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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 그림의 민중정서와 힘
원동석(미술평론)
1986 / 오윤 판화집 '칼노래' / 그림마당 민
그는 동인의 모임에서 과격하고 주도적인 발언을 하지 않으나 개인성을 간과하는 집단적 행동에 대하여 꼬장꼬장 따지며 물고 늘어지는 취중발언으로써 한 몫을 한다. 섬세한 기질을 가진 그는 집단적 행동주의 보다도 개인적 체험주의에 가까운 편이다. 키가 크고 깡마른 체구에 날카로운 눈매와 얇은 입술을 가진 그의 음영짙은 인상은 자기 반성이 강한 섬약한 지식인상이며 대중 영합의 사교적 각광보다도 한 구석에서 친한 벗과 소곤거리는 것을 즐기는 타입이다.
술좌석의 어울림 이외에 사교적 접근이 별로 없는 그의 성품에도 때때로 비례를 무릅쓴 목소리 높은 대화의 공방전에도 연상인 나는 그를 조금도 건방지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 호감에는 격식을 무시해도 뒤가 깨끗한 성품의 비슷함 이외에, 소설가 오영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추억의 관심으로 숨어 있었던 것이다. 나의 문학지망의 청년기에 오영수 소설의 서정세계가 심취시켰던 짙은 추억이 오윤과의 만남에서 즐겁게 상기된 것이다.
한과 신명의 정서, 그리고 해학의 감정은 오윤의 그림에 되풀이되는 기본 정조이자 가락의 울림으로써 소재의 내용이 바뀌어도 지속되는 흐름이 되어있다. 이점에서 그는 민족미술의 전통적 맥을 짚고 있는 것이며 스스로 굿의 풍류를 즐길줄 아는 멋도 지니고 있다. 아마 그가 전통그림에서 보다도 더 배우고 익힌 것이 많다면 이같은 모든 정서가 어울려 있는 민속예술- 판소리나 마당굿 같은 데서 체득하였으리라고 본다.
오윤의 한은 생의 전면부정이라는 허무주의에 귀착하지 않고 있다. 80년대 작가들 중에 신랄한 풍자나 공포, 전율, 허무의 감정을 극단화함으로써 더 이상 나아갈 곳 없는 삶의 벼랑에 주춤거리고 있는 세계가 많다. 이들 세계에는 삶의 주체나 방향이 없는 관념의 극화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오윤은 이같은 결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여유롭게 숨돌리며 웃음과 신명떨음, 고향 정서를 제공한다.
이와 같이 오윤은 삶의 희노애락이 드러내는 여러 정서를 평범한 인간들의 시선에서 파악하고 표현한다. 그것은 결코 연약하지 않는 강인한 역동성을 구사함으로써 민중정서의 다양함을 알기 쉽게, 그리고 오윤 특유의 기법으로써 표현하고 있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수많은 민중상은 표정과 자세에서 하나도 같지 않은 개별성을 지니면서 공통되는 핏줄을 나누고 있다. 그 핏줄은 따뜻한 애정의 인간성으로 감싸고 있는 연대감이다. 이런 호구력이 민중미술을 하는 후배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며 그의 중심으로 다가서게 한 것이다.
우리는 극복해야할 비극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의 예술가들은 이를 가장 첨예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오윤도 그러하다. 오윤의 그림과 판화는 이 시대의 삶을 우리의 시선에서 읽게 하는 증언의 기록이다. 그것이 새삼 값있고 소중함을 느끼게 한다.
오윤의 붓과 칼
성완경(미술평론)
오윤은 그 이름이 나름대로 알려진 것에 비해 정작 그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떤 사람인가는 다소 신비의 그늘에 가려 있고 그 작업의 전모가 제대로 소개된 적도 없다. 오윤은 그 이름이 알려져 있는 방식이 좀 특이하다. 그의 독자는 미술계에 국한되지 않는 그의 폭넓은 지우와 지면들 그리고 통상적인 전시회 관람객들 보다는 사회과학이나 민족문학이나 노동시 등의 책의 독자, 대학신문의 독자, 마당굿과 탈춤의 관람객, 민족문학의 밤이나 무슨 출판기념회 같은 집회의 참석자들에서 더 찾아질 수 있다.
그는 우리에게 풍요한 양의 작품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그가 때로는 시간에 대어 가까스로 작업하는 작가가 아니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이 가까스로 된 일의 오윤다운 특이함이 반드시 얘기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윤이 가까스로 이룬 그 무엇은 깊은 곳에서 짜낸 혼신의 힘과도 같은 것이며, 그 힘겨운 것이 지닌 정직함과 진실성 때문에 부정적인 비난의 감정보다 훨씬 더 크고 확실한 참여적 공감을 느끼게 한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거기엔 정직한 계획의 가까스로 이루어진 최소한의 수행과 그 성공이 주는 안도감이 있다.
