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조선후기 이귀 선생에 관한 사항입니다
충정공파가 2곳이 있습니다 판사공파후 충정공파(이귀)와 첨사공파후 충정공파(이현) 이귀 가문은 연평부원군파로 통칭되기도 합니다
가계도(하단의 참고사항 참조) 5대조 이석형(호 저헌, 판중추부사, 좌리공신 연성부원군) 고조 이혼(사헌부 장령 증 이조판서) 증조 이수장(대호군, 증 이조판서) 조부 이기(호 정헌,이조참의, 증 좌찬성 조광조 문인 ) 부 이정화(부사용,증 영의정 연성부원군) 형 이보(증 사헌부 지평, 의병장 임진와란때 금산전투에서 전사) 이갱(통덕랑) 이자(증 호조판서) 본인 이귀(호 묵재,정사공신, 좌찬성, 연평부원군 증 영의정. 충정공) 아들 이시백(호 조암, 정사공신, 영의정,연양부원군, 청백리, 충익공) 이시담(호 사우당, 충주목사, 동지돈녕부사, 증 병조판서, 형 이자의 양자로 출계) 이시방(호 서봉, 정사공신, 호조판서, 연성군, 증 영의정, 증 연성부원군, 충정공) 서자 이시응(훈련원 판관) 이시형(동지중추부사) 사위 김경여(호 송애, 부제학, 문정공)
손자 * 이시백계 이흔(동지돈녕부사, 연창군) 이한(호조참의) 이열 (장악원 첨정, 증 승지) *이시방계 이회(상주목사) 이관(공조참판, 총융사) 이항(동지돈녕부사) 이준(종묘서령)
후손들중 유명인 5대손 이명희(이조참판, 연원군, 증 영의정) 이명식(호 목애, 이조판서, 판중추부사, 청백리, 문정공) 6대손 이유(이조판서, 연릉군, 충목공) 이후(호 구옹. 좌의정, 정익공) 이면응(예조판서) 7대손 이도묵(예조참판) 8대손 이갑(이조판서, 연풍군) 9대손 이조승(예조판서)
10대봉군 1.정화(증 연성부원군) 2.귀(연평부원군) 3.시백(연양부원군) 시방(연성군 증 연성부원군) 4.근(연창군) 5,상주(연성군), 6,영(연은군) 7, 명희(연원군 증 연원부원군) 8,유(연릉군) 9,도양(연천군) 10, 갑(연풍군)
*특징 성격이 강직 호탕하셨으며 의리에 강하셨고 부안기생 매창과의 로맨스도 있는 부드러움도 지니셨으며 당시 67세의 노인인데도 선두에서서 반정을 지휘하셨고 당시 반정 주역들은 모두 정승에 올랐지만 공은 지위엔 초연하신것 같았다 서변방비책을 주장하시어 다가올 호란에 대비하려 했으나 당시 조정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점이 아쉽다
*참고사항 9세 석형(石亨 Suk-Hyung 1415(태종15년)ㅡ1477(성종8년) ) 자(字)는 백옥(伯玉) 호(號)는 저헌(樗軒) 시호(諡號)는 문강(文康) 서기 1415년 음(陰) 10월 10일 생(生) 아버지 대호군공이 궁성에서 숙직하던 날 꿈을 꾸었는데 큰돌에 앉아 있는데 백룡(白龍)이 그 돌을 깨고 나오는 바람에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 기이하게 여겼는데 이틑 날 아침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아기 이름을 석형(石亨)이라 지었다 한다 1441년 세종(世宗) 신유년(辛酉年) 소과(小科)인 생원(生員)과 진사시험(進士試驗)시험에 모두 장원(壯元)을 했다 입격한 사람들은 임금님께 사은(謝恩)하기 위하여 광화문(光化門) 앞에 모인다 생원시험에 입격한 이들은 광화문 왼쪽 협문으로 진사시험에 입격한 이들은 오른쪽 협문으로 들어가는 법도였다 그런데 리석형이 생원과 진사시험에 모두 장원 하였으므로 생원과 진사들이 그를 앞세우고 서로들 자기네 쪽으로 데리고 들어가려고 다투다 도착시간이 늦어지자 세종대왕께서 연유를 물으시니 리석형이 양쪽 다 장원을 하여 서로들 자기쪽 문으로 데리고 들어가려 하느라고 늦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장원을 한 리석형에게는 가운데 문으로 들어오게 하셨다 한다 그 해 대과(大科)인 문과시험(文科試驗)에 또 장원급제(壯元及第) 과거시험(科擧試驗)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한 해에 3장원(三壯元)이 나왔다 하여 세종대왕께서 크게 기뻐하시며 주연(酒宴)을 