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과 혼 생명과 자아에 다하여(2)/ † 자아(自我)란 무엇인가?
<이 부분의 진리는 아직도 닫혀진 부분이다. 가끔 심리학의 일부 용어들을 도입하여 쓰기도 하지만, 그 내용이 정확하지도 않다. 더욱이 그것은 성경에서의 표현과는 거리가 멀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따라, 이의 정확한 이해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성경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부분의 이해는 전체 성경해석의 맥을 잡기 위하여 필수적인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부분을 지난 십 여년간 여러 각도에서 수시로 비교 설명해 오고 있다. 부디 당신의 분발을 기도드린다! 아멘!>
성경은 사람에게 혼만 있는 것처럼 사람을 ‘혼(魂)’이라고 칭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2장 5절의 ‘사람’이라는 단어는 원문에는 ‘혼’이다. 또한 혼은 사람의 자각이다. 우리가 자신의 존재성을 느끼는 이것이 바로 혼이다. 혼은 우리의 인격이 자리 잡은 기관이며, 우리 인격에 포함된 모든 것, 곧 우리로 하여금 사람이 되게 하는 그 모든 요소를 포함한다.
우리의 지력(智力), 생각, 사상, 자극에 대한 반응, 감정, 판단력, 의지 등은 혼의 각 기능이다. 인격에 내포된 모든 것이 다 혼에 속한다. ‘마음’은 인간의 참 ‘나’를 대표하기 때문에 성경은 자주 ‘마음’과 ‘혼’을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성경에 ‘혼’을 사람으로 대신한 곳이 셀 수 없이 많다. 이것은 혼이 바로 인격과 인격 안의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어떠한가를 알려면 그의 인격이 어떠한가를 보아야 한다. 사람의 존재와 특성과 생명 등은 모두 혼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성경은 사람을 ‘혼’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혼에는 혼의 지력과 애정과 의지와 자극에 반응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혼 생명도 있다. 이 생명은 인간의 생명, 곧 사람의 타고난 생명이다.
성경에는 혼을 생명과 통용하여 ‘혼’을 ‘생명’으로 번역한 곳이 많다. 예를 들면, 레위기 17장 11절의 “생명”과 계시록 12장 11절의 “생명”은 원문에서 다 “혼”이라는 단어이다. 그런데 이렇게 쓴 이유는 원문에서 “혼”과 “혼 생명”이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혼” 안에 포함된 모든 요소는 “혼 생명” 안에 포함된 모든 요소이기도 하다.
지력과 애정과 자극에 반응하는 기능 등을 포함한 이 혼 생명이 바로 사람의 타고난 생명이다. 이제 “혼”을 이해하기 위하여 같은 의미로 통용해서 쓰이는 “혼 생명”과 그리고 “자아”를 비교해 보자.
1. 혼(魂)
혼은 우리의 인격적인 기관이다. 우리 인격에 포함된 모든 것, 곧 우리로 사람이 되게 한 요소들은 다 혼에 속한 것이다. 우리의 지력과 생각과 애정과 자극과 판단력과 의지 등은 혼의 각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영과 몸은 혼 안에 융화되었기 때문에, 혼은 사람의 개성이자 인격의 중심이 되었다.
따라서 바로 이것 때문에 성경은 마치 사람에게 혼만 있는 것처럼 사람을 혼이라고 칭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2장 5절은 물론 46장 27절에서 야곱이 온 가족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갔을 때, 성경은 “야곱의 집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 ‘혼’이었더라.”고 말했다. 이처럼 원문 성경에서 사람을 혼으로 대치한 곳은 무수히 많다.
이것은 다름 아닌 혼이 곧 인격이요 인격 안에 있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어떠함은 그의 인격에서 볼 수 있다. 사람의 존재와 특성과 생명 등은 다 혼 때문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을 혼이라고 칭했다. 사람의 인격에 포함된 삼대 요소는 바로 우리의 의지와 생각과 감정이다.
의지는 우리가 어떤 주장을 내세우는 기관이고, 우리의 판단력으로서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원치 않으며, 무엇을 받고, 무엇을 거절하는가? 등을 표명한다. 이러한 의지가 없다면 사람은 기계가 된다. 생각은 사상을 나타내는 기관이다. 이는 곧 우리의 지력이다. 우리의 총명과 지식 그리고 추리하는 것 등은 다 이 생각에서 나온다. 생각이 없을 때 사람은 완전히 어리석은 자가 된다.
