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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02
#1 생고깃집 외경
-유리문에 붙은 종이에는 이렇게 씌여있다.
'금일 휴업. 우리집 넷쩨가 오늘 장가를 들었습니다.
축하해주실 분들은 오셔서 잔치 음식 드시고 가세요. 주인백'
종이 붙은 유리문이 열리고 또 한무리의 하객이 왁자하게 들어간다.
#2 생고깃집 안
-예식장의 친지들이 그대로 옮겨와 피로연중이다. 마시고 웃고 떠들고 음식 나르고,
일각에서는 노래방 기계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떠나가라 노래하고, 말 그대로 잔칫집이다.
그들을 훑으며 어느 방으로 다가가면.
#3 방
-조신한 품으로 앉아 힐끔힐끔 눈치 보는 연욱.
-나란히 앉은 4형제가 연욱을 보며 싱글벙글이다.
큰형(인자) : 이젠 한가족이 됐으니까 편하게 생각하고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 와.
와서 고기도 실컷 먹고.
연욱 : (얌전) 네...
셋째(무식) : 그리고 이젠 우리도 그냥 형부라고 불러. 우리도 처제라고 부를게. 그게 편하겠지?
연욱 : 네...
둘째(깐깐) : 고1이면 지금부터 공부 열심히 해야겠네. 처젠 뭘 전공할 생각이야?
연욱 : ... 아직...
셋째 : 형 또 불치병 나왔다. 이제 겨우 고1인데 왜 또 공부타령이야. 꼭 공부 못한 사람이 이런다니까?
처제, 공부 못해도 돼. 지금은 그냥 실컷 놀아.
둘째 : 실컷 놀다가 너처럼 숯불하고 씨름하라고?
셋째 : 숯불이 어때서. 고기맛은 숯불이 좌우하는 거 몰라? (큰형에게) 안그래 큰성?
큰형 : 두말하면 잔소리지. 셋째는 우리집의 프로메테우스야.
연욱 : (쿡- 했다가 얼른 수습하고)
막내(신세대) : 처제 남자친구 있어?
셋째 : (막내의 뒤통수를 갈기며) 니가 왜 처제야. 넌 사돈처녀라고 불러.
둘째 : 처제, 얘는 필승이 동생이니까 형부라고 부르지 마.
-다시 쿡-하는 연욱.
-형수 셋이 차례대로 음식쟁반 날라와 한 상 차리기 시작한다.
큰형수 : 당신, 나더러 왜 여동생 없냐고 타박이더니 소원 풀었수.
둘째형수 : 어머, 형님도 그랬어요? 이이도 그랬는데. 당신도 좋겠네, 이쁜 처제 생겨서?
셋째형수 : 난 내가 막 좋네. 나도 남동생만 셋이라 이런 이쁜 여동생 있으면 좋겠다 그랬거든요.
연욱이라 그랬지?
연욱 : 네.
셋째형수 : 우리도 그냥 언니라고 생각하고 언제든지 놀러와. 한번 올 때마다 용돈이 두둑할 걸?
형부들이 아주 이뻐죽네.
아버지 : (들어오며 술 취해 걸걸한 목소리로) 우리 애기 어딨어, 우리 애기.
어머니 : (따라들어오며) 초저녁부터 취해갖구 사돈처녀한테 흉잽히겠네. 아 목소리 좀 낮춰요.
-연욱, 아버지가 들어오자 얼른 일어나는데.
-코까지 붉어진 아버지, 연욱의 두 뺨을 덥석 쥔다.
아버지 : 하이고 요요 이쁜 것.
연욱 : (볼이 오그라든 채 당황, 창피)
-형수들, 어머? 눈 맞추며 쿡쿡 웃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쿵쿵 친다.
어머니 : 아유, 애기 놀래는 것 봐. 체신 좀 지켜요.
아버지 : 아 딸도 못낳는 에미가 어디서 큰소리야? 요런 딸네미 하나 나라 그랬더니
시커먼 것들만 줄줄이 다섯을 낳고.
어머니 : 에그 또 그 소리, 지겨워 증말.
아버지 : 불쌍한 것.
연욱 : ?...
아버지 : (연욱을 덥석 안으며) 조실부모하고 언니랑 둘이 얼마나 고단했을꼬.
연욱 : !!!...
-순간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벙-찌는 일동.
어머니 : (당황해 쿵쿵 치며) 주책이야 정말. 술을 마실려면 곱게나 마시지, 새삼스럽게 왜 이래요.
-연욱, 울컥하더니 흐느끼기 시작한다.
-연욱의 눈물에 일동 모두 휘둥그래진다.
-연욱, 눈물을 닦으면서 또 눈물을 흘린다.
-형수들은 울지말라며 연욱을 달래고, 어머니와 4형제는 왜 애를 울리느냐,
왜 그 얘길 꺼내고 그러느냐, 누가 아버지한테 술 먹였느냐, 얼마나 마셨느냐,
어머닌 왜 아버지를 감시 안했느냐 등등 중구난방으로 한마디씩 하며 아버지를 타박한다.
졸지에 중죄인이 된 아버지는 내가 뭘 어쨌다고? 항변하며 한바탕 법석인데.
연욱 : ... 고맙습니다.
-일동 모두 놀라 쳐다본다.
연욱 : (눈물 슥슥 닦으며 꾸벅꾸벅 인사)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왜 저러지?... 의아하게 바라보는 가족들.
#4 새 빌라 앞 (동 밤)
-뚜벅뚜벅 현관으로 향하는 연욱. 멈춰 돌아보면.
-생고깃집 마크가 새겨진 봉고차 앞에 나란히 선 4형제가 벙실벙실 웃고 있다.
연욱 : 그만 가세요.
큰형 : 어 처제 들어가는 거 보고. 들어가.
-4형제, 들어가라고 손짓한다. 마치 4인조 수중발레단의 손동작 같다.
-연욱, 웃으며 꾸벅 인사하고 들어간다.
-연욱이 현관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우르르 봉고차에 오르는 4형제. 운짱은 언제나 셋째다.
셋째 : 되게 귀엽지, 그치.
둘째 : 근데 너무 말랐다.
막내 : 마르긴? 저게 바로 21세기형 체형이라니까?
둘째 : 그래두 너무 말랐다. 형, 자주 데려다 고기 좀 먹여.
큰형 : 아무렴.
-봉고차가 떠난다.
막내 : (E) 근데 새 집에서 혼자 자면 외롭지 않을까?
#5 빌라 안
-연욱, 들어와 불을 켠다. 낯선 실내가 드러난다. 연욱, 주욱 둘러보고 안방으로 간다.
새 침대와 새 장롱, 화장대... 장롱으로 가 문을 열어보면
언니의 옷과 함께 남자의 옷이 나란히 걸려 있다. 그것도 낯설다.
연욱, 침대에 앉아 쿵쿵 해본다. 기분이 이상하다.
#6 연욱의 옥탑방
-들어오는 연욱. 이제 새생활이 시작될 새로운 방을 감회어린 눈으로 둘러보다가 침대에 드러눕는다.
쓸쓸한 기분이 드는지 베개를 꼬옥 끌어안는다.
연욱 : (피곤해 눈 꿈뻑꿈뻑하며)... 정말 결혼했네... 잘했네 뭐... 언니... 우린 행복하지?...
-스르르 눈을 감는 연욱.
-디졸브되면서...
-누군가 이불을 싹 빼간다. 이불을 둘둘 말고 자던 연욱(고3)이 한바퀴 구른다.
연욱 : (졸려죽겠는) 뭐야아... (그리고는 음냐 음냐 내쳐 잔다)
필승 : 처제, 지금이 몇신지 알어? 나중에 안깨웠다고 난리치지 말고 빨랑 일어나!
-연욱, 일어나기는커녕 방구만 뿌웅~
필승 : ! 골고루 해요 하여간에. (엉덩이를 철썩 치며) 니가 뿡뿡이냐? 이 자식은 어떻게 된 게
잠잘 때만 방구를 껴? (철썩철썩 치며) 안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연욱 : (눈 감은 채 벌떡 일어난다. 짜증이 꼭지까지 올랐다) 아이 씨 정말!
(어깨를 흔들며 졸음과 짜증이 섞인) 잠 좀 자게 내버려둬 조옴!
필승 : (어깨를 흔들며 똑같은 말투로) 나도 그러고 싶어어!
#7 옥상(겨울 새벽)
-아직도 눈을 못 뜨고 선 채로 꾸벅꾸벅하는 연욱. 그 얼굴에 휘익 날아와 맞는 샌드백.
샌드백 맞고 게슴츠레 눈을 뜨며 두리번거리는 연욱.
-글러브를 낀 필승, 샌드백을 연신 두드린다.
필승 : 고3이라고 공부만 하는 거 아냐. 체력관리를 해야지. 어서 때려봐.
연욱 : (낡은 글러브가 끼워져 있는 손을 보고는)... 아-씨... (하고는 다시 눈 감고 꾸벅)
필승 : (보고는 살짝 연욱을 친다)
연욱 : (눈 감은 채) 하지 마.
필승 : (또 치고)
연욱 : 하지 마아?
필승 : (또 한방 세게 치면)
연욱 : (열받아 눈뜨며 달려든다) 하지 말라 그랬잖아!
-필승, 도망가고 열받은 연욱은 마구 쫓아다니며 글러브를 휘두른다.
섀도우복싱 하듯이 하며 연욱의 펀치를 막아내는 필승. 결국은 어줍잖게나마 아침운동이 된다.
#8 거실 겸 주방 (동 아침)
-필승, 엉덩이를 싸쥐고 쩔쩔 맨다.
필승 : 연욱아, 아직 멀었어? (잠잠하자) 나, 나오는데...
연욱 : (타월로 머리 털며 나오는) 아침마다 이게 뭐냐? 전쟁도 아니구.
-후다닥 제치고 들어가 문 닫는 필승. 곧 이어 문 벌컥 열며.
필승 : 처제, 어렸을 때 까마귀 고기 삶아먹었어?
연욱 : (머리 털며) 까마귀 고길 어떻게 먹어, 개고기도 안먹는데.
