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 마지막 인터체인지 부산을 40여㎞쯤 남겨놓고 만나는 통도사 인터체인지에서 절까지는 아주 가깝다. 채 5분도 걸리지 않는 동안인데도 ‘통도 환타지아’라는 다소 이질적인 두 단어가 조합된 사하촌이 형성되어 있다. 어디가 정문인지 모를 정도로 절 앞은 휘황찬란하고 번잡했지만 일단 절안으로 들어서면 ‘불보(佛寶)사찰’ 통도사의 웅장한 면모가 천천히 드러난다.
아름드리 소나무 숲으로 난 좁은 차길을 따라 몇분을 올라가야 닿는 통도사는 사하촌의 어지러운 모습과는 달리 우리 사찰들의 맏형답게 웅장하고 의젓하다. 일주문 좌우에는 ‘불지종가(佛之宗家)’와 ‘국지대찰(國之大刹)’이라는 한국불교의 종가다운 현판까지 내걸고 있었다.
-신라때 자장율사가 세운 고찰-
구한말 통도사에 주석하고 있던 성해(聖海)스님의 두 제자, 구하(九河·1872~1965·사진 위)스님과 경봉(鏡峰·1892~1982)스님이 일구고 구하스님의 상좌인 월하(月下)스님과 경봉스님의 상좌 벽안스님이 이어받은 통도사는 위계질서가 엄격한 ‘종가의 가풍’을 그대로 간직한 한국불교계의 불지종가 그 자체이다. 통도사는 1986년 영축총림으로 지정됐고 초대방장 월하스님이 현재까지 주석하고 있다.
상편에서는 일제시대부터 60년대 중반까지 통도사의 기반을 튼튼히 한 구하스님을 중심으로, 하편에서는 주로 극락암에 주석하며 선풍을 드높인 경봉스님, 그리고 월하 방장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영축총림 통도사의 가풍을 짚어가겠다.
◇통도사의 역사와 선방의 개원=신라 선덕왕 15년인 서기 646년에 자장율사가 세운 통도사는 원래 아홉 용이 살았던 연못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연못의 흔적은 대웅전 옆 구룡지(九龍池)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남북의 축을 가진 일반적 가람배치와 달리 동서로 긴 통도사는 상로전, 중로전, 하로전으로 나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심적인 특징은 부처님의 정골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사찰이기 때문에 대웅전에 불상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대웅전 바로 뒤에는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위치해 있어서 불단 뒷문을 열면 바로 금강계단의 탑이 보인다. 또한 통도사에는 대대로 글씨와 그림에 능한 스님들이 많은데, 혹자는 영축산의 한 봉우리에 붓의 모양을 한 문필봉이 있어서 그 정기가 흐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1,300년 넘은 고찰 통도사도 조선시대 불교의 암흑기를 거쳐 조선말인 1899년 여름이 되어서야 백운암에 선방을 열었다. 경허스님이 해인사에 처음으로 선원을 연 것이 그해 봄이니, 통도사도 그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경허스님이 직접 통도사로 와서 선풍을 떨치는데, 이때 통도사 본사 내의 보광선원이 문을 연다. 이곳에서 성해스님과 그 제자인 구하·경봉스님, 그리고 초대방장인 월하스님이 도를 닦으며 통도사를 떠받치고 나간 것이었다. 이후 1905년 내원암에도 선원이 개설되었고 이후 안양암, 백련암, 극락암 등에 차례로 선원이 개설되었다.
-書● 명성은 문필봉 정기 덕?-
종가답게 상하의 위계를 존중하고 계율을 존중하며 화합을 중시하는 것이 통도사다. 수행하여 큰 깨달음을 얻거나 남다른 재주가 있다고 해도 사형이나 스승이 있으면 내세우지 못한다. 경봉스님과 구하스님 모두 명필로 소문났으나, 경봉스님은 구하스님 생전에는 결코 자신의 글씨를 자랑한 법이 없었다.
