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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옵는 친구들이여!
2004년 10월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8년이 넘도록 한 달에 두 번씩, 총 200회의 산행을 달성 하였습니다. 일기가 불순해도 집결지에 까지는 약속을 지켜왔던 성실한 친구들, 이게 우리의 삶의 지표가 아니겠습니까.
대부분의 친구들이 회갑을 보냈습니다. 이제부터의 삶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우리의 건강은 본인이 잘 관리하여야 할 줄 믿습니다. 끈임없는 산행으로 멋진 인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쪼록 300회, 400회, 500회, 그 이상의 산행이 계속 진행되어 주위 사람들의 선망이 되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내년에도 더 멋진 산행이 지속되길 기원하면서...
▣ 산행 : "남산순환산책길"
▣ 산행일/집결지 : 2012. 12.15(토)/ 충무로역 3,4번출구
▣ 산행코스: 충무로역-남산한옥마을-구름다리-남측순환산책로-남산(서울타워)-남산도서관-백범광장-남산공원-회현역 <약 3시간>
▣ 참석자 : 15명 (기세환, 김정남, 김종화, 나창수, 박형채, 신원우, 위윤환, 이경식, 이원무, 임용복, 전작, 조문형, 최광일, 최근호, 한양기) +
※ 뒷풀이 및 납회 참석 : 7명 (고갑무, 나양주, 이계신, 이승렬, 이재웅, 임삼환, 정해황) 추가 참석 < 총계 22명 >
▣ 동반시 : "12월의 독백"/ 오광수 시인 (기세환 낭송)
▣ 송년시 : 김춘수 시인의 '꽃'(전작 읊음), 이형기 시인의 '낙화'(박형채 낭송)
▣ 뒷풀이 및 납회 : 참치회에 소주, 맥주/ '홍도참치'(02-766-4242, 종로3가역 6번출구)
새벽에 일어나니 2012년을 아쉽게 보내는 송년 산행의 아침이 밝아온다. 시산회 200회 산행을 기념하는 역사적인 날이다. 산행지는 남산 순환도로를 돌고 정상에서 동반시를 읽는 날이다. 마나님은 저녁에 일찍 와서 맛있는 것을 사달라고 하지만 산행을 끝내고 이인의 불교학교를 가야 하니 바쁜 토요일이다.
일요일에 회현역에 있는 '언더더씨'라는 해물 부페에 가자고 달래고 나오는데 배웅하는 눈빛이 맑지 않고 힘이 없다. 나이가 들어가니 추위에 약해지고 항상 혼자 집에 있으니 외롭고 쓸쓸한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집에만 있을 수 없으니 안타깝다. 갑상선암은 다행히 커지지 않고 전이가 거의 없는 암이라지만 어쨌든 암의 일종이니 걱정은 된다. 청소와 설거지, 빨래도 도와주지만 좋아하던 골프와 에어로빅, 한국무용을 그만 두고 가사에도 힘겨워한다. 나도 나이 들어 병과 약을 끼고 살지만 마나님과 함께 정이 가는 약들이다.
이틀 전에 사놓은 생굴이 있다고 가져가라 했으나 오늘 산행은 펼치고 먹을 곳이 없으니 한과만 싸달라고 했다. 작년에 생굴 덕분에 받은 상품권에 대한 마나님의 굴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고 핏기 없는 얼굴로 웃기도 한다. 에효! 내 병은 내가 알고 주변의 번잡한 걱정거리도 마음을 비우면서 아픔도 덜어져 가지만 마나님의 얼굴에는 수심이 쉽게 걷히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50살이 되면 배운 것의 많고 적음에 대해, 60대엔 마나님의 유무에 대해, 70대엔 재산에 다소에 대해, 80대엔 생사의 관계에 대한 우스갯말이 있을 법하다. 그런 것들을 다 채워도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고, 마나님의 건강과 운명이나 얼굴에 대한 책임의 70%는 남편에게 있음을 알고 살아있을 때 잘 하자.