감정은 우리가 사랑하고 미워하며 느끼는 기관이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고 미워하며 희로애락을 느끼는 것은 모두 우리의 감정을 통해서이다. 감정이 없다면 목석과 같이 무감각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상고한다면, 인격의 삼대 요소, 곧 생각, 감정, 의지가 다 혼에 속한 것임을 알 것이다.
2. 혼 생명(魂 生命)
생명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세 단어, 곧 1) 비오스(bios), 2) 슈케(psuche), 3) 조에(zoe)가 있지만, 그들이 가리키는 생명의 의미는 각각 다르다.
1) 비오스(bios)는 육신의 생명을 말한다. 주 예수님께서 과부가 생계비를 다 하나님께 헌금으로 드렸다고 말씀하셨을 때 사용한 단어이다.
2) 슈케(psuche)는 곧 유기적 생명으로서, 이는 사람의 타고난 생명이자 혼의 생명이다. 성경에서 사람을 말할 때에는 항상 이 단어를 사용했다.
3) 조에(zoe)는 가장 높은 생명이자 영의 생명이다. 성경에서 영생이라고 한 곳에는 다 조애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성경에서 사용한 혼과 혼 생명이라는 단어이다. 원문에서 이 두 단어는 동일한 단어이다. 구약은 히브리어로 쓰여 졌고, 신역은 헬라어로 쓰여 졌다. 구약에서는 “혼”을 말할 때 ‘네페쉬(nephesh)’를 사용했고, “혼 생명”을 말할 때에도 ‘네페쉬’를 사용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혼과 혼 생명을 모두 ‘슈케’라는 단어로 사용했다. 또한 성경의 많은 부분은 “혼”을 “생명” 혹은 “목숨”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이것을 혼이라고 번역하면 읽기가 어렵기 때문에 다소 어렵고 무의미한 문장이 된다. 그러나 원문에서 이렇게 혼이라고 한 것은 혼이 사람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혼은 사람의 삼대 요소, 곧 영과 혼과 몸 중의 하나이다. 혼 생명은 사람의 타고난 생명으로서 이는 사람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생명이다. 곧 유기적인 것을 사람에게 주는 생명으로서 사람이 그로 말미암아 사는 생명이다. 또는 능력을 사람에게 주어 사람으로 살게 하는 생명이다.
그러나 성경이 혼과 사람의 생명에 대하여 ‘네페쉬’와 ‘슈케’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분리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분리될 수 있는 이유는 성경의 어떤 곳에서는 ‘슈케’를 그 전체 의미상 “혼” 또는 “생명”이라고 번역해야 하고 서로 뒤바뀔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2장 19-23절과 마가복음 3장 4절의 혼과 생명과 영혼은 원문에서 같은 단어이지만 결코 동일한 단어로 번역될 수 없다. 또한 분리할 수 없는 이유는 이 두 가지가 사람 속에서 완전히 융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의미한 말이 된다. 육체에 속한 사람에게서 혼을 제하여도 생명이 남아 있다고 말한 곳이 없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사람의 생명은 단지 몸 안에 있는 혼에 침투되어 있을 뿐이다. 혼이 몸과 연합할 때 혼은 곧 사람의 생명이 되었다. 생명은 혼의 현상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신의 생명”이 곧 “혼 생명”이기 때문에, 성경은 현재 사람의 몸을 ‘혼에 속한 몸’(고전15:44)으로 여겼다. 이 혼이 바로 사람의 생명이다. 이것은 우리가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느냐 혼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느냐를 결정해 주는 측면에서 볼 때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성경의 많은 말씀에서 혼에는 생각, 감정, 의지의 기관이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한 사람의 사상, 상상, 결정, 느낌, 감정, 자극, 사모, 지식, 번민, 모략, 기뻐함, 미워함 등의 모든 활동(현상)이 모두 혼에서 나온, 혼 생명의 기능들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생명이 연합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의 생활은 이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혼 생명은 바로 사람의 타고난 육신의 생명이며, 타고난 것들 안에 포함된 인격의 모든 것은 혼의 각 부분이다. 좀 딱딱한 내용이지만 당신이 이 부분을 숙독하고 정리한다면, 향후 엄청난 영적 지식의 진보를 스스로 발견할 것이다.