베풀고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과 지제교(知製敎)를 제수(除授) 하셨다 한다 그 후 호당(湖堂)에 뽑혀 박팽년 이개 성삼문 하위지 신숙주와 함께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셨으며 1447년 정묘년(丁卯)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또 급제하셨고 집현전(集賢殿)에서 13년(1442ㅡ1455)동안 학문연구에 몰두하셨고 지제교는 문과에 급제한 후 14년(1441-1455) 동안이나 겸직하셨다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 이후 수양대군이 권력을 잡자 불만이 컸던 집현전 학사들을 1455년 세조가 즉위하면서 리석형은 전라도 관찰사로 박팽년은 충청도 관찰사등 외직으로 분산시켰다 1456년 집현전 학사들을 주축으로 단종복위사건(端宗復位事件)이 일어났고 복위 사건 때엔 리석형은 전라도(全羅道) 관찰사(觀察使)로 멀리 떨어져 연락을 할 수 없어 화(禍)를 모면하셨고 지방 순시 도중 집현전 동료들의 의거(義擧) 소식을 듣고 익산동헌(益山東軒)에 동료들과 함께 하지 못한 심정을 피력 글로 남겨 놓았다
우시이녀죽(虞時二女竹) 진일대부송(秦日大夫松) 종시애영이(縱是哀榮異) 영위냉열용(寧爲冷熱容) 순임금때의 이녀죽과 진나라의 대부송이로다 비록 슬프고 영화로움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와 솔의 절개 차고 더움이야 있을소냐
동료들을 이녀죽에 죽지 못한 자신을 대부송에 비유 본시 마음은 동료들과 같다는 심정을 피력한 것이다 이 글 때문에 리석형은 고변을 당하여 세조 앞에 끌려와서 국문을 받게 되었다 세조 역시 세종대왕이 아끼던 학자들을 역적으로 처형한 직후이고 몇 안 남은 집현전 인재들까지 잡아들여 국문을 하는 것이 착잡했던지 바로 죄상을 국문하지 않고 엉뚱하게 정몽주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鄭夢周 於麗朝何等人 我朝何等人(정몽주 어려조하등인 아조하등인) 정몽주가 고려에서는 어떤 사람이고 우리 조선에서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리석형이 답하기를 聖周容得伯夷淸(성주용득백이청) 餓死首陽不死兵(아사수양불사병) 善竹橋頭當日夕(선죽교두당일석) 無人扶去鄭先生(무인부거정선생) 주나라 임금은 백이를 용서하여 군대를 풀어 잡아죽이지 않고 수양산에 굶어죽게 놔뒀네 선죽교 머리 그 날 저녁에 정 선생을 부축해 가는 사람도 없었네
주 무왕은 수양산에 들어간 백이, 숙제를 잡아서 처형하지 않고 굶어 죽도록 그냥 놔두는 아량을 베풀었는데 반하여 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으로써 기울어진 고려를 붙잡으려 애쓰고는 있으나 그를 따르는 무리가 없어 당시 이성계에게 기울어진 민심을 되돌릴만한 세력도 이루지 못했는데 구태여 죽일 필요가 있었는가 하면서 정몽주를 죽인 것이 아량이 없는 처사였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세조는 그 답을 듣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당초의 시는 시인이 자기 느낌을 썼을 뿐이니 어찌 탓하랴 하면서 국문을 중지하였다한다 그 후로 예조(禮曹), 형조참의(刑曹參議), 판공주목사(判公州牧使),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대호군(大護軍)을 지내시고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에 다녀 오시고 수문전(修文殿) 제학(提學), 황해도(黃海道),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대사헌(大司憲), 형조(刑曹), 호조참판(戶曹參判)을 거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6년(1462ㅡ1468)이나 