4호선 창동역에서 출발하여 시간에 맞춰 가는데, 동대문을 지나면서 나 원장에게 전화가 온다. 반갑게 받으니 약 15분쯤 늦겠다고 한다. 1시 반에 병원이 끝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혼자 늦으면 겸연쩍을까봐 역에서 기다릴 테니 같이 가자고 해놓고, 박 회장에게 늦겠다고 전화를 한다. 남산한옥마을에 약간 늦게 도착하니 14명의 산우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언제 봐도 반가운 얼굴들이다.
겨울이라 한옥마을에는 별다른 공연도 없으니 구경거리가 없어 그냥 통과한다. 역사 캡슐이 묻힌 곳을 지나 뒷문으로 빠져나가니 옛날 박정희 정권의 똥개역을 충실하게 수행했던 중앙정보부의 남산 분실이 나온다. 건물을 없애자는 논란이 있었지만 역사적 유물이니 살리자고 해 다른 국가기관이 사용하고 있다.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고통을 겪었을까! 빨갱이 원조는 박정희 아닌가! 그런 것을 자신의 좌익 성향을 덮기 위해 더 우익인 것처럼 행세하는 좌익 컴플렉스라 한다. 아버지가 경북도당위원장이었다는 이문열도 다름 아니다. 이근안 같은 놈들이 저지른 만행을 어떻게 용서하나. 남녀를 가리지 않고 성고문하고 어쨌든 나쁜 놈과 놈들이다. 18년을 그렇게 강압통치를 하면서 경제를 조금 발전시킨 것을 가지고 지금도 우려먹고 있으며 그것에 넘어가는 노인들도 한심한 사람들이다.
박정희의 세뇌교육은 가히 천재적이다. 당시 경제의 발전은 우리나라에 필연적이고 그것은 국민이 교육을 잘 받았고 열심히 일 한 덕분이지 혼자서 경제대통령이라는 칭송을 들을 것은 절대 아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를 보면 민주주의와 함께 발전했으면 우리는 더욱 빠르게 발전했을 나라다. 참으로 한심하고 답답한 일이다. 특히 지금의 60대 이상의 덕분이라 하며 마치 자신들이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말하는 노인들이 있으나 말도 안 되는, 어림없는, 어린애들이 떼쓰는 것과 같은 수작이다.
나이가 들면 느는 게 주름과 아집, 잔소리가 많아진다는 말은 틀리지 않는다. 면세점 이하의 저소득자로 세금이라고는 평생 한푼도 내보지 않은 무능한 자들이 더 심하다는 말이 있다. 60살이 넘은 노인들은 판단이 흐리니 투표권을 박탈해야 한다는 큰딸의 울분이 가슴 속까지 닿는다. 박근혜가 전두환에게 받았다는 6억 원의 돈은 지금에 환산하면 엄청난 액수이다.
당시 학교 앞의 방 6개의 하숙집의 집값을 300만 원으로 추산하면 1,000억은 된다. 그것도 통치자금이라니 엄청난 축재에 속한다. 그만큼 상속을 받았으면 아버지의 추태도 상속해야지 애비의 나쁜 것은 상속받지 않고 좋은 후광만 상속받겠다는 것은 무뇌아이거나 후안무치한 행동이다. 주변의 인물들이 축재한 것은 박정희보다 더 하다.
육영수 여사가 죽은 것도 지아비인 박정희의 책임이고 박지만이 추하게 자란 것도 그의 더러운 행실에 대한 댓가다. 대통령을 지낸 자가 세상에 죽을 곳이 없어 딸 나이의 여자 무릎에서 죽은 것은 어떻고, 폭군 연산처럼 간신들이 채홍사 노릇을 해서 바친 어린 처녀들이 200명이 넘는다는 김재규 의사의 부하 박선호의 진술에는 아예 두손을 들고 귀를 막고 싶다. 에이, 더러운 놈! 내 손이 더러워지니 그만 쓰겠다.
어쨌든 그곳을 지나니 갈림길에서 임 수석이 전과 반대코스로 가자고 권한다. 모두 수긍하고 산중한담을 나누고 가니 차도 없고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밝고 좋다. 춥다가 푸근해진 토요일 오후에 정겨운 산우들과 함께 걷는 즐거움을 어디에 비기랴. 항상 말이 없고 점잖은 임 수석은 자주 왔다는데 봄의 화사한 벚꽃과 가을의 화려한 단풍이 설악산에 뒤지지 않는다고 한다.
