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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이미 중반기로 접어 들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하기위하여 호텔 앞 레스트랑으로 내려갔는데 강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여기에 기온이 급강하하면서 몸이 떨리기 시작하여 다시 겉옷을 입어야 하나 망설여졌다.
이 지역이 이렇게 기온의 격차가 심한 것은 각 지역 간의 고도와 지리적 특성, 산악 지형에 따라 기후가 따르기 때문이었다.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가 전 국토의 대부분이라 할 수 있겠으나 스페인 북부지역인 에브르 분지와 중앙산맥 지대는 우기가 두 차례 정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마침 우리가 스페인 여행에 나서 것이 5월 경이어서 우기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그래서 인지 저지대인 대평원에서는 찌는 듯한 더위가 엄습해왔고 여기에 기후가 아주 습하여 여행 일정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한 동안 버스는 저지대의 대평원을 달리다가 고원지대로 오르기 시작하였다.
내가 보기에는 끝없는 대평원으로 여겨졌으나 해발 800m가 넘는 고원지대라고 하였다.
사막과 같은 대평원에서 고원지대로 올라가니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부르고스였다.
부르고스는 인구 20만 내외였다.
레온 대성당
레온 산타마리아 대성당이라고도 한다.
레온 주 중앙부에 위치한 주도 레온에 있다.
레온 주의 심벌은 사자였다.
레온 시내로 들어가면서
저녁 시간 무렵이라 사진이 희미하다.
현재 대성당이 위치한 장소는 로마 지배하에 있을 때
로마인들의 대규모 목욕탕이 있는 자리다.
도시 중앙에 강이 흐르고 있어서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도시 자체가 계획도시 인양 바둑판처럼 잘 정비되어 있었으며 거리에는 휴지조각 하나 찾아 볼 수 없었다.
우리나라 서울 한강 가 산책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부르고스 시내 수양버들이 늘어서 있는 강가를 노부부가 석양에 거닐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 태양이 뉘엿뉘엿 져물어가고 있는 풍경과 어우러져 더욱 가슴을 저리게 하였다.
그러나 노부부의 뒷 모습이 평화롭고 안정되어 있어서 아름답고 행복하게 보였으며 부르고스 시내가 붐비지 않아 풍요롭고 여유있게 보였다.
서안해양성 기후 지대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부르고스는 아직은 한 겨울의 한기가 가시지 않아 대부분 사람들은 두툼한 겨울 옷을 걸치고 있었으나 날씨가 맑은 오후의 공기는 신선하여 공원에서 한가하게 산책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레온 시내
레온 대성당은 3개의 큰 장미창과 120개 이상의 창문을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하였다.
무늬는 대부분 식물이다.
찬란하고 황홀한 스테인드글라스
시차 적응을 하지 못한 것 때문에 버스 안에서 계속 졸리곤 하였는데 저녁식사를 마친 후 침실로 돌아와 잠깐 누워있었던 것이 그만 잠이 들어 골아 떨어지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식사를 마치고 이번 여행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이동하였다.
내가 스페인 여행을 강행한 이유 중의 하나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지로 가는 아름다운 순례자 길을 탐색하기 위해서 였다.
흔히 이 길을 까미노라고도 하였는데 까미노란 본래 길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까미노는 평범한 길이 아니었다.
중세 이후 성지 예루살렘을 이슬람세력이 점령해버리자 가톨릭 신자들은 그 대체지를 찾게되었다.
그래서 유럽의 가톨릭 신자들은 예수의 12사도 중의 한분이었던 야고보의 묘가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를 성지로 여기고 순례하기 시작하였다.
레온 시내를 거닐면서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작품
천재 건축가와 가우디와 함께
부르고스에서 레온으로 가는 길은 대평원으로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터키 안탈리아로 갔던 여행이 머리에 떠올랐다.
안탈리아로 가는 길은 우리나라의 태백산맥처럼 토로스산맥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산비탈을 돌고 돌아도 낭떠러지만 지속될 뿐 구절양장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지루하고 힘든 사막을 넘어서려는 카라반 상인들을 위하여 건립한 카라반사라이가 도로가 곳곳에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여행이 지루하고 힘든 고행의 길이라는 것을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 가이드는 카라반 상인들의 희로애락을 묘사한 음악을 들려주었다.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며 잠시 묵상에 잠겨본다.
드디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고
순례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찾고 있었던 곳은 신비에 쌓여 있었으며 비경에 그만 놀라기만 하였다.
