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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핵심-주님의 만찬
제가 어려서부터 가졌던 의문은 사람들이 교회에 예배보러 간다고 말하는데, 예배라는 말은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리는 것이거나 그분앞에 무릎꿇고 경배하는 것, 등을 연상하는 말인데 반하여 자꾸만 인간이 강단에 올라 무엇을 가르치며 주장하기도 하고, 나머지 듣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께 자꾸만 무엇을 요구하는 기도를 하는 순서들이 가득한 시간을 예배라고 부르고 있는 현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가르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께 영광돌린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자꾸만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고 요구하고 주장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까?
저는 교회 안에서 진리를 가르치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께 생활의 필요를 공급해달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배라는 교회의 순서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저의 확신입니다. 교회안에서는 성경공부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말씀시간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또 기도집회시간을 갖고 기도의 제목들을 모두 모아서 순서에 따라 기도 제목 당 두 세명씩 기도하여 충분히 망라하고 충분히 기도할 사항들을 카버하며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기도를 한다면 하나님이 응답해주시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것은 기도시간입니다. 예배시간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배란 인생들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며, 그분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경배한다든지, 그분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사역을 기억하고 인정하며 믿고 감사드리며 영광돌리는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하나님은 무엇인가 부족하여 인간들에게 구걸하시는 분도 아니며, 인간들에게 무슨 재물이나 물질을 받으시고자 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는 그분께서 아깝고 고귀한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셔서 인간들의 죄값을 대신 치루게 하시고자 예수님으로 하여금 채찍질 당하시며, 침뱉음과 수욕을 당하게 하시고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시고 피흘리고 죽게 하심으로 이루어놓으신 세계 구속의 대역사, 인류 구원의 크신 역사를 기억하고 믿고 감사하며 그 진리대로 인생들이 죄사함의 사실을 믿고 여기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하나님은 인생들이 무엇을 가져오는 것보다도, 그분 자신이 이루어놓으신 크신 은혜를 인생들이 믿고 남김없이 받아먹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것이 최우선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어떤 소유물로도,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만족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기준에 못미칩니다.
인생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서 십자가의 사실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며, 그분을 순종하는 영역은 넓어져서 하나님의 나라는 창대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다음과 같이 예배를 설명합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내가 너희를 권면하노니 너희 몸들을 살아있고, 거룩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제사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합당한 예배이니라. 2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너희 생각의 새롭게함으로 변형되어져서, 너희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며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함에 이르라.
우리의 몸을 살아있고 거룩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로 드리는 것이 바로 합당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삷 전체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모임의 예배는 어떻게 구성되어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
루카 22장
19 그리고 떡을 받으시사, 감사드리시고 나누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이르시기를 “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어지는 나의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하시고 20 식사하신 후에 잔도 그와같이하여, 이르시기를 “이 잔은 내 피로된 새 언약이니, 너희를 위하여 흘려지는 것이라.
이것은 마치 죽음을 향해 가는 어느 어머니가 극진히 사랑하는 아들에게 더 이상 다른 무엇으로도 그 사랑을 표현할 수 없어서 내가 너때문에 차마 죽지 못하겠으나 이것으로 네게 나의 피, 나의 몸을 남겨준다 그러하니 너는 나를 기억해다오. 하고 유언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주님의 만찬은 기독교 진리의 핵심인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 모두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십자가 지시고, 못박히시사 피흘리시고 죽으신 사실을 기억하고 믿으며
감사하고 증거하는 것을 실천적으로 행하는 행사입니다.
주님의 만찬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며 왜 그것이 중요한가?
주님의 만찬은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하여 그들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피흘리시고 죽으셨음을 기억하게 하는 행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기를 잡으려고 인간들이 달려오려고 준비하던 그 시간에 성만찬을 제정하시고 최초로 실행하셨으며 그 사건은 중요한 까닭에 성령께서는 세명의 복음서 기자들이 이를 기록하도록 하셨습니다.
