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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대전클라이밍동호회 회장
대전산악연맹 이사
등반경기 1급 심판
등반 경력
98년 계룡산 병풍암 개척
02년 천등산 어느 등반가의 꿈 리지 개척
08년 속살바위 업버전(5.13d) 완등
50대 중반 나이에 들어서면 어지간한 사람들은 꿈을 잃는다. 사회적으로나 체력적으로 쇠퇴해 가는 연령이기 때문일 게다. 한상훈씨(54)는 그런 일반적인 통념을 깨는 생활을 하고 있다. 7년 전인 48세 때 5.13급 대열에 올라선 그는 2006년 5.13c급에 진입하고, 이어 지난 8월 등반가들 사이에서 꿈의 경지라 일컫는 5.13d급 클라이머로 등극했다.
그의 등반활동은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자유등반에 빠져든 90년대 말 이후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스포츠클라이밍 대회에 심판이나 운영진으로 참가하는가 하면, 2002년 대전 유일의 실내암장을 세우고, 2006년 말 개장 이후 국내 최대 규모의 인공빙벽으로서 아이스클라이밍 붐을 일으키는 등 화제를 모으고 있는 영동의 송천산악레포츠장과 또한 최근 완공된 대전 월드컵경기장 인공암벽이 만들어질 수 있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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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상훈씨/영동 송천빙장에서 등반 준비중인 한상훈씨(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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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 무릎 부상으로 히말라야의 꿈 깨져
“쑥스러워요. 히말라야 원정을 다닌 것도 없고…. 뭐, 내세울 게 있어야 인터뷰를 하지요.”
취재를 요청하는 전화 통화를 할 때나 대전에서 만났을 때나 한상훈씨는 인터뷰하는 게 너무 쑥스럽다며, “혹시 안 하면 안 되겠느냐”고 손사래를 쳤다. 대전역 앞에서 만났을 때 그는 167cm 키에 58kg 몸무게를 유지하는, 중년 나이답지 않게 매끈한 몸매와 동안(童顔)의 얼굴이 우선 매력적으로 느껴지면서 반면 곰발바닥처럼 두툼한 손에서 강한 파워를 짐작케 했다.
“제가 할 줄 아는 게 달리 없어요. 바위뿐이다 보니까 이제껏 바위만 해온 거예요.”
그는 재작년 가을 열다섯번째 시도에서 5.13c급 루트를 완등해냈다. 선운산 속살바위 ‘베스트 오브 베스트’에서였다. 그리고 올 여름 역시 속살바위에 위치한 5.13d급 업버전 등반에 성공했다.
“마흔여덟 살 때 5.13을 해냈어요. 그 전까지는 아내에게 5.13까지 목표를 달성하면 산에 그만 다니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막상 완등하는 순간 눈이 절로 5.13b로 가지 뭐예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어요. 욕심은 끝이 없나 봐요.”
자유등반을 하기에 그의 체격이나 체력 조건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장이 짧아 아쉬움을 느낄 적이 많다고 한다. 그렇지만 어려서부터 등반해왔다는 게 남들이 지닐 수 없는 장점이라고 그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엉덩이가 커서 몸무게가 많이 나가요. 신체적으로 남들보다 낫다면 손이 좀 크다는 거 하나일 거예요. 그렇지만 어려서부터 등반해왔다는 게 무엇보다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 같아요. 인공암벽에서는 뛰어난데 자연암벽에 가면 쩔쩔매는 친구들이 많아요. 특히 작은 발홀드에 대한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지요. 저는 어려서부터 작은 홀드를 딛는 데 익숙해 자신 있게 밟고 일어서지요.”
그는 직업군인이던 부친 덕분에 어린 시절 여러 곳에서 살았다. 강원도에서 태어났으나 초등학교는 서울에서 마치고, 이후로는 부산에서 살았다. 바위도 부산에서 배웠다. 20대 초 모 대학산악부원이던 선배와 함께 금정산에 놀러갔다가 클라이머들이 준행암에서 바위 타는 모습을 봤다. 무섭기도 하고 재미있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곤 한동안 잊어 먹었다.
그러다 륙색 메고 놀러 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바위에 빠져들었다. 80년대 초였다. 당시 부산 산악계의 활동은 활발했다. 토왕폭 초등을 꿈꾸는 클라이머들도 있었고, 히말라아 고봉을 노리는 산꾼들도 많았다. 그런 분위기는 그를 한층 바위에 빠지도록 했다. 부산 산악계의 원로에게 암벽등반을 배운 그는 나이가 엇비슷하고 배짱이 맞는 산꾼들끼리 모여 벽우회를 만드는 등 열정적으로 등반에 몰입하며 지냈다.
