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景福34회 제58차 문화답사; 風納洞土城-夢村土城
2016.12.13(화) 景福34회 제58차 文化踏査는 서울 風納洞土城(史蹟 제11호)과
서울 夢村土城(史蹟 제297호)을 답사하였다.
10:30, 전철 5∙8호선 천호역에 집결한 24명(부인 10명 포함)은 천호역 10번 출구를 출발하여
千戶大路를 따라 風納土城에 도착하여 남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풍납토성을 따라가다
주택개발 등으로 끊어진 풍납토성의 漢城百濟王都길을 따라 風納市場에서 ‘바람드리 6길’로
접어들어 풍납백제문화공원-풍납토성 경당지구를 거쳐 서울 土城초등학교 앞을 지나 다시
풍납토성을 따라 갔다.
풍납종합사회복지관 뒤 풍납토성 발굴조사장소를 지나 토성은 북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곳까지
답사를 마치고 올림픽대교와 연결되는 도로의 地下道를 거쳐 城內川둑길을 타고
서울 夢村土城으로 향하였다.
나는 몸이 불편하여 풍납토성만 답사하고 몽촌토성은 靑皐가 알려 준 답사코스를 참고로
내가 그 동안 수시로 다녔던 몽촌토성과 올림픽공원의 사진을 聚合한 몽촌토성(촬영한 계절에
관계없이)의 사진을 포함하여 2회로 나누어 올린다.
景福34회 제58차 문화답사(2-1); 서울 風納洞 土城
景福34회 제58차 문화답사(2-2); 서울 夢村土城
景福34회 제58차 문화답사(2-1); 서울 風納洞 土城
서울 風納洞 土城 -史蹟 제11호-
서울 松坡區 風納洞 漢江邊에 있는 초기 百濟時期의 土築 城郭으로, ‘風納土城’이라고도 부른다.
원래는 둘레가 4㎞에 달하는 큰 규모의 土城이었으나 1925년 乙丑年 大洪水로 남서쪽 일부가
잘려나가고 住宅開發로 일부가 毁損되어 현재는 약 2.7㎞ 정도만 남아있다.
토성의 형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타원형으로 성벽은 돌이 없는 평야지대여서 성을 쌓는 방식은
고운 모래를 한 층씩 다져 쌓았으며 높이는 일정하지 않으며 동쪽에는 4곳에 출입문으로
여겨지는 흔적이 남아있다.
원래 명칭은 ‘廣州 風納里土城’이었으나 2011.07.28 ‘서울 風納洞 土城’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文化財廳은 2011.07.28 ‘서울城郭’을 ‘서울 漢陽都城’ 등으로 史蹟 439건의 지정명칭을
변경 告示하였다.
漢城百濟와 河南慰禮城
우리는 ‘百濟’라고 하면 通常的으로 公州(熊津)나 扶餘(泗沘)를 떠올리고 있다.
백제가 건국된 때부터 熊津으로 遷都하기 전, 즉 河南慰禮城에 수도를 두고 있었던
500여년간(BC 18~AD 475)을 일컫는 漢城百濟時代는 熊津百濟(476~568)의 90여년,
泗沘城(扶餘 扶蘇山城) 百濟(538~660)의 120여년에 비하여 百濟 670여년의 대부분(약 73%)이
漢城百濟時代인데 公州와 扶餘를 聯想하고 있다.
백제의 始祖(재위 BC 18∼AD 28)인 溫祚는 고구려의 시조인 朱蒙(東明聖王)의 아들로
沸流(비류)의 동생이다. 주몽이 卒本으로 와서 고구려를 세우고 召西奴를 왕비로 삼아
비류와 온조 형제를 낳았다.
<三國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주몽이 북부여에서 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孺留가 卒本으로 와서
太子가 되자 召西奴는 온조와 비류를 데리고 烏干 등 열 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온조는 BC 18년 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十濟’라 하였다.
형인 비류는 미추홀(弥鄒忽; 지금의 仁川 朱安)에 따로 터를 잡았다가 沸流가 죽자 신하와
백성들이 慰禮로 합류하였으며 그 뒤 온조왕은 위례로 올 때 백성들이 기꺼이 따랐다고 해서
나라 이름을 ‘百濟’로 고쳤다.
그런데 漢城百濟時代 약 500년 동안의 都邑으로 백제의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하남위례성은
지금의 어디일까?
그 동안 하남위례성의 후보지로는 天安 聖居山 慰禮城(충남기념물 제148호), 河南市 春宮里 일대, 서울 夢村土城과 서울 風納洞土城 등 네 곳을 꼽아왔다.
