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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숭현서원(崇賢書院)
서원은 강학과 선현에 대한 제향을 목적으로 대체로 16세기 이후 사림(士林)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이다.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정치를 펼쳤던 조선왕조는 서울과 지방의 고을마다 향교를 세우고 교육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향교는 점차 교육적 기능이 쇠퇴하면서 재야의 사림들이 다투어 서원을 세우기에 이른다. 숭현서원도 이런 와중에 설립되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회덕(縣)에는 ‘삼현서원(三賢書院)’이 있었다. 삼현서원은 정광필(鄭光弼) · 김정(金淨)·송인수(宋麟壽) 등 삼현의 위패를 모시고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던 사우(祠宇)로부터 출발했다. 이 사우는 처음 용두록(龍頭麓)에 건립되었다. 용두록은 현재의 을지대학교(대전캠퍼스)와 목양마을 일대로 추정된다. 이곳이 용의 머리를 닮았다는 용두봉(龍頭峰)이다. 숭현서원이 삼현서원 또는 삼현사로 불리는 것은 당시는 혹 서원으로도, 사우로도 혼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숭현서원을 처음 지은 시기는 문헌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대체로 1585년 창건설이 몇몇 문헌에 나타나고 있다. 다만 이건(移建) 시기는 1609년이 정설이다. 신흠(象村 申欽, 1566~1628)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소실된 사우를 1609년 송남수(宋枏壽, 1537~1626)가 현재의 유성구 원촌동에 옮겨지었다. 고을 선비들이 조정에 청액(請額)을 해서 묘호를 ‘숭현(崇賢)’으로 받았다. 제물과 제례도 관급으로 하고 제향은 중정(中丁)으로 한다.”고 기록했다.
옛날에 사우가 용두산 기슭에 있었는데, 임진년 병화에 없어지고 만력 기유(1609, 광해군 1)에 고을 서쪽 몇 리 밖에다 새 터를 잡아 창건하였는데, 역시 지형과 경관이 좋은 곳이다. 그 일을 실지 주관하기는 향대부(鄕大夫) 송남수가 하였지만 그 고을 선비들이 조정에 청액하여 묘호를 숭현으로 하사받고 제물과 제례도 관급으로 하여 중정으로 제사를 올렸던 것이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다음 해 1월 강화도가 함락되자 회덕의 죽창 이시직(竹窓 李時稷, 1572~1637)과 야은 송시영(野隱 宋時榮, 1588~1637)이 강화도에서 순절했다. 이들은 모두 회덕출신으로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의 문인이다. 1641년 서원의 바로 옆에 별사 충절사(別祠 忠節祠)를 세우고 이시직과 송시영을 배향하였다. 일명 죽사(竹祠)로도 불렀는데, 이시직을 배향했기 때문인 듯하다. 송준길이 발의(發議)하고, 주도하였다.
신사 14년(崇禎) 충절사(忠節祠)를 세우자는 의논을 일으켰다. 선생(宋浚吉)이 죽창·야은 두 공께서 동시에 순국해 절개를 세웠으니, 제사도 함께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논을 일으켜 숭현서원 옆에 사당을 세우고 ‘충절사’ 라고 이름 지었다.
그 뒤 1667년 별사(忠節祠)에 배향했던 이시직과 송시영을 본사(本祠)로 올려서 삼현(鄭光弼·金淨·宋麟壽)과 함께 봉안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지역의 선현들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646년에는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 1681년에는 송준길(同春 宋浚吉, 1606~1672), 1695년에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을 추가로 배향함으로써 오늘날의 ‘팔현묘(八賢廟)’가 되었다. 팔현의 위패는 이서위상(以西爲上, 서쪽부터 차례로 모시는 법)으로 배향하였다. 춘추제향은 계월 중정일(季月 中丁日, 음력 3월과 9월의 두 번째 정일)에 봉행하였다.
