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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모의 역사 이야기 스크랩 남한산성(사적57호)
니브 추천 0 조회 37 10.09.20 08: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300년 전, 남한산성에는 무슨 일이...
능선을 휘감아 도는 성벽, 만리장성도 부럽지 않아...
우리의 성(城)...남한산성(사적57호)
◇ 설경의 남한산성 ⓒ최진연 기자


서울서 동남쪽 24km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성은 삼국시대 이래 우리민족사의 중요한 역사가 녹아있다.

1998년, 토지박물관은 남한산성에 있는 조선시대 행궁터 발굴을 시작했다. 행궁은 병자호란 당시 16대 왕인 인조가 청나라가 침공하자 피신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조사단이 발견한 것은 행궁터 뿐이 아니었다. 백제시대 유물이 나오는 바람에 발굴기간이 연장 됐고, 건물지내에서 고려의 토기와 온돌구조도 노출 됐다.

◇ 휘감아 도는 성벽 ⓒ최진연 기자
2007년 11월엔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초대형 건물터가 나왔다.

두께 2m에 달하는 엄청난 건물 벽과 한장에 19kg이나 되는 세계 최대 기왓장도 함께 출토됐다. 출토된 기와들은 실제 사용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일부 기왓장에는‘갑진년 말촌주‘‘천주’ 라는 글자가 새겨 있었다. 350여장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기와저장 시설도 확인돼 통일신라 기와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심광주 토지박물관 학예실장은 “경주 왕궁을 빼고는 신라시대의 가장 큰 건물이 갑자기 한강유역 산꼭대기에서 발굴되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기술로 이런 집을 지었는지, 의문스럽다고 했다.

발견된 건물터는 지금까지 나온 삼국시대 건물터 가운데 최대 규모다. 직사각형 건물은 화재로 인해 무너진 것으로 조사됐다.

박물관 측은 역사적 배경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 문무왕12년(672)에 쌓은 주장성 관련 군수품 창고로 추정하고 있다.

◇ 산성 정상의 망루인 수어장대 ⓒ최진연 기자

1300년 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는 나당전쟁으로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불과 같을 때다. 당나라 장수 고간이 4만 대군을 이끌고 평양을 침공했다. 당나라군에 맞서 신라군은 전투를 벌였지만 패하고 후퇴했다. 통일신라는 세계 최강국 당나라에 승리를 다짐하며 결사항전에 돌입했다. 그리고 최후 보루로 국운을 걸고 한강유역인 이곳에 주장성(남한산성)이란 요새를 만들었다.

천 수 백년동안 남한산성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초창기에는 백제의 옛터가 있었고, 한강유역을 둘러싼 3국간의 쟁탈전이 있을 때 신라는 이곳을 북방전진기지로 사용 했었다. 고려는 남한산성에서 몽고군을 격퇴했다. 남한산성 전투의 승리는 용인 처인성의 승리로 이어졌다. 남한산성의 함락은 결국 나라전체의 명운이 달려 있었던 곳이다.

◇ 성벽 넘어 한 사찰이 보인다 ⓒ최진연 기자
현재의 성벽은 조선인조 때 한양수비의 핵심 보루로 집중 부각되면서 수축됐다. 그러나 인조(14년)는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자신이 열정을 다해 쌓은 남한산성에서 제대로 한번 싸움도 못하고 청나라에 항복하는 굴욕을 당했다.

그 후 현재까지 여러 번 보수를 하면서 197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남한산성은 청량산(483m)산등성이를 따라 높고 낮은 여러 개의 산을 타고 넘으며 역사유적이 현존하고 있다. 외성까지 합하면 약 12km 나 된다.

성곽 시설물로는 5개의 옹성과 4대문, 산성수비의 사령부였던 수어장대를 비롯한 4개의 장대가 있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수어장대 뿐이다. 그 아래에는 산성축조의 공로자들을 기리기 위한 청량당이 서 있다.