충남 稷山面 일대의 天安 聖居山 慰禮城과 河南市 春宮里 일대(春宮洞과 草一洞, 廣岩洞에 걸쳐
있는 二聖山城)의 이성산성을 1999년까지 모두 일곱 차례 발굴하였으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1988년 이후 하남위례성의 유력한 후보지는 夢村土城으로 공동발굴단의 6차에 걸친 조사와
발굴결과 3세기 말 ~ 5세기 후반의 遺物이 출토되었으며 石村洞 古墳群과 芳荑洞 古墳群이
인접해 있어 많은 학자들이 몽촌토성을 하남위례성으로 보는 見解가 學界의 主流로 자리잡게
되었다.
1997년 풍납토성은 아파트 건설 터파기 공사할 때 百濟 土器破片들이 발견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의 현장 검증과 긴급 구제발굴이 진행되었으며,
1999년~2000년 경당지구 발굴을 비롯해 수 차례의 발굴이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풍납토성은 三國 이전의 平地城 가운데 최대일 뿐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가장 큰 편에 속해
대규모의 노동력 동원능력을 가진 中央集權的 권력을 가진 고대국가가 건설한 것으로 보며,
성벽의 구조와 규모만으로도 王都였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어 늦어도 서기 200년쯤에는
풍납토성의 축조가 완료되었을 것이라 한다.
풍납토성은 전체 면적의 아주 작은 부분밖에 발굴하지 않은 이제까지의 결과만으로도
<三國史記>에서 溫祚王이 기원전 18년에 도읍으로 정했다는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2016. 12. 16 孤 山 朴 春 慶
서울 風納洞土城 사진
(01) 전철 5∙8호선 千戶驛 집결
(02) 漢城百濟王都길 안내지도
漢城百濟王都길은 한성백제의 王都 風納土城에서 夢村土城을 거쳐 石村洞古墳群까지
이르는 길로, 약 500년간 漢城百濟의 수도였던 松坡의 歷史와 文化를 체험할 수 있는
徒步觀光코스이다.
(03) 한성백제왕도길 답사코스 안내
경복34회 文化踏査 때마다 수고를 아끼지 않는 白九 金裕元 동문의 설명
(04) 천호역 10번출구에서 풍납토성으로 향한다.
(05) 바람드리골 풍차[風納洞風車]
*風納洞은 송파구 북쪽 끝 漢江邊에 있으며, 洞 이름은 이 마을에
‘바람드리성’, 즉 風納里土城이 있어 ‘바람드리’ 또는 ‘風納里’로 부르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廣州牧에 속하였으며 1914년 경기도 廣州郡
龜川面 風納里라 하고, 1963년 서울특별시 城東區에 편입되면서
風納洞이 되고, 1975년 江南區, 1979년 江東區를 거쳐 1988년
松坡區 管轄이 되었다.
풍납동은 法定洞으로 行政洞인 풍납1∙2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06) 송파구 표석
*<松坡>는 ‘언덕 위에 소나무가 푸르게 우거진 산 좋고 물 맑은 강변마을’이라는 뜻으로
일찍이 백제 때의 도읍지로 원래 경기 廣州郡 中垈面에 속하였으나 1963년
서울 城東區에 편입, 1975년 江南區로 분리, 1979년 江東區, 1988년 松坡區로
分離∙新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蠶室과 新川 일대는 과거 '부리도'라 부른 河中島였으나 잠실 개발에 따른 물막이공사로
대규모 주택단지로 변모하고, 한강의 옛 河道가 매립되어 石村湖水가 만들어졌다
文化財로는 서울 風納洞土城(사적 11), 서울 夢村土城(사적 297),
서울 石村洞 古墳群(사적 243), 서울 芳荑洞 古墳群(사적 270), 서울 三田渡碑(사적 101),
可樂洞 先史遺跡地와 無形文化財로 송파 다리밟기(서울무형문화재 3),
송파산대놀이(중요무형문화재 49)가 있다.
(07) 한성백제왕도길 지도
漢城百濟王都길에는 천호역에서 8호선 石村驛으로 가는 길에 千戶市場-경당역사공원-
서울 風納洞土城-서울 夢村土城-夢村歷史館-움집터 展示館-漢城百濟博物館-
서울 三田渡碑-서울 石村洞古墳群 등이 있다.
(08) 한성백제왕도길
(09) 서울 風納洞 土城과 서울 夢村土城(오른쪽 아래)
(10) 漢城百濟
(11) 서울 風納洞 土城(사적 제11호) 안내표지판
안내표지판의 큰 제목은 아직도 <廣州 風納里土城>으로 되어 있는데 2011년 7월에 명칭이
변경되었으나 그대로 放置했다가 밑에 작은 글씨로 <서울 風納洞 土城>으로 변경되었다고
기록했는데 2년 전에는 작은 글씨조차 없었다.
(12) 서울 風納洞土城 土築 城壁
(13) 서울 風納洞土城, 千戶大路에서 북쪽 千戶大橋 쪽으로 본 모습.
(14) 서울 風納洞土城, 천호대로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15) 風納市場에서 ‘바람드리 6길’로 접어든다.