오윤은 마치 부릅뜬 노인의 눈 같기도 하고, 저 깊은 곳으로부터 끌어올려진 恨 같기도 한 시선으로 우리의 일상적 삶의 몰골과 역사의 한많은 뼈마디를 훑어내리면서 우리를 어머니의 체취에, 그 정직하고 절대적인 가난에 닿도록 한다.
오윤이 기본적으로 리얼리스트이고 내용주의자이며, 회화적이라기보다는 도상적이고, 공간적이라기보다는 선묘적인 취향의 작가라는 점에 기인하는 것 같다. ...시작 때부터 그의 작업은 도상적 배열과 묘사의 방향이 완벽하게 결정되어 있고 완성에까지 이르는 사이에 다른 어떤 새로운 공간의 중첩이나 침투도, 또한 회화적 사건의 개입도 배제되어 있다. 그의 화면의 공간은 가장 초보적인 단일 공간의 범주을 벗어난 적이 없다. 그의 작품이 응축되고 완강한 느낌, 무거운 느낌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의 회화작품 속의 인물들은 대개 돌맹이처럼 단단하게 내부로 응축되어 있다.
오윤은 대학에서 조각 전공학생이었고 졸업후에도 간혹 목각부조나 목탈 제작을 했던 흔적이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그는 칼질과 나무 다루는데에 애초부터 친숙한 작가라고 해야 할것 같다. 이 점은 인물들의 도상적 특징에 대한 뛰어난 감각과 아울러 그의 판화의 배경을 설명하는데 다소 관련될 수 있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오윤은 힘의 화가다. 오윤의 작품에는 힘이 있다. 힘이 있다는 것은 맥이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다시 말해 오윤 예술의 생명은 바로 그가 맥을 잡을 줄 아는, 맥을 짚고 그 맥을 살려내는 화가라는 점에 있다는 밀이다. 그 맥이 물론 민족의 맥이니 민중의 맥이니 하는 그런 것일 것이다. 그러나 꼭 그렇게 거창하고 추상적으로 할 필요는 없다. ...내가 오윤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가 자기 몸의 맥을 짚으며 자기 자신과의 투쟁을 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더 구체적인 것으로는 자기 자신의 치료를 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다.
오윤은 한 때 건강이 좋지 않아 의사로부터 심각한 경고를 받은 적이 있다. 사람의 몸은 좋지 않을 때도 있는 것이고 그 가운데는 희생불능의 치명적인 경우도 있는 법이다. 놀라운 시술법을 배운 다음 그 스스로가 시술자이자 단련고행자가 되었다. '氣' 요법은 시술자 자신의 대단한 정신 집중을 요하는 것이고 또 상당한 수행과 단련이 필요했다. 그 기간 또한 오래 되었다. ...이것이 말하자면 오윤의 사는 방식이고 또 그의 예술과도 관련되는 것이다.
"민중..." 운운하는 식의 토론이라도 벌어지는 좌석에서 간혹 그의 목소리의 톤은 신경질적으로 높아질 때가 있다. 민중을 들먹거리며 '지식인의 역할...' 어쩌구 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경계심은 유별나다. '민중예술'에 관한 그의 입장도 또한 비슷하다. 그의 얘기의 요점은 자기자신이 우선 민중이 도어야 하며, 그러려면 '헛소리 말고' 정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중을 '위해서'나 '민중적 논리의 당위성' 에 의해서 민중문화운동을 하는 식의 생각은 진짜 민중을 생각하면 오만한 발상이고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민중적 논리' 라는 것과 소위 '운동권' 문화운동의 시각으로 미술을 생각하는 방식에 대해 경계심이 심하다. 그가 말하는 정직한 삶이 얼마나 가능하고 또 실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선 나로선 분명히 알 길이 없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오윤이 주변의 다른 어떤 예술가나 민중논리적 지식인 보다도 더, 민중예인적인 가락과 그 교양의 맥을 풍기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藝人과 老人은 그것을 자기의 몸과 기억력 속에 다른 사람보다 많이 축적한 사람이다. 오윤은 이 예인의 가락과 노인의 지식을 지니고 있다. 좀 우스운 표현이지만, 그것이 오윤을 그 나이 또래의 사람들에게 민중적 카리스마의 자연주의적 표본으로 느끼게 만든다.
