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상륙 앞뒀던 부산 앞 바다
6.25 한국동란이 일어나던 1950년 피난길에 올라 부산까지 내려갔다. 군인 가족이라 하여 부산 수정공원에 있는 한 고아원에서 피난생활을 했다. 고아원 건물은 조금 높은 지대에 지어진 2층으로 기억된다.
피난민들은 시멘트 바닥을 편의상 조각조각 선으로 구획을 지어 자기 방을 삼고 살았다. 그런 자기 방이 바로 자기 집이었다. 옆 집 가족 상황, 때마다 먹는 음식이 무엇인지 다 알고 지냈다. 식사만 하고 나면 2층 창 밖 부산진 시가지를 바라보며 고아원 입구 장터에서 하루 종일 열리는 노점상을 구경하는 것이 일과처럼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앞 먼바다에 보이지 않던 많은 배들이 앞 바다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밤만 되면 배에 켜진 불로 바다는 불야성을 이루었다. 저녁마다 특히 밤마다 이런 바다를 구경하는 것은 아름다운 구경거리였다. 불빛으로 춤추는 바다. 배 중에는 각종 전함을 비롯해 아름답게 보이는 병원선도 있었다.
선선한 초가을바람이 이는 8월 중순경부터 수용소 많은 노약자들은 배앓이로 시달리며 귀향을 손 뽑아 기다렸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그 많던 군함과 병원선이 사라지고 바다는 종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 무렵 인천 상륙작전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인천 상류작전!
<한국동란>에 따르면 "8월 중순경 맥아더 원수는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인민군은 9월 초에 들어서 대구 근교 12km까지 공격해 들어왔다. 이에 맥아더는 인천에 상륙할 병력 일부를 낙동강 전선에 전용, 인민군의 공격을 분쇄하고 인천 상륙을 결행하였다."
9월15일 미명 유엔군 함선 261척이 참가한 상륙작전이 예정대로 진척되어 미 제1해병사단과 제7사단 그리고 국군 제17연대와 해병 제1연대는 공격 28분만에 최초목표 월미도를 점령하고 이 날 오후 그 주력이 인천에 상륙함으로써 인천시가를 장악하게되었다. 17일에 김포비행장점령, 19일에 영등포에 돌입, 28일 실함이 된지 98일만에 수도 서울을 탈환하였다.
한편 낙동강의 한미양군은 9월16일 9시를 기하여 총반격을 개시하였다....9월30일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은 맥아더 원수가 권고한 항복을 묵살하였다. 이에 10월1일 38선을 넘어 북진을 계속해 10월17일에는 원산을 20일에는 평양을 그리고 같은 날 초산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때 수십만의 중공군이 한국동란에 개입, 전쟁이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11월24일 유엔군이 국경전선에서 철수를 시작, 1951년 1월4일 공산군은 다시 서울을 점령하였다....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한국방송기자회보>(2004년 9월3일 제64호)에 실린 "판문점은 여전히 자유세계의 최일선"이라는 판문점 방문기를 보면 "판문점 지역은 북쪽으로 돌출하여 3면이 북한군 측에 노출되어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IN FRONT OF THEM ALL"-유엔사 경비대대의 구호처럼 판문점은 50년 세월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자유 세계의 최일선으로 살아있는 한미 혈맹의 살아있는 징표가 되고 있다"
"한국 전쟁 때 자유를 지키기 위해 유엔군 4만 명과 한국군 15만 명이 희생과 고통을 감내하였다" 이는 판문점 남측 제3초소 앞에 건립된 "휴전 50주년 기념비"에 새겨진 비문이다. 이 비문은 반세기의 시공을 뛰어 넘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오늘 9월15일은 인천상륙작전이 있은 지 만 54주년이 되는 날이다. (2004. 9. 15.)
글을 제자리에 옮겨놓았네 나는 1.4후퇴 때 부산진 성당으로 고아원과 함께 피난을 갔었는데 그 때의 경이로웠던 바다광경이 떠오르는군 비극의 6.25를 우리는 너무 빨리 잊어버리고 친복반미로 상호적이 아닌 일방적인 정신적무장해제를 서두르는 데에는 우려를 자아내는군 625를 경험한 세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만 가고
우리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기 쉬운 인천상륙작전을 되 새기게 한 시의적절한 글, 잘 읽었습니다. '그리운 소식'편집인으로 잠시 일 할때 박형의 글솜씨를 익히 안 바 있지만 그 필력은 여전하시구만. 6.25 한국전쟁을 북침이라 우기는 북한의 억지 주장을 믿는 젊은 세대도 있다는데 그들이 이 글을 한번 읽어 봤으면...
첫댓글 알림: <박천규춘하추동>에 등록한다는 것이 그만 <우리들 이야기>에 잘못 등록되었음을 알리며 미안하게 여깁니다.
글을 제자리에 옮겨놓았네 나는 1.4후퇴 때 부산진 성당으로 고아원과 함께 피난을 갔었는데 그 때의 경이로웠던 바다광경이 떠오르는군 비극의 6.25를 우리는 너무 빨리 잊어버리고 친복반미로 상호적이 아닌 일방적인 정신적무장해제를 서두르는 데에는 우려를 자아내는군 625를 경험한 세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만 가고
우리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기 쉬운 인천상륙작전을 되 새기게 한 시의적절한 글, 잘 읽었습니다. '그리운 소식'편집인으로 잠시 일 할때 박형의 글솜씨를 익히 안 바 있지만 그 필력은 여전하시구만. 6.25 한국전쟁을 북침이라 우기는 북한의 억지 주장을 믿는 젊은 세대도 있다는데 그들이 이 글을 한번 읽어 봤으면...
고맙군. 역시 운영관리에 짱이로고!
인민군의 주력이 낙동강 다부동 전투에서 일진 일퇴하고 있을 때 인천상륙작전 감행이라. 역시 맥아더는 천하의 명장이었어. 노르망디의 The Longest Day 처럼 인천상륙작전을 주제로한 名畵를 만들었었다면 오늘날 남침,북침의 논쟁도 없으련만...
300만명의 인명이 희생된 민족의 비극 한국전쟁 " 느네들이 6.25 전쟁을 알기나 하느냐 ? "
당시 초등학생 이었지만 평화의 사도들 은혜가 무척 고마웠다.훗날 연합군으로 주월한국군 민사작전장교 임무 수행시 내가 겪은 전쟁중 고생을 생각하며 전쟁중인 민초들 돕는데 좋은 메뉴얼이 되었고 그들도 그렇게 좋와 하였다.은혜의 씨는 은혜를 뿌렸다 할수 있을 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