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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1일
초저녁부터 아침까지 누워서 보냈더니 심지어 목까지 아프다. 긴 시간 잔 것에 비례하면 몸이 가뿐하거나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피곤한데 역시 잠은 하루 6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아침식사로 된장찌개가 식탁에 올랐는데 호박을 많이 넣어서 시원한 된장 맛보다 호박국이 되어 있다. 아침에 영식이 문자가 와서 홍제동에서 북한산을 출발하니 동행하라고 하여 배낭을 메고 아파트를 나섰는데 어머니도 뵈어야 하고 학원도 임대관계로 긴박하여 홍제시장 부근에서 그냥 되돌아왔다. 시간을 절약하여 오후를 보내기 위해 배낭을 벗고 가까운 안산에 10시30분에 올라서 정상을 돌고 내려오니 12시30분이 되었다. 오늘은 날이 맑고 따뜻해서 산행하기에 좋았는데 아마 북한산이나 도봉산에도 등산객들이 많이 올랐을 것이다. 집으로 내려와 점심으로 떡국을 먹고 요양원에 가서 어머니를 뵙고 돌아오면서는 학원에 들어가 3월달 시작하는 강의시간표를 만들었다. 내일부터는 전국 초, 중, 고등학교가 개학을 하고 실질적으로 2009년 학사 일정이 시작되기 때문에 새로운 변화와 준비가 필요하다. 오늘 북한산에 간 영식이가 오후에 연락이 와서 불광동으로 나갔더니 함께 산에 다녀온 그의 일행들이 노래를 하고 있다. 내일이 3월 첫 출근이고 특히나 교육을 담당하는 우리들은 긴장의 마음가짐이 필요할 때인데 이렇게 흥청하게 지낼 수 없어 바쁘다는 핑계로 일찍 돌아왔다.
2일 2009년 학사일정을 시작하는 날이다. 학교뿐만 아니라 대학입시를 담당하는 입시학원에서도 오늘부터는 새롭게 일정을 시작하는 출발선이다. 입시학원에서 생활한 나로서는 매월 시작하는 3월의 개강일은 초조함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매월 시작이 그렇지만 특히 3월과 4월은 한 해의 수강을 좌우하는 기싸움이 치열하게 시작되기 때문에 숨 돌릴 틈이 없는 압박감이 가장 많은 시간이다. 우리 집도 오늘부터 아들은 중학교 3학년 딸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는데 아무쪼록 건강하게 학교생활 충실히 잘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전에 체육관에 갔다가 라면을 사들고 돌아와 고추와 파를 넣고 맛있게 요리하여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어머니에게로 달려 갔다. 날마다 반복되는 일이지만 어머니와 함께 있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고 오늘도 1시간 이상을 보내는데 횡설수설 하시다가도 옛날 말씀을 하시며 한참을 웃으신다. 모든 학교가 개학이 되어 학원강의는 저녁으로 옮겨져 늦게 요양원을 나왔고 종로M스쿨과 SLS학원에서 매매 문제로 전화가 와서 도착하자마자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자 살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고민하면서 여러 방안을 제시하는데 모두가 부담을 최소화 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겨울방학 동안 오전과 오후에 주로 수업을 하다가 오늘부터 밤에 수업을 하려니 나도 힘들었지만 선생들의 표정도 밝아 보이지는 않았다.
3일 어제부터 오후 6시에 강의를 시작하여 10시에 마치고 집에 늦게 와서 7시경에 일어났다. 아침에 밖에 눈과 비가 내린다고 아내는 중얼거리고 7시40분이 지나서는 아들이 중학교 3학년 둘째 날 등교를 한다. 작년만 해도 오늘 같은 궂은 날씨에는 당연히 아들을 태워다 주려고 힘들어도 일어났는데 오늘은 마음이 내키지 않아 움직이지 않았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오니 새벽에 일찍 일어났던 아내가 다시 깊은 잠을 자고 있다. 긴 겨울방학에 수업한다고 고생도 많이 했는데 오늘부터는 개학을 해서 수업이 저녁시간에 있으니 잠이라도 실껏 자면 좋을 것이다. 조용히 집을 나와 체육관으로 가서 운동을 하고 12시에 점심으로 3일 전에 만든 시래기조림을 김에 싸서 맛있게 먹었다. 오후에 차를 몰고 어머니에게 가는 중에 꽃집에서 난을 담은 화분을 구입하여 요양원에 전해주었더니 수간호사가 기뻐한다. 오늘이 어머니가 계시는 유자원(요양원) 개원 1주년이라 축하를 하기 위함이었는데 특별히 나는 요양원에 입원한 환자들 가운데 방문을 가장 많이 하는 보호자다. 원장이나 직원이나 간병인들까지 내 입장에서는 친근하고 가깝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나로 인하여 불편함 점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튼 오늘도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여러 곡의 노래를 불러드리고 형과 동생이 찾아와서 요양원을 나왔다. 학원으로 가면서 신설동에 들러 장마철이 오기 전에 옥상 방수처리를 한다고 세입자와 약속하고 저녁에는 평소처럼 강의를 하는데 학생들이 떠들어 스트레스가 많은 날이었다. 방향이 같은 은평구에 사는 영어선생을 무악재에 내려주고 거실에 들어서니 11시가 지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도 학원을 마치고 돌아왔다.
4일 어제 잠이 늦어 아침에 8시경 눈을 떴다. 아들은 벌써 학교에 갔고 거실에서는 아내와 딸의 대화 소리만 들린다. 식사를 한 뒤에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데 어제와 내일을 생각하지 말고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라는 작년 TV에서 들었던 구절이 떠올라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여기고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야 할 것으로 우선 체육관에 가서 열심히 운동을 했다.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고 과거에 학원운영을 논의했던 역촌동을 오랜만에 방문했더니 1월말을 끝으로 폐원을 한 상태다. 경기학원에 4시30분 도착하여 강의를 하고 장원장과 만나 학원상황을 점검하니 임대료 미납으로 법원서류만 쌓여 있고 더 이상 해결책이 없어 여기도 캄캄하기만 했다. 장원장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면서 학원운영이나 사업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로서는 반면교사로 삼기에 충분한 요즘의 시간이었다. 자신감을 가지고 다시 살아가는 심정으로 내일을 맞이하고 무엇보다 건강에 신경쓰며 조급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나도 심기일전 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대화를 할 수 없는 장원장을 대신하여 유하영 선생을 만나 학원운영을 맡기고 대신 내가 차용해 준 금액을 돌려받은 답답하면서도 시원섭섭한 하루가 되었다. 나로서는 학원에 미래가 없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지만 마지막까지 강의에 최선을 다하는 내 모습은 필요하다.
