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2년 9월 17일, 북일정상회담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뒤틀린 과거사 청산 문제를 제대로 매듭짓는가, 선언에서 새로운 지평을 펼쳐내는가에 대한 대다수 재일조선인의 기대와 우려를 뒤로 한 채, 이 역사적인 회담은 아무런 성과없이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있다. 한편, 최근 5개월간의 일본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파격적인 일본인 납치시인 발언으로 완전히 이성이 마비된 사회였다. 식민지 역사의 산증인이요 최대 피해자인 120만 재일조선인을 가해자 혹은 범죄집단으로 매도하며 이미 최소한의 양심도 찾아 볼 수 없을 지경이다. 일본 전역에서 등하교길의 재일조선인 어린아이들이 무차별 폭언·폭행에 시달리고, 날카로운 흉기로 등 뒤에서 치마저고리를 찢기는 등, 소위 테러적 상황이 점증하고 있다. 하소연할 곳 없이 고립된 재일조선인에 대한 90년의 이유없는 폭력, 앞으로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가? 시민사회와 정부는 언제까지 팔장만 낀 채 남의 일로만 지켜볼 것인가? 아래 글은 재외동포 교류단체 활동가로서, 필자가 바라본 재일조선인에 대한 명칭 및 정책과, 체험한 재일조선인 사회의 모습을 통해, 120만 재일조선인 현실에 동참할 것을 정부와 시민사회에 제언하는 것이다.
2. 왜 재일조선인이며, 120만명인가?
재일조선인이란 용어를 주목하자. 재일조선인이란 용어는, '재일한국인', '재일교포', '재일동포', 재일한인', '재일한국·조선인', '재일조선·한국인', '재일', '재일코리안' 등등...... 시대적 상황 혹은 글쟁이들의 이념적 스펙트럼에 따라 참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국내 지식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재일한국인'이라는 용어는, 분단체제의 한국에서 건너가 일본에 사는 뉴커머(New Comer)로서의 의미로만 한정시켜 사용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이 용어로는, 과거 일제 식민지 역사에서 비롯된 재일조선인 사회의 근간을 이해할 수 없으며, 어느 면에서는 과거 의도적으로 '정권에 알아서 기는' 냉전적 용어였다. 어떤 지식인 집단도 이 부분에서 책임을 회피하지 못한다.
이 글에서 필자는, '일본사회내 정체성있고 역사적인 집단으로서, 일본의 구식민지인 한/조선반도에서 일본으로 도래한 자 및 그 후손으로서 특별영주권을 가진 사람'과 그 외의 '한/조선 혈통 혹은 국적을 가지고 살거나 장기 체류하는 사람들 및 그 후손'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재일조선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모든 용어가 일면 차별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 식민지 시기 이후 복잡한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며, 군사정권에 편승한 이데올로그들이 사용한 차별 용어들을 정리하고, 동시에 재일조선인에 대한 집요한 차별을 극복하자는 데 의미가 둔다. '재일동포?' 좋다. 그러나, 정부나 시민사회가 재일조선인을 역사·문화·언어를 함께 나눈 통합적인 의미의 동포로 인정한 적이 언제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부끄러움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불러야 할 용어일 뿐이다.
2000년 12월말 기준이다. 외통부는 일본 법무성 통계를 인용하며, 재일조선인 총수를 64,0234명으로 추산했다. 정부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일본 법무성은 매년 자국 체류외국인 통계를 낼 때, '한국·조선'으로 통합 발표하고 있으며, 구분된 자료 요청에는 불응하고 있다 한다. 울며겨자먹기식으로 정부는, "재일동포들이 자발적으로 설립한 순수 재외동포단체인 민단 단원수 약 43만명 및 우리 체류자 수 약 9만명을 감안"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통계 수치는 참으로 외통부의 안이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부는 현재 각 국 재외동포 통계 작성시 각 국의 시민권 및 국적을 취득한 재외동포와 재외국민을, 일반 재외동포 통계에 모두 포함시키고 있다. 설령 민단을 순수한 재외동포단체로 보아준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밝힌 64만명 이외에 '1952년 4월 28일(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일) 이후 2000년 말까지 일본국적을 취득한 재일조선인 총수 약 24만 5천명이 빠져있고, 해방 후 지금까지 재일조선인과 일본인 부부 사이에 태어난 일본국적을 가진 30만명도 제외되어 있다. 결국 정부 통계 작성법으로 보아도 재일조선인 총수는 120만명을 상회하고 있는 셈이다. 자국의 국민 혹은 재외동포가 몇 명인지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3. 그렇다면 정책다운 정책은 있었는가?