국내의 산야에 자라는 벚나무는 원산지가 일본산이 아니고 한국이라는데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 나는 단풍이 보고 싶으면 도봉산은 망월사 갈림길에서 민초샘으로 오르고 망월사로 내려오고 북한산은 아카데미하우스 쪽으로 올라 소귀천계곡으로 내려온다. 가을에 설악산에 가는 것은 마나님이 동해안 복어회를 먹으러 가고 싶은 핑계를 댈 때다. 별로 오르막도 없는 길의 주변에는 벚나무 군락이 있고 단풍나무 군락도 있다.
우리의 소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애국가 2절의 처음에 나오는 '남산 위에 저 소나무'는 세월이 흘러 참나무가 소나무를 쫓아낸 결과다. 그것도 자연의 이치다. 전망대에서 북쪽을 보니 멀리 족두리봉에서 시작하여 향로봉, 비봉, 문수봉이 잡힐 듯 가까이 보이고 멀리 구름에 싸인 망경대, 백운대, 인수봉도 보인다. 더 멀리는 도봉산도 보인다. 인왕산과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을 보면서 악명 높은 청와대도 국민의 손에 들어갈 날이 멀지 않았다고 한마디씩 한다.
더러운 권력의 상징인 청와대가 국민에게 완전하게 개방될 날이 빨리 오기 바란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후보가 당선이 되어야 한다는데 뜻이 같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의 끝자락이 좋지 않은 이유는 청와대가 풍수지리상 좋지 않은 곳이라 한다. 특히 우맥은 좋은데 좌맥이 중간에 끊겨 자식 중 아들들의 운이 좋지 않다고 한다. 남쪽의 전망대에서 보니 한강이 아름답게 흐르고 멀리 관악산과 청계산, 대모-구룡산도 보인다.
서쪽의 전망대에서 미군부대가 주둔했던 용산을 보니 길지명당이다. 일제시대에는 일본군이 진주한 곳이다. 그곳도 국민의 휴식공원이 된다니 반가운 일이다. 중간에 이르러 조문형 산우가 아침에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먹은 것이 없다며, 조용하고 양지바른 곳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자고 해서 한가한 샛길로 오르는데 군사보호구역이라 쓰인 곳을 지나자 군인들이 저지한다.
조금 내려와 오랜만에 나온 기세환 전 회장이 가져온 오디주에 막걸리 한잔이 빠질 수 없다. 신원우 산우의 떡과 과일들, 내가 가져온 한과가 좋은 안주가 된다. 정상까지 가는 길은 경사가 거의 없고 순탄하다. 정상에 올라 서울의 중앙석을 보니 위도 37도 33분이고 경도는 120도 59분이다. 마침 16인이 앉을 수 있는 정자가 비워있어 나양주 산우가 추천한 동반시 오광수 시인의 ‘12월의 독백’을 낭송했다. 오늘의 기자인 내가 읽을 수 있는 권한이 있는데 오랜만에 참석한 기세환 산우에게 낭송을 권하자 맑은 목소리로 엄숙하게 읽는다. 송년회에 딱 맞는 시와 목소리다.
어린이 도서관 앞을 지나 백범광장에 이르자 의사 안중근의 이토오 히로부미 죄악 15개조를 쓴 돌비가 나온다. 그 앞에서 모두 옷깃을 여민다. 이런 분이 있는가 하면 박정희 같은 빨갱이 친일파를 이용해 미국에 빌붙고 정권을 연장한 이승만 같은 자도 있다. 그가 '건국의 아버지'라고? 지나가는 참새도 웃을 일이다. 미국에서 살면서 프란체스카 같은 웨이트리스나 꼬시면서 무위도식한 인물이 '반공의 수호자'라고? 도올 김용옥 교수는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라는 책에서 그녀를 창녀라고 했다.
우리 국민의 역사의식이나 언론의 편파성에 놀아나는 수준 낮은 국민이 있어 박정희 같은, 이승만 같은 자들이 놀아나는 것이다. 만약에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다면 안개 속 한모퉁이 같은 암흑의 5년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산으로 가자.