필승 : (짜증) 근데 왜 소변 보고 물 내리는 걸 자꾸 까먹어?
연욱 : 까먹긴 뭘 까먹어, 물 아낄려 그러지. 우리 물부족국간 거 몰라?
필승 : 아낄께 따로 있지, 뜨거운 물은 펑펑 쓰면서 오줌 내리는 물이 아까워?
연욱 : 형부 싸고 내리면 되잖아. 그런다고 오줌이 금방 썩는데?
암모니아는 그냥 두면 물에 분해된다는 걸 아셔야지.
필승 : 말이나 못하면. 이리 와 봐.
연욱 : 왜.
필승 : (샴푸거품과 치약과 머리카락과 철벅한 물기로 지저분한 세면대와 바닥을 가리키며)
이게 뭐냐 처녀가. 너 여자 맞어? 얼른 닦어.
연욱 : 형부가 닦어.
필승 : 니가 어지른 걸 내가 왜 치워.
연욱 : 고3인데 좀 치워주면 안돼?
필승 : 고3이 유세야? 너 좋으라고 공부하지, 나 좋으라고 공부해?
연욱 : 으- 치사빤스. (들어가 샤워기를 틀어 바닥을 물로 씻어내린다)
필승 : (등짝을 짝! 후려치며) 이게 정말!
연욱 : 아!!! 왜 때려어!
필승 : (샤워기 뺏어 잠그고) 이러면 머리카락 때문에 하수구 막히잖아.
연욱 : 그럼 어쩌라구우!
필승 : 내가 몇 번을 말해. 머리카락은 얌전히 모아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세면대하고 바닥은
(화장실용 깨끗한 마른걸레를 디밀며) 이걸로 깨끗이 닦으라고 몇 년을 말했어.
너 내가 말할 때 안듣지?
연욱 : 뭐 이런 남자가 다 있냐? 형부 남자 맞어? 남자가 이렇게 깔끔 떨면 재수 없다는 걸 아셔야지.
필승 : 여자가 너처럼 더티해도 재수 없다는 걸 아셔야지. 얼릉 닦어. (손에 걸레 쥐어주고 나온다)
연욱 : (마지못해 닦으며 투덜투덜) 하여간 결혼은 겉만 보고 하면 안된다니까?
이건 완전 사기결혼이야.
필승 : 사기는 내가 당했지. 성격만 드러운 줄 알았지 이럴줄 누가 알았겠어.
연욱 : 근데 똥 마렵다며. 나오다가 들어갔어?
필승 : !... (후다닥 뛰어들어가 연욱을 집어던지듯 내쫓고 문을 닫는다)
연욱 : (황당) 나 참... (끄응, 뿌지직 소리가 들리자 온갖 상을 쓰며 손을 젓는다) 으~
#9 골목, 마을버스 정거장
-마을버스 기다리는 연욱.
-마을버스가 달려와 멈춘다. 올라타는 사람들.
-저 뒤에서 도시락 가방을 들고 '연욱아! 도시락!'을 부르짖으며 달려오는 필승.
-연욱, 못듣고 차에 오른다.
-애타게 부르며 달려오는 필승.
-떠나는 마을버스. 쫓아가며 쾅쾅 두드리는 필승.
필승 : 처제! 연욱아! 연욱아!
#10 마을버스 안
-문득 쳐다보고 기함하는 연욱.
연욱 : 뭐야아, 쪽 팔리게. (창을 연다)
필승 : (도시락가방을 간신히 차 안으로 던지며) 불고기 바닥에 깔았으니까 혼자 먹어야 돼?!
연욱 : (킥킥거리는 승객들의 웃음소리에 도시락가방으로 얼굴을 슬그머니 가리며) 60년대냐?
요즘은 스테이크도 싸오는구만...
#11 골목
-멀어져가는 마을버스.
필승 : (이게 무슨 짓인가 싶다)... 이눔의 기집애, 수능만 끝나면 죽음인 줄 알어.
(돌아서서 터덜터덜 가다가 그래도 걱정이 되 뒤돌아보며) 김칫국물 안흘렀나 모르겠네.
#12 빌라 안, 청소하는 필승
-거실에서 청소기 돌리는 필승. 왔다갔다 물걸레질도 하고. 세면대와 양변기도 박박 문질러 닦고.
-연욱의 방도 치운다. 책상을 치우고, 침대에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고, 시트와 베겟잇을 갈고,
이불을 좌악 펼치고, 침대 밑에서 빨래감을 꺼낸다. 속옷들이다.
-옥상. 필승의 빨래와 연욱의 빨래들이 널려있다. 연욱의 빤스 엉덩이에는 마시모로가 새겨져 있다.
#13 경찰서 마당(동 오전)
-필승, 통화하며 바쁘게 안으로 들어간다.
필승 : 힘들긴... 아냐 괜찮어, 나중에 우리 애기 나면 연욱인 애보기 시킬거니까.
#14 지방공항 청사
-유니폼을 입은 연정이 미영과 함께 게이트로 향하고 있다.
연정 : (웃는) 응, 오늘은 제주도가 마지막이거든. 내일은 첫비행만 마치면 끝이야.
응, 내일 저녁엔 내가 근사하게 차려줄게. 끊어. (핸드폰 닫는다)
미영 : 열혈남편에 열혈형부에 표창장 줘야 되는 거 아냐?
연정 : 힘들겠지?
미영 : 말이라고 해? 그러지 말고 너도 사무직으로 돌려. 내가 먼저 가서 터 닦아놓을게.
연정 : 수당이 적잖아. 연욱이 대학등록금도 마련해야 되고, 시집도 보내야 되고...
저가 원하면 유학도 보내야 되는데...
미영 : 동생 위하다간 남편 여럿 잡겠다. 하여튼 필승씨 진저리 내기전에 얼른 자리 잡아라.
아- 마지막 비행이라 그런가 몸이 찌뿌드하네.
연정 : (생각이 깊은)...
#15 강력반 사무실(동 오후)
-깔끔하긴 하지만 조폭 같이 생긴 강형사가 열중쉬어 자세로 서있다.
-필승과 형사들, 강형사를 탐문중이다.
김형사 : 어디서 뛰다 왔어?
강형사 : (씩씩하게) 서울청 특수기동대 70중대 소속이었습니다!
필승 : 허리케인?
강형사 : 네!
필승 : 어쩐지 등빨 좋다 했더니. 매매춘 단속 많이 했겠네?
강형사 : 네!
필승 : (강형사의 어깨를 툭툭 치며 유들유들 웃고 있는 형사들에게) 얘 증말 등빨 좋네.
인상으로 열몫은 하겠어. 검거 나갔다가 깍두기로 오해하고 우리끼리 싸우는 거 아냐?
(그렇게 주위를 흐트려놓고 강펀치)
강형사 : (등빨이 무색하게 억! 배를 안고 꺾어진다)
-형사들, 그러려니 웃는다.
김형사 : 저 한형사 성질 드러우니까 통과세 냈다고 생각해.
필승 : (선배답게) 강력반과 기동대는 남과북이야. 그만큼 하는 일이 비슷하면서도 다르단 얘기지.
기동대에서는 지휘 받으면서 수동적이었겠지만 여기선 달러.
직접 머리도 굴리고 발로도 뛰어야 돼, 알겠어?
강형사 : 네, 알겠습니다.
오반장 : (들어오며) 한형사, 호프집 강도는 어떻게 됐어?
필승 : 신원파악 됐습니다. 오늘부터 잠복 들어갑니다.
오반장 : 강형사 데리고 나가.
필승 : (빠릿하게 빠져나가며) 따라와.
강형사 : (민첩하게 따라나가는)
#16 서민 주택가(동 밤)
-B주택의 담장 안에서 담 너머로 A 다가구주택 대문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는 필승.
-C주택 안에서 A주택의 쪽문을 지키는 강형사.
-취객 하나가 비틀대며 걸어간다.
-덜덜 떨며 지키는 필승.
-새벽. 신문배달 스쿠터가 지나간다.
-길게 하품하는 필승. 졸리운 눈을 꿈뻑꿈뻑하고 머리도 한번 흔들고 계속 지킨다.
-아침. 출근하는 사람들, 등교하는 학생들이 오가는 골목.
-여전히 지키고 있는 필승. 문득 시계를 본다.
-필승, 쪽문을 지키는 강형사 자리로 다가온다.
필승 : 자리 바꾸자.
강형사 : 왜요.
필승 : 물 좀 빼고 오게. 대문 비우기가 그렇잖아.
강형사 : 다녀오세요, 얼마나 걸린다구.
필승 : (머뭇)... 좀 길어.
강형사 : (피식) 알았어요. (간다)
#17 거리(동 오전)
-뛰어오며 뭔가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필승. 찾았는지 그리로 뛰어든다.
-도시락 전문점에서 도시락봉지를 들고 나오는 필승. 다급히 택시를 잡아타고 간다.
#18 교실(동 오전)
-불어시간이다. 한 아이가 일어나 불어책을 읽고 있고
50대의 교양 있어 보이는 여선생은 책 펴든 채 창가에서 왔다갔다...
-연욱, 나름대로 열심히 책 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킥! 하는 소리.
-아이들, 하나 둘 복도쪽 창문을 힐끔거리며 킥킥댄다.
-연욱, 뭔데? 하는 눈빛으로 보면.
-창 너머로 도시락 봉지를 한껏 치켜올린 채 팔짝 뛰어 오르는 필승의 얼굴.
-연욱, 뭐야아 챙피하게! 짜증스런 표정이고.
-아이들의 술렁임을 느끼고 창을 돌아보는 선생님.
-그때 마침 팔짝 뛰어오르는 필승과 눈이 마주친다.
-아이들은 와르르 웃는데 연욱은 고개 푹 꺽는다.
선생님 : (못마땅한) 연욱아, 형부더러 선생님 면담 좀 하잔다 그래.
-연욱, 큰일 났다! 표정 일그러진다.
#19 상담실
-선생님과 마주앉아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필승.
선생님 : 다른 아이들은 다 진학상담이 끝나고 연욱이만 남았네요.