그러자 히말라야 등반의 기회가 왔다. 참랑 원정이었다. 그러나 어이없는 사고로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대원사계곡에 베이스캠프를 마련하고 훈련에 임한 원정대는 지구력 훈련을 위해 치밭목대피소를 거쳐 천왕봉~노고단 왕복 종주 산행에 나섰다.
“선배들이 열심히 노력하면 대원으로 뽑아준다 하기에 물불 안 가리고 훈련에 참가했어요. 그러다 후배 한 명이 상태가 나빠 부축하고 내려오다 무릎을 다치고 말았어요. 치명적이었지요. 한동안 제대로 걷지도 못했으니까요. 조금 나아진다 싶어 2년쯤 지나 설악산에 갔는데 하산길에 또 무릎이 아파오더군요.”
이렇게 히말라야에 대한 꿈이 허망하게 깨지자 20대 후반이었던 그는 당시 운영하던 봉제공장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러나 직원 수가 240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를 키워놓은 상태에서 예상과 달리 주문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자 맥없이 도산하고 말았다. 가방 하나 들고 어린 시절과 젊은 날을 몽땅 보낸 부산을 떠나 서울로 이사했다. 그 때 도움을 준 것이 부산에서 함께 바위를 오르던 자일파트너였다.
“빈털털이가 되어 서울에 오자마자 보름간 인수산장에서 함께 지내면서 바위만 했어요. 그러고나니까 마음이 가라앉더군요. 그 친구 덕분에 재기할 수 있었던 거죠.”
90년, 생활터전을 서울로 옮긴 그는 80년 결혼한 아내와 함께 커피숍을 운영했다. 그렇게 4년쯤 하다 또 다른 산친구가 안성에도 커피숍하기 좋은 자리가 있다 하여 하나를 더 차렸다. 이후 2년간 주말부부생활을 하는 사이 갈등이 생겼다. 돈도 좋지만 부부는 함께 살아야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96년 새롭게 옮긴 생활터전이 지금까지 살고 있는 대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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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송천빙장 개척의 주역
“대전에 오자마자 산악잡지에서 봐왔던 산악인의 집부터 찾았어요. 정말 좋더군요. 당시 국가상비군으로 활약하고 있던 스포츠클라이밍 고수들이 훈련장 삼아 지내고 있어 좋은 기술을 배울 수도 있었고요.”
산을 다니지 못한 6년이란 세월 동안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예전의 등반방식으로는 새로운 루트를 단 한 발짝도 오를 수 없었다. 젊은 날 가락이 남아 있던 그는 빠르게 적응하고 기량도 빠르게 발전해 나갔고, 클라이밍에 대한 애정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 심판으로도 활동하고, 대산련 등반경기위원회 운영위원이나 부위원장으로 대회를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산악인의 집이 문을 닫게 되자 여러 해동안 훈련을 쌓아오던 트레이닝 장소를 잃고 말았다.
“후배들을 모아놓고 십시일반 돈을 모아 실내인공암벽을 만들자고 했지요. 못 먹는 술을 마시면서 어렵게 꺼낸 얘기에 전혀 반응이 없으니까 정말 화가 나더군요. 그래서 정 그러면 내가 혼자 하겠다고 큰소리 쳤죠.”
말 한 마디에 한상훈씨는 엉뚱하게도 2003년 3월 대전시 서구 괴정동 지하에 110평 규모의 실내인공암장을 차리게 되었다. 당시나 지금으로서나 국내 최대 규모였다.
“후배들 앞에서 꺼낸 말에 대해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에서 어쩔 수 없이 만든 거예요. 새로 마련한 건물의 인테리어를 위해 모아두었던 돈을 썼으니 아내가 좋아할 리 있었겠어요. 지난해 8월 말 후배한테 넘길 때까지 4년 반 동안 운영했어요. 인공암벽을 만들 때는 후배 한 명 데려다놓고 운동이나 할 생각이었는데 그게 잘 안 되더군요. 월세와 시설물 교체하는 데만 해도 회비로는 빠듯했으니까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선택하는 게 가장 좋다고들 하지만, 막상 직접 해보니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더군요. 오히려 순수하게 즐길 수 없고, 얽매이게 되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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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송천 산악레포츠장./2세련된 자세로 인공벽을 오르는 한상훈씨./3심판으로 참가한 설악산 토왕폭 빙벽대회(맨오른쪽)./4전국장년부 친선등반대회에서 심사평을 하고 있다.
- 한상훈씨는 지난해 8월 말 실내암장 운영에서 손을 떼면서 이제는 정말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이후 더 많은 일들이 몰아닥쳤다.