5일 새벽 6시에 일어났다. 신문을 보고 장원장과 정산할 서류를 만들어 두고 7시20분 생선튀김으로 거의 2달 만에 가족 4명이 함께 식사를 했다. 날이 흐리고 오후에는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 안방에서 10시까지 TV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이후 안산에 올랐는데 봄이 왔다고는 해도 아직도 바람이 차갑다. 산악회 운동장에서 가져간 사과 맛이 강하게 느껴질 만큼 열심히 기구운동을 하고 상쾌한 마음으로 집으로 내려왔다. 점심으로 아내가 맛있는 보쌈 돼지고기를 삶아 놓아 밥도 뚝딱 먹었는데 오늘처럼 음식은 비싼 것보다도 정성이 있고 입맛에 맞는 것이 무엇보다 좋다. 오후에 성일이 전화가 와서 거의 5년 만에 통화를 했는데 10년 전 마장동에서 학원을 시작할 때 전기공사를 무료로(약 50만원) 해 준 고향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후배다. 그 동안에 사업을 하면서 부도를 여러 번 맞아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현재는 3명의 자녀와 화곡동에서 산다는데 안타까운 마음이었고 조만간 만나기로 했으니 빚고 갚고 격려라도 해 주리라. 저녁에 학원으로 가서 강의를 하고 시내를 배회하다가 늦은 밤에 들어온 하루종일 비가 내린 날이다.
6일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보며 방에서 보내는데 아내가 아침식사를 권하여 거실에서 서성거리는 아들은 외면하고 딸하고만 닭국물로 식사를 했다. 오전에 산에 가려고 준비하는데 아내도 따른다고 해서 사과 몇 개를 준비하여 함께 올랐더니 오늘도 날씨는 쌀쌀하고 바람까지 차갑다. 정상을 넘어 중턱을 돌고 2시간을 보내다 집에 내려와 점심으로 닭고기를 먹었다. 오후에 아내는 수강생이 탈락하여 스트레스가 많다고 하며 논술교실에 가는데 광고물이라도 만들어 홍보라도 해 줄까 생각을 했다. 3시경 집을 나서 은행에 가서 대출금 이자를 확인하니 몇 개월 전보다 훨씬 낮아 ADT기준 2억원에 월 이자가 연4.4% 74만원 수준으로 하향되었다. 요양원에 가서 어머니와 노래를 하면서 30분을 보내고 학원으로 이동하여 강의를 마치고 선생들과 학원의 앞날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장원장보다 오히려 소통이 잘 되었다. 신설동 2층 세입자한테 건강상의 이유로 호프집을 다른 사람에게 인계하겠다는 전화가 왔다. 투자를 많이 하여 실내를 아름답게 장식해 놓고 새로운 주인을 구한다니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고 계약기간이 남았으니 현 세입자가 현명하게 마무리하고 처리할 것이다.
7일 토요일이다. 오늘은 수업도 없고 일찍 일어나 지나간 시간들을 돌이켜보니 모든 것이 한 순간이다. 개학을 하고 처음 맞는 주말, 아들과 딸은 학교에 가고 나도 식사 후에 장안동으로 자동차 네비게이션과 스테레오를 수리하러 나갔다. 시간이 소요되어 근처에 사는 초등학교 친구를 만나 식사를 했는데 세월은 사람을 바꾸는지 대화나 행동이 나와 달라 신경만 쓰였다. 살아가면서 억지로 인간관계를 가질 필요는 없고 생각이나 철학이 같은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만도 시간이 부족할지 모른다. 오후 3시에 요양원에 가서 어머니를 뵈는 중에 신내동 집에서부터 걸어서 왔다는 형과 형수가 들어왔고 자리를 교대하고 요양원을 출발하려니 밖에까지 따라 나온 형이 항상 조심하라고 격려를 한다. 어릴 때 함께 자란 형이라도 각자의 가정을 가지고 살다보니 거리감이 생길 수밖에 없지만 따뜻한 형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집으로 가면서 신설동 2층에 올라가 세입자를 만났더니 어제 전화한 그대로 목에 디스크가 생겨 가게 영업이 힘들다는 것과 임대기간이 남았으니 자신이 새로운 임차인을 구하여 나에게 피해가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낮부터 속이 편하지 않더니 저녁에 집에 와서도 뱃속이 전쟁이라 식사도 거르고 자리에 일찍 누웠다.
8일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하고 산행을 하기 위해 10시경 집을 나섰다. 종로 3가에서 1호선을 타고 중앙선을 이용하기 위해 회기역에서 내렸는데 뜻밖에도 영식이네 형을 만났다. 이렇게 가까운 사람을 정면에서 만나다니 세상이 좁기도 했고 영철이 형은 도봉산으로 나는 팔당댐을 지나 양수리 근처에 있는 운길산을 가는 중이다. 양수리 부근은 승용차로 지나는 다녔지만 지하철로는 처음인데 40분을 달려 도착한 운길산역은 조용하고 한적한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마을 어귀를 지나서 1시간 30분을 걸어 정상에 올라 경기도 일원을 조망하며 오늘을 보냈고 하산하면서는 직선코스로 계단을 내려와 아담하게 산 속에 자리 잡은 수종사에 이르렀다. 동남 방향으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까지 한 눈에 보이는 이 사찰은 세종대왕이 병을 얻어 휴식을 하고 있는 새벽에 물소리가 종소리처럼 들려 수종사水鍾寺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암자 몇 개 정도만 이어놓은 작은 절인데 귀퉁이에 서 있는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의 자태는 오랜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30분을 걸어 운길산역으로 다시 이동하여 호젓한 포장마차에 들어가 빈대떡에 소주를 몇 잔 마셨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어수선하고 혼잡한 지하철이 등산열차로 변신해 있다. 스트레스도 날리고 건강도 챙긴 오늘은 보람이 있어 좋았고 휘파람을 불며 퇴근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종로 3가를 넘어 집으로 7시에 돌아와 식사를 마쳤다.