그리고 비상시에 이용하던 16개의 암문, 봉수대가 2곳에 있었으나 한곳은 확인이 어렵고 한곳은 남쪽 군사시설이 있는 곳에 있어 출입이 통제된다. 내부는 유사시를 대비해 왕과 신하들이 거처할 행궁 70여 동을 지었다.

조선후기까지 남한산성은 1천여 가구에 4천여명의 인구를 자랑했다. 1917년 성내에 있던 광주군청이 밖으로 이전하면서 화려했던 군사, 행정도시는 급격히 쇠락해 갔다.

경기도는 2008년까지 행궁 복원을 끝내고, 국내유일의 성곽공원을 건립해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 송파에 있는 삼전도 비 ⓒ최진연 기자

남한산성은 수도권 역사 산행코스로 가장 인기 있다. 정해진 산행 길 말고도 아름다운 길이 10곳이 넘는다. 산성 전체 답사는 쉬엄쉬엄 가도 6시간은 산행해야 한다.

거목과 어우러진 남문에서 동문으로 이어지는 성벽이 축성당시 원형으로 드문드문 남아있다. 동문과 벌봉으로 이어지는 성벽 주위는 가을날 오색단풍이 뛰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겨울설경에 흠뻑 빠지고 싶으면 서문에서 수어장대로 가는 성벽길이 단연코 으뜸이다. 8월 중순 남한산성 서문에서 내려다보는 한강의 일몰은 과히 환상적이다.

남한산성은 예사롭지 않다. 고색 짙은 암문과 옹성을 지나면서 성벽 하나하나가 역사의 매듭이요. 선조들의 숨결이 절절이 배어 있다.

최진연 기자(cnnphoto@naver.com)

[데일리안 경기 최진연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최진연 문화전문 칼럼니스트의 다른 기사 보기

남한산성을 찾는다. 지하철 5호선 거여역에서 내리면 최단코스로 남한산성에 오를 수 있다. ‘등산로 3거리’라고 불리우는 등산로 초입에서 남한산성에 오르는 코스는 5갈래(1~5코스)다. 맨 왼쪽 1코스를 택한다. 다른 코스에 비해 비교적 완만한데다 성불사를 들러보기 위함이다.


성불사는 비구니 사찰이다. 보살(아주머니 신도)들의 헌신이 눈에 띈다. ‘무이문(無二門)’이라는 현판은 많이 봤어도 ‘무일문(無一門)’이라는 현판은 처음 접한다. ‘둘이 아닌 경지’를 넘어선 ‘하나조차 없는 경지’를 이름인 듯 한데 마음에 척 꽂힌다. ‘만법귀일(萬法歸一)’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일귀하처(一歸何處)’의 물음이기도 할 것이다. 하긴 송광사에 ‘무무문(無無門)’이 있긴 하지만 ‘무무문(無無門)’까지 알음알이로 해석하고 토를 달기엔 어리석고 부질없는 일이다. 성불사 요사채 앞 ‘그대 발걸음 돌리시게’라는 푯말이 앙증맞게 다가온다. “예로부터 계집질, 화투치기, 도둑질은 하지 말라고 그랬어~ 돈은 아무렇게나 벌어도 상관없지만...” 주위 누군가의 망가진 신세를 빗대어 연로한 아주머니들이 주고받는 말이다.


성불사에서 남한산성 서문까지는 2,070m. 서문 직전 연주봉 옹성까지는 1,780m다. 천천히 걸어 오른다. 등산로 한켠 바위 위의 도마뱀을 보고 아주머니들이 기겁한다. 한 아주머니가 “우리 어렸을 때는 공부 잘 하라고 머리위에 놓고 놀았는데...”라며 옛날을 회상한다. 맞다. 그랬었다.


성불사에서 서문(우의문)까지는 불과 35분 거리다. 서울의 한 자락이 바로 눈앞에 훤히 펼쳐진다. 한 등산객이 자신이 젊은 시절 복무했던 산 자락의 병영 하나 하나를 가리키며 부대 설명에 열을 올린다. 예전의 부대 규모가 훨씬 컸음을 알았다.


