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빈씨의 사적자료와 역사적 증거문서를 기준으로 한 대구빈씨 족보 편찬 역사
핵심 포인트: 오래된
달성빈씨 세보(무주발행, 180년전)가 달성빈씨족보(의령발행1945년)를 잘 입증하고 있으며, 이 두 가지 족보를 잘 이용했더라면 오늘날
이런한 대구빈씨 씨족의 족보분쟁은 없었을 것이다.
1). 1838년경 달성빈씨세보(達城賓氏世譜: 180년전(무주지방에서 발행)
2). 1925년경
달성빈씨 가승보 達城賓氏
家乘譜90년전(무주
가승보)
3). 1930년경 달성빈씨 가승보 達城賓氏 家乘譜85년전(남해 가승보)
4). 1945년 달성빈씨 족보 達城賓氏 族譜70년전 (의령에서 발행) 가승이 아닌 “족보
(族譜) "
5). 1959년 기해보(己亥譜) 빈씨종족의
족보분쟁의 시작이 된 족보.1975년 공식폐간.
1957~1959년 전국족보
(기해보)를 만든다고 종친일가 모두가 고무되어 환영하였다.
그러나, 족보 편찬과정에서부터 조상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의령지역 (빈무용) 반발하여 族譜 論爭이 시작된 이후….37년여 동안 족보논쟁, 대립, 갈등(대구 묘제 불참, 법정소송 등)이
이어지고 있다.
6). 1975년 을묘보(乙卯譜) 1993년
공식폐간
7). 1980년5월4일 대종회 회의록; 제2대
대종회 빈남을 회장(재임기간1965.5~1985.4)작성
(기해보 편찬 당시 무주계열, 남해계열, 의령계열의 오류가 있다고 자필로 작성 인정하시고, 다음 수보때 수정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첨부자료참조. 그러나, 그의
친자 빈재인 님은 사천지역 일가 위주로 1994년 가짜족보를 편찬 했다.
8). 1993년 대동보 현재 대구빈씨 공식족보
1990년 대종회 결의에 따라
1990~1993년까지 賓氏 대통합 단결을 위해 묘역정화사업 및 족보편찬을 동시에 추진한 결과
1993년 대동보(현족보)가 탄생하였다. 기해보의 가명을 없애고, 1세~9세
까지는 賓氏 事蹟 에 근거하여 1993년 대종회 공식족보인 대동보(현족보)로 수정되었다. 이때 大期祖께서 기해보에서는 5세 였던것이 대동보에서 9세로 수정됨으로 인해 事蹟과 같게 되었다.
9). 1994년 사천지역 발간 대동보(가짜족보)
35년여 동안 족보논쟁, 대립, 갈등을 해소하고 대통합 단결을 위해 묘역정화사업 및 족보편찬을 동시에 추진하였지만 이때 편찬한 족보(대동보)내용과 세워진 시조묘역 묘비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아 또다시
논란이 생겼다.
1994(?)년 사천지역 몇몇 분이 이미 별세하신 제3대 대종회장(賓潤玉 빈윤옥(재임기간1985.5~1994.4))을
임의로 도유사로 내세우고 발행일도 (1993년) 으로 소급하여
위 대동보(현공식족보)와 싸우기 위해 비공식 족보를 편찬하여
아래와 같이 “대구빈씨 대동보”라고 칭하며 가짜족보를 종친들께 판매 하였다.(편찬:빈남현 / 교정:빈재규,빈남준 / 상재:빈재인 등)
사천지역 몇몇 분이 이족보가 비석과 일치한다고 주장하며 또다시 족보논란이 시작되어 20여년간 논란을 계속하다가, 5년전인 2011년 대종회에서 본격 발표하기를 비석과 맞추어야 하므로 이 족보대로 해야 한다고 3년간(여러 차례 회의소집) 주장해
왔다. 이리하여 족보논란은 기해보(1959년)이후 지금까지 50~60 년간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
대구빈씨 족보 발행 역사 2019.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