눈을 감고 음악을 감상하면서 카라반 상인들을 떠올려보았다.
낙타 등에 비단과 차를 실고 하늘과 산과 사막을 친구삼아 대륙의 끝까지라도 찾아 갈 듯 콧노래를 부르며 집을 나섰었는데 어느덧 가족의 얼굴이 서서히 잊혀져가며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하였다.
어제는 사막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보니 지형이 바뀌어 길을 잃어버리기도 하였고 그제는 도적에게 돈을 빼앗기기도 하여 수중에는 한 푼의 동전마져도 쥘 수 없었다.
차라도 끓여 마셔야 하겠는데 물마저 구할 길이 없었고 생명의 위험을 느끼는 듯 고달프고 외롭기도 하여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올리면서 눈물을 글썽이다가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카라반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가 너무 애처롭고 구성지기도 하여 듣는 이들의 애간장을 도려내는 듯 눈물을 흘러내리게 하였다.
나는 가이드가 들려준 노래를 듣고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어디나 삶에 대한 애환과 고통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어려운 삶을 한곡의 음악으로 모두를 표현할 수 있을까마는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카라반 상인들에 대한 애절한 생활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 스페인 부르고스에서 레온을 거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외롭고 고통스러운 여행의 연속이었다.
산티아나 데 콤포스텔라 야고보 교회 성지로 가는 길도 터키에서의 여행처럼 오로지 나 자신과의 싸음에서 투지가 있어야 가능하였다.
앞을 바라보니 끝이 보이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지평선과 신기루 뿐이었다.
이곳 산티아고로 가는 길은 하늘과 땅이 맞닿은 지평선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간혹 인간들이 거주하는 민가가 보이기는 하였으나 혹서 때문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끝없이 지속되는 자연속을 살피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로 가는 까미노 길을 찾고 있었는데 아무런 인기척도 주변에서 느낄 수 없었다.
이 들판이라면 분명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로 가는 길과 순례자들이 눈에 띌 것 같았다.
왼쪽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방향으로 뻗어 있는 작은 도로가 보였다.
그러나 이 작은 길이 중세 때부터 고행을 자처하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로 가는 까미노 순례자 길인지는 알 수는 없었으나 어쩐지 그 길일 것도 같았다.
그것은 나의 상상이었을 뿐 알 수 없었으나 아이패드의 지도로 보아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길이 맞는 것도 같았다.
우리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로 주행하고 있는 도로 왼쪽 작은 도로 가장자리에는 플라타너스 활엽송과 같은 나무가 파란 쪽빛 하늘을 등지고 훤칠하게 서 있었는데 나뭇잎이 산들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로 가면서 분명 프랑스 국경을 넘어 산 세바스티안 부근에서 시작되는 까미노 길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우리와 평행을 이루고 있는 길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동쪽에서 서쪽으로 달리고 있었는데 구릉의 기복이 반복되었다.
지형의 기복처럼 날씨 또한 변덕이 심하였다.
비가 왔다가 어느 사이에 화창하게 개었다.
산악지대에서 대평원으로 접어들었는데 처음에 보았던 작은 도로가 또 다시 우리가 달리는 도로와 평행선을 긋고 있었다.
역시 우리가 처음에 보았던 도로처럼 도로 가장자리에 가로수가 늘어서 있었다.
가로수가 태양을 가리고 날씨가 건조하다면 가로수의 그늘이 걷기에는 최상일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주변 도로나 농가에서 전혀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는데 갑자기 가로수 아래에서 삼삼오오로 구룹을 이루며 걷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벌떡 일어나 아이패드를 들이대고 사진을 찍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를 향아여 걷고있는 순례자들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였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까지의 거리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서부터 대략 900~1000km에 달한다.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서부터 스페인 서쪽 거의 끝까지 가는 길이니 상상을 초월하는 거리였다.
30일 이내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까지 순례 계획을 세운다하더라도 30~35km를 하루에 걸어야 하였다.
시속 4km로 걷는다면 하루에 8~9시간을 걸어야 하였다.
하루 정도의 도보는 가능할 지 모르겠으나 30일 동안 연속하여 걷는다고 하는 것은 초인적인 정신력을 요구하는 고행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태어난 이후 한 번쯤은 걸어보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머리가 혼란수러웠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가 있는 곳까지 묵언하면서 순례 길에 기어이 도전하고 싶었는데 겁이 덜컥 났다.