서문(우의문)에서 오른쪽으로는 수어장대, 영춘문, 남문(지화문), 초단파 매표소, 남장대지터, 동문(좌의문) 코스다. 왼쪽으로는 북장대지터, 북문(전승문), 동장대지를 거쳐 장경사, 동문(좌의문)에 이른다. 수어장대쪽 오른쪽 코스를 택한다. 수어장대는 보수 작업 중이다.

 

한산성엔 모두 16개의 암문(暗門)이 있다. 북한산성의 암문에 비해 규모가 작다. 작긴 하나 운치는 더하다. 특히 복원 공사 한창인 남장대지터 못 미처에 위치한 암문은 절묘하기까지 하다. 높은 옛 성벽사이에 자그마하게 뚫려진 통로가 성 안팎을 차단하는 단순 공간을 넘어 과거와 현재, 이생과 저생을 가르는 신비한 지평으로 다가온다.

 

성벽을 따라 걷는다. 장수가 되어보기도 하고 병졸이 되어보기도 한다. 임금의 문관 신하가 되어보기도 한다. 스님도 좋다. 아니 성벽 쌓는 인부가 가장 어울릴 듯 싶다.


남한산성 등반의 묘미는 성벽 안과 함께 성벽 밖으로도 산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벽 안에 비해 산행의 호젓한 맛을 더 진하게 만끽할 수 있다. 입장료(2,000원)도 안 내고^^ 하지만 성벽 전체 외곽 산행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아쉽긴 하다.

 

남장대지터에서 동문(좌의문)으로 내려서는 길은 다소 가파르다. 성벽은 초창기 때 모습 그대로다. 광주(廣州) 쪽에서 남한산성으로 들어서는 문이 바로 동문이다. 동문 오른쪽으로 끼고 경사진 길 올라 황진이 에피소드가 남아있는 송암정(松岩亭) 터 스쳐 지나가면 장경사(長慶寺)다.

 

남한산성 쌓을 때 전국 승려들을 징집해서 사역을 돕게 했는데 이들의 숙식을 위해 건립된 9개의 절 가운데 하나다. 그중 유일하게 옛 풍경이 남아있는 사찰이다.

 

장경사 높은 은행나무 아래 야단법석(野壇法席)이 펼쳐지고 있다. 부처님이 설법중이다. 가지각색의 자그마한 불상과 나반존자, 보살상 들을 투명한 유리판위에 잔뜩 모아놓았다. 우습기도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진지함도 느껴지기도 한다.


'참 부처는 바로 반월3성(半月3星)이로다.

 

  예불하는 몸으로 자신을 낮추고

  염불하는 입으로 항상 친절하고

  독경하는 뜻으로 서로 공경하고

  좌선하는 지혜로 서로 깨우치고

  계를 지키는 삶으로 항상 맑아져라‘


마른 목 장경사 약수물로 실컷 축이고 걸음을 계속한다.


남한산성의 특성중의 하나는 '옹성'이다. 5개의 옹성이 있다. 본성에 대한 외적의 직접 공격을 막고 성문을 가리기 위한 1차 방어물이자 보조 성벽이라 할 수 있겠다. 장경사 바로 위에 자리한 ‘장경사 신지(信地) 옹성’이 말끔하게 복원돼 있다. 옹성의 전모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다.


'여장(女墻)' 또한 남한산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몸을 숨겨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성벽위에 낮게 쌓은 담이다. 영어로는 ‘Breast Works’라고 되어 있다. 재미있는 표현이다.


“늘 다녀도 이 나무가 무슨 나무인줄 모르겠네~” 중년 아주머니의 의문이다.

“강원도에서도 이런 나무는 못 봤는데... 참 신기하게 생겼네~” 젊은 남자 등산객도 궁금한가보다. 바로 서어나무를 두고 하는 소리다.


남한산성 산행에 눈여겨 봐야할 것이 서어나무다. 도처에서 서어나무를 만날 수 있다. 특히 남장대지터 지나 동문쪽으로 내려서기 前 서어나무 군락지가 일품이다. 그 터에서의 전망도 빼어나고...