마태 26장
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감사드리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나의 몸이니라.”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드리시고 “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마가 14장
22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시사 축복하시고 나누어 저희에게 주시며 이르시기를 “ 받아 먹으라, 이 것은 나의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한 잔을 가지사 감사드리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저희가 모두 그것에서 마시니라. 24 그분이 저희에게 이르시기를 “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려지는 나의 피 곧 새언약의 피이니라.
(2) 주님의 만찬은 매우 중요한 행사이므로, 바울에게 직접 주님께서 부탁하셨습니다.
고전 11장
23 왜냐하면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을 나는 주께로부터 받았나니, 곧 주 예수께서 넘겨지시던 그 밤에 떡을 가지시사,
바울이 베드로에게서 전해들은 것도 아니고 요한에게서 전해들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바울에게 명하셨던 것입니다.
(3)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인간의 죄를 위하여 부서진 사실을 기억하게 해줍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부서진 나의 몸이니
이 진리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우리가 못박혔어야 할 나무에 우리 대신 못박히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4) 피로 세워진 새 언약을 기억하게 해줍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새언약을 갖고 있습니다. 그분의 신실하심앞에 그분께 충성을 다할 것을 약속한 믿음의 언약을 다시 생각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고전 11장
만찬 후에 잔을 가지시사, 이르시기를, “ 이 잔은 내 피로 된 새 언약이라
(5) 주님의 죽으심을 오실때까지 전하는 행사입니다.
고전 11장
26 이는 너희가 자주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이 오실 때까지 전파하는 것임이라.
(6) 죄를 예방하게 해줍니다.
고전 11장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합당치 않게 주의 떡을 먹으며 잔을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28 이에 사람이 자기를 시험해보게 하라, 그리고 그와같이 그 떡을 먹게 하고 그 잔을 마시게 하라. 29 왜냐하면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을 분별치 아니하고 스스로에 대한 정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기 때문이라.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은 자기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자기 스스로를 시험해보게 하여 영적 정결성을 유지하게 도와줍니다.
이러한 원칙을 아는 성도들은 범죄하는 경우 만찬에 참여할 수 없음을 알고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7)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되었음을 믿고 실행하게 해줍니다.
고전 10장
16 우리가 송축하는 송축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냐? 우리가 나누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에베소서5장
30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의 살과 그분의 뼈로된, 그분의 몸의 지체들임이라.
(8) 성도들끼리 한 떡이 되었음, 한 몸됨, 하나됨을 믿고 마음에 새기게 해줍니다.
고전 10장
16 우리가 송축하는 송축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냐? 우리가 나누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17 많은 우리가 한 떡이요, 한 몸임이니, 왜냐하면 많은 우리가 그 한 떡을 나누어 먹기 때문이라.
이러한 교제는 다른 어떤 교파 교회들보다도 더욱 친밀한 성도들간의 교제를 가져옵니다.
(9)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고 앙망하는 행사입니다.
고전 11장
26 이는 너희가 자주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이 오실 때까지 전파하는 것임이라.
히브리서 9장
28 그와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사람들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려지셨다가, 자기를 앙망하는 자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죄들과 상관없이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이와 같이 주님의 만찬은 주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그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3개의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었으며 바울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명하신 사항입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피흘리시고 죽으신 사건을 기념하는 행사입니다.
그것을 자주 기념하는 이유는 그분이 또다시 피흘리시고 죽으실 필요가 없이 영원한 속죄를 단번에 이루셨기 때문에 이제는 그것을 기념하고 기억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죄를 범할때마다 또다시 죽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이렇게 외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0 예수께서 신포도주를 받으셨을 때, 그분이 이르시기를 “그것이 이루어졌도다!”하시고, 그분께서 머리를 숙이시며, 영을 맡기시니라.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히브리서 10장
17 저희 죄들과 무법들을 더 이상 내가 결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8 이에 이것들의 사함이 있는 곳에는, 더 이상 죄들을 위하여 예물드림이 필요 없느니라. 19 형제들아, 그러므로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들의 진입로 안으로 담대함을 갖고서…..
이제 다시 주님의 만찬으로 돌아가서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의 형태요 순서라고 믿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만찬이 어떻게 실행되는 것이 정상인지를 살펴보기 위해 몇가지를 살펴봅니다.