사실 1970년대까지의 한국의 재외동포정책은 주로 재일조선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미국지역 및 유럽지역의 재외동포정책은, 65년 미국의 이민법 개정과 남미지역에 대한 농업이민 등 해외 이주정책으로 이루어졌고, 약 200만명의 재중동포와 약 50만명의 재CIS지역 동포에 대한 정책적 접근은 미수교의 문제로 최근 10년을 넘지 않는다.
이승만 정권은 1957년 '재일동포에 대한 교육지원금' 명목으로 보조금 2만 2천불을 지원한 것 이외에 기본정책 혹은 지원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같은 시기 북한은 한국정부의 지원금의 30배에 가까운 61만 5천불을 민족학교에 지원했다. 상대적으로 북한은 최고인민대표자회의(한국의 국회에 해당)에 7명의 총련 대표를 참여시키고 있을 정도이며, 1963년 10월에 개정한 국적법 제2조에도 "그 거주지에 관계없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적 및 법적 보호를 받는다"라고 선언적 의미나마 일찌감치 명기했으며, 헌법 15조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해외의 조선동포들의 민주주의적 민족권리와 국제법에서의 공인된 합법적 권리를 옹호한다"고 하여 일관되게 일본 전역의 민족학교를 지원하는 등 적극적인 재외동포정책을 펼쳐온 셈이다.
박정희 정권의 정책은 어떠했는가? 1965년 한일법적지위협정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수행과정의 일본의 법적 책임을 명확히 하고, 역사적 청산을 강제해내야 하는 것임에도, 일본의 역사적 책임에 대해서는 공식문서로 단 한 줄 남겨놓지 않았다. 중요한 점은 당시 한국국적 보유자만을 직접적인 법의 적용대상으로 명시하고, 분단된 어느 특정 국가의 국적 취득을 거부한 다수 재일조선인을 제외시켰으며, 식민지 지배와 역사적 정주의 경험을 함께 한 재일조선인 사회에 또 다른 분단을 야기시켰다는 점에서 씻을 수 없는 반민족적 과오로 남는다. 또한 당시 외국인의 처우에 관한 국가간 실정과 국제법, 나아가 인권보장에 관한 국제적 기준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군사정부의 무지 자체만이 돋보일 뿐이다.
1998년 10월, 한일정상회담에서 양국은 과거사 청산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90년 넘는 세월, 일본의 차별·배제 정책의 산증인이며, 과거사 청산의 주역으로 참여해야할 재일조선인의 목소리는 98년 한일정상회담 합의 내용 중 어느 곳에도 투영되지 못한 근본적인 한계가 있으며, 미래에도 두고두고 커다란 문제로 남을 전망이다. 결국 재일조선인에 대한 정책다운 정책은 추스려보자면 '기민정책' 밖에는 남을 게 없을 정도다. 식민지 역사 팔고 재일조선인 팔아 그 댓가로 한국 고속도로 만들고, 공장 만들었다는 얘기는 알 만한 사람 다 아는 얘기다. 참으로 부끄러운 노릇 아닌가?
4. 2002년 재일조선인사회는?
필자는 2002년 7월, KIN(지구촌동포청년연대)의 재일체험단에 참여, 일본사회, 특히 재일조선인 사회를 직접 체험할 기회를 가졌다. 변화하는 재일조선인의 삶과 역사적 현장, 일본사회 구석구석을 체험하고 그 체험을 바탕으로 한국사회에 재일조선인 현실을 공론화하기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그 체험 중 일부를 이 소중한 지면에 소개한다.
체험단이 만났던 일본의 저명한 시사평론가 신숙옥씨는, 일본의 한 르포작가의 조사를 인용하며, 98년 대포동 미사일 사건이 보도된 달에만 58명의 재일조선인 학생들이 일본인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지난 9·11 뉴욕에서의 테러사태가 TV에 소개되는 순간, 신숙옥씨는 거의 반사적으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문을 걸어 잠그고 당분간 외출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야스쿠니 신사도 방문했다. '야스쿠니'란 말은 본래 '편안한 나라', '평화의 나라'라는 의미이다. 체험단이 방문한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8만여 신사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전쟁과 군신의 신사다. 2차 대전 당시의 1급 전범자를 비롯하여, 전쟁에서의 전사자 246만명의 위폐가 보관되어 있는 이곳은 일본 우익의 상징이자 전쟁을 미화하기 위한 상징물이다. 입구에는 일본 육군의 창설자인 오무라의 동상이 있고, 아시아 주변국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 국가에서 관리하는 대신, 민간 종교재단이 운영한단다. 역대 일본 총리는 해마다 전쟁과 군신의 이 상징물 앞에서 향을 피우며 오랜 동안 묵념을 해왔다.