연임하셨으며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팔도도체찰사(八道都體察使)를 겸임하셨다 세조(世祖)가 돌아가시자 고부겸청시승습사(告訃兼請諡承襲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오셨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겸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을 지내셨으며 성종(成宗)때에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오르고 정1품(하)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을 지내셨다 세조공신(世祖功臣)들의 견제로 정승(政丞)등 힘있는 자리에는 등용되지 못하고 성종때에 와서 마지못해 좌리4등공신(佐理四等功臣)으로 공신(功臣)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학문적 업적으로 품계(品階)는 정1품까지 오르셨고 당시 8대문장가(八大文章家)의 한사람으로써 성균관(成均館)에서 후진 양성에 힘쓰셨고 청렴한 공직자이면서 덕망 있는 학자였고 풍류를 아는 풍류객이셨다 문집(文集)으로 저헌집(樗軒集)이 있고 완산별곡(完山別曲),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 홍의집략(洪義輯略)등을 저술하고 치평요람(治平要覽), 고려사(高麗史), 역대병요(歷代兵要), 세종실록(世宗實錄), 문종실록(文宗實錄)등의 편찬에 참여했고 의원(醫員)들이 지켜야 할 도리인 의원정심(醫員正心) 내규를 제정하셨고 황화집(皇華集)의 서문(序文)을 쓰고 사서(四書)의 구결(口訣)을 정하는데 논어(論語)의 구결(口訣)을 주관하셨다 서기 1477년 음(陰) 2월 8일 졸(卒) 불천위(不遷位 : 국가에서 영원토록 제사를 모시라는 신위) 처(妻) : 증(贈) 정경부인(貞敬夫人) 영일정씨(迎日鄭氏) 아버지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의 손자이며 사헌부 감찰을 지내신 정보(鄭保)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이시다 서기 1445년 음 1월 16일 졸 1남을 두셨다 장남 : 혼(渾 사헌부 장령, 증 이조판서) *저헌 문강공께서 정1품에 오르시기 전에 돌아가시었으므로 증 정경부인이라 칭한다 처(妻) : 정경부인(貞敬夫人) 고령박씨(高靈朴氏) 아버지는 고려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를 지내신 박임종(朴林宗)의 손자이며 종묘서승을 지내신 박진언(朴眞言) 어머니는 한양조씨(漢陽趙氏)이시다 기일(忌日)은 음 1월 22일 1남1녀를 두셨다 차남 : 호(浩 진사) 사위 : 송여해(宋汝諧 은진송씨 안동대도호부사 증 예조참판 차례2) 족보에 소실 소생의 자식들이 있는 것처럼 기록되었으나 홀로된 누이의 자식 남매를 내 자식처럼 길러 성혼시키셨다 묘소 :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능골 정포은 선생 묘 인근 부인 영일정씨와 합장 후처(後妻) 고령박씨 묘소 : 능원리 능골 문강사(文康祠) :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안골
현재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 병원 본관 앞 길 옆에는 저헌 문강공의 집과 계일지(戒溢池)와 계일정(戒溢亭)이 있던 자리다 집 앞에 연못을 만들고 물을 채워 맑은 물에 자신을 비치어 반성하고 물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조절하여 자손들이나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매사(每事)를 분수에 맞게 하라는 훈계를 계일(戒溢)로 하셨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지고 이 계일지(戒溢池)의 연꽃이 너무나 아름다워 연화방(蓮花坊)이라는 동네 이름까지 불리우게 되었는데 지금은 연건동과 연지동으로 나뉘어져 있다