 

난 사실 서어나무 잎이나 꽃, 열매는 잘 모르고 관심도 크지 않다. 나를 매료시키는 것은 그 줄기다. 인간의 육체미에 비할 바 아니다. 오죽했으면 별명이 ‘근육나무(Muscle Tree)'일까? 나무의 어원엔 ’나무의 우두머리‘란 뜻도 있다는데 사실 으뜸의 자리에 오르기에 손색없다.

 

서어나무에 ’노쇠‘나 ’소멸‘은 없어 보인다. 허나 남한산성에서 ’죽음‘ 임박한 썩어가는 고령의 서어나무를 여러 그루 보았다. 숲의 최상층 발전단계를 알려주는 서어나무가 그 ’생존‘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혹시나 이곳 남한산성 숲 전체의 노화를 예시하는 것인지나 아닌지 모르겠다.  


동장대지터다. 동문(좌의문)으로부터 1.5km 거리다. 이곳에서 북문(전승문)까지는 1.4km, 북문에서 1.1km 더 내닫으면 출발점인 서문(우의문)이다.

 

하지만 곧 바로 북문과 서문으로 향한다는 것은 남한산성 산행의 절반(折半)을 잃어버리는 꼴이다. 동장대지터로부터 남한산성과 이어진 또 다른 성, 곧 봉암성과 한봉성을 꼭 챙겨볼 일이다. 남한산성 본성과 별도로 또 다른 적지 않은 규모의 외성을 쌓은 까닭은 확실치 않지만 본성 보강 차원이라는 옹성 축조의 이유와 유사할 듯 싶다. 숙종 2년(1686)에 축조됐다.

 

동장대지터문 빠져나와 오른편으로 400여 미터 걸으면 봉암성과 한봉성 가는 길이 나뉜다. 한봉성의 정상은 한봉(418m), 봉암성의 정상은 벌봉(515m)이다.

 

1,142m 길이의 봉암성 코스는 적막한 기운이 돌 정도로 인적이 드물다. 거의 평탄한 코스로 조용히 생각을 가다듬고 마음을 추수려보기에 아주 적절한 코스다. 봉암성 한 복판에 자리했었을 동림사터는 텃밭으로 바뀌어있다. 무 하나 뽑아서 시장기를 달랜다.

 

봉암성 성벽을 삥 돌아나오면 바로 첫 지점인 동장대지터다. 한봉성 성벽은 전혀 반대편 동문(좌의문)쪽으로 연결되는 비교적 험한 코스다.


범종 소리 울린다. 6시인가 했더니 5시다. 해가 짧아 지면서 저녁 예불 시간도 앞당겨졌다.


곳곳에 옛 초소인 군포지도 잘 정비되어 있다.


북문(전승문)은 대대적인 보수 공사중이다. 북문 거쳐 서문(우의문)에 이르기 前 서문 바로 아래 국청사(國淸寺)를 둘러 보려했으나 문은 굳게 잠겨 있다. 어두어둑해진다. 미련이 남아 절문 밖 게시판이나마  훑어본다.  


‘좋은 말만 하라. 내가 하는 말이 기도다. 말에는 지우개가 없다.

 누가 욕해도 화내지 마라. 그가 한 말은 그에게 돌아간다.’


서문(우의문)에 도착하니 오후 5시 50분. 오후 1시 반에 서문 출발했으니 4시간여의 성곽 일주다. 점점 어두워진다. 하산을 서둘러야한다.


남한산성은 백제와 신라의 도성이었다. (백제의 왕도였다는 주장도 있고 신라 문무왕 12년인 672년에 쌓은 주장성일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인조반정 이후 후금 침입에 대비해 2년만인 인조 4년에 완성한 성으로 이후 150년 동안 10여 차례의 중수 과정을 거쳤다.