9일 어제 산을 다녀왔고 일찍 자서 그런지 몸도 가볍고 좋은데 아내가 밤새 잠버릇으로 소리를 내어 깊은 잠은 이루지 못했다. 의도적이지 않은 무의식적인 콧소리를 뭐라고 탓할 수도 없고 함께 잠을 자는 오직 나만의 고민거리다. 새벽 6시경 아내는 아침 식사를 준비하러 일어나고 일찍 일어난 나도 7시가 지나서는 딸과 함께 식사를 하고 새벽에 못 잔 잠을 채우려고 방으로 들어갔다. 일전에 신설동 3층에 대하여 명도소송을 했는데 이제는 임대료를 해결하여 없던 일이 되었고 체육관으로 가면서 소송 취하서를 북부지원에 새로 보냈다. 평소에 좋은 마음으로 대화를 하고 약속을 지켰다면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이런 무리한 일들이 없었을 것인데 막판에 부딪치고 법으로 가면서 해결하다니 한 치 앞도 못 보는 우리들이다. 운동을 마치고 배가 고파서 집으로 집에 돌아오니 산에 다녀온 아내는 수업이 늦었다며 바쁘게 나가 혼자 점심을 준비하여 먹었다. 오후에 일찍 학원에 들어가 장원장과 대화를 하면서 앞으로의 일정을 논의했지만 자신의 입장만 고집하여 오늘도 진전이 없다. 수업이 저녁에 있기 때문에 어머니를 뵈러 요양원으로 갔더니 간병인이 말하기를 어젯밤에는 곡소리를 내며 울었다고 하고 내가 도착한 낮에도 소리를 내며 울어서 난감한 시간이 되었다. 다른 간병인이 다가와서는 항문 부근이 많이 상하여 간병하기가 힘들다며 난색을 표현해 나로서도 당혹스러웠다. 학원으로 돌아와 형과 동생에게 어머니의 현재 상황을 전화로 알리고 강의를 마친 밤 11시에 집으로 왔다. 하소연 할 수도 없는 난감한 어머니의 근황으로 잠들기 전에는 뒷목이 뻐근하기까지 하였다.
10일 어젯밤 어머니의 건강 악화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뒤척였더니 아내는 베개를 들고 딸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뻐근한 뒷목이나 만져주었으면 좋았겠는데 만약 내가 혈압으로 이상이라도 생긴다면 자리만 피하는 것이 부부간 사랑이나 의리는 아닐 것이다. 새벽에 잠깐 아내가 없어서 깊은 잠 편안하게 잤다고 해도 결국은 불행 속의 행복한 잠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아침에 아내는 나물무침에 된장국을 끓였고 나는 별도로 직접 얼큰한 김치찌개를 만들어 식탁을 반으로 나누어 놓고 어색한 식사를 했다. 오전에는 잠실에 산다는 민정이네 집에 간다고 아내가 여러 번 옷을 갈아 입는데 봄이 와서 그렇다고 하여도 기본이 되는 더 중요한 것은 체형을 관리하는 일이다. 혼자 집에 있으면서 서류를 정리하고 베란다에 기대어 안산을 조망하며 담배 한 개피를 피우며 시간을 보내니 모처럼 여유가 있어 좋다. 오후에는 학원으로 가서 장원장과 만나 업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신설동 2층 임대광고를 벼룩시장에 세입자를 대신하여 접수했다. 기존 2층 호프집 주인이 시설이나 재료에 많은 금액을 투자했는데 더 이상 영업을 못하여 안타까운 마음에 뭐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1층에서는 오늘 150만원 임대료가 정확하게 입금되었고 요양원에서는 오후부터 형과 여동생이 어머니 곁을 지킨다고 하여 편한 마음으로 수업을 하러 학원에 바로 들어갔다.
11일 어제 11시에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니 새벽 6시가 지났다. 아내는 오늘도 딸과 함께 잠을 자기에 나로서는 깊은 잠을 이룰 수 있었지만 이 상황이 결코 편안한 삶이라고는 할 수 없다. 요즘 학원상황이 어려워 나와 마찬가지로 답답할 녹번동에 사는 고등선생한테 안산에 오르자고 연락을 했더니 무악재에 도착했다. 함께 2시간 이상을 걷고 오후 1시가 되어 내려와서 동네 중국집으로 가서 간짜장으로 점심을 먹었다. 식사 후에 집으로 들어오니 어느새 부쩍 자라서 날씬하다 못해 왜소할 정도가 되어 있는 6학년 딸이 학교에서 돌아와 있다. 이야기를 나눌 틈도 없이 곧바로 어머니를 뵈러 갔더니 엉엉 울던 엊그제와는 다르게 오늘은 대화도 하고 편안한 오후를 보내고 계신다. 어제 신설동 2층에 대하여 임대광고를 내었더니 문의가 와서 신설동 갔다가 학원에는 5시에 들어가 수업을 하고 저녁에 일찍 집에 왔다. 딸은 이틀 후에 1박2일 강화도 간부수련회 간다고 벌써부터 부산한고 달랑 하룻밤 자면서 준비물은 아예 집을 나가는 사람같다. 시간이 빨라 3월도 중순으로 접어들어 하루하루 긍정의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가리라 여러 번 다짐을 하며 늦은 밤에 잠을 청했다.
12일 아침에 눈을 뜨니 함께 자던 아내가 없고 혼자 덩그러니 나만 남아 있다. 7시30분에 무국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TV를 보는 중에 영식이 전화가 와서 9시경 우리 아파트 입구에 온다고 하여 시간을 맞추어 내려가니 부산에서 어제 왔다면서 멸치젓갈과 김치 등을 가져왔다. 마음도 고맙고 날씨도 쌀쌀한 아침이라 일단 집으로 들어가 커피를 마시고 사업 등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박해 있는 배는 아직 출항하지 않았지만 20일경에는 분명히 나간다고 하고 특히 아들에 관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한다. 평소 나와 대화를 많이 하여 우리 집 상황이나 나의 근황을 많이 알고 있어 걱정을 하며 물은 것이고 오늘도 현명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고마운 친구다. 집을 나와 함께 안산에 올랐다가 정상을 거쳐 내려왔고 연세스포츠센터 안에도 들어가 내가 운동하는 체육관도 둘러보았다. 점심시간이 지나 건물 뒤편에 있는 양평해장국집에 들어가 식사를 했고 친구와 헤어질 때 청주에서 가져온 매실원액과 토란을 준비하여 고마운 마음으로 실어주었다. 오후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어머니를 뵈었고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5시에 저녁식사 하시는 것 보고 학원으로 이동하여 강의를 했다. 밤에는 박선생이 운전하고 신설동에서 정식이를 태워 방배동으로 이동했다.