우리나라에서라면 도전하고도 싶었으나 이국이어서 한편으로는 겁이 났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을까?
하늘의 별이 되어버린 나의 딸 지원이를 생각하며 자주 반복하며 질문하는 대목이었다.
잡념의 근원을 뿌리치고 잊고 싶었다.
그라나 지금까지 나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가슴에 묻어둔 지원이가 잊히지가 않았다.
그래서 산 세바스티안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가 있는 곳까지 순례길에 도전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달리고 있는 도로 옆에서 순례길에 도전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용기 충천하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가 있는 곳까지 고행을 해보고도 싶었는데 체력이나 정신력에 비해 마음이 너무 앞서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투지나 의지가 있어서 였던 것도 아니고 가톨릭에 대한 집념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져 막연하게 여행을 해보자는 생각때문이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고통을 통하여 잡념을 지워버리고 가족을 잃은 슬픔을 잊고 싶어서였다.
비록 희망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꿈을 간직하고 싶었다.
나는 오늘 운이 좋았다.
평소에 산 세바스티안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 성지까지 도보여행을 하고 싶었으나 아직까지도 실천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부르고스애서 레온을 거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순례자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기원하고 곧이어 나도 실천을 행동으로 옮겨보리라 생각하였다.
아직도 대평원의 지평선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비가 대여섯 번이나 내렸고, 우리 일행을 실은 버스가 산을 여러차례 오르내렸어도 종점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있다.
어떠한 고통에도 끄덕 없었던 순례자들, 그들은 프랑스와 스페인 접경에서부터 이베리아반도 서쪽 끝 대서양을 향하여 이동하면서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 되고 지푸라기조차도 손으로 집어 올릴 힘이 없었을 것이다.
앞만 바라보고 걷는 그들은 순례길을 걷는 과정에서 육신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을 겪고 옷은 누더기처럼 남루하였으나 정신력 만큼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까지의 순례길을 기어이 달성해야 하겠다는 투지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들은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띄고 있었는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800~1,000m에 이르는 거리를 매일 8~9시긴씩 한 달에 걸쳐 걷는다고 하는 것은 초인적인 인내력이 아니면 감히 도전할 수 없는 무모한 짓이다.
파란 하늘 아래 구름사이로 나타난 횃불, 그것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 첨탑인 것도 같았고 지평선의 신기루속에 어렴풋이 나타난 신기루효과 인것도 같았다.
10세기까지 가톨릭이라고 하는 새로운 신앙은 이베리아반도 북부일대에 퍼지고, 11세기에는 피레네산맥을 넘었다.
이 무렵부터 서유럽은 물론, 멀리 북유럽이나 동유럽에서도 귀천을 불문하고 많은 순례자들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를 찾았다.
이슬람세력에게 빼았겼던 실지를 다시 회복하자는 영토회복전쟁이 전면대결의 단계를 넘어서서 피레네 산맥 이북의 지원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스페인 제왕은 순례를 크게 환영하였다.
그래서 이때부터 순례길을 정비하고 순례객을 보호하는데 노력하였다.
최 전성기였던 12세기 경에는 연간 순례자수 만도 50만 명이 넘어섰으며 그들을 위한 안내서까지 발행되었다.
순례 객들로 북적이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를 이슬람계 알 안달스의 작가들이 자신들의 성지였던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신전 카바에 비유하자, 신과의 완전한 합일을 주장하였던 단테는 산티아고를 향한 것만이 참된 순례라고 썼다.
997년, 이슬람세력 알 안달스의 독재자 만스르가 산티아고를 파괴하였는데 야곱의 묘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17세까지 계속되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 순례는 유럽과 이베리아를 연결하는 굵은 동맥이 되었다.
한편, 11세기 이후 그리스도교가 이슬람교에 대하여 벌인 실지회복운동(리콘퀴스타)에서 스페인은 야고보를 점차 그리스도교 수호성인으로 보게 되었다.
그들은 "산티아고"라고 외치면서 이슬람 적군에게 돌격하였으나 실지 회복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야고보가 하얀 백마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이슬람 교도를 물리치는 용맹한 모습을 기대하였다.
이슬람 교도를 멸망시키는 야고보상이 이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다.
야고보신앙은 실지회복운동에 가톨릭교 성전적 성격이 부가되어 15세기 말 그라나다왕국을 정복할 때까지 최대의 에너지원이 되었다.