남한산성은 천연요새지다. 성벽의 경사가 급해 접근이 어렵다. 그러나 성안은 경사가 완만해 자급자족하기에 크게 부족함이 없다. 10여석의 벼씨를 파종할 논이 있고 풍부한 수량을 갖추고 있다. 그야말로 전략적 요충지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피난해 항전하면서 치욕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나 역사적으로 한번도 함락되지 않은 대외항전의 격적지라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둘레가 7,545m인 남한산성은 하부는 석재지만 상부는 전돌(塼乭)이다. 북한산성은 하부와 상부 모두 화강암 석재로 되어 있다.


최고 수준의 성곽 축조 기술을 간직한 성벽이라는 평가도 세밀히 따져보면 헛된 말은 아닌 듯 싶다.


남한산성은 현재 도립공원으로 지정해 성벽 보수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나무 테크 등 등산로 정비공사도 더불어 진행 중이다.

 

어두컴컴한 하산길에 군 나팔 소리 들려온다. 저녁 6시, '일과 끝'을 알림이다. 나의 오늘 산행도 마감이다.

닉네임 : 이연재

(*지난 달 21일 토요일 오후에 남한산성을 둘러보고 쓴 글입니다.)

 

작성자
  
김태규 
제   목
  정조(正祖)와 수원성

조선(朝鮮)조의 역사에서 필자가 늘 궁금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부끄러이 여기는 대목이 있었다. 임진왜란, 최근에 와서는 조일(朝日)전쟁이라 부르는 전쟁 당시, 선조 임금이 수도 한양을 지켜보려는 노력도 없이 그냥 북으로 내뺀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또 병자호란에 가서도 인조는 강화도로 몽진(蒙塵)하려다 실패하고 남한산성에 들어갔다가 치욕을 당했다.
 
  수도 한양성은 인구도 많고 북한산성과 함께 큰 성곽을 이루고 있었는데, 왜 한양을 지키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고 외적만 쳐들어오면 부랴부랴 도망가야 했을까 하는 것이 늘 궁금했었다. 그럴 바에야 엄청난 비용을 들여가며 길이 9995보에 성첩까지 높이 20 척, 대소 여덟 개의 성문을 지닌 한양성은 왜 쌓았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다. 상무 정신이 없어 임금 이하 모든 신하들이 유약해서 그랬던 것일까?
 
  이것이 화두가 되어 조선 시대의 국방 정책에 관한 책과 자료들을 뒤지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최근,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즐겁게 시청하면서 앞의 주제와 국운(國運)의 흐름을 음양오행과 관련시켜 글을 써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나라의 수도를 내어주는 것 역시 다분히 문화적인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경우, 대부분 평야라서 난이 있거나 외적이 침입하면 일단 황제는 몽진이란 이름으로 안전한 곳으로 피신한 다음, 전국에 널린 군대나 의병이 적을 물리치면 다시 환도하는 것이 상례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산세가 험해서 주로 산성(山城)에 의지하여 지구전을 벌였는데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그 또한 모화(慕華)사상이 강해지다 보니 쉽게 수도를 내어주는 일이 반복되었던 감이 있다.
 
  반대로 일본의 경우, 성은 곧 생명이어서 끝까지 농성하는 것이 기본이고 마침내 농성이 어려우면 성주나 다이묘(大名)들은 일가와 함께 할복자살하곤 했다.
 
  도요도미가 조선을 침공했을 때, 수도 한양을 점령했다는 말을 듣고 이제 조선 정벌은 마무리 단계로 들어서는구나 하고 판단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그 때부터가 시작이었으니 문화적 차이라는 것이 이토록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정조가 쌓은 수원성은 결론적으로 조선 건국 이래 어떻게 하면 나라를 제대로 지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 좁게는 수도 한양에 대한 방어 전략에 대한 최종 답안으로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대한 해답이었다.
 
  정조가 수원성을 쌓은 이유로서 당시 왕권의 강화책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물론 옳은 얘기이지만 왕권 강화책으로 왜 수원성 축조라는 사업을 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은 부족하다.
 