13일 어제 방배동에서 박선생이 나를 태우고 운전하며 오는 중에 술에 취한 내가 심하게 욕설을 하여 놀랐다고 아침에 전화를 한다. 술에 취한 내가 잘못이지만 나도 스트레스가 있고 어머니를 비롯한 주변의 여러 상황이 편치가 않아 무의식중에 불만을 표출하지 않았나 싶다. 또한 어제 형준이가 모르는 친구를 데리고 합석하여 자리가 불편했고 술도 마시지 않은 박선생이 길을 잃고 강남역 쪽으로 운전을 하여 정환이 동생이라고 착각하고 순간 고함을 질렀더니 놀랐던 모양이다. 아무튼 박선생한테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고 함께 산에 오르기로 약속을 하고 녹번동에서 차에 태워 북한산 삼천사 계곡에 도착했다. 능선 부근까지 1시간을 걷다가 다시 내려와 삼천사 입구에서 식사를 하면서는 학원상황과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하였다. 집에 3시경 도착하여 낮잠을 자고 6시에 학원으로 갔다가 중간고사를 대비하여 과학수업을 포함한 새로운 시간표를 만들고 고등부 수업을 하며 저녁을 보냈다. 학원에 들어올 때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갈 때도 예전과 달리 학원은 밖의 날씨처럼 휑하고 차갑기만 하다. 집에 8시40분에 들어왔고 계란탕에 영식이가 가져다 준 김치로 저녁을 먹었는데 경상도 김치가 전라도 내 입맛에도 맞아 의외라고 여겼다. 오늘 강화도로 간부수련회 간 딸은 알찬 시간을 보낼지 걱정이 되지만 준비물이 많았으니 그다지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14일 어제 잠을 푹 자는데 친구 형규 전화가 와서 깼고 아침에는 아들이 나와서 앞에 앉아 함께 식사를 했는데 2개월 이상 대화도 없는 놈을 바라보니 그 사이에 부쩍 자라서 몸이 더 튼튼해진 모습이다. 방에 들어가 쉬다가 체육관으로 가서 달리기와 기구운동 열심히 하고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주말이라서 아내는 논술학원에 갔고 나도 어머니를 뵙기 위해 집을 나서 내부순환도로를 달리면서 봄이라고 생각하여 창문을 열었더니 여전히 쌀쌀하여 그 겨울이 아직도 머물러 있다. 요양원에서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다 정식이 사무실에 갔더니 모친이 수술을 잘못하여 의료원에 입원했다고 걱정을 많이 하는데 20대 초반 춘천 효자동에 있는 그의 집에 갔을 때 뵈었으니 30년이 지난 지금은 많이 연로하셨을 것이다. 오늘이 화이트데이라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요란한데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날인지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남의 나라 이야기로 들릴 뿐이다. 집에 5시에 들어왔고 수업을 마친 아내가 와서 함께 저녁식사를 했지만 말도 없고 어색하기만 하여 일찍 방으로 들어갔다.
15일 어제 일찍부터 누웠더니 아침에 답답하기까지 하다. 오늘은 반드시 산에 가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데 역시나 영식이가 도봉산에 가자고 연락을 해 온다. 우리만 가는 것도 아니고 또 여러 사람을 몰고 와서 시끄러울 것인데 개인 시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혼자 다른 방향으로 산행을 나섰다. 꽃샘추위로 아침기온이 쌀쌀하기도 하지만 종로 3가에서 1호선을 갈아 타니 등산객들로 금방 열기가 오를 것만 같다. 회기역에 도착하여 양평 방향 중앙선을 타고 국수역에서 내려 청계산에 오르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청량리역에서 뜻하지 않게 산악회원들을 만났다. 함께 동행을 요구하여 어쩔 수 없이 수락산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의정부 변두리에 있는 장암역부터 걸어 오르기 시작했다. 수락산은 나도 처음으로 가는 곳인데 국립공원은 아니라도 북한산이나 도봉산에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특히 정상부근의 기차바위는 가파른 절벽을 밧줄을 의지하고 오르는 재미있는 곳이다. 산을 넘으니 이번에는 철모를 닮아 철모바위라고 일컫는 작은 정상이 기다리고 있어 계곡에 앉아 라면을 끓여 7명이 함께 점심을 먹었는데 간식까지 구수하여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산 입구에 내려오자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한 무리의 일행들을 만나 덩실 춤을 추며 어울리다가 근처 식당으로 들어가 뒤풀이 음식을 먹었다. 1차 회식을 마친 뒤에 다시 노래방에 간다는 회원들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먼저 중화역으로 지하철로 이동했지만 오늘 산악회원들의 술 마시는 양은 놀랄 정도였다. 아침에 영식이 팀을 피하여 산행을 시작한 것이 마치 늑대를 피하다가 범을 만난 꼴이 되었고 집에 돌아오니 도봉산에서 내려온 영식이는 일행들과 여기도 노래를 한다는 전화가 왔는데 단체로 산에 다니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16일 산행은 혼자나 두명이 다니는 것이 좋다. 단체로 다니면 재미가 있기는 하지만 시간 낭비나 쓸데없는 언어소비 그리고 산행 후 과음 등 더 많은 문제점이 기다리고 있다.
체육관에 가서 열심히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와 영어를 마치고 일행들과 산에 간다는 아내에게 전화를 했더니 벌써 내려와 초등학교 근처 보리밥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 나도 식사를 하기 위해 엊그제 영식이가 가져온 꽁치젓갈을 꺼내어 양념을 하여 먹었더니 입맛에 딱 맞다. 식사를 마치고 들어온 아내는 수업을 한다고 바로 나가고 나도 2시에 집을 출발하여 요양원에 가서 어머니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아들의 마음을 알고는 있는지 모르겠다. 사람은 누구나 젊은 날보다 인생의 말년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적어도 오늘은 행복한 시간이 되었을 것이고 30년 후 내 인생의 황혼은 아름다울 수 있을까 반문해 보았다. 요양원을 나와 학원에 5시에 도착하여 얼큰한 콩나물 라면을 사 먹고 고등부 강의를 마친 뒤에 집으로 오면서는 청양고추 8개를 1천원에 샀다. 저녁에 낮에 먹은 것보다 더 집중하여 꽁치젓갈 양념을 만들어 삼겹살과 먹었더니 독특한 맛이 더 살아난다.