떡 떼는 행사가 음식을 나누는 행사와 구분되는 것은 사도행전 2:46절에서 분명해집니다.
사도행전 2장
46 날마다 저희가 성전에 한마음으로 헌신하여 모이며, 집을 돌아가며 떡을 부수어 떼고, 큰 기쁨과 겸손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으며
( 떡 떼는 것과 음식을 먹는 것을 구분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서 떡떼는 순서도 있었고, 음식먹는 시간도 있었음을 보시지 않습니까?
떡 부수는, 떡 떼는 행사는 초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였음이 분명합니다.
그 주님의 만찬 행사를 초대교회는 < 날마다 > 행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일년에 한번씩 행한다는 교회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고전 11장 25절과 26절에서 < 자주> 라는 단어를 빼버린 것은 초대교회가 보여준 주님의 만찬의 자주 실행을 폐기하도록 한 성경의 가감삭제의 행위가 아닙니까?
그것이 어찌 하나님의 정죄와 징계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화체설과 공재설(임재설)
로마 카톨릭에서는 그들의 만찬을 유카리스트(영성체 미싸)라고 하여 그들의 사제들이 주관하여 실시합니다. 그들은 이 유카리스트에서 떡(쿠키)이 변하여 살이되고 포도주가 변하여 피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전혀 근거없는 주장으로 그들은 위에 언급된 주님의 첫 성만찬을 근거로 주장하며 요한 복음 6장에서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는 말씀(요 6:53-54)을 인용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 6장에서 영인 말씀을 하신 것이지(요 6:63), 그분의 육체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카톨릭은 스스로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고 주장합니다만 피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레위기 17장
14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겨지리라.
따라서 로마 카톨릭이 스스로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고 주장하고 고백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서 끊어진 사람들임을 스스로 강력히 주장하는 것입니다.
피는 인간들이 먹도록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피는 죄를 속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예수님이 완성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를 받을 자라는 것을 증거하는 셈이 됩니다.
공재설 혹은 임재설이란 루터파들이 믿고 주장하는 것으로 주님의 만찬의 떡과 잔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임하신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화체설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루터의 교리로서 바빌론의 식인 풍습등에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화체설의 뿌리는 바빌론 종교의 식인 제사장들의 풍습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기념설을 믿어왔습니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을 기념하는 행사입니다.
이러한 화체설 임재설 등은 카톨릭의 성직자 제도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한 화체설이라는 신비스러운 마술을 자기네 사제들만이 행할수 있다 하여 다른 교인들이 카톨릭 교회를 떠나지 못하도록 막는 방법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일반 평신도들은 떡을 살로 바꾸고 포도주를 피로 바꾸는 마술을 못 행사할 것이므로 성직자가 아닌 평신도들이 행하는 형제단의 예배에서는 성만찬을 실시 할 수 없다는 식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럼에도 신약에 충실했던 알비진 등의 기독교 형제단들은 이러한 화체설을 배격하였습니다.
예배의 핵심, 최상의 경배 – 주님의 만찬
주님의 만찬은 어느 특정 성직자가 피흘려 죽은 것도 아니므로, 그가 마치 피흘리고 죽은 것처럼 주인 행세하고 다른 사람들은 평신도라 하여 그 성직자의 초대에 초대받은 양 참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만찬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은, 형제들이든 자매들이든, 어린이든 노인이든, 누구든지 동등한 신분으로, 모두 동등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으로 죄사함을 입은 거룩한 성도들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베푸신 잔치 상에 값없이 은혜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성직자도 있을 수 없으며 참여 성도 모두는 존귀하고 거룩하고 명예로운 손님으로서 동등하게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만찬을 가장 합당하고 진지하게 자주 실행해온 교회 모임으로는 소위 형제 모임이라 불리우는 모임 단체가 있습니다. 그들은 매주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주님의 만찬으로 그들의 예배를 시작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은 일요일에 예배라는 이름으로 모이지만 이러한 예배에는 주님의 만찬은 빠지고, 인간의 설교가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나마도 설교의 내용은 주일성수(주일을 거룩히 지켜야 한다는 새로운 십계명), 십일조(연보와 폐해진 십일조를 구분 못하는 설교), 목사숭배(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의 자리에 목사를 올려놓는 행위), 새벽기도(세계 유일의 새벽기도 국가), 성전 건축(건물을 성전으로 착각하게 하면서 성전된 성도들의 몸에 관한 가르침-고전 6:19-을 짓밟는 설교)에다가, 시사평론과 정치 한담, 헌금 많이 내면 축복받는다는 기복신앙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까? 경배입니까?