  발단은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英祖)가 도성사수론(都城死守論)을 국론으로 굳히면서 시작되었다. 도성사수론이란 국란이 일어나거나 외적의 침입 시에 과거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당시와 같이 임금이 무조건 수도 한양을 방기하고 몽진할 일이 아니라, 수도 한양을 백성들과 함께 지키겠다는 정책이다.
 
  이로써 오늘날 우리들이 부끄러워하는 점에 대해 우리 선조들도 동일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차례 전쟁을 통해 모두 국방에 실패한 조선 왕조는 그 이후로도 별 신통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다가, 영조 18년, 즉 1742년 임술(壬戌)년이 되어서 강화성을 개축하는 문제가 불거졌을 때 다시 대두되었다. 대개의 신하들은 왜가 쳐들어오면 남한산성, 북쪽의 침입이 있으면 강화 섬으로 피난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수였다.
 
  이에 영조는 “도성을 버리고 강화도나 남한산성으로 가면 한양의 백성들은 모두 어육(魚肉)이 될 것이니 내가 어떻게 버리고 가겠는가?”하고 도성사수론을 제시했다.
 
  당시 대부분의 신하들이 수도 한양의 성곽이 튼튼하지 못하고 또 지킬 곳이 너무 광범위하다는 점을 들어 도성을 지킨다는 방안에 반대했지만, 구성임(具聖任)이란 인물이 있어 도성을 지키는 16조의 방책을 통해 유사시에도 능히 도성을 지킬 수 있다면서 강화성 개축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의 주장은 영조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이 때가 바로 1784년 갑자(甲子)년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갑자년이었다는 점이다. 우리 민족과 국가를 대변하는 음양오행의 코드가 바로 갑자(甲子)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어 갑자의 해는 언제나 새로운 융성과 발전이 시작되는 해인데, 특히 120 년 간격으로 오는 갑자의 해는 대단히 중요하다. 반대로 갑오(甲午)라는 해가 오면 언제나 국력이 쇠하거나 해서 새로운 쇄신이 필요해진다.
 
  따지고 보면 임진왜란도 갑오년이 되기 두 해 전의 일이었기에 국력이 피폐하고 정신이 유약해졌을 때였다.
 
  1744년은 따라서 1984년 갑자년으로부터 240년 전이므로 중요한 해였다. 이 때 영조가 제시한 도성사수론은 훗날 정조가 수원성을 쌓는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구성임이 어영대장으로 임명되어 도성 한양을 보강하는 작업이 시작되었으며, 국방정책과 체제, 편제 전체의 개편작업이 진행되면서 1747년 정묘(丁卯)년에는 수도절목(守都節目)이 간행되었고, 다시 확대 보완되어 1751년에는 수성책자(守城冊子)가 나오면서 완결을 보게 되었고 훈련법을 밝힌 수성기요(守城機要)도 발간 유포되었다.
 
  수도절목은 국왕의 뜻을 받들어 일심협력하기 위한 9개조의 실행 사항이며, 수성책자는 이를 기반으로 유사시 도성의 백성들 각자가 군대와 협조해서 지켜야 할 구역을 정하고 이를 책자를 통해 널리 유포시켰으며, 아울러 수도 방위를 맡은 삼군문(三軍門)의 지역 분담, 각 백성들의 소속과 그에 따른 인원수를 정하고 있으며 수성기요란 도성방어를 위한 구체적인 훈련법을 담고 있다.
 
  영조는 이를 통해 전에는 수도 방위에 있어 제외되던 양반까지 포함하였으며, 행주산성 당시의 사례를 통해 부녀자도 참여하는 만민동심(萬民同心)의 의지를 반포하였다. 이로써 당시 한양의 인구가 대략 20만이었는데 그 중 절반 정도인 10만을 유사시 수비 병력으로 하여 수도인 한양을 방어한다는 전략이 세워졌던 것이다.
 
