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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많은 우중 종주
지근(至近)으로 다가온 한남금북정맥의 분기점 속리산 천황봉에
벌써 취해버린 건가.
까마득히 잊은 채 새벽 녘에 배낭을 챙기다가 퍼뜩 떠올랐다.
낮에 꼭 참석해야 할 결혼식이 있는 것이.
어차피 한 번 더 와야 할 길이기에 당초의 일정도 이에 맞춰졌던
건데 깜빡했나 보다.
어제 밤에 올라왔어야 했는데 별 의미 없는 찜질방의 밤이 되고
만 것이 아쉬웠다.
서울행을 서두러야 했던 지난 일요일이었다.
그리고 난 후 한 주 사이 청주와 보은의 홈피(Home-page)에서
버스노선과 시간을 모두 복사해 지닌 덕에 누구에게 뭘 물었다가
언짢은 일 겪지 않아도 되었다.
청주 ~ 보은, 보은 ~ 구티의 교통사정이 훤해졌으니까.
이 지역에서는 묻는 것보다 인터넷 검색이 더 정확하고 편했으며
이 습관의 고착은 여기에서 비롯된 셈이다.
백두대간에서도 수시로 인터넷이 해결사였으나 습관화에 이르진
못했으니까.
2003년 11월 29일 새벽 5시 50분 청주행 고속버스가 나의 한남
금북정맥 마지막 접근을 맡았다.
심상찮던 날씨더니 보은에 내렸을 땐 이미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강 이남과 금강의 북쪽 사이라 그런가.
가을인데도 비와 동행한 날이 유난히 잦았는데 겨울에 접어들어
서도 여전하니 말이다.
같은 가을 날에 한북정맥에서는 단 한 번도 비를 맞지 않았는데
10일중 3일째다.
이왕에 이리 된 것 다시 비님을 사랑하자.
말티재까지는 그리 먼 거리도 아니다.
비와 사랑놀음이나 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밤눈 어두운 약빠른 고양이였나?
구티로 가는 버스편이 잦지 않아 편승할 요량으로 우선 보은에서
아까 통과했던 구티 세거리로 이동해 방향을 잡았다.
확률을 높여야 하니까.
hitch-hike의 법칙 1조다.
과연 적중했는데 왜 그랬을까.
약빠른 고양이가 밤눈이 어둡다던가.
딴은 약은 짓이라고 했지만 화가 되었으니까.
한 승용차가 내 앞에서 섰다.
비를 맞으며 서성거리고 있는 대형 배낭의 늙은 이가 안쓰러워
세운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당연히 고마운 마음으로 탔어야 할 우아한 버버리코트
중년녀의 차를 구티 고개마루까지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냥
보내버리다니.
이런 우매한 짓이 또 있겠는가.
거기까지 일단 가고 보는 법칙 2조를 잊다니.
그동안 잘 해오던 대가(大家?)의 순발력이 고장이라도 난건가.
사라져 가는 차의 뒷 모습을 멍청히 바라보며 아쉬워 하는 늙은
이의 몰골은 마치 지나간 버스 뒤에서 손드는 꼴이 되고 말았다.
아니면 나무에서 곡예하다 떨어진 원숭이?
1시간여 후에 구치리 산외초등학교 앞을 통과하며 세련미를 풍긴
그녀는 아마도 이 학교 중견 교사일 꺼라고 짐작되면서 더욱 후회
막급이었다.
순간적인 착각이었을 것이다.
결국 물실호기를 스스로 버린, hitch-hike의 ABC(기본 수칙)를
지키지 않은 벌을 받아야 했다.
잘 포장된 지방도로지만 차량 통행이 워낙 뜸한 구티유래비 앞에
다시 서기가 이리도 힘이 들었으니까.
게다가 전번과 너무 다른 환경에 실망스러웠다.
유혹의 자력을 느끼게 했던 북쪽의 탁주봉이 꽁꽁 숨어버렸고
들어선 정맥도 답답하기만 했다.
말티재 유감
280m 고개마루에서 400m ~ 600m 대의 봉들을 오르내리는 동안
정맥들에서 흔히 겪는 현상의 반복이었다.