그동안 여러번 언니든 형부든 모셔오라 그랬는데 바쁘다고 하더군요.
필승 : (그런 일이 있었나? 힐끔 연욱 보면)
연욱 : (부은 채)...
필승 : (고개 조아리며 절절 맨다) 죄송합니다. 깡패새끼들, 아니 달건이, 아니 그게 아니구...
어쨌든 민생치안에 매달리다보니 미처 신경쓰지 못했습니다.
선생님 : 그런데 어쩌죠. 그러시는동안 연욱이 성적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각 대학의 학과와 예상점수가 기록된 기록표 한 장을 젖혀 옆에 두며)
이건 서울에 4년제 대학이니까 필요 없고 (다른 한 장도 젖히며) 서울에 있는 전문대니까
이것도 필요없고.
필승 : (기가 찬다)
선생님 : (마지막 한 장을 들이대며) 지방 전문댑니다. 잘 보세요. (볼펜을 맨 윗줄에 대고)
상위권은 그래도 취직율도 괜찮고 평가도 좋은 학교죠. (볼펜이 주루룩 밑으로 내려온다)
아, 여기네요. 여긴 가능할 것 같네요.
-보면, 볼펜은 기록표의 맨 하단에 멎어있다.
-필승,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필승 : 저기 그래두... 지금부터라도 졸라, 아니 열심히 공부하면 (하는데)
연욱 : 선생님, 저 실업반으로 옮겨주세요.
#20 상담실 복도
-상담실 문을 열고 나오는 선생님과 연욱과 필승. 필승, 선생님에게 굽신굽신 인사한다.
#21 교정 일각
-걸어오는 필승. 툴툴대며 따라오는 연욱. 각자의 이유로 둘 다 단단히 화가 나있다.
필승 : (멈춰 돌아보며) 너 왜 면담얘기 안했어.
연욱 : 면담하면 뭐가 달라져? 그리구! 내가 사람이라도 죽였어? 왜 죄인처럼 굽신거려?!
필승 : 선생님이니까.
연욱 : 선생님이면 다야? 우리 담탱이, 공부 못하는 애들은 인간으로도 안보는 사람이야.
필승 : 못하는 애들이 아니라 안하는 인간이겠지. 못하는 건 죄가 아니지만 안하는 건 죄거든.
너, 내가 흉악범들을 맨손으로 때려잡을 수 있는 게 뭐 때문인 줄 알어? 죽자사자 덤벼드니까.
니 놈을 기필코 잡겠다, 미련하고 끈질기게 달려드니까. 넌 그런 맘으로 공부해본 적 있어?
연욱 : (삐죽삐죽) ...
필승 : 너 정말 대학 안갈거야?
연욱 : (외면하며) 남이사.
필승 : (버럭) 남이사?!!!
연욱 : (뜨끔)
필승 : (화 가라앉히고 시계 보고, 엄중히) 이따 집에서 얘기하자. 야자 끝나면 곧바로 집에 가 있어.
연욱 : 오늘 야자 안해, 동사무소 가야 돼.
#22 동사무소(동 오후)
-뚜하게 부은 채로 카메라 앞에 앉아있는 연욱.
-직원이 컴퓨터를 조작하자 모니터에 연욱의 얼굴이 나온다.
상희 : 야, 웃어라 좀. 평생 남는건데 그게 뭐냐?
연욱 : 그럼 니 얼굴 붙여라?
상희 : 싫어. 니 주민등록증에 왜 내 얼굴을 붙이냐?
연욱 : 나두 싫어. (카메라를 보며 히- 웃는다)
상희 : 치약 선전 하냐? 그거 말구, 화알짝! (하며 활짝 표정 짓는다)
-연욱, 어설프게나마 활짝 표정 짓는다.
-모니터에 찍히는 연욱의 얼굴. 이도저도 아닌 이상한 표정이다.
-직원, 연욱의 다섯손가락 지장을 찍는다. 연욱, 묘한 기분으로 바라본다.
#23 동사무소 앞
-나오는 연욱과 상희.
상희 : 너 나 땜에 돈 굳은 줄 알어. 몇 달씩이나 늦게 왔다구 벌금 물어야 되는데 나 아니었어봐.
연욱 : (여전히 부은)
상희 : (표정 살피고는) 야아 너 아까부터 왜 그러는데에. 모의고사 성적 땜에 그래?
연욱 : 대학 안갈건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
상희 : 그럼 지난번엔 왜 그렇게 공부 했는데?
연욱 : 하는 척 한거지 그게 한 거냐? 에이, 차라리 여상이나 갈 걸, 그럼 취직이라도 하지.
상희 : 내 친구 여상 다니는데 거기도 그렇더라 뭐. 인물순으로 취직하니까 뼈 빠지게 공부해봤자
소용 없대. 그럴바엔 차라리 성적순으로 평가받는게 낫지.
연욱 : ... 공부 안돼, 인물 안돼, 집안 안돼... 도대체 난 왜 태어났을까?
상희 : 괜히 뜬구름 잡지 말고 지금부터 공부해. 공부해서 우리 전문대 가자.
요즘은 왠만한 4년제보다 취직도 잘 되잖아.
연욱 : 전문대는 누가 그냥 붙여준대?... 그리구... 언닌 내 학비 댄다구 허리띠 졸라매고 있단말야.
나 땜에 아기도 안갖구... 에이- 열아홉 청춘이 뭐 이러냐? (답답하다)
#24 주택가(동 오후)
-구석진 곳에서 필승과 강형사가 오반장한테 호되게 야단맞고 있다.
오반장 : 니들 형사 맞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용의자를 놓치다니 말이 돼?
(강형사의 배를 주먹으로 쿡쿡 치며) 넌 첫날부터 어떻게 된 거야, 어?
그 자식들 오늘도 어디 가서 설치다가 사람 죽으면, 니가 책임질 거야? 어?
필승 : (오반장의 주먹을 막으며 의기소침한) 강형산 잘못 없어요.
오반장 : 그럼 니 잘못이야?
필승 : 네...
오반장 : 네에? 너 요즘 왜 그래. 한동안 실적 좋더니 왜 요즘하는 일마다 개판이야?
필승 : (할 말 없다)...
오반장 : 내일까지 놈들 못잡으면 방범 옷으로 갈아입을 줄 알어! (간다)
필승 : (답답한 마음에 담배 하나 피워물고)...
강형사 : ... 한형사님 잠깐 비운 사이에 쪽문으로 나갔나봐요. 근데 어디 다녀오신 거예요?
필승 : ... (어깨 툭툭 치며) 미안하다. 교대하고 퇴근하자. (간다)
#25 빌라, 안방(동 저녁)
-필승, 옷 갈아입고 연정이 받아주다가.
연정 : 대학을 안가겠다구?
필승 : 응, 실업반으로 옮기고 싶대.
연정 : 얘가 정말! (하며 뛰어나가려는데)
필승 : (얼른 잡고) 흥분하지 말고 잘 달래. 다음주가 생일이라 더 예민해져 있을 거야.
연정 : ... 알았어.
필승 : (다시 덥석 안고) 전쟁 치르기 전에 좀 오래 안아보자. 이틀 안봤는데 꼭 한달은 안본 거 같다.
연정 : 많이 힘들었구나. (토닥토닥 며칠만의 회포를 푸는데)
연욱 : (문 벌컥 열며) 형부 들어왔어?
-연정과 필승, 얼른 떨어지며 무안해한다.
연욱 : (아랑곳없이 손에 든 속옷을 흔들며) 이거 형부가 빨았지.
필승 : 어? 어.
연욱 : 미쳐 증말. 누가 형부더러 속옷 빨아달래? 그리구 남의 방엔 왜 자꾸 들어가?
내 방에 손대지 말랬잖아. 왜 똑같은 말을 하게 해, 짜증 나게.
연정 : 연욱이 너 형부한테 그게 무슨 발버릇이니?
#26 거실 겸 주방
-식탁의자에 앉은 연정과 필승, 연욱.
연정 : (무섭다) 사람은 두 종류가 있어. 잘해주면 만만히 보고 기어오르는 사람,
아 좋은 사람이구나, 나도 잘해줘야지, 이런 사람. 넌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연욱 : (입이 쑥 나와 있다)
연정 : 너 요즘 하는 거 보면서 언니가 얼마나 실망했는 줄 알어? 형부가 니 친구야?
왜 그렇게 버릇이 없어? 형부한테 사과해.
필승 : 됐어 됐어. 수능이 얼마 안남아서 예민해져서 그래. 그렇지 처제?
연욱 : ... (마지못해) 미안해요 형부...
연정 : 그리고 너, 대학 안가겠다 그랬다며?
연욱 : 대학을 왜 가야되는데?
연정 : 왜 가냐구? (거침없이) 남들 다 가니까.
연욱 : (어이없는) 난 언니같은 그런 이데올로기에 염증이 나. 그래서 안가.
대학 안가고도 성공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연정 : 너, 남들하고 비슷하게 사는 게 얼마나 중요한 줄 알어? 남들 다 하는 거 안하는게
나중에 얼마나 큰 컴플렉스로 남는 줄 알어? 부모님도 없고 돈도 없고,
우리가 내세울 게 뭐가 있어. 거기다 대학도 안나오면 너 이 세상 어떻게 살려구.
(핑그르르 눈물 맺힌다) 우린 기를 쓰고 평균에 맞춰도 모자라는 사람들이야.
그런데 평균도 못맞추고 어떻게 살 건데.
필승 : (말리느라) 연정아.
연정 : 그래, 언니 속물이야. 그치만 현실이 그런 걸 어떡해. 너 사회에 나가서 무시 안당하고 살려면
대학 졸업장은 필수야. 손톱만큼이래도 너를 보호해줄 수 있는 무기라구. 그러니까 대학 가.
안그럼 언닌 너무 슬퍼. 내 동생이 무시받는 거 싫다구.
연욱 : (한풀 꺽인 채 필승을 힐긋 보고) 근데... 형부도 대학 안나왔잖아.
연정 : (아차, 당황) 그, 그건...