17일 시간적인 여유가 많은 화요일이다. 하루가 한 달이 눈 깜박할 사이에 가 버리고 3월도 중반을 넘어선 지 며칠이 지났다. 아침에 식사를 마치고 체육관에 가서 기구운동 열심히 하고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고 오후 2시에 집을 나서 용산 전자상가 부근에 있는 초등학교 동창 세무사 성남이 사무실로 향했다.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만나면 커피 한 잔 마시고 없으면 그만이라 생각하고 전화도 없이 들어갔더니 친구가 놀라면서 반긴다. 어렸을 때 단짝으로 꼼꼼하고 성실한 친구가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어린 시절의 성격이나 행동은 같은 맥락으로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 경제가 금년들어 지난 4/4분기보다 급격히 악화되어 큰 걱정이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4월18일 고향 동창 모임에 함께 가자는 이야기를 했고 하지만 그는 바쁘다는 이유로 불참을 말한다. 사무실을 나오면서는 직원들 주라고 음료수 1박스를 전해주고 근처에 있는 영기획 출판사에 들러 오래 전에 내가 만들었던 문학교재를 확인했더니 3년이나 지나서 흔적이 없고 영업부장만 나와서 인사를 한다. 이 곳 출판사에서 내 강의자료와 부교재를 많이 만들었지만 부장도 여기에서 30년을 근무했으니 나하고도 오래된 사이라고 할 수도 있다. 종로를 거쳐 요양원에 갔다가 어머니를 뵙고 학원으로 들어가 수업을 마친 뒤에 수강생이 적은 화,목반 인원을 월,수,금반으로 통합을 시켰는데 확장이 아니어서 좋지는 않다.
18일 어제 저녁에 영식이가 집에 문제가 생겼다고 문자가 와 있는데 무슨 일인지 궁금하다. 사람이 어렵고 힘들 때 동행하는 친구가 있으면 고맙다는 것을 나도 여러 번 경험을 한 터이어서 아침에 일어나 청계산이라도 가자고 문자를 보냈더니 답장이 와서 식사를 마치고 강남으로 넘어가 친구를 태우고 산으로 갔다. 작년 3월 13일에 이 곳에 온 적이 있으니 1년이 지나 다시 온 곳이다. 올 때마다 계단이 많아 불만인데 오늘은 진달래골 방향으로 올랐더니 그나마 연속된 흙길이어서 좋았고 옥녀봉을 지나 매봉 정상에 도착하니 아래에서부터 1시간40분이 지났다. 12시20분 정상에서 컵라면과 막걸리를 하며 시간을 보내니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느낌이었고 오를 때와 달리 방향을 달리하여 내려오던 중에 길을 잃어 2시간 가까이 과천 경마장 주변 능선을 헤매고 다녔다. 이정표도 없고 어렵게 길에 내려서도 차 한 대 다니지 않아 나도 그렇고 친구도 그렇고 답답한 오후였다. 다행히 날도 푹하고 아직은 어두워지지 않아 몇 시간을 돌고 돌다가 군대에서 행군하듯이 한참을 걸어 가까스로 주차한 곳에 도달한 2년 전 북한산 탈진에 이어 또 한 번의 황당한 날이다.
(2년 전 북한산 탈진: 2007년 3월14일 모의고사 일이라 노량진 강의가 없어 가볍게 북한산을 다녀오려고 전날 마신 술이 깨지도 않은 상황에서 식사도 거르고 정릉에서 동장대 근처 정상에 갔다가 쉬고 오후 3시에 내려왔는데 베낭에서 꺼낸 검정색 손가방을 그대로 두고 왔다. 돈은 그만 두고 당시에 모든 서류가 들어 있어 어쩔 수 없이 다시 산 정상을 오르게 되었고 평소 다니던 곳이라 빠르게 올라 가까스로 가방을 찾았으나 벌써 산에는 사람도 보이지 않고 어둑해졌다. 급한 마음으로 빨리 하산하려고 대동문을 통과하여 우이동 방향으로 내려오는데 아침과 점심을 걸러 배가 고픈 상황에서 쉬지 않고 산을 올랐더니 하산길에서 탈진 상태가 되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핸드폰은 배터리 문제로 작동이 안 되고 베낭에는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 난감했다. 지나는 등산객이 있으면 구걸이라도 해야 될 것인데 이미 산에는 인적이 끊겼다. 날이 어두워졌고 거짓말처럼 한 걸음을 걸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산길이고 바위가 많아 기어 내려오다가 의식을 잃었고 얼마쯤 지났을까 정신이 희미하게 돌아와 가까스로 계곡 물속으로 박히듯 들어가 허겁지겁 물을 마시고 나니 정신이 들었는데 다리가 떨어지지 않아 걷지를 못하였다. 3월의 밤바람이 차가워도 산 속에서 하루를 보내면 다시 힘이 솟아나고 혹 내일 아침에 등산객을 만나면 구조되지 않을까 생각하여 계곡에 누웠는데 밤하늘의 별빛만 가물거리고 의식이 사라져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왔다. 살아야 된다는 생각으로 뒹굴면서 또 포복으로 3시간은 족히 내려오다 보니 멀리 불빛이 보였고 30여분을 더 기어서 내려와 정문도 아닌 울타리 사이를 뚫고 들어가 어느 창고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컴컴한 곳에서 또 의식을 잃었다. 1시간쯤 지나 다시 깨어나 또 다른 문을 밀치니 큰 식당이 나왔고 영업도 끝난 식당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닥치는 대로 손으로 쥐어서 입에 집어 넣었다.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한 두시간 잠을 자고 일어나니 수유리 산 중턱의 아카데미하우스 식당이고 두 손으로 입에 퍼 넣은 것은 김치 한 통이다. 문을 열고 로비에 나와 시간을 보니 밤 12시가 지났고 처음 하산하던 시간이 오후 4시쯤이었으니 1시간 30분 거리를 8시간동안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택시를 불러 정릉 주차장으로 이동하여 차를 가지고 가까스로 집에 돌아왔다. 탈진이 된 것은 순간이고 의식은 있어도 발이 옮겨지지 않는 미스터리, 10미터를 가는데 5분이 더 걸린다면 도대체 누가 믿기나 할 것인가. 최후의 순간에 가장 생각난 것은 사탕이나 설탕같은 단맛이 나는 것이었고 똑바로 서면 다시 쓰러지기를 수십 번 했는데 당시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다. 동네에 도착하여 단 것을 실컷 먹으려고 파인애플과 사탕을 사 가지고 집에 왔는데 죽다 살아온 나를 모르고 아내는 화이트데이 선물이라고 좋아하여 상황을 어찌할 수 없어 바로 들어가 잠을 잤다.)