야고보신앙은 나아가 정치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사실 이 지역에서는 그리스도의 형제라고 하여서 그리스도와 매우 유사한 또 한 명의 야고보가 있었다.
앞의 야고보와 구별하기 위하여 후자를 차야고보라고 불렀는데 중세 초기에 두 사람은 흔히 혼동되곤 하였다.
그 결과 야고보를 12사도 중에서 가장 그리스도와 가까운 존재로 보고, 그의 묘가 안치되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를 베드로가 잠들어 있는 로마와 거의 동격으로 보았던 것이다.
10세기에서 12세기까지 로마 주교에게만 허용되는 최고 제사장(교황)의 칭호를 산티아고의 주교에게도 부여하여 일반인들의 비난을 사기도 하였다.
또한 이 무렵 스페인 북서부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지배자를 정치적 1인자인 왕을 대신하여 종교적 지도자로 칭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또한 서유럽의 정치적 전통과 관행에 어긋난 행위였다.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는 야고보의 특별한 가호하에 있는 자신들의 나라야말로 다른 그리스도교 국가들보다도 우월하다는 민족적 자부심을 갖게 하였다.
이러한 야고보 신앙은 중세 이베리아반도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로 주민들에게 인식되었는데, 그라나다 왕국 정복 이후 점차 힘을 잃어갔다.
사자(Lion)가 로고인 스페인 북서부 레온은 프른 나무와 잔듸로 잘 조성된 아름다운 도시였다.
레온은 유럽 중세시대부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 순례길의 중요 거점이었기 때문에 유적과 유물들이 많이 남아있었으며 레온의 상징인 사자처럼 대성당도 웅장한 모습으로 우리들을 반겼다.
레온 시를 관통하며 흐르고 있는 베르네스강 양쪽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으며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잘 활용되고 있었다.
레온은 카스티야 자치지역 북서부 끝에 위치한 레온주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평균 해발 고도는 838m였으며 기원전 1세기 경 고대 로마 군단이 이곳에 주둔하였던 것이 계기가 되어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910~1301년까지 레온 왕국의 수도로 번성하였으며, 이후 줄곧 에스파냐 북서부 일대에서 주요 도시의 지위를 누려왔다.
레온 주는 대체로 건조하여 전체 인구의 1/4 이상이 이 레온 시에 몰려 있다.
기후는 대륙적 지중해성 기후라는 보기 드문 기후를 보이고 있었는데 서로 상반된 성질을 지니고 있어서 대륙성 기후나 지중해성 기후와는 달리 맑았다가 다시 구름이 끼는 등 날씨가 자주 변하고 있었다.
또한 오랜 역사를 반영이라도 하는 듯 도심 곳곳에는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건축물을 비롯해 많은 관광 명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역사적 건축물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16세기 후반에 완성된 레온 대성당, 산이시도로 바실리카, 구스마네스 궁전, 콘데루나 궁전 등을 들 수 있었다.
레온 대성당을 레온 산타마리아 대성당이라고도 하였는데 레온주 중앙에 있는 레온 시에 위치하고 있었다.
현재 대성당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는 로마제국이 에스파냐를 지배하고 있을 당시 로마인들의 대규모 목욕탕이 있었던 자리라고 하였다.
에스파냐 건축가 엔리케(Enrique)가 1205년에 처음 건축을 시작한 이래 거의 400년이 지난 16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완성된 대규모 성당이었다.
성당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가 모두 기념비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웅장한 규모의 성당 외벽은 다양한 문양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한 120여 개의 창문, 3개의 장미 문양 창문, 57개의 둥근 창문 등 아름답기로 소문난 많은 창문들로 구성되어 석재보다 유리가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창문들에 사용한 유리는 모두가 13세기에 제작한 것이라고 하였다.
양쪽 끝에 2개의 거대한 탑이 세워져 있는 성당 앞면에는 아치형의 대형 출입문 3개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으며 각각의 문 윗쪽은 수많은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성당 내부의 성가대석 또한 정교하게 제작되어 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으며 에스파냐에서 가장 오래된 성가대석 중 하나라고 하였다.
이 성당은 오늘날까지도 고딕 양식의 건축물 가운데 가장 걸작품으로 꼽히고 있었으며 1844년에 가서야 에스파냐 정부는 중요 문화 유산으로 지정하였다.