필승 : (단호히) 난 언니 뜻대로 했음 좋겠어. 처제가 나한테 버릇없이 구는 건 참아도
언니 맘 아프게 하는 건 싫어.
연욱 : (다 글렀다!)...
연정 : (필승에게 고마운 눈길을 짧게 보내고, 연욱에게 강경한) 대답해. 공부할 거지?
연욱 : (중얼중얼) 변해도 너무 변했다, 토끼가 호랑이가 됐네...
연정 : 너 언니 죽는 꼴 볼래?!
연욱 : 아 왜 소린 지르고 그래!
필승 : 아 정말! (벌떡 일어나며) 서연욱, 넌 내일부터 내가 접수한다.
#27 경찰서 정문(다음 날 오후)
-반항하는 연욱을 질질 끌다시피하며 데리고 들어가는 필승.
#28 경찰서내 독서실
-연욱의 어깨를 눌러 주질러앉히는 필승.
필승 : (낮게) 관내 불우학생들을 위해서 만든 거야. 다들 우등생들이니까 보고 배워.
-연욱이 둘러보면 또래의 고등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잘못 걸렸다, 연욱의 표정이 이지러진다.
#29 몽타쥬
*주택가
-각각 대문과 쪽문을 감시하는 필승과 강형사. 눈매들이 독수리처럼 날카롭다.
*독서실
-공부하다 짜증나는지 볼펜을 집어던지는 연욱. 주위를 휘- 둘러보고 조용히 가방을 챙겨 일어난다.
살금살금 걸어가 문을 살며시 여는데 앞에 떠억 버티고 있는 이형사.
포복자세 그대로 돌아서서 살금살금 자기자리로 가 앉는 연욱.
*주택가
-김형사와 필승,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교대한다.
*동사무소 안
-처음 발급된 주민등록증을 신기하게 보는 연욱.
*동사무소 앞
-주민등록증을 보며 나오는 연욱. 그 팔을 낚아채 끌고 가는 필승.
*독서실(오후)
-공부하는 연욱.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면 의자에 앉아 감시하고 있는 필승.
-연욱, 포기하고 공부한다.
*주택가(다른 날 오후)
-20대 청년이 대문을 나서는 순간 팔로 목을 옭죄며 낚아채는 필승.
*주택 반지하방
-벌컥 문이 열리고 필승을 위시해 강형사 김형사 이형사가 들이닥쳐 술판을 벌이고 있던 세 명을
순식간에 덮친다. 고성이 오가는 난장 속에서 깡다구 있게 생긴 한 놈이 벌떡 일어나며 빈 맥주병을
집어들고 휘두르려는데 필승이 번개처럼 발로 걷어차고 놈을 뒤집어 수갑을 채운다.
*독서실(동 밤)
-다른 학생들은 모두 돌아가고 텅 빈. 연욱은 꾸벅꾸벅 졸고 있다. 그 뒤의 필승도 졸고 있다.
둘은 같은 리듬으로 꾸벅... 꾸벅...
#30 연욱네 주방(밤)
-세식구가 모여앉아 식사중이다.
-연욱은 밥 먹는데만 열중해 있고 연정과 필승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다. 이윽고 연정이 총대를 멘다.
연정 : (조심스럽게) 생일선물 뭐 사줄까? 뭐 필요한 거 있음 말해.
연욱 : !... 없어.
필승 : 그러지말구 힌트 좀 주라.
연정 : 가죽장갑 사줄까?
연욱 : ... (중얼거리듯) 사람들 참 이상해. 해마다 돌아오는 생일을 뭐하러 챙기나 몰라. 귀찮지도 않나.
연정 : 그래두 생일인데...
연욱 : (숟가락 놓고 일어난다) 나 공부해야 돼. (올라간다)
연정 : (힘 빠진다)...
필승 : (같이 힘빠져 하다가 분위기 일신하듯) 짜식, 꼭 한숟갈씩 남겨요.
(연욱이 먹다 만 지저분한 밥을 가져와 먹는다)
#31 연욱 방(동 밤)
-공부하는 연욱. 갑자기 덜컥- 소리가 난다. 돌아보면.
-못이 하나 빠졌는지 액자가 삐뚤어진 채 덜렁거린다.
붉은 달 속에서 소녀가 흰 고양이를 머리에 이고 있는 그림이다.
-일어나 액자를 바로 하고 보는 연욱... 그러나 곧 손을 떼고 삐뚤어진 그대로 그림을 본다.
그게 더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창가로 간다. 무심히 커텐을 열다가 와!
-눈이 내린다.
-연욱, 창틀에 팔을 괴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연욱 : ... 엄마... 아빠... 또 생일이다?...
-F.O
#32 아이스링크장(F.I 오후)
-격렬히 벌어지는 경기.
-성준, 상대편을 제치고 센터라인을 넘어간다. 막아서는 수비진들.
성준이 과감하게 돌파하려는 순간 수비진의 태클이 들어오고 넘어지며 펜스에 가 쳐박히는 성준.
그 순간, 윽 왼쪽 발목을 움켜잡고 고통스러워하는 성준. 달려드는 팀원들.
재범 : 성준아!
-재범이 마스크를 벗으며 달려와 성준의 마스크를 벗긴다.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일그러진 성준의 표정.
#33 아이스링크장 밖(동)
-들것에 누워 119 구급차에 실리는 성준. 팀의 주무쯤되는 사람이 따라타고.
-떠나가는 구급차.
#34 병실(다른 날, 밤)
-환자복을 사복으로 갈아입는 성준.
-옆에서 짐 꾸리고 있던 재범, 힐끗 성준을 보더니.
재범 : 요즘 윤식이가 니 자리에서 뛴다.
성준 : (덤덤한) 알어.
재범 : ... 괜찮냐?
성준 : 뭐가.
재범 : (모른 척 하는 그 맘을 안다) 짜식 잘난체는... 난 안괜찮아.
중학교 때부터 너랑 짝이었는데 적응이 잘 안돼.
성준 : 난 놀만큼 놀았어. 안그래도 시들해져서 딴 거 없나 찾던 중인데 잘 됐지 뭐.
재범 : (툭 치며) 너 퇴원 축하해주나부다. (하며 창쪽을 턱짓)
-성준이 돌아보면 눈이 내리고 있다. 약간 절뚝거리며 창가로 가는 성준.
탐스럽게 쏟아지는 눈을 내다보는 눈빛이 씁쓸하다.
#35 빌라 전경(아침)
-눈사람 하나가 서있고 팔 대신 꽂은 나뭇가지에는 일전에 연욱이 끼었던 낡은 글러브가 끼워져 있다.
#36 주방 겸 거실
-식탁에 생일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고 케익이 한가운데 놓여있다.
-연욱, 선물꾸러미를 푼다. 와인색 가죽장갑이 나온다.
하지만 연욱의 표정은 굳어있고 연정과 필승은 조심조심 연욱의 눈치를 보는 중이다.
필승 : 내 것도 풀어봐야지.
연욱 : (풀어본다. 멋진 복싱글러브가 나온다)
필승 : (연욱의 한쪽 손에 끼워준다) 이젠 주민등록증도 나왔고 만 열여덟이 넘었으니까
어디 가서 술 마셔도 불법 아니고... 이젠 처제도 어른이야. 어른이 됐으니까 히딩크처럼 멋있게
세상을 향해 어퍼컷을 날리는 거야.
연욱 : ... 언니 왜 내 말 안들어? 나 생일 치르기 싫다 그랬지.
연정, 필승 : !...
연욱 : (일어나 손에 끼워진 글러브를 확 벗어던지며) 부모 잡아먹은 생일이 무슨 자랑이라고.
내 생일은 없어. 일년은 364일뿐이라구! (가방 들쳐매며 뛰쳐나간다)
연정 : 연욱아. (따라나가고)
필승 : (맥 빠져서는 케익을 손가락으로 쿡 찌른다)
#37 빌라 앞
-뛰어나오는 연욱. 가다가 멈칫 돌아서더니 다가와 눈사람을 발로 뻥 차고 간다.
눈사람의 머리가 떨어지고 글러브 한쪽도 빠진다.
#38 골목
-성큼성큼 오는 연욱. 저 뒤에서 숨차게 쫓아오는 연정. 간신히 붙잡고는.
연정 : 그래도 어떻게 생일을 안챙겨. 니가 안태어났음 언니 혼자 얼마나 외로워.
연욱 : ...
연정 : 일찍 들어와서 제사 지낼거지?
연욱 : ...
연정 : 너 없으면 엄마아빠가 서운해하시잖아. 일찍 들어와, 응?
-연욱, 언니의 손을 뿌리치고 간다.
-연정,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39 몽타쥬
-달리는 마을버스 안. 우두커니 앉아있는 연욱.
-필승, 떨어진 눈사람의 머리를 얹고 글러브도 끼어주는 등 재정비를 한다.
-거리를 정처없이 걷는 연욱.
-교실. 같이 도시락 까먹을려고 도시락 들고 온 상희는 연욱의 빈 자리를 보며 걱정스러워한다.
-거리 포장마차에서 떡볶이와 오뎅으로 점심을 때우는 연욱.
-연정, 전을 부치다가 문득 멈추고 한숨을 쉰다.
필승은 식탁에 앉아 밤을 치다가 연정의 한숨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극장 안. 코미디 영화를 보며 웃는 연욱. 마치 생각 없는 사람처럼 흐흐... 히히...
-네온이 휘황찬란한 거리를 쓸쓸하게 걷는 연욱.
자기 또래의 아이가 엄마아빠의 팔짱을 끼고 백화점으로 들어가는 걸 물끄러미 바라 본다.
-흑백. 엄마아빠의 손을잡고 깡충깡충 뛰며 백화점으로 들어가는 여덟살 연욱.
-흑백. 먼지를 뒤집어쓰고 울고 있는 연욱.
-KFC. 치킨을 맛없이 뜯어먹으며 울먹울먹하는 연욱.
-제사음식이 차려진 상. 연정과 필승, 제사상 앞에 앉아 연욱을 기다린다.
-마로니에 공원. 오들오들 떨며 벤취에 앉아있는 연욱. 그 앞에 달려와 멈추는 오토바이.