또한 계율을 지킴에 있어서도 통도사 스님들은 남다르다. 40대 후반 이른 나이에 열반한 홍법스님(전 주지, 월하스님 상좌)은 지병 때문에 육식이 필요해 주변에서 아무리 육식을 권해도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사찰의 중으로 어찌 부처님 계율을 어길 수 있겠냐’며 듣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통도사는 승려뿐 아니라 대중들의 교화에도 일찍부터 눈을 돌렸다. 경봉스님이 2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대중법회인 화엄산림은 음력 11월 한달간 전국 고승들이 법문을 들려주는데, 현재도 면면히 이어져 전국의 불자들을 통도사로 향하게 한다.
◇구하스님과 일제시대=1911년부터 통도사 주지가 된 구하스님은 사제인 경봉스님과 함께 근세 통도사의 역사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5세에 사서삼경을 다 떼었을 정도로 신동이었던 구하스님은 1884년 13세에 천성산 내원사로 출가해 1889년 18세에 경월스님을 은사로 출가한다. 이후 전국의 산천을 떠돌며 운수행각을 하던 구하스님은 29세때 비로소 통도사와 인연을 맺는다. 통도사에서 구하스님은 성해스님을 만나 그의 법제자가 되어 ‘구하’라는 법호를 받게 된다. 1905년 34세에 통도사 옥련암에서 정진하던 중 생사가 둘이 아닌 경계를 깨닫고 오도송을 읊었다. ‘마음에 티끌이 따로 없어 같이 존재하고/오체를 공중에 던지니 함께 귀의한다네’.
특히 기도를 열심히 하기로 소문난 구하스님은 1911년 통도사 주지가 돼 당시 대처승들이 누룩을 절에서 만들어 팔 정도로 심각했던 사찰내 폐습을 일소하고, 즉시 강원과 선원을 복원했다. 1917년 30본산위원장(본사주지회의 의장)으로서 일본시찰을 하기도 했으며 1950년에는 초대 중앙총무원장에 취임했다.
이처럼 겉으로는 일본의 신문물을 배우러 일본에 드나들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많은 독립운동자금을 대는 큰 자금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이를 눈치챈 일제가 구하스님을 주지에서 쫓아내려고 한 적도 있었다. 구하스님 말년에 시봉을 들었던 현재 통도사 주지 현문(玄門)스님은 “독립운동 자금을 받으러 오는 사람은 항상 걸인 행색을 하고 구하스님 방앞에서 행패를 부리면 구하스님이 데리고 들어가 슬며시 자금을 건넸는데, 어찌나 은밀하고 눈 깜짝할 새 건네지는지 그 바로 옆에 있던 시자스님들도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구하스님 독립자금 몰래 대기도-
‘통도사가 독립운동 자금을 댄다’는 소문이 흘러나가자 일본형사들이 통도사 주위를 맴돌며 절의 살림살이를 살폈는데, 그때마다 구하스님은 사제인 경봉스님과 함께 절 밑 사하촌의 기생집에서 일부러 몇날며칠을 머물다가 가곤 했다는 것이다. ‘기생집에서 거금을 썼다’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였는데, 사실 두 스님을 존경하던 기생들은 한푼도 받지 않고 명필로 소문난 구하스님과 경봉스님의 글을 받는 것으로 만족했다고 한다.
구하스님은 1965년 11월24일 한낮 “나 이제 갈란다. 너무 오래 사바에 있었어. 그리고 다시 통도사에 와야지”라는 말을 남기고 세수 94세, 법랍 82세로 열반에 들었다.
[5대총림 禪의 현장을 찾아서]영축총림 통도사 下
조선 말인 1899년부터 다시 선맥을 잇기 시작한 통도사의 근세불교 역사는 ‘구하의 교와 경봉의 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자양분을 바탕으로 통도사의 역사는 다시 뿌리를 뻗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상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형인 구하(九河·1872~1965)스님이 통도사 본사에서 사찰의 재정을 튼튼하게 다지는 한편 독립운동 자금을 대는 대외적 창구 역할을 했다면, 경봉(鏡峰·1882~1982)스님은 주로 극락암의 작은 전각 삼소굴(三笑窟)에 주석하면서 전국에 그 선풍(禪風)을 드날렸다. 불교의 종갓집이라 일컫는 통도사답게 사형사제의 관계가 남달리 가깝고도 깍듯했던 두 사람이 함께 지은 것으로 알려진 ‘통도사’라는 선시(禪詩)가 전해져 내려온다.