방배동으로 이동하여 어젯밤 아들과 딸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았다는 영식이의 고민을 들어주며 이번에는 내가 용기를 주고 집으로 늦게 돌아왔다.
19일 일어나니 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어제 늦게까지 친구와 시간을 보냈더니 오늘의 스케줄에도 차질이 생겨 운동도 못가고 밤 12시 전에는 집에 들어올 일이다. 아침식사를 하고 아내가 광화문 한글회관에서 처체를 만나 함께 독서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차에 태우고 나갔더니 처제는 석계역에서 지하철에 문제가 생겨 집으로 그냥 돌아간다는 전화가 왔다. 피곤하여 다시 집으로 왔다가 교육을 마치는 시간에 다시 나가 송백 부대찌개에서 아내와 점심을 먹고 어머니를 뵈러 출발했다. 요양원에 도착하여 노래를 하며 보내다가 신설동 2층에 들렀더니 영업을 중지하여 우중충한 날씨만큼 여기도 어둡다. 오늘부터 화,목요일에는 학원에 수업이 없어 돌아오는 길에 교보문고에 들어가 책을 읽다가 집에 왔다.
20일 일찍 자고 7시에 일어났다. 깊게 잠을 자고 일어나니 당연히 컨디션이 좋았고 식사를 마치고는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열심히 하고 돌아왔다. 오전에 아내가 소개한 동덕여고 3학년 특례입학 학생과 부모를 만나 과외수업을 시작했는데 국어에 대한 지식은 하위권이라 오늘은 기출문제만 설명하고 집으로 내려왔다. 오후에 요양원에 가는 중에 장원장을 만나 학원운영에 대한 미래의 계획과 고등부 금전문제를 논의했는데 여전히 불투명하여 갑갑했다. 요양원에 도착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노래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어머니의 혈색도 좋아 마음이 놓인 하루다. 저녁에 학원으로 이동하여 강의를 하고 밤 9시에 나왔더니 영식이가 오늘 대일학원 젊은 선생들 모임이라고 참석을 요청했지만 특별한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는 말을 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21일 어제 모임이 궁금하여 영식이에게 전화를 했더니 다음 주 금요일인데 착각을 하고 갔다가 혼자만 시간을 보내며 돌아다녔다고 한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산도 오르고 마라톤도 하려고 운동화에 츄리닝 바지를 입고 우선 안산에 올라 정상을 올랐다가 반대방향 홍제천 분수대로 내려가 모래네까지 달리기를 시작했다. 평소에 산에 다니고 체육관에서 열심히 운동을 한 까닭인지 6킬로의 거리를 지치지도 않고 가볍게 돌아왔다. 홍제천에서 휘파람을 불며 걸어서 집에 들어오니 아내는 논술학원에 갔고 딸만 컴퓨터를 하고 있다. 점심을 먹으려고 한 개뿐인 라면을 준비하는데 딸이 다가와 경목이 오빠를 준다고 가져가서 꼼짝 못하고 밥을 먹게 되었다. 3시경 요양원에 들어가니 오늘도 영식이가 매월 오는 날이라고 빵과 과일을 사가지고 왔는데 벌써 16번째 방문한 날이다. 그가 올 때마다 간병인들이나 환자들은 언제나 잔치를 맞는 날인데 오늘은 초저녁에 여동생이 팥죽까지 가지고 와서 그야말로 진수성찬 어머니의 시간이다. 식사를 마치고 휠체어에서 보내다가 침대로 이동시키는 중에 장루(인공항문)의 캡이 빠져 난처한 상황이었는데 젊은 간병사가 와서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능숙하게 처리를 한다.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희생과 사랑을 실천하는 저 젊은이는 누구인가 미안하고 고맙기만 했다.
22일 잠을 자고 8시에 눈을 떠 식사를 했다. 어제 밤까지 내린 비는 아침에는 갠 상태고 산행을 하려고 집을 나섰는데 나를 위해서는 좋아도 6학년 딸과 중학생 아들한테는 무관심의 시간이 될 수 밖에 없으니 미안하기도 했다. 배낭을 메고 지하철로 종로 3가와 회기역을 거쳐 얼만 전에 오려고 시도했던 양평 근처 국수역에 11시에 도착했다. 국화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많다는 이름인 국수역 근처 굴다리를 지나 맑은 시냇물이라는 청계산을 오르게 되었는데 같은 명칭으로 서울에도 있으니 일반인들에게는 혼란스럽다. 1시간을 걸어 형제봉에 도착했고 다시 30분을 걸어 청계산 정상에 올랐다. 국립공원이 아니라서 잘 정리되었거나 화려한 산은 못 되어도 양평을 비롯하여 경기도 동북부 지역이 한 눈에 보이는 장쾌한 산이다. 점심을 먹고 형제봉까지 다시 내려와 반대 방향 능선을 타고 부용산으로 걸음을 옮겼는데 사람도 없는 초행길이 멀고 지루하기만 했다. 2시간을 걸어 부용산 정상을 넘고 다시 얼마쯤 걸었을까 양수역 3킬로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일반 도로와 달리 산에서의 3킬로는 능선을 중심으로는 1시간 이상의 거리가 되어 기슭을 뛰다시피 했는데 땀이 흐르는 힘든 시간이었다. 걷고 달리며 5시경에 양수역으로 내려와 가까스로 지하철을 탔는데 국수역에서 양수역까지 긴 거리 5시간의 산행이었지만 큰형이 남겨준 다이아몬드표 모자를 잃어버려 아쉬움이 컸다.