연욱이 쳐다보면 남자아이가 타라고 손짓한다. 외면하는 연욱.
-필승이 술을 쳐주고 연정이 향불 위에서 잔을 돌리고 난 뒤 절을 한다.
-거리. 오토바이 여러대가 거리를 폭주한다. 그 중의 한대에 탄 연욱.
바람에 머리카락이 차갑게 나부낀다.
#40 파출소 전경(동 밤)
-여러 대의 오토바이가 뒤죽박죽 섞여있다.
#41 파출소 안
-10여명의 폭주족들과 그들이 태웠던 여자아이들로 시끌벅적, 난리법석이다.
-벌컥 문이 열리고 연정과 필승이 뛰어들어온다. 필승이 순경에게 형사수첩 내보이자
순경이 짧게 거수경례를 하고 구석을 가리킨다.
-구석에 짱박혀 있는 연욱.
-다가오는 연정과 필승.
-연욱, 문득 그들을 보더니 차갑게 외면한다.
연정 : (눈물이 글썽하다)
연욱 : ...
연정 : (울며) 너 왜 이래... 지금까지 잘 견뎠잖아... 왜 갑자기 안하던 짓을 하고 그래 언니 속상하게...
니가 이럼 언닌 어떡해 응? 어떡하라구...
연욱 : (우는 언니를 힐긋 봤다가 냉소) 많이 울게 해달라 그랬더니 아주 울보를 만들어놨네.
그만 울어! 지겨워 죽겠어!
필승 : (버럭) 너 언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연욱 : (이죽거리는) 아저씬 참견하지 마. 아저씨가 뭔데. 아저씨가 아빠라도 돼? 우린 남남이야,
그러니까 제발 껴들지 말구 꺼지란 말야!!!
-순간 뺨을 올려붙이는 필승.
연욱 : (뺨 돌아간 채) !!!
연정 : (둘을 번갈아보며) !!!
필승 : (때린 손을 꽉 쥐며 낭패스러워하고)
연욱 : (독하게 이를 악무는)
#42 빌라 안(동 밤)
-현관문 열리자 연욱이 먼저 들어와 자기 방으로 올라가 쾅 문 닫는다.
-뒤이어 들어온 연정과 필승이 무겁게 바라본다.
#43 안방(동 밤)
-연정, 필승의 팔을 배고 누워있다.
필승 : 미안하다.
연정 : 아냐 잘 했어, 우린 가족이잖아. 당신이 안때렸음 내가 때렸을 거야.
필승 : (보듬어안고)
연정 :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건가?
필승 : 아냐, 넌 잘 하고 있어. 넌 니 역할에 충실한 거고,
연욱인... 연욱이도 뭔가 있을거야, 우리가 모르는...
연정 : (품으로 파고들고)
#44 연욱의 방(동 밤)
-침대에 걸터앉아 안에서 치받치는 신음소리를 죽어라 악문채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연욱.
-디졸브되면서.
-아침햇살이 비춰드는 방안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다.
삐뚤어진 액자... 다른 쪽에 걸린 권투 글러브.
-(E)기차소리.
#45 달리는 기차 안(아침)
-연결통로의 출입문에 기대어 물끄러미 창 밖 풍경을 내다보는 연욱.
#46 경주시 전경
#47 경주, 단독주택(성준의 집) 외경
#48 거실(동 아침)
-완고해 보이는 차회장, 양복 저고리만 입으면 출근할 수 있는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신문 보고 있다.
-방금 일어난 듯 츄리닝 차림에 부스스한 몰골로 2층에서 내려오는 성준(절뚝거림은 없어진).
어슬렁 어슬렁 걸어오며.
성준 : 안녕히 주무셨어요?
성준부 : (안보고, 무덤덤한) 그래.
-성준, 소파에 앉으며 리모콘으로 TV를 켠다. 여유롭다 못해 게으른 자태로 반쯤 눕듯이 하고
관심도 없는 아침프로를 본다.
-30대 후반의 단정하고 교양있어 보이는 화영이 찻쟁반을 가지고 온다.
화영 : 성준이 아침 먹어야지.
성준 : (시선은 TV에 둔 채) 예.
화영 : (아버지 앞에 조신하게 찻잔을 놓아주며) 재첩국 있는데 토스트 구워줄까, 밥 먹을래.
성준 : 밥 먹을게요.
화영 : 준비할게. (주방으로 가고)
-차회장은 여전히 신문 보며 차를 마시고 성준은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무덤덤한 부자의 분위기.
성준부 : (신문에 눈길 둔 채) 이젠 공부해야지.
성준 : (역시 TV에 눈길 둔 채) 생각중이에요.
성준부 : 그만큼 놀았으면 젊어서 놀 건 다 논 셈이다. 슬슬 준비해라.
성준 : 난 호텔 재미없는데... 공부 마쳐도 아버지 밑엔 안들어가요. 사람 필요하면 형 부르세요.
MBA도 땄겠다, 준비된 경영자잖아요.
성준부 : (신문 접으며) 건방진 자식. 언제까지 건방 떠나 두고보자. (안방으로)
성준 : (일어나며 뒤에다 대고) 아버지 그래서 저 좋아하는 거잖아요. (주방으로)
#49 주방 겸 식당
-요리하는 주방과 식탁이 놓인 식당이 구분되어 있는.
-식탁에 2인분의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화영. 저쪽 주방에는 가정부 보이고.
-들어와 식탁에 앉으며.
성준 : 아직 아침 안드셨어요?
화영 : 응, 간만에 내려왔는데 혼자 먹긴 그렇잖아. 같이 먹을려구 기다렸어.
성준 : 노력파시네. (하다가 굳은 표정을 보고는) 아녜요, 비꼬는 거. ... 정말이라니까요?
화영 : (앉으며) 먹자. (밥 먹는)
성준 : (한숟갈 떠먹고는) 근데, 원래 잘 안웃으세요?
화영 : (보며) ?...
성준 : 원래 그러시는 건지, 아님 제가 불편해서 그러시는 건지 몰라서요.
화영 : 내가... 웃는 게 좋아?
성준 : 웃으시면 더 이쁠 것 같아서요. 그럼 아버지도 더 좋아하실 거구.
화영 : (미소 띄려 노력하는)
성준 : (웃으며) 진짜 노력파시네. (밥 떠먹으며 무심한 듯이) 우리 아버지, 어머니 돌아가시고
십년 넘게 꽤나 심심하셨을 거예요. 전 신경 쓰지 마시구 아버지하고만 행복하세요.
대신 어머니 소린 기대하지 마시구요.
화영 : ... 고마워, 솔직하게 말해줘서.
성준 : (열심히 밥만 떠먹는)
#50 경주역사 앞(동 오전)
-우르르 역사를 빠져나오는 사람들. 그 중에 섞인 연욱, 광장으로 걸어나와 주위를 둘러본다.
참 막막한데... 남자 하나가 연욱을 지나치다 툭 부딪힌다.
연욱, 흘기기도 귀찮은 듯 무심히 보다가 걸어간다.
#51 버스정거장
-버스가 와 멈추고 문이 열린다.
연욱 : 이거 첨성대 가요?
기사 : 어 타라.
-연욱, 버스에 올라 가방을 열어 지갑을 찾는다. 그런데 없다. 연욱, 어어? 하며 뒤지지만
곧 예리한 칼로 절단난 구멍으로 손이 나올뿐이다.
#52 버스정거장
-축 쳐진 채 앉아있는 연욱.
-(플래쉬)아까 툭 부딪히던 남자.
연욱 : 나쁜 자식... 우리 형부한테 걸리기만 해봐라. (꼬르륵 소리가 나자 배를 움켜쥔다)
#53 학교 앞 일각(동 오후)
-상희를 세워놓고 물어보는 연정과 필승.
연정 : (많이 울은 듯 눈가가 붉은) 핸드폰 계속 켜놓고 있었어?
상희 : 네.
연정 : 얜 핸드폰도 꺼놓고 안받는다... 혹시 어디 갔는지 짐작가는데 없니?
상희 : ... 아직... 더 생각해볼게요.
필승 : (짐짓 무섭게 으름장) 너 거짓말하면 거짓말탐지기로 조사하는 수도 있어?
진짜 아무 연락 없었어?
상희 : (겁먹고) 네.
필승 : 너 수업 끝나고 경찰서로 와.
상희 : ! 형부, 저 거짓말 안해요. 정말 연락 안왔어요.
필승 : 앞으론 올 거잖아.
#54 강력반 사무실
-구석 소파에 지친 연정과 겁먹은 상희가 나란히 앉아 있다.
-필승은 책상에서 통화중이다.
필승 : 이름 서연욱. 키는 한 165쯤 되구 마른 편입니다. 옷은 xx색 스웨터에 xx색 xx바지,
겉엔 xxx 입구요. 어깨에 매는 학생용 xx색 가방. 네,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끊고)
김형사 : 만화방이나 극장 같은데 쏘다니다가 저녁에 들어오는 거 아냐?
필승 : 자존심 때문에 들어오고 싶어도 못들어올 거예요.
강형사 : 서울에 있겠어요? 애들 가출하면 가능하면 먼데로 가잖아요.
김형사 : 난 목포로 갔었는데, 넌 어디로 갔었냐.
강형사 : 부산이요.
이형사 : 난 속초.
김형사 : 공통점이 있네. 바다가 있는 도시.
오반장 : (들어오며) 처젠 어떻게 됐어.
필승 :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오반장 : (책상에 앉으며) 괘씸한 녀석. 찾으면 나한테 보내, 군기가 바짝 나도록 혼내줄테니까.
#55 경주시내 허름한 만두집 앞(동 오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찜통. 뚜껑 열리자 김이 화악~
-연욱, 주인이 만두를 접시에 담는 걸 보며 침을 꿀- 꺽 삼킨다.
-주인, 힐긋 연욱을 보는 바람에 하나를 떨어뜨린다.
-(슬로우로) 낙하하는 만두.
-떨어지는 만두를 보며 연욱의 허기진 두 눈이 슬로우로 커지는가 싶더니
슬로우로 얼른 두 손을 뻗친다.