산행을 마치고 송년회 장소인 종로 3가까지 걸어가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우리의 오랜 관행인 차를 타자는 의견이 더 많다. 나 원장은 의사들 모임이 있어 먼저 가는데 마침 회장의 순번이 자신의 차례라 빠질 수 없다고 한다. 아쉽지만 어쩌랴. 우리는 시간에 맞춰 홍도참치집에 도착했다.
뒤풀이에는 나양주 산우와 이재웅, 이승렬, 임삼환, 이계신, 고갑무, 정해황 산우가 함께 참석했다. 음식은 1인당 24,000원으로 무한 리필이 된다며 미리 답사도 했다니 이경식 산우를 비롯한 집행부의 노고가 컸다. 여담으로 이재웅 산우의 동생이 수 년 전에 운영했던 음식점이란다. 금요일에 박 회장님께서 지난 동반시 중에 추천하고 싶은 시 두 편의 선정과 인쇄를 부탁해오는데 감히 대명을 거역할 수가 없다.
전작 총장님이 김춘수 시인의 '꽃'을 낭송하면서 회의를 시작했다. 시의 밑에, 뱀의 다리 : 한국의 시인 100인이 추천하는 애송시의 첫손이라고 썼더니 뜬금없이 무슨 뜻이냐고 묻길래 사족이라고 했더니 아하! 한다. 아니 한글을 모르고 한자어로 말하니 알아 듣는다. 아이러니하다. 그가 낭송하는 시처럼 그의 총장직 수행은 마치 시산회의 꽃을 아름답고 깔끔하게 피운 것과 같다.
이어서 전작 총장님의 회계에 대한 깔끔한 결산보고가 있었다. 거금 180만 원을 남겼으니 본인은 짜게 운영해서 미안하다고 했지만 우리는 알뜰하게 잘 운영했다고 덕담을 건넨다. 항상 적자이거나 수지를 딱 맞췄는데 참으로 그의 인물이나 인품 같이 훌륭하게 총장직을 수행했다는 데에 모두의 의견이 모아졌다. 이어 회장직은 전작 총장에게 당연하게 이어지고 차기 총장직에 대한 선출이 있었다.
처음에는 위윤환 산우에게 봉사의 기회를 주려고 했지만 산행 때부터 4대 불가론을 내세우며 완곡히 거절한다. 결국 박 회장님의 추천에 조문형 산우가 순순히 맡겼다고 한다. 그러면 차차기 총장은 위윤환 산우의 몫이 된다. 임삼환 산우도 유력하다. 이어진 박형채 회장님의 고별사가 있었다. 모두의 협조가 있어 무사하게 보낸 것에 대한 감사의 말이 있었고 개인적으로 준비한 선물은 차기 총장을 맡은 조문형 산우의 고마움에 대한, 전작 총장님에 대한 수고의 표시고 나는 산행기를 정리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선물은 neck warmer이다. 올 겨울도 박 회장님 덕분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되어 고맙다. 그는 회장직을 후임에게 물려주는 것이 홀가분한 표정이다. 시쳇말로 ‘어차피 맞을 매를 미리 맞았다’는 뜻과 다름없다. 200회 기념문집은 김종화 산우가 정리를 미리 해줘 쉽게 간다는 노고의 말씀이 있었지만 편집이 어디 쉬운 일인가? 다행히 내가 미리 맞춤법과 띄어쓰기 등 정정과 가필을 했다고 하나 새롭게 하면 그만큼의 노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네.
한 편의 교정에만 평균 40분이 걸리니 100편이면 4,000분의 시간이 필요하고 편집에는 3배의 시간과 5배의 노고가 든다는 것을 알고 있네. 교정은 보고 또 봐도 생기는 것이니 나도 가벼운 경추골절이 와서 고생한 적이 있다네. 법정 스님은 3쇄는 해야 비교적 완벽한 책이 탄생한다고 했네. 추운 교실에서 작업을 했다니 선생님들의 노고를 어찌 갚나! 기름종이에 싸놓으소. 언젠가는 갚을 날이 올 것이네. 끝으로 박 회장님이 이형기 시인의 '낙화'를 낭송하는데 마치 미리 알고 선정한 것 같이 내용은 그의 고별사와 심경을 같이 하는 시다. 그래서 등산 도중의 그의 뒷모습이 유난히 아름다웠다는 따뜻한 덕담이 나왔다.