레온 대성당을 관람하고 꿈에서도 그리워하였던 산티아나 데 콤포스텔라로 이동하였다.
도로 양 옆은 끝없이 펼쳐진 구릉지와 광활한 평야지대가 지속되고 있어서 과연 이베리아반도가 광대하고 넓다는 느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간간히 고속도로 왼쪽 작은 도로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 성지로 걸어가는 순례자들이 눈에 띄었다.
이들이 오랜 행군 때문에 기진맥진하여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그것은 나의 착오였다.
이들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면서도 한 두사람 혹은 삼삼오오로 떼를 지어 걸어가고 있었는데 내가 생각하였던 것처럼 지쳐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이들을 바라본 나는 나 자신을 찾아서 순례를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순례를 지속하고 있는 이들이 장시간의 행군으로 고통스럽다기보다는 낭만적이고 평화롭게 보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까지 가는 순례길은 그리 평탄하고 쉬운 길이 아니었다.
우선 고원지대와 끝없는 대평원이 가로막고 있었다.
여기에 순간 순간 비가 왔다가 그치고 맑은 하늘이 보이는 등 기후의 변화가 체력을 감소시켜 인내의 한계치에 이르게 할 것 같았다.
걸어가는 순례자들과는 반대로 버스를 타고 편안한 가운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로 이동하고 있었는데도 왜 이리 졸리고 잠이 오는지 모르겠다.
높은 산이 앞을 가로 막을 때는 구절양장의 산 비탈을 아슬아슬하게 이동하여야 하였고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만났을 때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 달리는 끝에 버스는 이베리아 반도 서쪽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게 되었는데 대서양의 찬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였다.
또한 주변의 삼림이 다른 수종으로 변해가고 있었으며 간간히 카페 앞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순례자들과도 눈빛이 마주치게 되었다.
드디어 버스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시로 접어들었다.
터키 고대 도시 에페수수를 방문하였을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벅차오르기 시작하였다.
버스로 이동해 가는 길은 실제 고통을 겪어가면서 도보로 순례 길을 이동해 가는 길이 아니어서 나 자신이 체력의 한계를 체험해보지는 못하고, 영적인 고통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으나 가이드가 틀어주었던 The Way라는 영화를 감상하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
물론 자신을 발견하는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중세 때부터 순례자들이 왕래하였다는 순례자들의 종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를 방문 한 것만으로도 나는 꿈이 현실화 되는 것 같았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야고보 교회는 야고보 성인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는 곳이자 순례자들의 도시였다.
중세유럽에서는 예루살렘과 로마에 비견하는 그리스도교 3대 순례지 중의 하나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의 갈리시아로 이어지는 기독교 순례길을 따라 퍼져 있는 순례자 성당 중 가장 마지막에 등장한 곳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을 비롯해 36개의 수도원과 46개의 교회가 있으며, 16세기에 창립된 대학도 있었다.
산티아고는 그리스도의 12사도 중 야고보(장야고보)의 스페인어명이며, 캄포스텔라는 일반적으로는 라틴어 별이라는 뜻이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현재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은 3세기경 로마의 지배하에 있을 당시 묘 위에 세워졌던 것으로 중세 그리스도교도 스페인 사람들의 신앙에서 태어나 발전하였으나 이 신앙의 기원에 대한 결정적인 것은 아직 없다고 하였다.
당시 중세 서유럽인들의 정신과 문화생활에서 순례는 반드시 필수적인 코스였다.
따라서 중세 서유럽인들이 순례하였던 이 길은 순례자들의 정신적인 안정과 육체적 휴식을 위한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에는 교회와 민간 건물, 크고 작은 집, 토목 건축물 등의 형태로 중요한 기록들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으며, 중세 시대 이베리아 반도와 그 외 유럽 지역들이 양방향에서 문화 교류를 촉진하는 역할을 하였다.
유럽 어디에도 이 정도의 규모와 지속성을 갖는 기독교 순례길은 없었다.
사도 바울이 기독교를 전도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시리아 안티오크를 거쳐 터키 에페수수와 그리스 데살로니카 그리고 코린트로 가는 길과 예루살렘에서 시돈을 거쳐 터키 안탈리아에서 로마로 가는 바닷길이 있었으나 이슬람세력이 이 지역을 장악하여 순례길을 차단해버림으로서 거의 단절되거나 파편처럼 부분적으로 확인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산티아고 순례길은 위대한 역사적 · 정신적 가치 외에도 유럽의 예술과 건축이 수세기에 걸쳐 발전한 단면을 뚜렷하고 완벽하게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다른 순례길들이 모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야고보 사도의 무덤’ 아래에서 만나게 되며, 여러 예술품과 건축물이 이 순례길과 연결되어 있다.