-그러나 손을 비켜가 땅에 떨어져 속이 터지는 만두.
-연욱, 아까워죽겠는데.
주인 : 야.
연욱 : (기대감에 눈이 반짝) 네?
주인 : 가. (들어간다)
연욱 : (시무룩해서 땅에 떨어진 만두를 보며)... 속 터졌네...
#56 경주시내 공원
-음수대에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연욱. 빈 속에 찬물을 들이붓자 오한이 인다.
부르르 떨며 몸을 감싸다가 고개 들면 호텔이 보인다.
#57 호텔 로비
-얼은 몸을 부비며 커피숍 입구에 진열된 케익을 바라보고 있는 연욱. 너무 먹고 싶다...
-저쪽에서 수상쩍다는 듯 쳐다보는 보안요원.
-연욱, 푹 고개 떨군 채 진열장 앞을 벗어나 소파로 가 앉는다.
-다가오는 보안요원.
요원 : 너 학생이야?
연욱 : (보고)... 네.
요원 : 학생이 집에 안가고 뭐하고 있어.
연욱 : 추워서 그래요, 잠깐만 있다 갈 거예요.
요원 : (의심스런)...
연욱 : 좀만 있다 간다구요. 여기 있는 것도 돈 내야 돼요?
요원 : 너 손님 꼬실려 그러지?
연욱 : 에?
요원 : (일으켜 내쫓는다) 가. 머리에 피도 안마른게 어디서 수작이야?
연욱 : (떠밀리며) 꼬시긴 뭘 꼬셔요. 좀 있다 간다는데.
요원 : 이게 가라면 갈 것이지. 너같은 기집애들한테 한두번 속아본 줄 알어? 가 이자식아!
연욱 : (확 뿌리치며) 아이 씨 놔아! 아저씨가 뭔데 가라마라야? 아저씨가 여기 전세냈어?
#58 커피숍
-성준, 오랜 친구인 듯한 또래의 남자와 편하게 잡담나누고 있다가 고성이 나는 곳을 쳐다본다.
-저쪽에서 쫓아내려는 요원과 반항하는 연욱이 보인다.
연욱 : (E) 놔요 조옴! 얼어죽으면 아저씨가 책임질 거야? 놔!
-무심히 넘기고 고개 돌리던 성준 어! 해서는 다시 쳐다본다.
#59 로비
-연욱, 보안요원의 손을 확 뿌리친다.
연욱 : 놔! 나가면 될 거 아냐? (현관으로 가며 떠나갈 듯 큰소리로) 정말 드럽고 치사해서.
있는 놈들만 호텔 드나들라는 법 있어? 없는 놈 잠깐 쉬게 해주면 건물이 무너지기라도 한대?
내일아침 신문 잘 봐, 불쌍한 여고생 얼어죽게 했다고 날 거니까!
그러고도 장사가 되면 내가 강시가 되서라도 방방마다 (돌아서며 감자를 먹이는) 나타날 거다.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멈칫!)
-어느새 쫓아와 바로 앞에서 미소 짓고 있는 성준.
성준 : 또 오랜만이네?
연욱 : (누구지?) ?...
성준 : (빙긋) 오랜만 아닌가?
연욱 : (기억이 가물가물)... 갑옷?...
성준 : 와- 우리 인연 깊다, 여기서 다 만나구.
#60 아까 그 만두집
-빈 접시가 세 개. 연욱은 네 접시째 만두를 (손으로) 미어터져라 먹고 있다.
목이 막히자 켁켁거리며 가슴을 치면 성준이 물컵을 앞에 놓아준다. 얼른 물을 마시는 연욱.
성준 : (미소)... 나도 하나 먹어도 돼?
연욱 : (아까워하며 하나를 망설이듯 건넨다)
성준 : (받아서 먹지는 않고 빙그레)... 우리 2년만인 거 아니?
연욱 : 2년밖에 안됐어요?
성준 : 글쎄, 난 2년씩이나 된 거 같은데... 근데 참 이상하지? 왜 넌 항상 이상한 상황에서만 만나질까?
첨엔 파출소, 담엔 경찰서 유치장, 그리고 이번엔 호텔... 너 가출했지?
연욱 : (입이 쑥 나온다)
성준 : (웃으며) 근데 나 아직 니 이름도 모른다?
연욱 : ... 연욱이요, 서연욱.
성준 : 서연욱?... 이름 좋네?... 내 이름은 기억하니?
연욱 : (생각하다가) 차씨 아저씨요.
-성준, 피식 웃고는 만두를 입에 넣고 씹으며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미소 띈 채 바라본다.
-연욱, 민망해 고개를 외로 틀며 오물오물 만두를 먹는다.
#61 객실(이하 저녁, 밤)
-처음 들어와보는 호텔실내를 신기한 듯 둘러보며 이것저것 열어보고 만져보고 하는 연욱.
마지막으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뒹굴뒹굴하다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켠다.
#62 강력반 사무실
-필승 책상에 외따로 놓인 상희의 핸드폰이 울린다.
-우르르 모여드는 사람들. 마치 강력사건의 수사본부진 같다.
-핸드폰에 뜨는 발신자, 연욱이다!
-발신자표시를 보고 잔뜩 긴장하는 연정. 놀라는 상희.
-역시 긴장해 눈 맞추는 필승과 형사들. 마치 유괴범의 전화를 기다리는 형사들 같다.
필승 : (핸드폰 집어들고 상희에게) 침착해야 돼. 절대 눈치 채이면 안돼.
상희 : (긴장) 네.
필승 : (열어서 건넨다)
상희 : ... 연욱..이니?
#63 객실 & 강력반 사무실
연욱 : (뒹굴뒹굴하며) 여기 어디게?
상희 : (F) 어딘데?
연욱 : 호텔.
상희 : (놀란) 호텔???
-그 소리에 다들 놀라는 일동.
연욱 : 근데 상희야, 우리 언니랑 형부 너한테 안왔다갔어?
상희 : 왔다갔지. 느이 언니 막 울고불고 난리났어.
연욱 : (시무룩해져 일어나 앉는다)
상희 : 근데 너 정말 못됐다. 어쩜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그러냐? 나 니 친구 맞냐?
연욱 : 미안... 우리 언니 많이 울었어?
상희 : 그러엄, 형부도 얼마나 속상해하시는데. 근데 어디야? 내가 갈까?
연욱 : 안돼, 너무 멀어.
상희 : 어딘데?
연욱 : 경주.
상희 : 경주?!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 일동.
-연정은 입안이 바짝바짝 타고.
-필승은 종이에 무슨 호텔? 이라는 말을 갈겨써 상희에게 보여준다.
상희 : (보고, 영리하게) 경주 무슨 호텔인데?
연욱 : 아레난가?
상희 : 아레나?
연욱 : (근처에 있는 메모판 따위를 집어들고 호텔마크 확인하는) 응, 아레나호텔.
상희 : (필승이 써준 몇호?라는 글귀를 보고) 아레나호텔 몇호?
연욱 : 몇혼지는 몰라. 누가 데려와서 그냥 따라왔어.
상희 : ? 누가? 누가 데려갔는데? 남자야?
#64 객실
연욱 : 응, 말하자면 길구, 나중에 올라가서 얘기할게. (그때 문이 열리고 성준이 들어오자)
어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언니한테 말하면 안돼, 알았지? (얼른 끊는다)
#65 강력반 사무실
상희 : (안절부절) 어떡해요, 어떤 남자가 호텔에 데려갔대요.
-연정, 하얗게 질린 얼굴로 벌써 겉옷을 들고 나가며.
연정 : 필승씨, 얼른 가자.
필승 : (잡는다) 당신은 여기 있어.
연정 : ? (보는)
필승 : 나랑 강형사만 가는 게 좋겠어. 그게 기동력도 있고, 당신 지금 얼굴이 허얘, 쓰러질 것 같아.
연정 : (가려하며) 아냐, 괜찮아. 얼른 가자.
필승 : (붙잡아 터프하게 의자에 앉히며) 이형사, 우리 와이프랑 상희 집에 데려다 주고
경주경찰서에 협조공문 보내.
이형사 : ? 거기 경찰까지 동원하는 건 좀 그렇잖아요?
필승 : 내가 수습할게 보내.
이형사 : 그래도 그건. (하는데)
오반장 : (E) 내가 책임질게 보내.
-모두 돌아본다.
오반장 : (책상에 앉아 일 보며 무심한 듯이) 그새 무슨 일 벌어지면 어떡해, 처제 일생이 망가지는데.
한형사랑 강형산 빨리 가고, 이형산 협조공문 보내.
-필승, 오반장에게 슬쩍 신뢰의 미소를 보내고 걱정 말라는 듯 연정의 어깨를 한번 짚어주고
강형사에게 눈짓하며 부리나케 나간다. 뒤따라 나가는 강형사.
-걱정스레 쳐다보는 연정.
#66 객실
-째진 가방을 꿰매온 성준, 가방을 연욱에게 내민다.
성준 : 구두수선하는 데서 고쳐서 튼튼할 거야.
연욱 : 고마워요. 근데 아이스하키 선수는 겨울에 바쁘지 않나? 경기 없어요?
성준 : 경기?... 좀 다쳐서.
연욱 : ? 많이 다쳤어요?
성준 : 많이 다쳤지. (좀 씁쓸한) 이젠 운동하지 말래네?
연욱 : (불쌍해져서는) 그래서 속상하구나아.
성준 : 속상하기 보단 시원섭섭하지. (조금은 허탈하게) 넌 그 기분 모를거야.
차가운 아이스링크 위에서 땀 흘리는 기분... 몸은 뜨겁고, 공기는 차갑고...
(다시 밝게) 어쨌든 있는 돈으로 그냥 흥청망청 살까 아님 공불 시작해볼까 생각중이야.
근데 넌 왜 하필이면 경주에 왔니?
연욱 : ... 첨성대 갈려구요.
성준 : 첨성대는 왜? 거긴 수학여행 때 가지 않나?
연욱 : 작년에 오긴 왔었는데 무슨 벌떼두 아니구 우르르 왔다갔다하는 바람에 제대로 못봤거든요.
