회 의장이었고 1944년 임시정부의 수반이었다. 그는 프랑스를 유엔 안보리의 상임이사국 자리를 확보하게하여 전통적인 강대국의 면모를 확인케 하였다. 또한 영국수상 처칠의 후원과 스탈린의 동의로 독일 공동 점령에 참여하여 포츠담체제에 프랑스를 편입시켰다.
드골의 대독강경책은 라인-루르-쟈르정책 Rhein-Ruhr-Saar Politik은 1947년까지 유지되었다. 또한 그는 독일이 느슨한 유럽연합에 편입되고 프랑스가 이를 주도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1946년 6월 의회(NS)선거는 MRP(공화국 연합우파) 558만, 공산당 525만 사회당 417만 극우파 229만명 득표율을 나타냈다. 1946년 6월19일 비돌 Bidault 수상으로 임명되고 드골식 대외정책을 계승하였다. 당시 쟝 모네 Jean Monnet는 경제계획원장으로 임명된다. * 프랑스 4공화국의 내각: 1951년 2월 Pinay내각; 1952년 1월 Faure 내각; 1952년 3월 Pinay 내각; 1953년 1월 Mayer내각*1953년 4월 지방선거에서 공산당 제 1당 28.8 드골파 RPF는 3/2 지지파를 상실한다.; 53년 7월 Laniel 내각; 53년 12월 Coty 대통령임명
프랑스 제 4 공화정(1946-1958년)의 성립과 독일문제
1946년 10월 13일 제 4공화국 헌법(1789년 프랑스 헌법정신 계승)은 입법기능 강화된 의회중심주의와 의원 내각제를 유지하였다. 대통령은 양원에서 추대하고 절대적 권력사용을 억제하였다. 레옹 불륨 Leon Blum 사회당수가 수상으로 임명되고, 대통령은 Vicent Auriol이 추대되었다. *1946년 4월에 드골은 공화파 RP당을 창당하면서 국민투표를 통한 초당적 대통령제 촉구한 바 있다. 따라서 그의 정계은퇴는 4공화국 헌법의 채택으로 불가피한 것이었다.*1946/47년 3당합작의 연립내각(사회당, 드골파, 공산당)으로 출발되었다.당시 국내 정국은 계속적으로 불안정하였고 정파간의 의견은 대립되었다. 1947년 1월 비돌 Bidault 수상이 사임한다.
1947년 초 불륨 L.Blum 내각의 정책방향은 '제 3세력'으로서 유럽연방 또는 유럽통합론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즉 미.소의 양극체제에 대항하기 위한 영국과의 동맹을 통해 '제 3세력의 유럽통합론'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특히 독일의 산업 및 경제적 잠재력이 유럽통합 차원에서 절대적으로 유용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는 유럽경제의 부흥과 밀접한 관련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프랑스가 마샬플랜을 수용하고 서유럽 안정화 계획에 동참하면서 기존의 유럽통합론은 변화과정을 거쳐야만 하였다. 사실상 프랑스는 1948년 봄 독일의 분단과정에서 기존의 강경책인 드골정책을 결정적으로 수정하여 변화된 독일 및 유럽상황을 고려하여 영미세력과 같은 노선을 택해야 만 했다. 이는 프랑스가 제 3세력으로서의 유럽통합론을 선택하는 결과이기도 하였다. * 프랑스 의회는 1948년 3월 11일 유럽연합 울타리안에서의 서독정부의 성립안에 찬성하였다. 419:183(공산당은 반대표) 그러나 프랑스는 안보와 경제문제를 고려하여 서독정부가 지방분권적 요인 강화된 반 중앙집권적인 정부형태가 유지하고, 루르지역의 국제화는 유럽통합에 기여되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한다는 점을 끝까지 주장하였다. 또한 쟈르지역은 이후 선 경제적 후 정치적 프랑스에 통합되는 원칙을 고수하였다. (쟈르의 귀속문제: 주민투표를 통해 1955년 독일에 복귀한다.)