오윤(吳潤) / 부산 동래 産 1946. 4. 13 ~ 1986. 7. 5 서울미대 조소과
'현실과 발언' 창림전, 구상화가 11인전, 삶의 미술전, 해방 40년 역사전, 봄판화제, 40대 22인전, 수 많은 서적의 표지화와 삽화, 엽서, 포스터, 탈, 걸게그림을 제작함. 40세에 간경화로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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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살. '내놓을 게 없다' 는 개인전을 마침내 전무후무하게 '내놓고' 오윤은 세상을 떴다. 천재가 세상을 버릴 때는 연대를 떠나 가사 이중섭처럼 괴이하다. 자신의 '고추'가 썩는다고 소금에 절인다거나 친구를 위해 제 아내를 가운데 재웠다는 奇行이 '괴이하게도' 조금도 낯설지가 않다. 담배속지를 꺼내어 끄적거리다 입술에서 니코틴을 바르든, 사무친 그리움에 미쳐버리는 것마저 차마 당연하다. 이중섭이 일본으로 헤어진 아내 마사코 남덕에 보내는 엽서엔 구구하 고 절절한 사랑이 아로새겨져 있다. '예쁜 엽서 그림' 정도야 천재라면 펜을 잡는 순간 단숨에 그 려졌어야 옳은데 이 싸구려 소품들은 수없이 신문지에 끄적이면서 어쩌다 이쁜 '도안'이 한나 나오면 또 다른 도안을 덧대여 마지막엔 '먹지'로 옮겨 그려지곤 했단다. 인하대학 성완경선생은 오윤이 '시간 에 대어 가까스로 작업하는 작가가 아니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고 하였다. 모든 미술가들이 한결같이 겪는 창작의 고통일진데, 중섭의 소가 그토록 힘차고 자재롭다 하여도, 오윤의 칼이 이토록 강하고 날 카롭다 하여도 도깨비방망이처럼 '뚝딱'이 아닌, '팔엽일화' 처럼 꽃은 '가까스로' 피어났던 것이다. 미 완의 완. 초월적 감성의 끝에서 풀떡 뛰어내리는 동백꽃같은 꽃숭어리 그 고독... 그것은 고난의 시대 를 내어 공연히 가난한 예술가들의 영혼을 시험하는 습작기 神의 못생긴 지우개다. 몇 번을 스쳤어 도 별반 다가가지 않았을 그의 꾸부정하고 깡마른 인상은 내게도 살가운 것은 아니었다. 그가 스 스로 '정직한 민중' 이기를 바랐거나 '완강하고 응축된' 신명을 소유하였다거나 하는 그 본태성 '끼'를 멀찌기 바라보는 것으로 난 그와의 동시대 인연을 다하였다. 작은 그림 하나에 거는 저 철저성과 집요함과 천근 같은 반골이 되레 무섭다. 생전에 나는 그를 불러본 적이 없기 때 문에 '형' 소리는 못하겠지만 불철저한 내 행적을 돌아볼 때마다 예술과 생의 근원을 캐묻는 저 '꼬장꼬장'한 판화들이 형처럼 반갑기도 하다. 수려한 오윤의 논픽션이 마흔에서 막을 내릴 즈음, 민중미술의 내레이션도 리얼리즘에 대한 내 방백도 겨울 메아리처럼 도랑을 건너고 산을 넘어 오늘, 봄빛 마냥 섧다. 2009. 5. 12. 김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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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이고. 오월에 오윤선생님이라니.......................!!!!!!!!!!!!
사막... 이 기회에 당신을 소개해주세요~
최작가가 얼골을 내밀었으니 낯낯하게 시 한 수 읊겄다고 띄워보니 양이 많아 꼭지가 안 떨어져요.. [시인의 파도] 방으로 가서 띄울게...
오윤의 판화에 나오는 육각형의 얼굴들. 태극이나 원형으로 도는 사람들의 행렬. 너무도 처연스럽기도 하고 능청스럽기도 하고 곰살갑기도 하고 대숲에서 일렁이는 바람소리와도 같은 느낌. 이 느낌이 민중미술의 내레이션인가요? 형이 오윤 선사를 습작기의 신이라고 한 것이 이해가 되네요.
가난한 예술가 오윤의 영혼을 시험하는 신이 있다면 그 짓궂음이 습작기 수준이라 비아냥거리는 것이고, 고난의 지난 시대가 많이 아프다는 말이었네, 여기서 오윤을 '습작기의 신'이라 한다면 해몽이 너무 깊어서, 신이 함부로 떨구는 동백꽃처럼 자신이 잘 못 그린 그림을 서둘러 지우는(오윤을 죽게 놔두는) 초보 神이다 그 말입네. 미안 내 글이 조금 미롤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