성준 : 제대로 보면 뭐가 다른가?
연욱 : 옛날엔 거기서 별을 봤다면서요. 별 보면서 생각할게 있어요.
성준 : 무슨 생각?
연욱 : ... (사뭇 진지한) 왜 신은 나를 지구로 보냈을까...
성준 : (피식)... 그럼 우리 첨성대 갈까?
#67 첨성대(동 밤)
-별이 반짝이는 겨울의 밤하늘...
-카메라가 첨성대의 곡선을 타고 내려오다보면...
첨성대 바로 앞 잔디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연욱과 성준.
연욱 : (뺨이 발갛다)...
성준 : ... 답이 나왔어? 신이 왜 너를 지구로 보냈는지?
연욱 : 내가 유치원생이에요? 그딴 생각이나 하게? 아저씬 놀 건지, 공부할 건지 결정했어요?
성준 : 아니.
연욱 : 공부해요.
성준 : ? 왜?
연욱 : 아니 뭐... 공부할 능력이 되는데도 안하는 건 죄거든요.
성준 : 그래? 근데 공부해서 뭘 하지?
연욱 : 뭐 하긴요, 부자라면서요. 부자니까 좋은 데 취직을 하든가 사업을 하든가 해서 돈도 많이 벌구
좋은 일도 많이 하구 그러는거죠.
성준 : 근데... 난 제대로 공불 해본 적이 없거든? 대학도 체육특기자로 들어가고.
연욱 : 그럼...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누가 그러는데요, 죽자사자 달려드는 사람한텐 당해낼 재간이
없대요. 그러니까 죽자사자 공부해보세요.
성준 : 누가 그랬는데?
연욱 : (눈을 꿈뻑꿈뻑하다가) 형부요.
성준 : ! 아, 그 경찰형부? 형분 잘 계시구?
연욱 : (시무룩) 잘 계시든 말든...
#68 고속도로
-질주해오는 필승의 차.
#69 달리는 성준의 차 안
성준 : 아주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그 날 유치장에서 왜 그렇게 울었니?
연욱 : ...
성준 : 그렇게 섦게 우는 사람, 처음 봤거든.
연욱 : ... 아주 무서운 걸 봤어요, 어렸을 때...
성준 : 근데 그게 그렇게 섦게 울 일이었어?
연욱 : ...
#70 객실
-피곤해 침대에 대자로 눕는 연욱.
성준 : (서서, 기막힌) 넌 여자애가 겁도 없니? 어떻게 남자 있는데 벌렁벌렁 누울수가 있어?
연욱 : (그러거나 말거나) 여기서 잘 거 아니죠?
성준 : 순서가 뒤바뀐 거 아냐? 실컷 놀다가 이제야 물어보면 어떡해. 무슨 일 생겨도 내 책임 아니다?
연욱 : (벌떡 일어나며) 이거 순 사기꾼 아냐?!
성준 : (빙긋) 왜. 이제 겁 나?
연욱 : (아니구나, 머쓱)...
성준 : 난 집에 가서 잘 거니까 배고프면 아무거나 시켜먹어. (겉옷을 챙겨입는다)
연욱 : 아저씬 이 호텔 가진 것만큼 부자예요?
성준 : (피식 웃는다) 글쎄... 하여튼 난 아냐, 아버지가 부자지. 근데 너랑 나랑 세살 차이 밖에 안나는데
아저씬 좀 그렇다. 오빠라고 불러.
연욱 : 싫어요, 오빠하다가 아빠되면 어떡해요.
성준 : 하하하! (요절복통할만큼 웃는다)
연욱 : (그게 그렇게 웃을 일인가싶어 멀뚱멀뚱 보는)
성준 : 아빠되면 어때. 나처럼 잘 생기고 돈 많은 남편도 괜찮지 않나?
연욱 : 잘 생기고 돈 많으면 바람 밖에 더 펴요?
성준 : 하하... 잘 생기고 돈은 많은데 바람은 안피면?
연욱 : 겉만 보고 어떻게 알아요. 우리 형부도 겉은 디따 지저분한데 얼마나 깔끔떠는지 몰라요.
성준 : 말끝마다 형부, 형부... 나 간다. (돌아서는데)
연욱 : (얼른) 나 돈 좀 빌려줘요.
성준 : (멈칫 돌아보면)
연욱 : 내일도 여기서 신세 질 순 없잖아요. 그리구... 물에서 건져줬으면 보따리도 줘야지...
성준 : (어이없어하는)
#71 호텔 현관 앞
-필승의 차가 달려와 멈춘다. 차에서 내려 뛰어들어가는 필승과 강형사.
#72 로비
-형사수첩 내보이는 필승.
필승 : xx경찰서 강력반 한필승 형삽니다.
-두 명의 경주경찰서 형사와 프런트 직원이 모여있다.
형사1 : 여고생이던데 혐의가 뭐예요?
필승 : (급하다. 거두절미하고) 몇호실인지 알아냈습니까?
형사2 : 알긴 했습니다만 그게... 그 방을 얻은 사람이 이 호텔 오너 아들이라네요?
필승 : ? 오너 아들이라뇨.
프런트 : 말 그대롭니다. 저희 호텔 회장님의 자제분이 그 여고생에게 방을 얻어줬습니다.
필승 : !!! 이 개쉬끼!!! 돈으로 사람을 농간해?!!!
#73 객실
-지갑에서 만원짜리 몇장을 꺼내 내미는 성준.
연욱 : (안받고) 에게, 겨우 고거?
성준 : 이거면 내일까지 버틸 수 있어.
연욱 : 내일까지 있을지 모레까지 있을지 모르잖아요. 아님 아예 안가든가. 더 없어요?
성준 : (하 기집애, 눈총 줬다가 등을 돌려 돈을 뺀다음 돌아서며 십만원짜리 수표를 꺼낸다)
연욱 : (좋아서) 봐, 있으면서. (얼른 받는데)
-바로 그 순간 쾅! 문이 열리는 소리.
-놀란 두 사람이 쳐다보면.
-무섭게 들이닥치는 필승!
-필승, 돈을 쥐고 있는 연욱을 보자 눈에 불이 인다!!!
이 개쉬끼! 비명처럼 내지르며 달려들어 성준의 멱살을 잡아채 있는 힘껏 일격을 가한다. 스톱.
-악- 비명 지르는 연욱(돈은 허공에 흩뿌려지면서). 스톱.
-나가떨어지는 성준. 스톱.
-필승, 성준을 일으켜 다시 때리려 주먹 쳐드는데 '하지마' 외치며 달려들어 필승의 허리에 엉기는 연욱.
스톱.
-반항하다가 강형사에게 팔이 꺾여 수갑 채워지는 성준. 스톱.
-연욱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는 필승. 스톱.
#74 호텔 로비
-수갑으로 연결된 채 끌려나오는 연욱.
연욱 : 아프잖아아! 빨리 안풀어?
필승 : (화가 나 거칠게 앞서가고)
연욱 : 내가 무슨 범죄자야? 이게 뭐냐?
필승 : (멈칫, 돌아보며) 너 돈 받고 뭐할려 그랬어. 너 쓰레기야? (버럭) 왜 몸을 함부려 굴려!
연욱 : (돈? 쓰레기? 기가 차 하다가 삐딱하게) 남이사 돈을 받든 말든, 함부러 굴러다니든 말든.
당신이 무슨 상관인데? 아저씨 나 알아? 나 아저씨 몰라.
필승 : !!!... (분노가 머리 끝까지 올랐다) 그래 우린 남남이야. 나 너 몰라. 근데 넌 윤락미수 범죄자고
난 형사야. 그리구 나, 너같은 녀석 법에다 안맡겨. 내 방식대로 해. (끌고 나간다)
#75 거실
-전화벨 울리자 얼른 받는 연정.
연정 : 여보세요? 당신이야?
강형사 : (F) 저 강형삽니다 형수님.
연정 : !... 네... 어떻게 됐어요?
#76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
강형사 : 체포했습니다. 근데... (말하기 곤란한) 필승이형이 따로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
저 혼자 올라가는 중입니다. 막차 타고 올라올 거 같습니다.
#77 거실
연정 : 네에...
강형사 : (F) 새벽에나 도착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구 주무세요.
연정 : 네... 알았어요. 수고했어요. (전화끊고 가만 생각하다가 식탁 위에 걸어둔 사진으로 시선이 간다)
-군복 입은 아버지와 단정한 어머니, 중3 연정(16), 초등학교 1학년 연욱(8)이 다정하게 찍은 사진.
연정 : (부모에게 고하듯) 연욱이가 다 컸다구 말을 안듣네... (씁쓸한)
#78 감포 바닷가(동 새벽)
-짙은 어둠 속, 겨울의 밤바다 위로 등대의 불빛 하나가 흘러간다.
-반항하는 연욱을 질질 끌고 오는 필승(수갑 풀은).
연욱 : 놔! 이거 안놔?! 니가 뭔데 이래!
필승 : (멈추더니 겉옷을 벗어 집어던진다)
연욱 : (이건 뭐하는 짓이야? 좀 놀라지만 아닌 척 하고)...
필승 : 차라리 같이 죽자.
연욱 : (흠칫 하는 순간 끌려가는)
필승 : (방파제 끝으로 끌고 가며) 이날 이때까지 친동생이라고 착각한 나도 쓸개빠진 녀석이고,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설치는 너도 한심한 인생이고. 살아 뭐햐냐, 같이 죽자.
연욱 : 놔! 난 안죽어! 내가 왜 죽어! 죽을려면 너나 죽어!
필승 : 너 같은 인간은 살 필요 없어. 살아봤자 인간말종 밖에 안돼.
연욱 : (안끌려가려 주저앉으면서도 끌려가고) 놔! 안놔! 이거놔!
필승 : (분노로 아랑곳없이 끌고가고)
연욱 : 놔! 죽어도 나 혼자 죽어! 왜 내가 너랑 죽어!
-필승, 연욱을 간신히 끌어다 끝에 세운다.
-방파제 밑으로 넘실대는 파도.
-연욱,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난다.