이 순례길의 곳곳에는 많은 문화유산들이 풍부하게 흩어져 있었으며, 이것들은 로마시대 건축양식인 로마네스크 예술을 대표하고 있었다.
평소에 간직하고 있었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대한 이미지가 만 천하에 드라나고 있었다.
중세때부터 유럽인들의 순례가 끊이지 않았던 신비스러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모습이 석양의 햇살 아래 눈 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오늘날 몇천 명이 함께 운집하여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도 알 수 없는 호화로운 교회가 아니라 고색이 창연하여 나도 몰래 사색에 잠기게 하고 고개를 숙이게 하는 자아의 전당이었으며 어느 누가 종교에 대하여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종교에 깊이 빠져들게 하였다.
산수가 빼아난 이베리아반도 서쪽 자연 만큼이나 아름다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왠지 마음이 편안하고 넓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다면 이를 시정하고 모든 이들에게 용서를 빌고 싶은 생각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치솟아 성찰의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과 순례자들이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성당 광장은 많은 사람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기독교도와 비 기독교도라는 문제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어느 종교나 귀결은 선이기 때문이다.
대성당 정문으로 들어가 내부를 살펴보니 분위기가 아주 엄숙하였다.
나도 몰래 성호를 긋고 성전으로 들어섰는데 저녁 미사가 한창 준비 중에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저녁 미사에 참여하고 싶었으나 제한된 시간 때문에 잠깐 앉아 있다가 일어서서 야고보 성인의 무덤으로 이동하였다.
야고보 무덤에 꿇어 앉아 고해성사를 하는 중에 우리 지원이를 잊지말아달라고 기도를 하였다.
자연은 빼어난 자태를 방문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불을 태우고 있었는데 하늘의 별이 된 지원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의 주변에서 죽음을 직접 대면해 보거나 슬픔을 지금까지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죽음이란 나하고는 관계없는 다른 이웃들의 일이겠거니 생각을 하고 언제인가는 알 수 없었으나 먼 미래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만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우리 가정에 슬픔이 다가왔다.
둘째가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하여야 한다는 급보가 날아왔다.
급히 달려가 병원에 도착하였으나 이미 수술 중에 있었다.
누구에게라도 손을 내밀고 회복을 위한 기도와 도움을 요청해야 하겠는데 인간으로서의 능력이 너무 미미하고 보잘것 없다는 것을 이때서야 비로서 느낄 수 있었다.
송모송을 암송하며 성모 마리아님에게 메달려 기도를 하였다.
기도라기보다는 거의 애원을 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는 동안 수술이 끝나고 중환자실로 이동한다는 메시지가 왔다.
수술은 끝났으나 담당 의사의 표정이 밝지가 않았다.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 앉아 두근거리기 시작하였다.
어려운 뇌종양 수술을 하였기 때문에 회복기간이 길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중환자실로 이동하였다.
둘째는 장기간 투병 끝에 결국 회복되지 못한 채 말 한 마디 해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둘째가 평소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사상이 어떤 것인지 내면에 들어가 살피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되고 말았다.
건강 상태가 어떠한 지 일상에서 늘 살폈어야 하였는데도 부모로서 체크하지 못한 것이 너무 후회스럽고 미안하였다.
이 모든 것은 아빠의 사려깊지 못한 이기심과 무관심 때문이라 생각이 들어 이곳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서 용서를 빌고 싶었다.
우리 지원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하고 싶은대로 뒷바라지를 해주지 못했던 것이 후회가 되어서 지금까지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버스에서 내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성 야고보 교회 앞에 섰을 때 나의 곁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 돌아다보았으나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그러나 나의 곁에는 늘 예쁜 지원이가 웃으며 지켜보고 있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딸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잠을 자고 있겠지!
생각을 하고 편안하게 주님곁에서 영면해주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대성전 앞에 비치된 초 한개를 집어들고 촛불을 켰다.
눈물을 흘리며 지원이와의 그동안 추억과 인연을 하느님 곁에 묻어두기로 하고 쓸쓸히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 야고보 교회를 빠져나왔다.
오늘 밤은 유난히도 밝은 달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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