10세 혼(渾 Hon 1445(세종27년)ㅡ1483(성종14년) ) 자(字)는 이호(而灝) 서기 1445년 음 1월 생 1465년 사마(司馬) 진사(進士) 시험에 입격 1470년 별시(別試) 문과(文科) 시험(試驗)에 급제하셨고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병조(兵曹), 이조정랑(吏曹正郞), 정3품(하)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등을 지내셨다 1483년 음 11월 16일 졸 아들 경장(敬長)의 공으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 평해군수(平海郡守)에 추증되셨고 증손(曾孫) 정구(廷龜)의 공(功)으로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또 추증 되셨다 처(妻) : 증(贈) 정부인(貞夫人) 죽산안씨(竹山安氏) 아버지는 호조판서를 지내신 안중로(安仲老)의 손자이며 사정(司正)을 지내신 안미(安美) 어머니는 양성리씨(陽城李氏) 이시다 1470년 음 5월 16일 졸 3남1녀를 두셨다 장남 : 수장(壽長 대호군 증 이조판서) 차남 : 명장(命長 대호군) 3남 : 복장(福長 호군) 사위: 변사겸(邊士謙 원주변씨 정국공신 첨지중추부사 원양군 양호공 차례2) * 후손 광조(光朝)께서 묘표에 2녀로 적은 것은 오류이다 1526년 정헌공(靜軒公)이 쓰신 할머니 한양조씨 묘표에 할머니 죽산안씨 소생을 3남1녀로 기록하였다 정헌공께서 고모(姑母)님이 몇 분인지를 모를 리 없다 용인리씨 족보 기록 사위 리효돈(李孝敦)은 저헌공께서 보살피고 성혼시킨 생질녀(甥姪女)의 남편으로 추측된다 처(妻) : 증(贈) 정부인(貞夫人) 한양조씨(漢陽趙氏) 아버지는 우의정을 지내신 조영무(趙英茂)의 후손이며 별좌(別坐)를 지내신 조계남(趙繼男) 어머니는 성주리씨(星州李氏) 이시다 1458년 생 1524년 음 9월 4일 졸 3남을 두셨다 4남 : 효장(孝長 대호군) 5남 : 순장(順長 동지중추부사, 증 영의정) 6남 : 경장(敬長 첨지중추부사겸 오위장) 묘소 :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능골 고령박씨 묘 아래 부인 죽산안씨와 합장 후처(後妻) 한양조씨 묘소 : 능원리 안골
11세 수장(壽長 Su-Jang 1462(세조7년)ㅡ1538(중종33년) ) 자(字)는 기옹(耆翁) 1462년 생 연산군(燕山君)의 폭정때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등 사림(士林)들과 가까운 관계로 사화(士禍)를 피해 형제들이 서로 떨어져 벼슬에 뜻을 잃고 초야(草野)에 묻혀 살았다 중종반정(中宗反正)때 정국(靖國) 원종공신이 되셨으며 정3품(하) 어모장군(禦侮將軍) 충좌위(忠左衛) 대호군(大護軍)에 오르셨고 글씨를 잘 쓰셨다 유묵(遺墨)이 전해내려 온다 1538년 음 8월 14일 졸 아들 기(山夔)의 공으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에 추증 되셨고 증손(曾孫) 귀(貴)의 공으로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또 추증 되셨다 처(妻) : 증(贈) 정부인(貞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 아버지는 의금부(義禁府) 경력(經歷)을 지내신 권관(權寬) 어머니는 언양김씨(彦陽金氏) 이시다 숙부(叔父) 호(浩)의 이질녀(姨姪女)이기도 하다 1464년 생 1543년 음 4월 8일 졸 4남을 두셨다 장남 : 기(山夔 이조참의 증 좌찬성) 차남 : 항(山亢 진사) 3남 : 공( 부사과) 4남 : 의( 사헌부 감찰) 세거지(世居地):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京畿道 龍仁市 慕賢面 陵院里) 묘소 :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안골 부인 안동권씨와 합장