필승 : 죽어봐 한번! 너 죽는다고 울 사람 있을 거 같애! 느이 언니 하나밖에 없어!
연욱 : (언니 소리에 정신이 드는 듯)
필승 : 느이 언니가 널 어떻게 키웠는 지 알어? 부모가 자식 키우는 거랑 언니가 동생 키우는 게
같은 줄 알어? 너 잘나 너 혼자 큰 줄 알지? 겨우 열여섯에 어린 동생 키워서 여기까지 온다는 게
말처럼 쉬운 줄 알어? 연애할 때 그러더라. 부모님 따라 너랑 같이 죽어버릴까 생각한 적 많다구.
왜? 너무 힘들어서, 너무 외로워서. 근데 니가 이럴 수 있어? 언니한테 이래도 되는 거야?!
연욱 : !... (눈물 날 것 같지만 오기로 참고)
필승 : 죽든 말든 맘대로 해! 몸을 함부로 굴리든 말든 맘대로 해봐! 대신 그렇게 살 거면
언니 눈 앞에 얼씬도 하지 마! 다시 한번 언니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내가 가만히 안둘줄 알어!
(가버린다)
연욱 : !... (보는)
-벗어던진 옷을 주워들고 성큼성큼 가는 필승.
-바라보는 연욱. 서럽고 외로운 마음에 울컥...
연욱 : ... 바보... 등신...
-분노로 입 꾹 다물고 걸어오는 필승. 그 뒤로 보이는 연욱.
연욱 : ... (소리치는) 언니만 힘들었는 줄 알어? 나도 힘들어 죽겠어!
-필승, 아랑곳없이 걸어오는데.
연욱 : 나 땜에 언니 힘들면 누군 좋은 줄 아냐구.
언니 혼자 편하게 살라구 죽을 생각까지 했었단말야 바보야. (울음 터진다)
-필승, 멈칫 선다.
연욱 : (울며) 언니 결혼할 때 나 혼자 나가 살 생각도 했었단 말야...
-필승, 돌아선다.
-엉엉 울고 있는 연욱.
-필승, 다가온다.
연욱 : 난 내가 싫어. 싫어죽겠어. 맨날 언니 짐 밖에 안되고...
잘난 거 하나 없고, 온통 못난 거 투성이고...
필승 : (가만 듣는)
연욱 : 내가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어. 왜 살아야 되는지 모르겠다구. 공부 하면 뭐해. 대학 가면 뭐해.
잘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아둥바둥해서 뭐하냐구.
필승 : (조금은 가라앉았지만 아직 화 나 있는) 그래서 언니 가슴에 못박으면서 가출이나 하고
아무 남자나 따라들어가? 핑계가 겨우 그거야?
연욱 : 그럼 어떡해. 화나 죽겠는데, 내가 싫어죽겠는데...
필승 : (완전히 누그러져, 답답한)... 이 바보야... 누가 그래, 너더러 못났다구. 넌 평범하지 않아.
넌 특별해. 너한테도, 언니한테도, 나한테도. ... 근데, 언니랑 날 이렇게 실망시킬 수가 있어?
연욱 : (울음 잦아드는)
-필승, 들고 있던 옷을 연욱의 어깨에 걸쳐준다.
필승 : ... 어떡할래. 집에 갈래, 말래.
연욱 : (울음 그치고, 눈물 닦는)...
필승 : 다시 이럴거면 아예 들어가지 말고. 돈 많은 남자 따라다니면서 니 맘대로 살어.
연욱 : ...
필승 : 그렇게 살래?
연욱 : ...
필승 : 그럼 여기 있어.
-미련없이 돌아서서 간다.
-연욱, 움찔 놀라 보고.
-걸어오는 필승. 그 뒤로 보이는 연욱.
-바라보는 연욱. 걸어가는 필승의 뒷모습. 연욱, 서럽고 겁이 나 다시 눈물 고인다.
훌쩍이며 주춤주춤 따라가기 시작하는 연욱.
-걸어오는 필승. 그 뒤로 쳐져 따라오는 연욱. 필승, 따라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슬몃 입꼬리가 올라간다.
-연욱, 눈가를 훔치며 졸레졸레 따라오는데.
-필승, 우뚝 멈춘다.
-연욱, 또 왜 저러지? 지레 놀라 멈칫했다가 쭈삣쭈삣 다가온다.
필승 : (바로 옆에 오자 팔짱 낄 때처럼 팔을 내민다)
연욱 : (멈춰 보는) ?...
필승 : 팔짱 껴야지. 옛날엔 잘 하더니 요즘은 왜 안해.
연욱 : ...
필승 : 옷까지 뺏어가구, 추워죽겠어.
연욱 : ... (멋적어하며 팔짱을 낀다)
-팔짱 끼고 나란히 걷는 두 사람.
연욱 : 춥지.
필승 : 아니.
연욱 : 추우면서.
필승 : 그런다고 한번 준 옷을 뺏을 수가 있냐.
연욱 : ... 근데 형부.
필승 : 말해.
연욱 : ... 난 정말 나쁜 년인가봐. ... 이젠 엄마아빠 얼굴도 기억 안난다?...
필승 : !...
연욱 : 나땜에 돌아가셨는데... 사진을 안보면 기억이 안난다?
필승 : (멈춰 보는)
연욱 : (목 메여) 그때 그냥... 엄마아빠가 골라준 거 사갖고 나왔음 좋았을 걸...
딴 거 산다고 떼쓰고 울고불고... 근데 기억이 안난다? 나 정말 나쁜 년이지.
필승 : (가슴 아프게 보는)
연욱 : 아침엔 생일상 받구, 저녁엔 제사상 차리구... 나 이제 그거하기 싫다 정말...
필승 : (안는다)
연욱 : (품에 안겨 섦게 눈물 흘린다)
필승 : ...
연욱 : (우는)...
필승 : ... 너, 나중에 죽어서 엄마아빠 만나면 못알아볼 거 같애?
연욱 : ... 아니... 아주 멀리 있어도, 아무리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있어도... 우리 엄마다, 우리 아빠다...
금방 알아볼 거 같애.
필승 : 그럼 됐네. 넌 착한 딸이야. 그렇지?
연욱 : (섦게 울며 끄떡끄떡)...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79 경주경찰서 현관(동 새벽)
-터덜터덜 나오는 성준. 필승에게 맞아 아직도 얼얼한 턱을 만지다가 어이없어 웃고만다.
성준 : 서연욱... 어떻게 너하고만 엮이면 경찰서 신세냐? 서연욱.. 서연욱... 기집애...
#80 바닷가 포장마차
-우동 먹고 있는 두 사람. 필승, 자기 잔에 술 따르다가 멈추고는.
필승 : 한잔 할래?
연욱 : (멋적게 끄떡)
필승 : (피식) 싫다고는 안하네. (한잔 따라주고 자기 잔을 들이킨다)
연욱 : (한모금 마시고)
필승 : 대학 가지 마라.
연욱 : (보며) ?!...
필승 : 대학 가지 말라구. 언닌 내가 설득할게. 차차 알아보면 돼.
분명 니가 하고 싶은 거, 잘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야.
연욱 : ... 없으면?
필승 : 내가 왜 경찰이 됐는 줄 알어? 대학 떨어지지마자 군대 갔다와서 2년동안 안해본 게 없었어.
근데 석달을 못가더라. 나도 너처럼 그랬어.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거든. 그제야 깨달았어.
이 세상이 나를 위해 있는 게 아니구나,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가는구나...
연욱 : (옆모습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듣는)
필승 : 그 기분, 참 엿같드라. 그래, 요즘 니 심정이 그럴거야.
내가 없어도 세상은 뻔뻔하게 잘 돌아가는 거. ... 오기가 생기더라. 그래서 경찰시험을 쳤어.
근데 이건 재밌는 거야. 3개월이 6개월이 되고 6개월이 1년이 되고... 체질이었던 거지.
(연욱 보며) 임마, 세상은 잘났든 못났든 그냥 저 좋아서 사는 거야.
연욱 : (숙연한)...
필승 : 그러니까 너도 한번 찾아보자구. 분명 니가 미친 듯이 좋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하고 우동 먹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연욱. 그가 사랑스럽고 믿음직스럽다...
#81 경주역 플랫폼(동 새벽)
-나란히 서서 기차 기다리는 기다리는 두 사람. 그러다 눈 마주치자 약속이나 한 듯 피식 웃는다.
필승 : 짜식... 웃긴 왜 웃어.
연욱 : 웃기잖아, 여기까지 와서...
필승 : 알긴 아네, 얼마나 웃긴 일을 저질렀는지.
연욱 : ... (멋적게) 미안해...
필승 : (피식 웃고는) 나두 미안하다, 어제 때린 거. (뺨 어루만지며) 많이 아팠지?
연욱 : (그 느낌이 어색해) !... (슬몃 시선 비끼고)
필승 : 이젠 그럴 일 없을 거야. 약속해. 그리고 이젠 너도 어른이야.
성인식 한번 호되게 치뤘다 생각하고 앞으로 잘해. 나도 이래라 저래라 강요하는 일 없을 거야.
알았어?
연욱 : ... (바로 보며) 네. (하는데)
-기적소리가 들리자 손을 떼며 기차 오는 쪽을 보는 필승.
-연욱, 필승의 손이 닿았던 뺨에 살며시 손을 대본다. 그 야릇한 느낌...
#82 달리는 기차 외경.
#83 기차 안
-창 밖으로는 아직도 짙은 어둠. 유리창에 비춰지는 연욱(창측)의 얼굴.
그 옆에 비치는 필승은 깊이 잠들어 있다.
유리창에 비춰진 필승의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연욱...
연욱, 문득 손을 들어 유리창에 비친 필승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더듬어본다. 기분이 묘해진다...
애틋함이 잔잔하게 밀려온다... 필승을 돌아보는 연욱. 그의 감은 두 눈이 깊다.
연욱, 살며시 그의 어깨에 고개를 얹는다.
연욱 : ... 사랑해요 형부...
-사르르 눈을 감는 연욱.
-그렇게 기댄 채 가는 두 사람.
2회 끝.
*출처 : 대본과시나리오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