‘영축산 천연의 성지/쉬어 간 이 그 몇인가/구름은 산 너머로 흘러가고/달은 솟아 동구에 떴네/맑은 눈빛은 바다처럼 푸른데/티끌세상 한갓 헛된 꿈일세/고금의 참 면목이여/벼랑 아래 물 언제나 맑게 흐르네’
-선문답 나눈 편지·일기만 몇가마분-
▲경봉스님과 극락선원
경봉스님은 24세에 모친상을 당한 뒤 인생무상을 느끼고 통도사로 출가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해인사, 직지사의 선방을 돌며 수행정진을 거듭하면서 ‘통도사로 돌아오라’는 은사 성해스님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공부가 잘 되어가고 있다고 판단한 경봉스님은 그제서야 다시 통도사로 돌아왔다. 해담화상과 화엄산림 법회의 설주(說主)가 되어 법회를 주재하면서 경봉스님은 밤낮의 구분이 사라지고 시야가 확 트이는 불이(不二)의 경지를 맛본다. ‘천지를 삼키니 큰 기틀이로다/돌토끼 학을 타고 진흙거북 쫓아가네/꽃 숲엔 새가 자고 강산은 고요한데/칡덩굴 달과 솔바람 뉘라서 완상하리’라고 오도송을 읊었다.
1928년 경봉스님은 통도사 본사에서 걸어서 1시간 가까이 걸리는 극락암에 극락호국선원을 개원하고 영축산 자락에 선풍을 크게 떨치기 시작했다. 경봉스님의 상좌 명정스님(61)은 “극락선원에서는 하안거와 동안거 도중에 일주일씩 한잠도 자지 않는 용맹정진을 하는데, 동안거 때는 섣달 초하루부터 일주일간 한다”면서 “용맹정진이 끝나고 나면 쉬지 않고 그 길로 등산을 하고 내려오는 것이 이곳의 전통”이라고 했다.
명필로 소문난 구하스님 못지 않게 필력을 갖추었던 경봉스님은 사형에 대한 예를 다하기 위해 구하스님 생전에는 글씨자랑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글씨뿐 아니라 글짓는 실력도 뛰어났던 스님은 여러 스님들과 소중한 벗에게 편지로 선문답을 주고받고 안부를 묻는 일을 즐겼는데, 스님이 열반한 후 모아놓은 편지와 일기가 몇가마니분이었다고 한다. 특히 1913년부터 8개월간 통도사에 머물며 화엄경을 강의했던 만해 한용운과 송광사의 효봉스님, 그리고 사형 구하스님을 평생의 벗으로 삼았다.
-“야반삼경에 빗장 만져보라”-
입적남녀노소, 유·무식을 불구하고 어느 누구와도 그에 맞게 법문을 들려주었던 스님은 양산에 장이 서는 날이면 직접 커다란 걸개 불화를 가지고 장터 한가운데서 법문을 했다고 한다. 어찌나 재미있고 구수하게 불법을 들려주었던지 지나가던 사람들과 물건팔던 상인들도 한바탕 그 법문을 듣지 않고는 못배길 정도였다.