숭현서원의 강당(立敎堂)은 송이창(淸坐窩 宋爾昌, 1561~1627)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1617년 유생들을 이끌고 창건하였다. 송이창은 신녕현감(新寧, 경북 영천의 옛 지명) 재임 시 서매부(庶妹夫) 서양갑(徐羊甲, ?~1613)이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죽었다하여 논파(論罷)당하여 그 해 가을 고향으로 돌아왔다. 향리에 머물면서 많은 역사(役事)를 일으켰다. 문헌에 나타난 것만도 읍호정(挹灝亭)을 짓고, 숭현서원 강당(立敎堂)을 세웠다. 또 정유재란 후 임시로 지었던 자신의 별당(淸坐窩)을 중수하였다. 송이창이 57세 때 지은 읍호정은 벼슬살이를 접고 만년을 보내려했던 곳이었다.
읍호정과 망신거를 지었다. 선암천 가에 있는 정자가 황폐한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부군이 마침 올라가 경치를 바라보고는 기뻐하여 몇 칸의 초옥을 지어 만년에 은거할 곳으로 삼고서, 옛 이름대로 읍호정이라 하였다. 또 그 앞에 작은 집을 지어 추·동기에 거처할 곳으로 삼고 ‘망신거(望辰居)’라 이름 하였는데, 선원 김 상공이 전자로 정액(정자의 현판)을 쓰고, 팔분으로 ‘망신거’를 써 주었다.
동네 어른들의 말로는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도 있었다는 읍호정이 지금은 흔적도 없다. 대화공단 도로변에 ‘읍호정지(挹灝亭址)’ 표석이 있으나 길가 화단에 있어서 보이지도 않는다. 송이창은 입교당을 세운 후, 선비들의 청원으로 숭현서원 원장이 되었다. 송준길의 기록으로는 1627년 죽을 때까지 10여 년 동안 원장으로 있으면서 성심을 다해 제생(諸生)을 고무시켰다고 했다.
부군의 나이 57세 때, 앞장서서 제생을 이끌고 숭현서원에 입교당(立敎堂)을 세웠다. 이때 회덕의 선비들이 부군에게 원장이 되기를 청하였다. 부군은 성심을 다해 10여 년 동안 몸소 앞장서서 제생을 고무시켰다.
숭현서원은 대전지역에 최초로 건립된 사액서원이다. 그러나 대원군의 섭정시절이던 1871년 3월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고 말았다. 이때 철폐를 면한 서원은 일인일원(一人一院)의 원칙에 따라 전국에 모두 47개에 불과했다. 이때 충청도는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과 논산의 노강서원(魯岡書院)만 남았다. 탄방동 도산서원(道山書院)도 이때 철폐된 것을 1968년과 1973년 2차에 걸쳐 안동권씨 종중에서 복원한 것이다. 도산서원은 권득기(晩悔 權得己, 1570~1622)와 그의 아들 권시(炭翁 權諰, 1604~1672)를 배향했다.
현재의 숭현서원은 훼철된 후, 130년 만인 지난 2001년 10월 대전광역시가 복원한 것이다. 어느덧 서원을 세운지 20년이 되었으나 전해지는 문적(文籍)도 없고, 그 흔한 세미나 한 번 개최한 적이 없다. 자치단체나 지역 학계의 관심이 절실하다. 다만 그동안 대전시와의 협약으로 회덕향교가 관리를 맡고 있는데, 재정이나 인력의 한계로 겨우 명맥이나 유지하는 수준이다. 다행이랄까 2018년에는 시의 지원으로 시급한 몇 군데를 보수하고 보안시스템을 설치하였다. 관리사도 새롭게 단장을 해서 서원의 모습이 정돈되었다. 현재는 대전시의 문화관광해설사들이 상주하면서 방문객을 안내하고 있다.[출처; 난석재예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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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공부에는 반복이 필요하다 절실하게 느낍니다.
좋아하고 관심있는 분야임에도 늘 모든것이 새롭습니다.
'망신거' 는 처음 알게 된 내용인데
읍호정과 연결해서 기억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