12세 기(山夔 Gi 1493(성종24년)ㅡ1547(명종3년) ) 자(字)는 사고(士高) 호는 정헌(靜軒) 1493년 생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선생의 문인(門人) 1513년 사마(司馬) 진사(進士) 시험에 입격하고 1519년 기묘년(己卯年) 식년(式年) 문과(文科) 시험에 급제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셨으며 기묘사화(己卯士禍)때 화(禍)를 모면하고 병을 핑계삼아 사직(辭職) 그 후에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 예문관(藝文館) 봉교(奉敎),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이 되셨으며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오시고 병조정랑(兵曹正郞),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보덕(輔德),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 성균관(成均館) 사성(司成), 군기시(軍器寺) 첨정(僉正), 청주(淸州) 해주(海州) 광주목사(廣州牧使), 사옹원정(司饔院正)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내셨으며 을사사화(乙巳士禍)때 문사랑(問査郞)이 됨에 식음(食飮)을 전폐(全廢)하고 응하지 않으시니 교만하다는 이유로 체임(遞任)되셨고 뒤에 대호군(大護軍), 예빈시정(禮賓寺正),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 이조참의(吏曹參議), 명(明)나라에 진헌사(進獻使)로 종이를 바치고 돌아오시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시었다 양주목사(楊州牧使)에 임명되셨으나 부임하기 전에 돌아가셨다 회재(晦齋) 리언적(李彦迪)과 절친한 친구사이였으며 성격이 강직 하시여 불의(不義)와는 타협할 줄 모르셨으나 후덕(厚德) 하셨다 1547년 음 8월 29일 졸 손(孫) 귀(貴)의 공으로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 되셨다 처(妻) : 증(贈) 정경부인(貞敬夫人) 전의리씨(全義李氏) 아버지는 충익부(忠翊府) 도사(都事)를 지내신 리진효(李震孝) 어머니는 영월신씨(寧越辛氏) 이시다 1495년 생 1547년 음 8월 8일 졸 3남2녀를 두셨다 장남 : 정수(廷秀 문천군수) 차남 : 정화(廷華 부사용 증 영의정 연성부원군) 3남 : 정현(廷顯 천안군수, 숙부 의( )한테 양자로 감) 첫째사위 : 조세구(趙世球 풍양조씨 차례2) 둘째사위 : 윤자운(尹自耘 파평윤씨 현감 차례4) 묘소 :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안골 부인 전의리씨와 합장
13세 정화(廷華 Jung-Hwa 1520(중종15년)ㅡ1558(명종14년) ) 자(字)는 자실(子實) 1520년 생 정5품(상) 과의교위(果毅校尉) 충의위(忠義衛) 부사용(副司勇)을 지내셨다 1558년 음 11월 18일 졸 아들 귀(貴)의 공(功)으로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정1품(상)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추증 되셨다 처(妻) : 증(贈)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 아버지는 화천군(花川君) 권감(權 )의 손자이며 청송부사(靑松府使)를 지내신 권용(權鎔) 어머니는 연안리씨(延安李氏:첨사공파 삼척부사 리말의 따님) 이시다 1522년 생 1612년 음 6월 25일 졸 안동권씨께서는 근면 검소를 신조로 자손들 훈계에 철저하셨으며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한 훈계집이 전해내려 온다 4남3녀를 두셨다 장남 : 보(寶 의병장 증 사헌부 지평) 차남 : 갱( 통덕랑) 3남 : 자(資 증 호조판서) 4남 : 귀(貴 정사공신 좌찬성 