요한 웨슬레는 그가 옥스포드 대학 학생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만찬이 매주일 실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수많은 고대 학자들의 문헌에는 성만찬을 최소한 1주일에 한번 이상 실시했음을 알리는 글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1장 25절과 26절에는 호사키스 라는 단어가 들어 있어 너희가 자주 먹고, 너희가 자주 마실 때마다, 라는 말로 성만찬이 자주 실행되었음을 가르쳐 줍니다.
진정한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해 이루신 위대한 희생제사 곧 십자가의 사실과 진리를 기억하고 믿고 감사드리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인생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자격도, 가까이 나아갈 자격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효력을 갖는 위대한 희생제사를 드렸으므로 이제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믿는 우리 모두는 그분의 피를 기억함으로 아버지께 나아갈 수있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초대 교회 제자들은 떡을 뗄 목적으로 모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설교를 듣는 목적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 그 설교는 바로 주님의 만찬을 실시하기 전에 혹은 그 후에 십자가 사실을 기억할 수 있도록 교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예배행위의 최고봉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예배는 교회에서 매주일 공식적으로 실행하여야 합당하겠으나,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일년에 두 번 정도로 실행하면서 마치 목사가 신도들을 위해 피흘리고 죽었던 양, 목사가 집례하는 방식의 성찬예식만을 시행하므로, 이를 가정에서라도 온전히 실행하고자 한다면 두 어 가정이 함께 모여(마 18:20) 매주 한번씩 실행할 수 있으며,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가정에서 가족들끼리라도 주님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을 기념하는 주님의 만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저의 개인적 분별입니다.
주님의 만찬을 위해 인간들이 만들어낸 교회 벼슬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할 것입니다(고전 16:22-23)
자주 이 떡을 먹으며, 자주 이 잔을 마실 때마다
고전 11장
25 그와같이 또한 만찬 후에 잔을 가지시사, 이르시기를, “ 이 잔은 내 피로 된 새 언약이라. 너희가 자주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도록 이것을 행하라.” 하셨으니 26 이는 너희가 자주 이 떡을 먹으며 자주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이 오실 때까지 전파하는 것이기 때문이라.
많은 한글 성경 번역들은 이 중요한 교훈의 말씀에서 < 자주> 라는 단어를 빼버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원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텍스투스 리셉투스
ὡσαύτως καὶ τὸ ποτήριον μετὰ τὸ δειπνῆσαι λέγων, Τοῦτο τὸ ποτήριον ἡ καινὴ διαθήκη ἐστὶν ἐν τῷ ἐμῷ αἵματι τοῦτο ποιεῖτε ὁσάκις ἂν πίνητε εἰς τὴν ἐμὴν ἀνάμνησιν
ὁσάκις γὰρ ἂν ἐσθίητε τὸν ἄρτον τοῦτον καὶ τὸ ποτήριον τοῦτο πίνητε τὸν θάνατον τοῦ κυρίου καταγγέλλετε ἄχρις οὗ ἂν ἔλθῃ
KJV
25 After the same manner also he took the cup, when he had supped, saying, This cup is the new testament in my blood: this do ye, as oft as ye drink it, in remembrance of me.
26 For as often as ye eat this bread, and drink this cup, ye do shew the Lord's death till he come. |
ὁσάκις
as often as, as often soever as
호사키스라는 말은 영어로는 as often as, as often soever as, whenever often
으로 번역되며, 한글로 번역된다면 < 자주 ㅇㅇ 할 때마다> < 자주 xx 할 때는 언제나> 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단어가 들어있는 문자을 번역할 때에는 자주라는 말을 넣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글 번역들은 이 단어를 이 문단에서 빼버렸습니다.