“실내암장을 운영하면서 등산교실을 열었어요. 겨울에는 빙벽등반교육도 했고요. 그런데 대전 주변에 마땅한 빙장이 없어 주말만 되면 고민이 되었어요. 그래서 대전 산꾼들끼리 판대나 매바위 인공빙장 같은 곳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대전 주변을 두루 살폈지요. 지난 겨울 인기를 끈 송천산악레포츠장이 그래서 탄생한 겁니다.”
후배를 통해 좋은 장소가 있다는 얘기에 솔깃해 곧바로 달려갔다. 경부고속도로 영동 나들목에서 승용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송천 자연발생유원지였다. 개울가를 끼고 솟아 있는 절벽은 정북향이어서 일단 얼음을 얼리면 여간해서 녹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대부분 군 소유의 땅인지라 영동군의 허가가 필요했다.
“장소만 이용할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하는 생각에 제안서를 만들어 영동 군수를 방문했더니 덜컥 좋다시는 거예요. 재정지원까지 약속하면서요. 그 후로 정말 석 달 열흘은 쫓아다닌 것 같아요. 판대빙장을 운영하는 후배를 찾아가 시스템을 배우고, 펌프 사랴, 배관작업하랴 정말 하루도 편히 쉴 시간이 없었어요.”
그 해 말 40m, 50m, 80m 높이의 빙벽 3개를 만들었다. 송천빙장은 정식 개장도 하기 전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불러일으켰다. 물을 뿌리다 수많은 턱이 생기자 벽면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난이도 또한 한층 높아진 40m와 50m 빙벽이 특히 인기 있었다. 대전 중부권 클라이머들이나 찾으리라는 예상을 뒤엎고 서울과 인천·경기뿐 아니라 멀리 부산과 광주권 클라이머들도 몰려들었다.
이듬해 또다시 영동군수를 찾았다. 대회를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그의 생각은 영동군수배 대회였다. 그런데 영동군수는 이튿날 뜻밖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기왕이면 도 차원에서 충북도지사배 전국대회를 열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올 1월19, 20일 이틀간 열린 제1회 충북도지사배 빙벽대회는 비록 코리안 시리wm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선수가 300명이나 참가하고, 군이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외지 사람들이 송천을 찾았다고 할 만큼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인공빙벽대회답게 독립 철구조물을 이용한 빙벽도 만들었어요. 여러 날 고민한 끝에 생각해낸 새로운 방식의 규정을 적용했고요. 빙벽등반 동호인들이 대회를 체험도 하고 즐길 수 있도록 특히 단체전에 역점을 둔 거죠. 3인 1조의 출전팀 첫 번째 선수는 퀵드로를 직접 걸면서 등반하고, 두 번째 선수는 마지막 퀵드로 외에는 모두 빼내면서 등반해야 하니까 다음 마지막 선수는 거의 뛰다시피 하면서 올라가야 해요. 스릴에 이어 박진감이 넘치는 경기가 펼쳐지는 거죠. 정말 성공적인 인공빙장이에요. 지난 시즌 연인원 3,000여 명의 클라이머들이 찾았으니까요.”
한상훈씨는 전국 여러 등산학교의 겨울 빙벽 교장으로도 자리 잡은 송천산악레포츠장이 산악인들이 사계절 활용할 수 있도록 겨울 시즌이 지나 녹아내린 암벽에 하드프리 코스도 여럿 개척했다. 그러고 나자 새로운 일거리가 생겼다. 월드컵 경기장 인공암벽 공사였다. 이것 역시 그가 추진한 것이다.
대전 지역에 국제 규격의 인공벽이 없어 아쉬워하던 그는 대전 일원에 인공벽을 세울 만한 곳을 찾아다니다 월드컵경기장 외벽이 적지다 싶었다. 타지역 인공암벽의 상황과 인공벽이 세워졌을 때 이용방안 등을 상세히 적은 제안서를 만들어 대전시에 제출하자 좋은 반응이 돌아왔다.
“송천빙장 시즌이 끝나면서 이제 정말 마음 편히 산에 다닐 수 있겠구나 했더니 이번에는 인공벽 공사가 꼼짝 못하게 하더군요. 아무래도 일복이 터졌나 봐요. 폭 25m 높이 17m 규모의 아치형 인공벽이에요. 천장이 아치형을 이루고 있어 비가 내려도 운동할 수 있지요. 8월 말 준공식을 가졌는데 아직 일반인들에게 개방하지는 못하고 있어요. 곧 되겠지만요. 내년에 대회가 열릴 거예요. 비록 전시종목이지만 전국체전 종목으로 열립니다. 그러면 대전 지역의 스포츠클라이밍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도 되고요.”