  그러나 도성사수론은 현실적으로 허점이 많았기에 반대론이 계속해서 이어졌으며, 그런 문제점은 영조를 이은 정조대에 가서도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래서 정조는 수원성을 쌓아 도성사수론이 지니는 문제점들을 해결하고자 했고, 그를 통해 새로운 정치적 이니셔티브(initiative)를 쥐고자 했던 것이다.
 
  수도 한양성은 방어할 범위가 너무 넓고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의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기에 수원성을 쌓아 오늘날 오산시의 독산산성과 호응해서 그물망과 같은 방어진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좀 더 멀리는 강화도를 통해 수도 한양의 뱃길을 보호하고 북으로는 북한산성을 통해 북쪽을 방어하는 태세를 갖춤으로써 당시 말로서 기각지세(掎角之勢), 즉 사슴의 다리를 잡는 한편 뿔을 잡아 사슴을 포획하는 일관된 방어 체제의 정점(頂点)으로써 건축된 수원성은 조선 땅 어디에도 여태껏 없었던 가장 완벽한 형태의 성곽으로서 조선시대 '성곽의 꽃'이라고 불리어진다.
 
  이에 정조의 명을 받은 소장학자 다산 정약용은 우리의 성과 중국 그리고 유럽 성의 장단점들을 고려하여 성의 둘레와 높이 등 성벽의 규모와 성벽을 쌓을 재료에 이르기까지 전혀 새로운 차원의 개념을 시도하였다.
 
  산성과 평지성의 모습을 두루 갖춘 성벽의 총 둘레는 약 5.4㎞, 평균 높이 5m 정도이고 그 위에는 높이 1.2m 정도의 여장을 쌓았다. 여장은 모두 벽돌로 쌓고 여러 개의 총구를 뚫어놓았다.
 
  성에는 네 군데 문을 내었으며, 성문에는 다시 밖으로 둥글게 겹으로 성벽을 쌓은 옹성을 쌓았다. 성문 외에 다섯 곳에 비밀출입구인 암문을 내었다. 한편 개천 위에는 각기 북수문과 남수문을 세웠다.
 
  특히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요철형의 성벽을 놓고, 높은 위치에서 적의 동정을 살피는 노대도 서쪽과 동쪽에 하나씩 두었다. 아울러 멀리 바깥을 보는 공심돈이라는 망루도 세 군데 만들었다.
 
  아울러서 성벽을 밖으로 돌출시켜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치성을 여덟 군데, 군사가 몸을 숨길 수 있는 건물로 된 포루를 다섯 군데, 대포를 쏘도록 만든 포구가 다섯 군데였다. 성의 서쪽과 동쪽에는 군사를 지휘하는 장대가 있어서 서장대, 동장대라 하였다. 성벽 모서리마다 사방을 내다볼 수 있는 누각인 각루도 다섯 군데 세웠다.
 
  이 정도니 가히 이제껏 이처럼 많은 방어시설을 갖춘 성곽은 없었다고 하겠으며, 오랫동안 실학자들이 주장해온 벽돌도 전폭적으로 사용되었다.
 
  다시 특기할 것은 완공 직후 공사 전말을 담은 ‘화성성역의궤’를 발간하여 당시 현장의 일을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공사의 모든 것을 오늘날에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의 국방정책은 건국 이래 국경선부터 방어한다는 관방(關防)론에서부터 산성(山城)방어론, 이어서 세종대의 행성(行城)론, 그러다가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하는 전략에 이르기까지 변천을 거듭했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외침을 통해 허구가 드러나자 영조 대에 이르러 수도사수론이 제기되었고, 수원성은 유사시 수도사수를 위한 강력한 전략 거점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그 속에 오랜 고심과 연구가 결집된 총화였다고 하겠다.
 
  수원성은 따라서 영조대에 수도사수론이 제기된 1744년, 갑자(甲子)년부터 시작하여 수원성이 착공된 1794년 갑인(甲寅)년, 낙성 1796년 병진(丙辰)년에 이르는 50여년간에 걸친 조선 시대 국운의 마지막 흥륭기에 있었던 커다란 역사(役事)였으니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실로 크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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