*1948년 6월 프랑스의 독일정책의 수정 1단계: *유럽통합론으로 코스 전환 결정 (베를린 봉쇄와 연관) * 1948년 11월 슈만내각의 성립 * 1949년 4월 9일 워싱턴회담 (트리죤 회담: 서독점령지의 통합을 목표)*내용:루르 규약: 반 카르텔화, 서연합국 통제하의 투자문제, 점령규약, 산업시철철거 제한, 계속적인 비무장화 원칙
* 프랑스의 대독 정책의 결정적 수정 2단계: 1949/50년 슈만계획으로 가시화: 1950년 5월서유럽의 초국가적 기구설립 계획 *영국 참가 없는 유럽통합론: 프랑스의 주도적 위치확보 전략 *1948년 7월 이후 프랑스 Robert Schuman 슈만 플랜: -Jean Monnet 장 모네가 기초(경제학자): 유럽통합의 기초골격으로 1950년 5월 성사됨: 1951년 로마조약이 체결되고, 6개국( 이,서독, 베네룩스,프)이 참가한 ECSC(유럽철석탄강공동체)가 1952년 발족된다: 공동체는 어떤 회원국에도 간섭받지 않고 가격의 책정, 원료의 배정, 수출할당에 전권행사가 가능하였다. 특히 루르지역의 석탄과 알사스-로렝지역의 철광석의 결합은 독불관계의 정상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초국가적 협력기구의 역할은 당시 서독의 아데나워 수상과 프랑스의 슈만외상 그리고 이탈리아의 가스페리 총리의 협력하에 증대되었다.
* 통합 배경: 1940년대 후반 프랑스의 국내적 경제문제는 미국에 의한 독일의 배상동결과 Demontage 제한으로 더욱 어려워졌다. 루르석탄은 프랑스 경제재건에 -특히 알사스의 철강생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이었다. 당시 철강석은 65.5% 감량생산하고 있었다.또한 1950년 초 쟈르지역의 프랑스의 귀속문제는 아데나워 수상이 절대적으로 대등한 위치를 요구하면서 난관에 봉착하였다. 특히 1950년 5월 10일 미국무장관 Dean Acheson 에치슨은 연설을 통해 쟈르지역의 독일로의 귀속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Monnet plan에 따라 Montan-Union이 성립되었다. 그는 독일산업시설과의 협력(특히 석탄과 철강)을 통해 독불화해와 제 3세력으로서의 유럽통합이 점진적으로 가능하다는 계획을 마련하였고 슈만외상은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슈만은 1950년 5월 9일 연설을 통해독불의 적대적 관계는 극복되고 청산되어야 한다는 냉용을 발표하였다. 특히 “생산의 단결: 'Solidaritaet der Produktion'만이 유럽석탄철강공동체를 결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므로써 독불화해의 협력체계가 가동되었다. 이제 프랑스는 전통적인 독일약화책을 포기하고 서유럽의 경제통합 및 나토차원의 정책을 수행하여야 했다. 이후 1959년 드골은 독불관계의 정상화에 노력하여 1963년 독불 우호조약을 성사시킨다.
◎프랑스의 독일정책 1943-1949
프랑스의 독일정책에 관한 문제점 (Kirsch)* 자료와 정보의 부족: * 사실상 점령 기간 독일정책의 목표를 전체적으로 규정한 정부의 공식문서와 포괄적인 프로그램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수많은 Communique, Memorandum 또는 연설문 및 선언서 등을 통하여 변화되고 수정된 독일정책의 대강을 파악할 수 있다. 2차대전 종결전후 프랑스의 독일정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A. 첫 번째는 드골 임시정부에 의해 추진된 대독강경책 -강대국 프랑스의 전통적인 위치로 복귀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목표. *배경:1940년 독일군의 파리점령의 결과 :- 예상 밖으로 순식간에 벌어진 제3공화정의 몰락과 그 엄청난 충격실제로 프랑스인에게 커다란 좌절과 패배를 맛보게 하였다. 따라서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복수심과 적개심은 당연한 국민적 공감대로 나타났다.
B. 두 번째는 상이한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정치적 우선 목표: 독일과의 화해를 통한 유럽연합을 추진하는 독일정책. *드골의 외교정책의 기본목표 (1944-1946): 우선적으로 프랑스의 재건과 독립에 있었다. 첫 번째 중요한 관건: 독일에 대한 안보와 경제복구. * 나찌독일의 패망과 더불어 대부분 프랑스인은 기존의 안보적 공포로부터 해방을 원하였다. * 따라서 독일은 군사적, 경제적으로 약화되고, 또한 독일 점령지의 모든 산업시설과 자원은 프랑스의 경제복구에 원동력의 역할을 해줄 것을 무엇보다도 기대하고 있었다.
* 독일 분할론 또는 해체론: ( 독일국가의 형태: 느슨한 국가 연합: Confederation)을 고수) - 조각간 독일민족국가들은 각각의 독립주권국가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느슨한 연방체제에 편입 (신성 로마제국 때 나타난 국가 형태로 복귀)* 드골파 국민주의자: -1923년 루르점령과 관련된 프앙카레식 강경책을 지지하고, 포츠담 합의에 따른 독일의 중앙집권적 행정체계의 성립을 절대로 묵과 할 수 없었다.