“5.14요? 목표라기보다는 꿈이겠죠”
그는 한때 개척활동에도 열중했다. 98년 한창 하드프리 등반에 몰입하면서 지낼 때 계룡산 병품암에 스카이라인(5.11a)을 비롯해 8개 루트를 개척하고, 2002년에는 완주 천등산에 ‘어느 등반가의 꿈’(5.11c)이라는 이름의 암릉길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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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선운산 자연암벽. 그는 난이도를 높이려면 실내인공벽 등반이 필수라고 강조한다./2설악산 장군봉 남서벽./3계룡산 병풍암.
- “병풍암은 접근성 좋은 자유등반루트를 찾아다니다 어느 날 어둑할 즈음 눈에 띈 암벽이에요. 밑에서 본 전면 벽 뒤편에 정말 멋진 40m 수직벽이 숨어 있더군요. 후배들과 함께 신이 났죠. 이튿날부터 산길 닦고, 발전기를 짊어지고 바위 밑까지 올라가 전선을 연결시킨 전동드릴로 볼트 구멍을 뚫는 등 힘이 많이 들었는데도 즐겁기만 했으니까요.”
천등산 리지는 98년 가을 탈레이사가르 북벽 등반 도중 사고를 당한 신상만을 추모하는 길이다.
“90년대 말 봐두었다가 2002년 봄 길을 낸 거예요. 상만이와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그처럼 앞만 보고 달린 산꾼은 부러우면서 존경스러워요. 그런 산꾼의 꿈과 제가 이루지 못한 히말라야 등반의 꿈이 누구에겐가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어느 등반가의 꿈’이란 이름을 붙인 거랍니다.”
그는 10여 년간 심판이나 운영위원으로 스포츠클라이밍 대회를 치르는 사이 깨달은 게 많다고 말한다. 그는 “한때 골수 바위꾼들은 스포츠클라이밍을 이단시하고 배척했으나, 이제는 좋은 등반을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트레이닝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요즘 분위기를 전해주었다.
“히말라야 등반을 앞두고도 실내암장에서 훈련을 하는 게 요즘 흐름입니다. 한데 대회의 방향이 변화해야한다고 생각해요. 너무 잘하는 선수들 위주로 대회가 열리다 보니 아마추어들의 참가율이 점점 떨어지고 있어요. 어린 선수들이 대회를 휩쓸고 한때 열심히 하던 사람들이 나이 먹어가면서 빠져나가다 보니 중간층이 없어지고 있고요. 그런 점을 보완하려면 누구나 즐길 수 있고, 스포츠클라이밍의 붐을 일으킬 수 있는 대회를 많이 열어야 할 겁니다.”
아내와 함께 요식업을 하고 있는 그는 요즘도 시간 날 때마다 실내암장을 찾는다. 좀더 나은 등반을 하려면 하루도 쉬어서는 안 되고, 무엇보다 근지구력을 키워야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어떻게 사느냐보다 어떻게 살았냐가 중요하다는 말이 있죠. 그래서 후배들이 형님은 그렇게 살았으니 행복한 것 아니냐 하곤 해요. 그렇지만 산도 열심히 다니면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솔직히 부러워요. 너무 집을 비우곤 해 아내한테는 늘 미안하고요. 그렇게 염원했던 해외원정 한 번 못 나가보고 세월이 다 지나가 버린 것 같아요. 요즘 들어서는 허리도 아파오고. 그래도 하는 데까지 해볼 거예요. 꿈은 이루려 애쓰는 자의 몫이라고 하니까요.”
그는 한때 고리타분한 스타일로 산에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못마땅해 했으나 지금은 그런 따뜻한 분위기의 산악회를 보면 부러워지곤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한 단계 높은 클라이밍에 대한 꿈은 저버리지 못하고 있는 게 한상훈씨다.
“오라는 데가 너무 많아요. 어떨 때는 몸이 몇 개 되었으면 할 적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이제는 정말 시간이 좀 날 것 같아요. 당분간 5.13c, d급 루트에 주력할 겁니다. 실내암장에서 트레이닝하고 기회가 닿는다면 외국의 암장을 찾아 경험을 더 쌓은 다음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 같다 싶으면 더 높은 그레이드에 도전할 거고요. 이제 내 한계에 도전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노력해서 더 높은 목표를 이루고 싶어요. 목표요?
5.14…, 목표라기보다는 꿈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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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 이양반 ㅎㅎㅎ 전국에서 유명인사 아닌가요 ㅎㅎ
칠곡센타의 박근철 클라이머가 더 멋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