23일 어제 산행을 많이 한 탓일까 아침에 눈을 뜨니 오히려 몸이 무겁다. 8시에 거실에 나와 보니 아들은 학교에 가고 없는데 한 집에서 부자지간으로 살면서 오랫동안 말도 없이 무관심으로 보낸다. 평행선을 가고 있는 이 냉전이 해소되고 아들에 대한 믿음과 기대감은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아침식사에 된장찌개가 맛이 없어 짜증이 났는데 아들이나 음식이나 모두 내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어도 아무튼 행복의 궤도에서 멀어져 가는 내 삶이다. 잠깐 잠을 자고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고 돌아와 점심을 하는 중에 영어를 함께 배우는 사람들하고 산에 갔다가 식사까지 하고 왔다는 아내가 왔는데 아침 기분이 연장이 되어 나로서는 그리 달갑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안하고 집을 나와 학원에 도착하여 프린트 만들고 요양원에 가서 어머니 뵙고 나왔더니 그제서야 마음이 편해진다. 알 수 없는 신비로움을 안고 청량리를 거쳐 신설동에 도착하여 2층과 3층을 둘러보고 학원에 와서 강의를 마친 뒤에 행복이 적은 집 한화아파트 1904호에 들어왔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자 그 동안 인기척도 없던 아들이 거실로 나와 소리를 내고 컴퓨터를 시작한다. 오늘 밤 나는 아들에게 걸림돌이었다.
24일 새벽에 일어나 거실에 나갔더니 아내는 잠이 오지 않는다고 책을 읽고 있다. 단정한 자세로 책을 읽는 모습은 진지하더니 6시가 되어 다시 들어가 쿨쿨 자는 모습은 완전 반대의 이미지라 실망스럽다. 거기다가 늦게 일어나 아들은 가까스로 식사를 했고 나도 식탁에 앉았더니 성의가 없는 음식만 남아있어 짜증이 난 아침이다. 불편한 마음으로 한양상가에 올라가 특례입학생 수업을 하고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왔더니 한국과 일본의 야구경기가 9회말 3:3 동점 그러더니 10회 연장에서 강타자 이치로가 안타를 날려 일본이 승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날렵한 몸매로 공을 잘 받아치는 이치로는 오늘도 5타수 4안타로 역시 일본의 영웅다운 선수인데 그에게도 많은 땀과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누구라도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뼈를 깍는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 실감하는 시간이 될 수 있었다. 오후에 요양원에 갔더니 여동생도 와 있어 바로 나와 신설동에서 20개월 분할로 저렴한 핸드폰을 구입했다. 학원에 들렀다가 집에 돌아와 아내와 딸을 태우고 홍제천 옆에 위치한 감자탕 집에 가서 저녁을 사 먹었다. 영식이는 영덕에서 대게를 가지고 서울로 오는 중이라면서 늦은 밤이라도 우리 집에서 함께 먹자고 하는데 시간도 늦고 오늘은 다소 무리다.
25일 11시경 잠이 들었다가 새벽 2시30분에 눈을 떴다. 어제 교환한 핸드폰은 010이고 기존 것은 011이라 번호 입력을 새로 했어야 하는데 직원이 판매에만 급급하여 연결을 하지 않았다. 이런 황당한 일로 인하여
나한테 전화한 사람은 없는 전화번호라는 소리만 들려 아침이 올 때까지 신경이 쓰였다. 오전에 강남학원 마원장이 약속된 원금과 이자를 보내와 우선 고등부 강사료를 처리하고 투자금으로 영식이한테 보낸 형의 원금에 대해서도 이자를 입금했다. 12시가 거의 되어 체육관에 나가 운동을 하고 새마을금고에 들러서 담보대출을 알아보니 4500만원까지는 가능하다. 하지만 이자가 너무 많아(4천5백만원 년8% 월이자 약30만원/일반은행의 2배) 무슨 일을 하든 대출은 어렵게 생겼다. 오후 2시에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고 서둘러 요양원에 도착하여 어머니와 노래를 부르며 보내다가 학원으로 이동하여 강의를 열심히 하고 마쳤다. 영식이는 오늘 저녁에 어제 못한 영덕 게를 우리 집에서 먹자고 다시 제안하여 약속을 했고 밤 9시가 지나 영식이 정식이 강형수 등과 우리 가족까지 7명 모두 동해안 게 파티를 했다. 1박스를 가져와서 맛있게 정신없이 먹었는데도 남을 정도였고 나중에 녹번동에 사는 고등 영어선생도 불러 자리를 했다. 담백한 게맛살이 다른 음식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고 모처럼 아들을 포함하여 우리 가족도 흥겨운 시간 속에서 보낸 저녁이었다.
26일 어제 게를 먹으면서 우리 집에 온 친구들이 아들을 보고 부모한테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니 옆에 있던 아들은 생각해 보겠다고 하여 내가 놀랐다. 아들에게 바라거나 의지할 생각은 없지만 아버지의 친구들이 부모한테 잘하라는데 생각을 해 본다니 말을 한 친구들도 무안했지만 현재 나는 이런 아들과 살고 있다. 철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지만 모두 내 탓이 아닐 수 없고 과거와 달리 핵가족 시대에 가족이나 부모를 대하는 인식은 우리의 기준과 다름도 그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침에 식사를 마치고 체육관으로 갔다가 운동을 마치고 나오니 비가 내려 부지런히 집으로 가서 한글회관 강의를 들으러 가는 아내를 태우고 나갔다. 집으로 돌아와 대기하듯 있다가 2시간이 지나 또 나가서 오늘은 점심으로 된장찌개를 먹고 식사 후 응암동 이마트에 가서 배추와 생선 등을 사 가지고 돌아왔다. 4시에 어머니를 뵈러 요양원에 갔더니 오늘은 유독 눈이 휑하고 초췌하시어 생의 마지막이 오고 있지 않나 생각이 되었다.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잔인하지만 나도 마음의 준비로 금전이나 부고할 명단 장례를 치룰 2박3일의 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요양원을 나와 방배동에 가서 영식이와 착잡한 심경을 나누었다.
27일 아침에 눈을 뜨니 잠이 쏟아진다. 연 이틀 술 마시고 늦게 잤더니 잠이 모자라는가 싶다. 9시경에 식사를 하러 나오니 어제부터 아내가 신중하게 담근 김치가 오늘 식탁에 올랐다. 맛있게 먹었는데 정성을 다한 흔적까지 보여 살면서 이런 날도 있나 싶었고 아내가 달라 보이고 고마운 은인같기도 하다. 오전에 특례입학 문제를 정리하니 12시가 되었고 아내는 아들 학교에 공개수업을 참관하러 갔다. 아들이 1학년 때는 나도 참석을 하여 가정과목 담임선생의 강의를 들었는데 그 시간도 벌써 2년이 흘렀다. 점심을 혼자 먹고 2시에 체육관에 갔더니 오전과 달리 생소하여 운동을 가볍게 마치고 어머니한테 가려다가 은행에 가서 대출서류를 마무리 하다 보니 시간이 늦어 그대로 집으로 들어왔고 오늘 수업이 없다는 아내는 한가하게 시간을 보낸다. 어제 사온 사태를 삶아서 맛있는 김치와 늦은 오후에 밥을 먹고 학원에 강의를 하러 나갔는데 날씨가 쌀쌀하여 감기환자가 많고 그로 인하여 결석생도 많다. 강의 마치고 바로 집으로 돌아와 일찍 자리에 누웠는데 영식이는 방배동에서 대일학원 선생들과 모임을 한다니 이리저리 나보다 더 바쁜 사람이다.