연평부원군 증 영의정) 첫째사위 : 원호무(元虎武 원주원씨 시직(侍直) 차례1) 둘째사위 : 유대숙(兪大 기계유씨 감찰 차례2) 셋째사위 : 소천선(蘇千善 진주소씨 차례5) 세거지(世居地) :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묘소 :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각위 원모재(元慕齋) :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14세 귀(貴 Gwi 1557(명종13년)ㅡ1633(인조11년) ) 자(字)는 옥여(玉汝) 호(號)는 묵재(默齋) 시호(諡號)는 충정(忠定) 1557년 음 3월 1일 생 율곡(栗谷) 리이(李珥) 우계(牛溪) 성혼(成渾) 선생의 문인(門人) 1582년 사마(司馬) 생원(生員) 시험에 입격하고 임진왜란때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 및 선유관(宣諭官)으로 도체찰사 류성룡(柳成龍)과 리덕형(李德馨)을 돕고 장성현감(長城縣監}이 되어 입암산성을 수축하고 의병(義兵)들을 모집 후원하였고 김제군수(金堤郡守)를 역임하고 1603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형조좌랑 함흥판관 숙천부사가 되었으나 무고를 입고 수감된 해주목사 최기(崔沂)를 만나본 죄로 이천(伊川)에 유배당했다 그 후 평산부사(平山府使)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개탄 아들(시백, 시방) 및 김류 김자점 심기원 리괄 신경진 리서 최명길 구굉 심명세등 동지들과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주도하여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綾陽君:仁祖大王)을 추대 국정(國政)을 바로 잡았다 호위대장 병조 이조판서 분충찬모입기명륜정사1등공신(奮忠贊謨立紀明倫靖社一等功臣) 정1품(正一品 하)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을 지내셨고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지고 공서(功西)의 영수(領首)가 되셨다 또 기로사(耆老社)에 들어 가시고 인조대왕께서 괘장(掛丈)을 하사하셨다 서울 북악산 너머에는 묵재(默齋) 충정공(忠定公)이 동지들과 칼을 씻고 맹세를 다짐하며 반정을 모의하던 곳이 있다 지금 그곳에는 세검천(洗劍川)이란 냇물이 흐르고 있고 세검정(洗劍亭)이란 정자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세검정동(洗劍亭洞)이란 동네 이름까지 생겨나게 된 것이다(서울 종로구 세검정동) 67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불의(不義)에 맞서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실제로 주도하였으나 반정대장은 젊은 사람들한테 양보하셨고 오로지 위기에 닥친 국가를 위해서 서변방비책(西邊防備策)을 주장하였지만 왕의 우유부단과 집권층의 갈등으로 묵재공의 서변방비책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정묘호란을 맞게되어 힘의 열세에 밀려 어쩔 수없이 후일을 기약 주화(主和)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 후에 묵재공은 세상을 뜨셨다 1633년 음 2월 15일 졸 정1품(상)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 되셨다 불천위(不遷位) 돌아가신 뒤에 병자호란의 수모를 당하게 되자 인조대왕(仁祖大王)께서도 묵재공의 서변방비책을 제대로 시행을 못하고 또 영의정을 낙점만 하고 제수하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하셨다 한다 그의 충성심을 뒤늦게 깨달은 인조대왕은 세자인 효종한테 묵재공 부자(父子)의 충성심을 이야기하여 그의 