재일조선인 단체의 한 활동가는 "고발정신이 없는 일본사회, 공권력을 비판하는 세력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일본사회, 천황제를 필두로 역사적으로 우경화된 사회를 근본적으로 비판할 기능을 상실한 비정상적인 사회"로 일본을 표현하고 있었다.
일본 전역에 150여개 있는 것으로 알려진 민족학교 한 곳을 찾았다. "민족성을 지키는 교육과 일본에서의 생활을 함께 생각하면서 교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국적 아이들이 반 이상입니다. 민단 간부의 80% 이상도 민족학교 출신이지요..특수한 상황에 놓인 재일조선인이 일본에 정주하면서 민족성을 기르기 위한 어느 정도의 교육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학교의 모든 재정은 스스로 확보해야 하는데 납부금, 기부금, 행정보조금으로 운영하는데. 북의 교육원조비는 액수보다는 상징적이고 심정적인 의미입니다...역사나 지리를 가르칠 때 북만을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반도 전체를 가르칩니다. 현실은 조금 다르지만 아이들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모두 우리의 조국인데 둘로 나누며 가르칠 필요없지요...지금까지 우리가 중립을 유지했다면 학교는 유지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했고,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남쪽에서는 우리에게 알아서 살아가라고 했고, 북에서는 교육지원금을 보내왔습니다. 우린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통일이 되면 통일된 나라에 당당히 학교지원을 요구할 겁니다. 한국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고향이 울산인데..." 이 학교 교장선생님의 남긴 말이다.
5. 몇 가지 제언들
새롭게 출범하는 노무현 당선자 진영은 '동북아 중심국가론'을 말하고 있다. 새로이 민족공조니 민족자산이니 하는 말들도 부쩍 자주 사용되는 현실이고 보면 가능성도 엿보이는 시점이다. 좋다! 그러나 외형적 수사로만 그치지 말아야 하며, 수사보다 앞서야 할 것이 있다. 동북아지역의 재외동포들에 대한 의식과 정책, 법제도 정비가 그것이다. 과거 암울했던 식민의 역사, 냉전시기 남북대립, 군사정권 시기 형성된 안보 중심의 정책과 법제도를 유지한 채 '동북아 중심국가론'을 말하는 것은 허구다.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이제는 재외동포를 당당한 '준내국인'으로 우대하여야 한다. 이는 국내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아닌, 국가가 강제로 내몰았던 재외동포들의 '내국인에 준하는 권리'를 새롭게 되찾는 것에 불과하며, 전향적인 차별해소 정책이다. 시기를 놓치면 재외동포들과의 '역사적 간격'을 줄일 기회를 영영 놓치게 된다. 마지막으로 남·북, 그리고 노무현 신정부에 몇 가지 제언을 추가하며 글을 맺는다.
첫째, 재일조선인 사회의 분단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남과 북은, 시급히 남북장관급회담 혹은 남북적십자회담에서 '재일조선인정책'을 주요의제로 공동 설정하여 긴밀히 논의해야 한다. 특히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는 일본의 조선학교(민족학교)의 문제 혹은 재일조선인의 일본에서의 법적보호의 문제에 대해 하루라도 빨리 머리를 맞대야 한다.
둘째, 남과 북은 극심한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 행위, 일련의 테러 행위에 대해 공동 대응하여, 일본정부에 강력히 항의해야만 하며, 재일조선인 전체의 신변을 보호할 수 있는 근본적인 조치를 시급히 취해야만 한다. 총련이니 민단이니 가릴 것 없이 대다수 재일조선인은 서로 공통의 상처를 보듬고 어루만지기에도 벅찬 게 2003년 오늘의 현실이다.
셋째, 노무현 신정부는 과거 군사독재정권 시대의 안보적 시각을 근본적으로 버려야 한다. 이 땅에서나마 더 이상 재일조선인을 범죄인 취급 말아야 한다. 특히 통일된 반도의 국적을 꿈꾸며, 그 정체성을 유지한 채 수십 년간 차별받으면서도 남과 일본의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20만 조선적(朝鮮籍) 재일조선인의 자유로운 출입국을 전면적으로 보장하여야 한다. 이들의 고향 및 친지방문, 사업, 유학, 관광, 결혼, 민간교류, 민간투자를 보장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국가보안법, 재외동포법, 남북교류협력법, 여권법 등을 시급히 폐지하거나 개정하여 길고 길었던 '역사적 간격'을 좁히고, 공동의 상처들을 치유하는 데 적극 나서야 한다. 또한 구시대에 안주해왔던 정권안보기관 그리고 인사들도 주저없이 개혁의 수술대에 올려, 최초로 재일조선인들에게 사랑받고 존경받는 정권이 되기를 그려본다.
120만 재일조선인! 이 글을 읽는 당신을 비추는 거울이고, 당신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