호사키스라는 단어는 모든 사본들에 들어있습니다.
거듭남, 십자가의 진리가 중요하지 의식이 중요하지 않지 않은가?
인류 구속의 진리,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에 의한 속죄의 진리, 구원과 죄사함,
그것을 믿는 믿음이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행하여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유언으로 부탁하셨습니다(룩 22:19). 그 이유는 주님의 만찬예배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피흘리심과 죽으심을 실물 교본으로 기억하고 기념하며 받아들이고 전파하는 행사(고전 11:26) 이기 때문입니다.
모임 ( 교회)의 어떠한 예배나 행사들중에서도 이 주님의 만찬 만큼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직접적이고 정확히 실증하는 행사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만찬 예배는 기독교인들의 모든 행사들중의 최고봉이며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일년중 2-3번으로 줄이고, 인간 목사나 다른 인간들의 행사들로 대체한후에 그것을 예배라고 이름붙인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은 빼놓고
인간의 설교와 인간들을 드러내는 행사로 변환되는 것으로 밖에 볼수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주님의 만찬은 다음과 같은 명백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1)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하고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며 그분의 피에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0:16-17)
2)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가르쳐줍니다. (고전 10:17)
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고난과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합니다.( 11:26)
4)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음을 상기시켜줍니다(갈 2:20, 고전 11:24)
5)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에 의하여 우리의 모든 죄가 대속되었으며 씻어졌고
죄값이 지불되었음을 기억하고 생각나게 하며 새로이 믿게 해줍니다.(마 26:28, 고전 11:25)
6) 성도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살피고 죄를 짓지 않게 예방시켜줍니다(고전 11:27-30)
7)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로 더불어 먹고 우리는 그분으로 더불어 먹음을 체험하며 가르쳐주십니다.(계 3:20)
주님의 만찬의 범죄 예방효과는 매우 강력하고 실제적입니다.
주님의 만찬을 진심으로 매주 실행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죄를 범하면 다가오는 주님의 만찬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항상 조심하며 자신을 살피게 됩니다.
만찬에 참여하면서도 성경에 명시된 죄를 범하는 자들에게는 주님으로부터 징계가 수시로 있어왔습니다. 또한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 직전에 그 지역 모임에
소련 KGB 가 들이 닥쳐 그들의 주님의 만찬 상을 군화발로 걷어찼는데 그 사건후 몇주가 못되어 폭파 사고가 났다는 것이 형제모임들에 알려진 사실입니다.
일년에 두세번 실행함으로서 인간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됩니다.
예배란 예의를 갖추어 경배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주류 교회들의 예배란 설교를 중심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예배는 각자가 하나님 앞에 예의를 갖추어 드리는 것인데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통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 사실을 기억하고 인정하고 믿으며 찬양하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주류 교단들은 인간 설교가 중심이 되어 성경 몇줄 읽고 해석한다음 그에 맞추어 시사 평론도 하고 격언도 전하며, 헌금 많이 하면 복받는다, 십일조를 해야 등록교인이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성전을 건축하도록 성전건축헌금을 내야 한다 등의 설교와, 교회에 열심히 다녀야 한다, 주일 성수 강조와 새벽기도 강조 또는 목사섬기기 강조 설교로 대부분의 시간이 할당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성경적 모임들은 매주일 주님의 만찬을 한시간 이상 가짐으로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에 집중하며 주목하여 기억하고 감사하며
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죄씻음(계 1:5) 과 영원한 속죄( 히 9:12-14, 10:16-18) 을 중심으로 많은 시간을 예배에 쏟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만찬을 자주 실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년중 대부분의 집회에서는 인간 설교가 중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 자주> 라는 단어가 빠짐은 일년중 49-50주간의 예배에서는 주님의 만찬이 실행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성경 번역에서 자주 라는 단어를 빼버림으로서, 일년중 2-3주만 만찬을 실시하고, 49-50주는 주님의 만찬을 매주일 실행하지 않아도 되도록 예배의 형태를 바꾸고 있습니다. 즉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만찬예배 대신에 인간 설교 중심으로 예배 형태를 바꾸었으며, 그것은 결국 인간 숭배, 인간 존경으로 향하게 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친정체제에서, 인간 목사 당회장의 지도체제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됨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속죄와 죄씻음을 매주 재확인하지 못하고, 죄를 예방시켜주지 못하면서, 인간설교로 정치방담, 시사평론, 속담과 격언, 십일조와 헌금, 성수주일, 목사중심체제, 건물중시 체제로 교회가 바뀌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할 모임을 선택할 때에는 바로 이와같은 주님의 만찬이 매주일 실행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성경을 고를 때는 고전 11:25-26절에 자주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해당되는 성경말씀들을 구절별로 살펴보겠습니다.
