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엔 佛 心 이 가득합니다 ⊙
룸비니산악회 2024" 대한불교조계종 교구본사 순례산행 !
경주에 위치한 토함산은 신라의 얼이 깃든 영산으로 일명 동악이라고도 불리우며 신라 오악의 하나로 손꼽힌다. 문무왕 수중릉이 있는 감포 앞바다가 굽어 보이는 토함산은 옛부터 불교의 성지로서 산 전체가 마치 하나의 거대한유적지인 우리 나라 문화재의 보고이다. 정상 가까이에 석굴암이 있으며 기슭에는 불국사가 자리하고 경내의 석가탑, 다보탑, 청운교, 연화교 등 빼어난 유적들이 많다. 토함산은 동해의 일출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곳이기도 하다. 감포 앞 바다를 붉게 적시며 토함산 위로 떠오르는 태양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일으킬 정도로 벅찬 감동을 자아낸다. 토함산은 자동차로 손쉽게 오를 수 있지만 가능하다면 불국사 담을 끼고 걸어 올라가 상쾌해진 몸과 마음으로 해를 맞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 특히 12월 31일 밤이면 새해 일출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수만명이 찾는다. 그들은 경주박물관에서 자정에 에밀레종 타종을 지켜본 후 시내에서부터 석굴암까지 걸어 올라와 한해 시작을 알리는 일출을 지켜보면서 신년을 맞는다
불국사의 부속암자. 국보(1962.12.20 지정)이다. 창건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751년 재상 김대성이 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불사를,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짓기 시작하여, 774년 신라 왕실에서 완성했다고 한다. 석굴의 구조는 전방후원식으로, 장방형의 전실과 원형 주실 그리고 그 사이를 이어주는 비도로 되어 있다. 주실의 가운데 높은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본존불의 두광은 사람이 전실의 중간쯤 와야 광배의 중앙에 부처의 머리가 놓이고 상의 크기나 몸체의 비례감이 알맞게 보이도록 고안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3차에 걸쳐 보수되면서 많이 손상되었다. 1962~64년에 대대적으로 수리되어 석굴의 구조 및 불상들의 위치가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국보(1962.12.20 지정).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부속암자이다. 창건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했다. 〈삼국유사〉 권5 대성효이세부모조에 의하면 751년(경덕왕 10) 재상 김대성이 발원하여 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불사를,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짓기 시작했으나 774년 김대성이 죽자 신라 왕실에서 완성했다고 한다. 따라서 경주 석굴암 석굴은 김대성 개인이 창건했다기보다는 신라 왕실의 염원에 의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경주 석굴암 석굴은 여러 개의 판석과 다듬은 돌로 궁륭천장 석실의 비례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역학적으로 축조한 인공석굴이라는 점에서 인도나 중국 등 다른 나라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석굴의 구조는 전방후원식으로, 장방형의 전실과 원형 주실 그리고 그 사이를 이어주는 비도로 되어 있다.
주실의 가운데 높은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본존불의 두광은 뒷벽에 연화무늬로 조각되어 있는데, 예배하는 사람이 전실의 중간쯤 와야 광배의 중앙에 부처의 머리가 놓이고 상의 크기나 몸체의 비례감이 알맞게 보이도록 고안되어 있다.
석굴암 내의 조각상들은 부처가 설법을 할 때 거느리고 다니는 여러 권속들로, 본존불상을 중심으로 보살상·천부상·제자상 등이 조각되어 있다. 즉 석굴암의 불상은 여러 불·보살·천부상 등이 모여 하나의 작은 불국토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불국사고금창기 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1703년(숙종 29)에는 종열(從悅)이, 1758년(영조 34)에는 대겸(大謙)이 경주 석굴암 석굴을 중수했다고 한다. 조선 말기에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에 의해서 크게 중수되었으며 그뒤 일제강점기에 1913~15, 1917, 1920~23년 3차에 걸쳐 보수되면서 원래의 모습이 많이 손상되었다.