3. 사람의 자아(自我)
앞에서 우리는 혼이 어떻게 사람의 인격이며 주장하는 기관이며 생명인가를 보았기 때문에 이 혼이 우리의 ‘참 나’요 우리 ‘자아’ 라고 단정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해서도 성경에 명확한 증거가 있다. 자아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확인하기 위하여 몇 가지 말씀을 예로 들겠다.
민수기 30장에서 “스스로 제어한다.”라는 말이 열 번이나 언급되고 있는데, 원문에서는 이것이 “혼을 제어한다.”이다. 이것은 혼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깨닫게 해 준다. 성경에는 혼을 “자아” 또는 “자신”이라고 한 곳이 많다.
레위기 11장 43절은 “스스로 자신을 더럽혀 부정하게 된다”고 말하며, 레위기 11장 44절은 “스스로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고 말한다. 에스겔 9장 31절은 “자기와 자기 자손을 위하여” 라고 말한다. 욥기 18장 4절은 “스스로 자신을 찢는 자” 라고 말한다. 민수기 23장 10절에서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에서 ‘나는’은 원문에 나의 혼으로 되어 있다.
시편131:2절의 “내가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은 원문에서 “내가 내 혼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이라고 되어 있다. 아모스 6장 8절의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였노라”의 원문은 “혼을 가리켜 맹세하였노라”로 되어 있다. 이 몇 성경 구절에서 여러 가지 말로 “혼”이 “사람의 자아”라는 것을 우리에게 지적해 준다.
베드로전서 3장 9절의 “여덟 명”과 사도행전 27장 37절의 “이백 칠십육인”은 원문에서 모두 “혼”이라는 단어이다. 로마서 2장 9절에서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은 원문에서 “악을 행하는 각 혼”이다. 누가복음 12장 19절에서 어리석은 부자가 자기 혼에 위로의 말을 하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과 동일시하여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사람의 혼 혹은 사람의 혼 생명을 사람의 자아로 여긴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만일 앞에서 인용한 몇 가지 예를 혼이나 생명으로 직역한다면 무의미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자아)’으로 번역해야만 한다. 이것은 성령께서 사람의 혼이나 혼 생명을 곧 사람의 자아로 보기 때문이다.
반면에 누가복음 9장 25절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동일한 기사를 기록한 것인데, 하나는 “혼 생명”이라고 말하고, 하나는 “자신(자아)”이라고 말한다. 이로써 우리는 성령께서 마태복음을 사용하여 누가복음의 “자기”를 설명하고, 누가복음을 사용하여 마태복음의 “혼 생명”을 설명한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의 혼 혹은 생명(혼 생명)은 바로 사람의 자아이고, 사람의 자아는 곧 사람의 혼 혹은 생명이다. 우리가 성경에서 혼을 언급한 곳을 읽어 볼 때 우리는 사람의 혼이 바로 사람의 생명이고 사람의 자아이며 사람의 인격이며, 인격 안에 포함된 의지와 생각과 감정 등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씀의 분석을 통하여 우리는 사람의 혼 안에 포함된 것이 바로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모든 육체에 혼과 혼 안에 포함된 모든 것이 있다. 혼은 모든 육신적인(육체적인) 사람이 공통적으로 소유한 생명이다. 거듭나기 전 사람의 생명 안에 포함된 모든 것, 곧 그것이 자아이든 생명이든 기력이든 능력이든 생각이든 뜻이든 사랑이든 감정이든 다 혼에 속한 것이다. 곧 혼 생명은 바로 모태로부터 받은 인간의 생명이다.
만일 우리가 혼에 속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보았다면, 이후로 우리가 다룰 영에 속한 것이 무엇인지를 쉽게 이해하게 되고, 영에 속한 것과 혼에 속한 것을 구분할 줄 알게 된다. 영을 알려면 혼을 알아야 한다. 영을 알아야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이들이라(롬8:9).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