박형채 회장님! 총장직 포함하여 2년간 수고했소. 초등학교 동창회의 집행부도 맡았으면서도 훌륭하게 수행했으니 쉽지 않았겠소. 그 노고를 어디에 비기겠소. 내년에도 순단 여사의 맛난 장아찌 맛도 준비해주고 농사 지은 농작물도 맛나게 먹을 테니 열심히 참석해주소. 지난 산행 때 주신 야콘은 가족 모두가 맛나게 먹었네. 내 생굴찜에 진한 막걸리 한잔 사리라.
전작 총장님! 올해는 태항산도 덕분에 편하고 저렴한 가격으로 갔다 왔고, 무엇보다 알뜰하게 살림을 해 200회 기념 문집을 내는데 별 어려움이 없게 되었으니 감사하고 내년에도 회장직이라는 무겁지만 보람있는 봉사의 직이 남았으니 1년만 더 고생해 주시면서 그 직을 즐기세.
내년의 산행에는 백두산이 포함되어 있고 8월에 가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있었다. 신원우 산우가 우리가 백두산은 꼭 가야 한다고 점잖게 한 마디 거든다. 백두산행도 자네의 도움이 많이 필요할 테니 미리 부탁하네. 나도 별일이 없다면 내년의 백두산행은 꼭 참석하겠네.
내년의 산행은 2일4토로 정했다. 2번째 일요일과 4번째 토요일에 간다는 결정이다. 항상 그랬지만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지켜지기 바란다. 내년의 시산제도 도봉산의 그 자리가 좋다는 의견에 변경이 없다. 나는 김종화 산우가 건강을 회복해 가는 것이 도봉산신의 인자한 보살핌이 있어서라고 굳게 믿는 사람이다. 송년회와 시산제는 모두 참석해주기 바란다. 기념문집의 예산 500만 원은 동창회 후원 100만 원, 내년부터 연회비를 15만 원으로 인상하고 미리 당겨쓰는 것으로 결정했다.
조문형 차기 총장! 내년에는 자네의 노고가 더 많이 필요할 것이네. 나도 자네의 요청이 있다면 뭐든지 마다하지 않고 거둘 테니 걱정 마소. 자네의 열정이나 책임감으로 봐서 매우 훌륭하게 수행할 것을 믿네. 자네가 맛난 홍어무침을 싸오듯이 나도 싱싱한 생굴을 열심히 챙기겠네.
산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산은 세찬 비바람과 눈보라를 포함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산은 누구나 오를 수 있으나 산행의 체험은 남에게 빼앗기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몫으로 남는다. 누구의 말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산은 나를 여러모로 시험해서 자신과 나의 힘을 알려고 하는,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욕구를 내 경우에는 산이 채워주었다'가 메모장에 담겨있다.
한 해를 보내면서, 특히 흑룡의 해를 보내면서 회갑을 맞았던 산우들아! 소망은 환상 속에서 아름답지만 현실에서는 충족될 수 없음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아쉽지만 내년에는 내년의 해가 떠오르고 또 바람은 내년에도 여전히 불어온다. 인간은 불행과 동행할 수밖에 없다는 냉정한 긍정을 인정하고 산다면 우리의 생은 결코 불행하지 않다고 한다. 산이 영원하듯이 시산회여 영원하라!
2012년 12월 17일 김정남 씀.
< 동반시 >
"12월의 독백" / 오광수
남은 달력 한 장이
작은 바람에도 팔랑거리는 세월인데
한해를 채웠다는 가슴은 내놓을 게 없습니다.
욕심을 버리자고 다잡은 마음이었는데
손 하나는 펼치면서 뒤에 감춘 손은
꼭 쥐고 있는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비우면 채워지는 이치를 이젠 어렴풋이 알련만
한 치 앞도 모르는 숙맥이 되어
또 누굴 원망하며 미워합니다.
돌려보면 아쉬운 필름만이 허공에 돌고
다시 잡으려 손을 내밀어 봐도
기약의 언질도 받지 못한 채 빈손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해마다 이맘때쯤 텅 빈 가슴을 또 드러내어도
내년에는 더 나을 것 같은 마음이 드는데 어쩝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