(16) 風納 百濟文化公園
(17) 풍납 백제문화공원 배치도
① 南北道路 ② 東潟路 ③ 內城壁 ④ 라-1∙2호 建物趾 ⑤ 마-1∙2호 建物趾 ⑥ 遺構마당 1 ⑦ 遺構마당 2 ⑧ 展示마당 ⑨ 行事마당 ⑩ 놀이마당 ⑪ 운동공간
(18) 44호 遺構 돌 놓기
평면이 ‘呂’字를 띠는 초대형 건물터로 입구가 되는 前室의 규모는 폭 5.2m, 길이 6.2m이상이고
後室은 동서 18m, 남북 13m이상이며 후실은 木炭으로 가득 채운 도랑으로 감싸있으며
나무다리가 전실과 연결되어 있다.
후실의 바닥 면은 粘土를 단단히 다졌으며 圓形과 半圓形의 기둥구멍을 3개씩 짝을 이루어
배치한 흔적이 확인되었다.
(19) 서울 風納洞土城 경당지구
(20) 서울 風納洞土城 경당지구
(21) 서울 風納洞土城 경당지구
(22) 서울 風納洞土城 경당지구
(23) 서울 風納洞土城 경당지구 全景
(24) Ⅰ∙Ⅱ∙Ⅳ 구역; Ⅰ구역(206호), Ⅱ구역(101호), Ⅳ 구역(196호)
(25) 206호 우물 터 음수전
한 변이 11m 정도의 正方形공간을 깊이 3m로 파고 粘性이 강한 흙과 모래를 교대로 채워
기초를 만들고 그 중앙에 우물을 만든 구조이다.
우물 깊이는 3m로 바닥은 자갈과 角材로 水平으로 맞추고 그 위에 板材를 4단으로 쌓아
올렸는데 평면은 方形이고 그 위에 割石을 쌓아 圓形으로 만들었으며, 바닥에는 5단에 걸쳐
200점이 넘는 土器를 埋納하고 그 위에 돌을 채워 廢棄하였다.
이 우물은 단순히 食水 확보용이 아니라 물이 드나들 수 있는 시설로 보이며 出土된 土器로
보아 5世紀 前半에 築造된 것으로 보고 있다.
(26) 큰 항아리[大甕]
큰 항아리는 住居址나 저장구덩이에서 확인되는데 풍납토성에는 60리터가 넘는
대형 항아리가 많이 出土되었는데, 이 造形物은 다-38호 竪穴趾에서 출토된 것을
形象化하여 제작하였다.
(27) 다-36호 竪穴式 倉庫
(28) 竪穴住居址群
(29) 수혈주거지군
(30) 수혈주거지군
(31) 수혈주거지군
(32) 南北道路
(33) 남북도로
(34) 東潟路
(35) 展示마당에서
(36) 伯濟國에서 百濟로 이행
(37) 百濟 漢城期 土器
(38) 백제 한성기 建築部材
(39) 백제 검은간토기[黑色磨硏土器]와 중국제 물품
(40) 라-1호∙라-2호 建物趾
라-1호 건물터는 라-2호 건물터와 나란히 축조된 장방형의 대형 건물터로 남북 11.2m,
동서 21.6m로 건물의 長軸은 동서방향이며, 발굴조사에서 礎石을 받치고 있던 積心施設만
확인되고 上部 構造物은 남아 있지 않았다.
라-2호 건물터는 동서 16.2m, 남북 12.4m의 長方形의 지상 건물터이다.
(41) 마-1호∙마-2호 建物趾
마-1호 건물터는 백제 최초의 基壇式 지상건물터로 마-2호 건물터가 폐기된 후 北西모서리
부근에 축조된 건물터로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지점(해발 15.5m)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長方形 構造로 건물터는 남북 6.92m x 4.84m이며 상부구조는
대부분 流失되었으며 건물터 주변에 수 천 점의 기와가 확인되어 지붕에는 기와를
올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호 건물터는 출입구가 있는 작은 방과 百濟人들이 생활하는 큰방 사이에 좁고 짧은
통로가 있는 ‘呂’자형 구조로 큰방의 규모는 동서 14.1m, 남북 18.0m이며 출입구를 포함한
남북 길이는 25m에 이른다.
風納土城에서 ‘呂’字形 평면형태를 가진 건물터는 경당지구 44호 건물터와 더불어
두 군데로, 주로 神殿 등 祭禮와 관련된 遺構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2) 서울 風納洞 土城, 남서쪽으로 뻗은 모습
(43) 서울 풍납동 토성, 북동쪽으로 뻗은 모습
(44) 서울 풍납동 토성, 북동쪽으로 본 모습
(45) 토성 위에서 북동쪽으로 본 서울 풍납동 토성, 주변에 建物群이 감싸고 있다.
(46) 發掘∙調査 중인 서울 풍납동 토성
(47) 서울 風納洞 土城 南壁
(48) 서울 풍납동토성 남벽에서 북서쪽으로 방향을 튼다.
-景福34회 제58차 문화답사(2-2); 서울 夢村土城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