일본인들의 잘못된 보수는 1962~64년에 정부지원 아래 대대적으로 수리되어 석굴의 구조 및 불상들의 위치가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건축학적인 면에서는 앞으로 문헌자료와 함께 중수과정에 대한 철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만 창건 당시의 경주 석굴암 석굴 모습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751년(경덕왕 10) 김대성(金大城)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국가에 의해 완성되었기 때문에 개인의 원찰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원찰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한편 〈불국사고금창기 佛國寺古今創記〉에는 528년(법흥왕 15)에 법흥왕의 어머니인 영제부인이 화엄불국사를 창건하고 574년(진흥왕 35)에 중창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신라 역사와 모순된 것이며 〈삼국유사〉의 내용을 그대로 베낀 듯한 대목도 있어서 사료로서의 신빙성이 적다. 그러나 창건 당시의 주요건물에 대해 자세히 기술해놓아 불국사의 원형복원에 좋은 자료가 된다.
창건 이후 여러 차례의 중창과 중수를 거쳤으며 현존하는 주요건물들은 대체로 임진왜란 이후에 복구된 것이다. 석탑을 포함한 석조물은 병화를 입지 않아 신라시대의 원형을 유지한 것들이 꽤 남아 있다. 현재의 모습은 1970년의 대대적인 복원공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염원한 이상의 불국토를 3갈래로 구현한 것으로 〈법화경 法華經〉에 근거한 석가의 사바세계는 대웅전으로, 〈무량수경 無量壽經〉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는 극락전으로, 〈법화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 세계는 비로전으로 대표된다. 즉 불국사의 경내는 석단에 의하여 단상의 불국토와 단하의 속계로 양분된다.
크고 작은 돌을 빈틈없이 쌓아올려 만든 석단 위에 청운교·백운교, 칠보교·연화교라는 2쌍의 다리를 놓았다. 청운교·백운교는 자하문을 거쳐 석가모니의 사바 세계인 대웅전으로 오르게 되어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3층석탑과 다보탑은 서로 마주 서 있는 쌍탑구조이며, 뒤편으로는 경론을 강술하는 무설전을 두고 대웅전 일곽을 동·서 행랑으로 에워싸고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를 올라 안양문을 지나면 극락전에 이르게 되며 그 안에 금동아미타불좌상을 안치했다. 무설전 뒤에는 관음전이 있고, 그 서편에는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을 봉안한 비로전이 있다.
이외에도 토함산 일대에는 몽성암과 보덕굴을 비롯하여 불국사 부속암자들이 다수 있다. 칠보교 아래에는 2쌍의 당간지주와 석조가 있고, 5기의 부도가 남아 있다.
▲불국사
석굴암(石窟庵)과 불국사(佛國寺)는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고대 불교 유적이다. 석굴암은 불상을 모신 석굴이며, 불국사는 사찰 건축물이다. 두 유산은 모두 경주시 동남쪽의 토함산(吐含山)에 있으며,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다. 두 유산은 8세기 후반에 같은 인물이 계획해 조영하였으며 비슷한 시기에 완공되었다. 석굴암은 화강암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쌓아 만든 석굴로 원형의 주실 중앙에 본존불(本尊佛)을 안치하고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나한상, 신장상 등을 조화롭게 배치하였다. 불국사는 인공적으로 쌓은 석조 기단 위에 지은 목조건축물로 고대 불교 건축의 정수를 보여 준다. 특히 석굴암 조각과 불국사의 석조 기단 및 두 개의 석탑은 동북아시아 고대 불교예술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석굴암 본존불과 그 주위 대부분의 석조 조각과 건축의 형태는 8세기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진정성이 높다. 불국사 경내의 석조 유산은 부분적 보수 과정을 거쳤을 뿐 신라 시대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목조 건축물들은 16세기부터 보수와 복원의 과정을 거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든 복원 사업은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전통 재료와 기술이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