아들 조암공(釣巖公: 時白)은 훗날 영의정까지 오르셨고 그 후로도 연평부원군가(延平府院君家)는 충성심이 강하여 대대로 10대나 봉군(封君)에 오르게 되었다 그때 당시의 연세로 보아 고령에 반정을 주도하신 것을 보면 남달리 기개와 결단력이 출중하셨던 것 같고 성격이 불의와 맞서는 강직함도 가지셨으나 김제군수 시절 인근에 있던 부안 기생 매창(梅窓)과의 염문설이 있는 것을 보면 풍류를 아는 부드러움도 겸비하신 것 같다 그리고 장성(長城)에서 의병(義兵)을 모집할 때 의병으로 참전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윤진(尹 )의 여식(女息)을 며느리(時白의 妻)로 삼은 것을 봐도 의리를 중히 여기셨던 것 같다 후대에 와서도 숙종대왕(肅宗大王)께서 연평부원군 제사 때 도승지를 보내 추모 하셨다 한다 그리고 아들 및 동지들과 반정을 모의하던 그가 살던 곳은 인조반정 원훈(元勳)이 살던 집이 있던 곳이라 하여 원당(元堂)으로 부르게 되었다(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한성 세거지 : 남대문로 5가 (대우빌딩 자리) 저서로는 묵재일기(默齋日記), 연평유사(延平遺事), 노랄수사(老剌修辭), 서변방비책(西邊防備策) 한음공언행록(漢陰公言行錄)등 서책(書冊)과 영정(影禎)이 전해내려 온다 처(妻) : 증(贈) 정경부인(貞敬夫人) 인동장씨(仁同張氏) 아버지는 증(贈) 참의(參議)에 오르신 장민(張旻) 이시다 1558년 음 5월 25일 생 1622년 음 4월 29일 졸 3남4녀를 두셨다 장남 : 시백{時白 정사공신 영의정 연양부원군, 청백리) 차남 : 시담(時聃 동지중추부사, 증 병조판서, 숙백부 자(資)에게 양자로 감) 3남 : 시방(時昉 정사공신 호조 형조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연성군, 증 영의정, 증 연성부원군) 첫째사위 : 김자겸(金自兼 안동김씨(安東金氏) 차례2) 둘째사위 : 변경윤(邊慶胤 황주변씨(黃州邊氏) 좌랑(佐郞) 차례4) 셋째사위 : 김설(金卨 상산김씨(商山金氏) 수찬(修撰) ) 넷째사위 : 김경여(金慶餘 경주김씨(慶州金氏) 부제학(副提學) 문정공(文貞公) ) 소실 소생으로 2남1녀가 있다 남 : 시응(時膺 훈련원판관, 증 장예원판결사) 남 : 시형(時衡 동지중추부사) 사위 : 안인건(安仁健 순흥안씨(順興安氏) 현감) 묘소 : 처음엔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에 모셨다가 충남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 괘성산(掛城山) 성자봉(盛子峰) 아래로 이장 부인 인동장씨와 합장 성봉서원(盛峰書院) 주향(主享) : 충남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연평부원군파에서 주관) 연영사(延影祠) 주향(主享) : 충남 천안시 광덕면 매당리(연양부원군파에서 주관) 지음서원(芝陰書院) 주향(主享) : 전북 김제시 하동(나씨 문중에서 주관) 오산창의사(鰲山倡義祠) 주향(主享) : 전남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의병들 후손모임에서 주관) 종묘(宗廟) 인조실(仁祖室) 배향(配享) : 서울 종로구 묘동(전주리씨 대동종약원에서 주관) 은천사(隱泉祠) 배향(配享) : 전북 익산시 팔봉동(지평공파에서 주관)
================================ ┼ ▨ 조선후기 이귀 선생에 관한 사항입니다 - 이용호(yh12293@hanmail.net) ┼ │ 안녕하십니까? 이귀 선생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는데 자료가 다소 부족해 글을 올립니다 │ │ 제가 알고 싶은 사항은 이귀선생이 연안이씨 충정공파로 알고 있는데 맞는지 여부와 선생의 가계도(조부로부터 손자까지)는 어떻게 되는지 입니다. │ 또한, 이후 후세중에서 비교적 유명인사라 할 수 있는분이 누구신지 여부입니다. │ │ 다소 귀찮더라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