“사바세계를 무대로 연극 한번 멋지게 해보라”고 호탕한 법문을 즐겨했던 스님은 입적 14년 전 자신의 수의를 짓던 날 ‘옛 부처도 이렇게 가고/지금 부처도 이렇게 가니/오는 것이냐 가는 것이냐/청산은 우뚝 섰고 녹수는 흘러가네/어떤 것이 그르며 어떤 것이 옳은가 쯧!/야반 삼경에 춤을 볼지어다’라고 열반계를 남겼다. 세수 91세 되던 1982년 어느날 스님이 입적을 하게 되자 효상좌 명정이 “스님이 가신 뒤 스님을 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거라”는 말을 남기고 이승과의 인연을 접었다. 상좌로는 돌아가신 벽안스님(전 동국대 이사장)을 비롯해 명정스님(극락선원 선원장), 경일스님(동국대 전강원장), 활성스님 등이 있다.
-다섯가지 욕락중 가장 힘든 小食 유명-
▲방장 월하스님
1984년 영축총림으로 지정된 통도사의 초대 방장 월하스님(1915~)은 1932년 18세에 금강산 유점사로 출가해 1940년 통도사에서 구하스님으로부터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았다. 오대산 한암스님 문하에서 몇차례 안거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통도사에서 정진하면서 구도자의 길을 걸은 스님은 1954년 효봉 청담 인곡 경산 스님과 함께 사찰정화 수습대책위원회에 참가했고, 이후 총무원 총무부장, 감찰원장, 종회의장을 거쳐 1994년 종정에 취임하기도 했다.
통도사 정변전(正●殿)에 주석하고 있는 스님은 언제나 문을 열어놓고 방문자들을 맞았고, 손수 자신의 빨래까지 하는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왔다. 새벽 3시 반 예불에서부터 시작해 간단한 운동을 하고, 대중과 더불어 식사를 하는 등 시골할아버지와 같은 자상하고 소박한 생활을 해왔다. 도승스님(통도사 성전암 주지)은 “월하스님은 격의없이 어떤 자리에서나 법문을 들려주시는 분”이라면서 “예전에 소위 무당절이라고 불리우는 이름모를 작은 절집에도 가시는 걸 보고 시자들이 말렸으나 ‘여기도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니 법문을 해야 한다’며 아무렇지 않아 하셨다”고 회상했다. 특히 스님의 소식(小食)은 유명하다. 상좌인 주지 현문스님은 “스님들은 국수가 나오면 너무 좋아해 국수를 승소(僧笑)라고 하는데, 다른 스님들은 보통 두세그릇씩 공양을 하는데도 월하스님은 항상 한그릇만 드시고는 젓가락을 놓으셨다”고 하면서 인간의 5욕락인 재색식명수(財色食名壽) 중 나이 들수록 가장 억제하기 힘든 식욕을 철저히 다스리는 월하스님의 일면을 소개했다.
월하스님은 50여년 가까이 본사의 보광선원을 떠나지 않고 조실로 머물면서 눈푸른 납자들을 지도해왔다. 함께 수행하며 늘 수좌들을 자상하게 지도하는 스님은 조는 수좌들을 야단치거나 죽비를 때리는 대신 “졸음이 올 때는 일어나 경행(輕行)하라”고 이르며 자비롭게 대해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건강이 좋지 못해 일반인들의 방문을 일일이 맞지 못한다. 스님의 제자로는 열반한 전 주지 홍법스님, 현주지 현문스님 등이 있다.
첫댓글구하스님을 직접 뵌적은 없으나 사진으로 뵌적은 있는데,참으로 자상하신 모습이었습니다. 통도사의 위계질서 대목을 보니 생각나는게 있군요.구하,경봉 두 스님이 모두 뛰어난 분들이신데,아무래도 本寺는 長子이신 구하스님이 법을 잇고,둘째인 경봉스님은 극락암으로 가신것으로 보입니다. 절집안 상속법도 재밌어요..^^
첫댓글 구하스님을 직접 뵌적은 없으나 사진으로 뵌적은 있는데,참으로 자상하신 모습이었습니다. 통도사의 위계질서 대목을 보니 생각나는게 있군요.구하,경봉 두 스님이 모두 뛰어난 분들이신데,아무래도 本寺는 長子이신 구하스님이 법을 잇고,둘째인 경봉스님은 극락암으로 가신것으로 보입니다. 절집안 상속법도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