비 사이로 못골 작은 마을이 희미하게 명멸하고 인적 차적(車跡)
없는 백석고개 포장도로가 마냥 쓸쓸한 것 처럼 홀로 걷는 늙은
山나그네도 그랬다.
동에서 북으로 지호지간일 속리 연봉에 대한 아쉬움까지 더했다.
이런 날엔 중지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내속리면 무수목과 보은읍 모정골을 잇는 임무를 종료한 듯한
수철령을 지나 얼마쯤 나아갔을까.
서서히 비가 그치고 오른 쪽의 구룡저수지가 눈에 들어오는 것을
시작으로 시야가 점차 넓어졌다.
산의 형국이 승천하는 9룡 같으며 마치 용이 움직이는 것처럼
고개가 구불구불하다는 구룡치와 새의 모가지(鳥項)를 닮았다는
새목이재를 지난 후로는 말티재 꼬부랑 고갯길이 간혹 보이고
동북의 구름 걷히는 속리산 천황봉이 신령스러웠다.
고개 오르느라 힘겨워서 끙끙거리는 듯한 차들의 소리가 가까워
진다는 건 말티재 당도가 카운트 다운되었다는 뜻도 된다.
'말티재'란 표현은 처가집, 역전앞과 같은 언어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이티재, 구티재 등도 그러하듯이.
속리산의 관문격인 이 고갯길은 고려 태조 왕건이 속리산을 다녀
가기 위해 닦았단다.
조선조 세조가 연(輦)으로는 넘을 수 없어 외속리면 장재리에서
말로 갈아타고 넘은 후 내속리면 갈목리 고개 아래 마을에서 다시
연에 올랐다 해서 말티고개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고.
일명 박성재라 하는 것 또한 세조의 행차를 위해 길 바닥에 얇은
돌(薄石)을 깔았기 때문인데 박석이 박성으로 변음되었다는 것.
1966년에 확포장, 37번 국도가 되기 이전에는 속리산 등산 한 번
하려면 교통편의 애로가 이만 저만 아니었다.
온갖 사정 다하여 겨우 트럭의 짐칸에 타고 꼬불 꾸불 좁디 좁은
비포장길을 어렵사리 오르고 나면 온 몸이 흙 먼지투성이가 되어
있던 당시와는 격세지감이 드는 고개다.
말티재 돌장승
고마운 젊은 이, LAKE HILLS의 강창석
또한 내일 아침에 다시 올라와야 하는 고개다.
늘 그러하듯이 처음에는 무작정 시작하나 중간 이후에는 어떤
구상이 떠오르게 된다.
그래서 이 정맥에서 갖게 된 계획은 오늘부터 3일간 계속 진행해
12월 1일 천황봉에 당도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구간을 짧게 남겼다가 호남, 한북 때처럼 김윤배와 함께
마무리하기로 했는데 그의 건강이 썩 좋지 않아서 이번에는 포기
하기 때문에 수정이 불가피했다.
12월 1일은 백두대간 북상 때 천황봉에 올라선 날이다.
분기한 정맥을 타고 그 곳에 그 날에 goal in 하는 것도 뜻 있을
법 했는데 하루를 단축하게 된 것.
그러나 늙은 이에게는 하루에 주파하기엔 벅찬 구간이기에 벌써
부터 긴장되는 거지만 내일 일은 내일 해결하고 당장엔 약수탕에
가서 젖은 옷들부터 말려야 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재마루에서 잠시 이런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속리산 쪽에서 올라
오던 대형 탑차가 내 앞에서 멎었다.
쉬어 가려는 차겠거니 생각했는데 내게 행선지를 물은 운전자는
LAKE HILLS(Hotel SONGNISAN)의 시설정비팀 강창석 주임.
그는 버스가 끊길 시간은 아직 아니지만 많이 기다려야 한다면서
보은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태워주었다.
강창석은 늙은 山나그네로 하여금 내일을 위해 오늘 밤을 편히
쉬도록 자진해서 도와준(volunteer) 고마운 젊은 이다.
그의 도움으로 어렵잖게 다시 든 청주의 약수탕에서 한남금북
정맥의 마지막 밤을 편히 보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