고전 10장
16 우리가 송축하는 송축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냐? 우리가 나누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17 많은 우리가 한 떡이요, 한 몸임이니, 왜냐면 많은 우리가 그 한 떡을 나누어 먹기 때문이라.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놓으신 가장 고귀한 만찬, 가장 값비싼 만찬에 초대받은 명예로운 손님들이며 그 만찬을 주관하시는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동등한 손님들이며, 목사가 주관자도 아니며, 집례자도 아닙니다! 목사도 그 분의 피에 의해 속죄함을 입었던 죄인이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을 나는 주께로부터 받았나니,
(고전 11:23)
사도 바울은 주님의 만찬에 관한 교훈을 다른 사도들에게서 배운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배웠습니다. 그분은 언젠가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직접 가르치신 것으로 분별됩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부서진 나의 몸이니, (11:24)
개역한글과 개역개정, 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은 < 부서진> 이라는 단어가 빠져 있습니다. 그들의 바탕원문에 < 클로메논> 이라는 동사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본들, 압도적 다수 사본들에는 그 동사가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킹제임스 성경은 그 동사 수동태 분사형을 넣은 것입니다.
< 자주> 가 26절에 두번 들어가는가? 한번인가?
원문의 호사키스는 26절에 한번입니다. 그러나 한글로 번역하는 경우 한번만 넣어야 할지는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호사키스는 < 자주 먹으며> 뿐만 아니라
< 자주 마시는 것> 에도 해당되고 걸리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축자역의 원칙과 그것이 낳을 오해의 소지 문제를 감안하여 판단할 문제라 생각됩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영성체는 자주 매주일 먹으면서 잔은 사제들만 마십니다. 평신도들이 마실때도 있는 줄로 아는데 그 경우에는 떡은 자주 먹으면서 포도주 잔은 드물게 마시는 경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원문의 뜻은 떡과 잔을 함께 자주 실행하는 것을 가르침이 확실합니다.
요한 웨슬레는 옥스포드 대학과 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주님의 만찬은 매주일 실행함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매주일이라고 성경에 명시하지 않은 이유는 초대교회 당시에는 실제로 매주 일회보다 더 자주 실행한 것도 상당한 이유였다고 분별됩니다. 행 2장 46은 그것을 매일 모일때마다 실행했다는 암시를 가르쳐 줍니다.
사도행전 20장
7 안식후 첫날에, 제자들이 떡을 나누려고 모였더니, 파울이 저희에게 강론하여, 다음날에 떠나려고, 한밤중까지 말씀을 계속하니,
이 구절에 관한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고 있다고 믿어지며, 저또한 바로 몇년전까지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회에 그것을 바로잡고 시정하기 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초대교회가 어떻게 교회에 모였는지에 관하여 중요한 정보를 얻습니다.
가) 초대교회에서는 안식일에 기도집회를 가졌습니다( 행 16:13)
나) 안식일에 설교하였습니다(행 13:42, 44, 15:21, 17:2, 18:4)
다) 베뢰아 교회도 안식일에 모였다고 믿어집니다(행 17:10)
라) 고린도 교회도 안식일에 모였다고 믿어집니다(행 18:4)
마) 사도 요한은 안식일을 주의 날로 불렀다고 믿어집니다(계 1:10) 그의 제자 폴리캅은
안식일에 예배한후 오후에 체포되어 큰 안식일에 화형되었다고 알려졌으며 그는 부활절이 아닌 유월절의 기념행사를 위해 마르치온파와 로마에서 쟁론하였고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였습니다.