28일 새벽에 눈을 떠서 핸드폰을 보니 새벽에 형준이 전화가 와 있다. 어제가 금요일이니 내가 새벽까지 술 마시는가 싶어서 연락을 했을텐데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다. 어제 밤에 생활비 문제로 아내와 대화를 하다가 화를 내서 그런지 속이 편하지 않아 아침 식사도 거르고 북한산으로 출발했다. 불광역에서 독바위까지 걸어가 족두리봉을 거쳐 향로봉에 올랐다. 20분을 더 걸으면 사모바위 정상인데 시간이 부족하여 서울시내가 보이는 중턱에 앉아 가져온 누룽지탕으로 점심을 먹고 다시 불광사 앞을 경유하여 내려왔다. 청주에 계시는 처 할머니께서 오늘 골절상을 당하여 입원하셨다고 연락이 와서 딸과 아내를 보내면서 위로금 10만원을 넣어가라고 일렀다. 내가 직접 차를 몰고 다녀오는 것이 도리인데 개인 일정으로 바로 내려가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다. 신설동에 지하철로 나가 일을 보고 집에 와서 학원에서 돌아온 아들을 위하여 생선을 중심으로 저녁을 준비하여 주었다.
29일 새벽에 눈을 떴는데 창문을 열어 둔 것처럼 춥고 방안이 썰렁하다. 급히 거실에 나가보니 여기도 냉방인데 알고보니 보일러를 외출로 누른 어제 상태로 아들과 나는 밤을 지새운 것이다. 언젠가는 시계를 잘못 보아서 허둥지둥 학교에 일등으로 보낸 적도 있었는데 오늘도 누구를 탓할 수가 없다. 서둘러 온도를 높이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기다리는 중에 청주에 간 아내한테 아들과 해장국이라도 사 먹으라는 문자가 왔지만 귀찮아서 남아있는 미역국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오전에 내부순환도로를 타고 요양원에 가면서 보니 여기저기 개나리와 진달래가 화창하게 만발하여 완연한 봄을 알리고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 보인다. 요양원에서 어머니를 뵙고 점심은 시내에 나와 갈치조림을 먹었는데 일요일마다 산에 가다가 오늘은 생소한 하루다. 오후에 집에 오니 아내는 돌아와서 수업을 갔고 딸만 집을 지키고 있어 동행하지 못한 미안함으로 저녁밥을 짓고 김치찜도 내가 만들었다. 3월도 거의 다 가고 낼 모레 공과금으로 국민은행 아내 통장에 4백만 원 보내고 은행이자 1백50만 원과 카드비용 8십만 원 전체 6백만 원 이상을 텔레뱅킹으로 처리했다. 3개월 전부터 보험회사에서 빌린 8백만 원을 분할하여 납부하다 보니 지출이 많은데 다음 달부터는 부담이 줄어들 것이다
30일 잠을 자고 6시에 일어났다. 아내에게 금전적인 걱정이 없도록 잘 해야 할텐데 미안한 마음으로 7시가 지나 거실에 나오니 식사는 했는지 인사도 없는 아들이 학교에 간다. 불러 세워 야단을 칠 수도 없고 갈치와 감자국으로 식사를 하고 실망의 심정으로 방에 들어가 한탄을 하며 보냈다. 체육관에 운동을 하러 갔다가 3층에 있는 윤형기 학원에 들어가 대화를 한참 나눴는데 사람이 성실하니 학원도 꾸준하게 잘 유지가 되는 것 같다.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와서 오전에 영어를 배우고 산에 다녀온 아내와 삼겹살로 식사를 하고 오후에 어머니를 뵈러 갔다. 오늘은 고향의 6촌 종식이 형이 문안을 왔는데 시골에서 이웃집에 살았다는 이유로 어머니께서 금방 기억을 하신다. 대화 하시는 것을 보니 기억력과 청력은 좋은데 거동을 못하고 힘이 없어 사경을 헤매는 모습이고 젊은 간병인은 오늘도 아들인 나도 못하는 대소변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처리하는데 그의 희생과 봉사 앞에 내가 부끄럽기만 했다.
31일 3월의 마지막 날이다. 산에는 개나리와 진달래가 활짝 피어 있고 벚꽃과 다른 나무들은 봉오리가 맺혀 있을 정도다. 어제 밤에 고추장을 많이 먹어 속이 쓰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고 식사 조금하고 논술학원에 올라가 특례학생 두번 째 수업을 했다. 열심히 잘 가르칠 것이고 이 기회에 아파트에 전단지도 붙여 중간고사 대비 소수과외도 해 볼까 생각을 했다. 돈도 중요하지만 입시강의 20년의 경험과 지식이 아깝다고 아내가 자주 말을 하는데 내가 판단해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수업을 마치고 내려와 점심을 먹고 수업이 없는 화요일이라 오후 3시에 안산에 올라가 느긋하게 걷고 기구운동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산 중턱이라 오후 5시가 지나니 을씨년스러워 서둘러 내려왔고 바로 영풍문고에 나가 ‘고슴도치의 꿈‘ 책 1권을 샀다. 서울시 공무원을 하다가 암을 만났고 그것을 극복한 과정을 생생하게 써 내려간 인간승리의 이야기다. 극한의 상황에서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 인간의 의지력은 어디까지인지 책을 읽는 동안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지하철로 집에 9시에 들어오니 고향 후배 부친상 문자가 와 있다. 해가 바뀌어 꽃이 피고 여전히 새는 운다 해도 우리의 인생은 죽음의 문턱을 피할 수가 없다. 내일은 나에게 잔인한 4월이 악마처럼 기다리고 있는데 오늘 저녁 마음조차 무겁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