* 드골정부의 목표: 우선적으로 Kontrollrat를 볼모로 잡음 1. 라인강 좌변지역은 독일로부터 분리 -프랑스에 친화적인 라인동맹과 같은 연방형태에 편입 (나폴레옹식 병합) 2. Ruhr지역을 독일에서 분리 -국제화된 행정체계를 유지하면서 루르지역 산업시설을 자국에 유리하게 이용하자는 속셈 3. Saar지역을 프랑스에 할양 - 자국의 경제 및 행정조직에 흡수 통합시켜 장기적으로 프랑스 경제부흥에 이용할 것.
*결과: -1949까지 프랑스의 목표는 부분적 달성 -Saar지역의 프랑스와의 경제통합만이 성사 (국민투표로 50년대 독일 복귀) -루르지역 국제화된 통제기구에 프랑스 참여-독일점령지로부터의 배상과 경제적 이익 확보 (1938년 기준 14억 달러)
* 그러나 이러한 드골의 의도는 이미 1차대전이후 베르사이유 체제의 근본적인 한계성과 관련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독일점령에 따른 프랑스의 경제, 사회적 구조의 파탄 때문에 프랑스는 더 이상 경제적 군사적으 로 강대국의 위치로의 복귀가 불가능해 졌다.
미. 영. 소 중심의 반-히틀러-연합 (3거두 회동)
1943년 이래 독일 및 유럽문제의 구체적인 논의에 프랑스를 의도적으로 배제시켜왔다. 사실상 얄타와 포츠담에 프랑스정부는 초대받지 못하였다. -다만 처칠의 책략에 따라 스탈린과 루즈벨트의 암묵적인 동의에 따라 독일 공동점령문제에 관여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1943년 10월 모스크바 3상회담에 따라 설립된 유럽자문위원회에 독일의 점령문제의 구체적인 합의가 이미 마련된 시점인 1944년 11월에 회원국으로 인정받았다.
드골은 대독강경책의 목표달성을 위해 포츠담 결정에 따라 성립된 독일 점령문제에 관한 최고 의결 및 집행기관인 조절위원회 (Kontrollrat)를 원천적으로 봉쇄하여야 했다. -프랑스는 Kontrollrat에서 거부권을 행사: 독일문제 공동해결원칙에 처음부터 비협조적. *프랑스의 대독 정책에 대한 미국의 반응: 미군정사령관 클레이는 드골 정부에 강한 불만을 표시: “독일문제의 근본적인 걸림돌은 프랑스”라고 비판하였다.
*미행정부내의 고질적인 군부와 외교관의 의견대립* 클레이의 이러한 의견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던 육군성과는 대조적으로 국무성은 프랑스의 국내외적인 정세변화에 주목하면서 프랑스에 대한 유화적인 태도를 취해야만 했다. 번스국무: 미국의 서유럽정책의 근본목표 달성: 프랑스의 역할과 위치의 중요성을 인정-정치, 경제, 안보 및 전략적인 관점에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문제 번스국무는 외형상 포츠담원칙에 따른 미소공조체제의 고수원칙 (독일 중립화 방안), -1947년 3월 모스크바 외상회담이전 까지 프랑스에 대한 정책방향은 결코 구체화될 수 없었다.
프랑스의 대독정책 (1945-1949)의 문제점
프랑스의 4공화국에서 나타난 국내정치의 대립과 변화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 4 공화국의 정국 불안정: * 10개의 좌. 우의 연립정부가 존재하였다. * 결과: 프랑스정부의 독일정책에 관한 목표와 방향은 대조적, 연속성이 없는 혼란한 진행. * 예: 1946/47 공산당, 사회당, 기민당(MRP)가의 연립정부 (Tripartisme)내에서의 각 당의 독일정책은 공개적으로 대립되는 혼란. * 결과: 드골이 정치적인 패배를 시인하고 은퇴 -은퇴이전 까지 드골의 대독강경책(1944-1946)은 사실상 주도적인 입장을 고수.
*프랑스의 한계: 2차대전이후 미. 소강대국 주도의 국제질서하에서 과연 민족국가적인 정책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던 프랑스가 얼마나 외교 및 유럽정책이 독자적이며 자율적인 행동영역을 확보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 제시: * 결론: 1. 국제무대의 힘의 정치로부터 그 본연의 위치를 상실한 프랑스가 지속되는 국내정치의 불안정속에서 대독정책의 정책목표를 수행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 이었다. 2. 국내 정치가들의 상이한 경험과 견해차이: 독일문제의 해결은 처음부터 정책방향에서부터 혼선을 빚고 있었다.