바) 예수님이 8일 후에 제자들에게 보이셨다는 말씀( 요20:26) 은 유월절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8일후라는 뜻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경우 목요일이든 토요일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날이 일요일이었다는 해석으로 수없이 강조되었던 안식일이 폐해졌다고 해석될 수는 없습니다.
사) 오순절은 항상 일요일이 된다는 계산 방식은 사두개인들의 계산방식으로서
레위기 23장 15절을 잘못 번역 해석한데서 온 산정이지, 실제는 오순절은 어느 요일이든 가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순절은 일요일 예배와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아) 사도 바울이 행 20장6절에서 빌립보로부터 닷새 동안 항해하여 드로아에 가서 7일을 머물게 된 것은 주님의 만찬 행사를 위해서 일정을 조율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바로 무교절 행사를 대도시인 빌립보에서 ( 당시 인구 100만 이상) 행하기 위해 머물렀고 (6절) 그후에 드로아에서 1주일을 머물렀다는 뜻이며 주님의 만찬은 어디에서든지 행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반하지 않습니다. 그는 항해중이던 5일중에도 주님의 만찬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자) 유대인들은 두 저녁들 사이( 출 12:6) 를 중요시합니다. 그것은 일몰 시각을 의미하며 특히 안식일의 일몰시각 이후부터는 안식후 첫날 저녁이 되며 한주를 시작하는 기념으로 가정집에서 초대되어 애찬을 갖습니다(유다서 12절) 이것을 합달라라 하며 행 20장 7절은 바로 그러한 합달라 행사였습니다.
차) 합달라 행사였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설교가 있은 후에 애찬을 가졌던 것입니다(행 20:11)
카) 합달라 행사가 아니고 일요일에 가진 주님의 만찬이었다면 어찌하여 일요일 아침에 모이지 않았겠습니까? 어찌하여 사도 바울은 먼저 만찬부터 실행한 다음에 설교를 하였을 것이지 설교부터 오랜 시간 행한다음에 떡을 떼었겠습니까?
타) 그들이 모였던 주 목적은 애찬, 곧 합달라를 나누기 위하여 모였습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모였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파) 떡을 떼는 것이 성만찬이었는가? 아니면 유대인의 합달라였는가?
여기서 사용된 클라오 동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떡을 떼심으로(
부수어 뜨림으로) 제자들의 눈들이 뜨여진 사실(룩 24:30. 31, 35)에서도 사용된 단어입니다. 사도행전 2:42. 46절에서 사용되었고, 행
20:7절에서, 고전 10:16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에서 다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고전
11:24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부서진 나의 몸이니"
( 한글 성경은 너희를 위하여 부서진이 삭제됨)에서 부서지다는 단어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로 사용되었으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서진 몸을 상징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행 20장 7절에서 사용된 동사
클라오를 통해서 그것이 바로 떡을 떼는 주님의 만찬 행사였다고
해석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타당성 있게 들립니다.
그러나 클라오 동사는 마태 14장 19절, 15장 36절 마가 8장 6절 8장 19절에서도 쓰였습니다. 즉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일반적인 식사를 하게 하실 때에도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하) 따라서 행 20장 7절은 주님의 만찬이 아니라 합달라였음이 분명해보입니다.
합달라란 바로 한주일을 시작하기 전에, 모임의 믿는자들이 가정집에 초대되어 함께 식사하며 교제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기) 사도 바울은 다음날 아침 여행을 떠났습니다. 다음날이 월요일이었겠습니까? 일요일 아침에는 무엇했겠습니까? 일요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울이 설교하다가 밤중이 되어서야 주님의 만찬을 시행했겠습니까?
니) 안식후 첫날 저녁은 바로 토요일 저녁이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합달라를 가진 다음에
다음날 아침부터 일했던 것입니다.