*모스크바 외상회담 1947
-대다수의 학자들 동조 (Willis등) *배경 '1947. 1.17 & 2.1자 Memoranden (미영소에 보낸): 프랑스 대독정책의 상세한 부분 언급: 독일 정치질서와 루르지역의 국제화 문제( 드골식 정책을 고수) -미영의 원칙적 반대: 양보와 타협적 태도로 수정* 프랑스 경제를 위한 루르지역 석탄공급을 원할케 함 (서부점령지의 석탄공급 12%-25%로 상향)* 쟈르 지역의 사실상 프랑스와의 경제적 합병 원칙 인정(소련의 쟈르지역 국제화에 참가를 프랑스가 인정하지 않는 원칙) 1948년 봄 런던 6개국 회담( 실질적인 프랑스의 독일 정책의 전환점): 미영의 독일정책과 공조하는 방향으로 나감: 서부점령지의 경제적, 정치적 통합 (서독의 탄생)
*프랑스의 국내 및 국제적인 요인이 중요한 변수-동서대립 관계속에서의 프랑스의 저울외교 결정적으로 포기*4공화국의 외교정책: 의회와 여론 독일문제가 최우선적 과제): -독일의 재무장과 관련된 프랑스 안보문제 (독일 정부 수립 시 대두)
*런던 의정서: 1948프랑스 의회 비준문제: 프랑스의 여론의 불만 (미. 영의 독일정책과 관련 bizone 1948.11.10: 루르지역의 재산권 독일에 위임 및 루르지역 통제와 행정에 독일인 참여 원칙적 인정: 이후 프랑스의 거센 항의 루르점령조례와 루르통제 권한 프랑스도 동등자격 참가 인정)* 경제적 관점( 달러부족) : 마샬 플랜 수혜 결정(소련 제외): 48년 이후의 국제적 대립 상황 프랑스여론의 변화에 기여: 예 베를린 봉쇄 및 공수작전) 서독의 탄생에 결정적 역할: 프랑스의 변화
*1946년 프랑스의 독일정책 3가지 목표
전통적 관심사의 유지확보1.독일에 대한 안전 확보 2, 경제, 재정적 확보 (미국원조 및 독일점령지 배상) 3. 동서 중재를 통한 전쟁 연합의 유지*결과적으로 환상에 불과한 정책 *1948년 6월 프랑스의 독일정책 변화: (4공화국의 전통적 외교방침에서 변화)원인: 계속된 민족주의적 대립의 결과, 전쟁의 결과 -유럽의 황폐화 및 민족주의 대결의 거듭된 악화란 인식으로 유럽 연합의 필요성 강조) 동서대립과 냉전 등 국제적 환경의 변화
*.독일에 대한 안전보장 2차적 목표로 수정*소련에 대한 안보문제가 우선시(Berlin-Blockade)* 유럽통합의 활성화 방침: 독불화해의 대전재가 필요 (물질적 원조문제와 관련)서유럽의 통합 방향의 주도권 확보:(경제, 안보) 프랑스의 민족국가적 외교 및 독일정책의 수단으로 활용 : 1954년 유럽방위공동체의 결성이 무산됨 *프랑스의 미국 경제적 의존도가 상승: (1946-1949) 프랑스의 외교 및 독일정책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
*프랑스의 대독정책: 1945-1949 :전체적으로 미국에 대한 프랑스의 경제, 정치, 군사적 의존한 결과 *프랑스 경제파탄 -1944년 GNP: 1938년의 55%, 철강 11%: 1945년 중요농산물 (곡식, 감자,) 35% 전쟁이전보다 기간산업 시설의 파괴 *미국의 경제 원조 없이 회생 불가능 (독일 배상문제: 적극적 대안)미국 자본의 필요성: 미국의 자유무역원칙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프랑스 정책 1945-1949
(프랑스 공산주의의 확장을 사전 봉쇄책: 유럽 공산주의 활성화에 대비) -달러외교를 통한 압력방안; 경제 원조 (프랑스 선거: 미국에 유리한 정당 지원: 프랑스 사회당: 소련보다 미국을 지지하는 원칙에서 지원 * 프랑스의 정치 및 경제사회구조는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점진적으로 높아짐 *마샬플랜을 통한 극복 *1946년 전반 blum-byrnes 회담이후: 500만 달러의 경제원조 요청 -1947 후/1948 전: 프랑스 점령지역의 경제적 상황 악화(식량부족)
*드골 강경책의 결정적 포기- 독일에 대한 프랑스 안보문제 보장: *브뤼셀 조약, 나토조약 1949년 4.4,1949년 4.8일 Washington 조약: trizonen 회담에 서명 *결론: *1945년 프랑스의 경제적, 군사적 약화 (전통적 독일정책은 환상에 불과)*1946년 이후 프랑스의 대미 경제 및 군사의존도는 점진적으로 증가, 대가는 미국의 독일 및 유럽정책과 협력체계를 유지, 서독 탄생에 협력해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