디) 안식일에는 일반적으로 아침부터 주님의 만찬과 설교와 기도집회를 갖고, 해산한 다음, 저녁에 가정집에 모여 합달라를 가졌다고 해석함이 타당합니다.
당신은 주님의 만찬을 자주 (매주일) 실행하는 모임에 참석하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예배의 핵심은 빠진 예배입니다.
당신은 < 자주 이 떡을 먹으며, 자주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라고 고전 11장 26절에 기록된 성경을 읽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 의도에 의해 삭제한 것입니다. 그 변경효과는 참혹합니다!
둘다 아닙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신앙생활의 귀중한 부분을 놓치고 계십니다!
2015. 6. 29 하토브
첫댓글 이 글은 과거에 제가 올렸던 글들을 통합하여 수정한 것입니다만 그중에서 행 20장 7절에 관하여 저의 해석을 변경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과거에는 행 20장 7절이 주님의 만찬으로 해석한 글이었으나 이 글은 그것은 만찬이 아니라 합달라였다고 분별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대의는 동일합니다. 이것을 일주일에 한번이 아닌 일년에 한번씩 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초대교회의 실행이 어떠했는가? 를 분별하는 분별력이 떨어지는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명쾌하고 섬세한 해석에 감사합니다.
저도 인간의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설교가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게 하고 가까이 가게하고 십자가의 보혈처럼 우리의 심장이 감동의 눈물로 흐르게 하는 것이라면 그나마 감수하겠습니다만...
인간들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면 얼마나 거룩하게 지키겠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에 얼마나 미치겠습니까?
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놓으신 희생제사를 믿고 감사하며 경배드리는 것일 것입니다. 이것이 빠져있는 인간설교 중심의 안식일 예배가 얼마나 의미가 있겠으며 그런 안식일 예배를 행하지 않으면 구원을 잃는다고 말하는 사람의 믿음이나 정신 상태가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진정한 예배가 빠진 안식일 예배를 하지 않으면 구원을 못얻는다는 교리를 단순한 율법주의로 규정하고 거짓 교리로 믿는 이유입니다.
안식일은 폐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날에 예배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인도해주시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에 순종하면 됩니다.
초대교회는 안식일에 주님의 만찬을 가짐으로 예배하였습니다. 그것이 300여년이 지난 다음에 일요일 예배로 바뀐 것은 라오디게아 공의회의 결의이후입니다. 성령께서는 안식일 준수와 상관없는 이방인 세계에 오셔서 전도하시며 그들을 구원하고 계십니다. 언젠가는 많은 진리들을 회복시킬 것입니다. 그때에 순종하고 참여하면 됩니다.
아멘!. 입니다.
예배의 중심은 주의만찬 여야 하고 그것은 자주 행해져야 한다는것을 쉐까페에 와서 알게됐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따라, 말씀대로 실천하는 교회에 속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드리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 찬송드립니다.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는 모임이 생긴다면 저도 그곳에 참석할 것입니다.
예배의 역사를 알면 이 문제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구약시대에 매 안식일마다 어린양으로 번제 희생을 드리고 진설병을 새것으로 교체하여 드렸습니다.
그 모든 희생제사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피흘림과 죽으심을 기념하여, 그 진리를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것을 신약교회는 안식일에 주님의 만찬으로 실행한 것입니다.
안식일을 준수한다 하며, 안식일에 예배한다 하면서 주님의 만찬이 빠졌고 대신 목사가 설교만 한다면,
그것은 마치 구약시대에 어린양의 번제와 진설병은 빠지고, 제사장이 대신 설교로 가름하며 찬양대가 찬양하는 것으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과 같습니다.
예배의 역사를 알면 이 문제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구약시대에 매 안식일마다 어린양으로 번제 희생을 드리고 진설병을 새것으로 교체하여 드렸습니다.
그 모든 희생제사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피흘림과 죽으심을 기념하여, 그 진리를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것을 신약교회는 안식일에 주님의 만찬으로 실행한 것입니다.
안식일을 준수한다 하며, 안식일에 예배한다 하면서 주님의 만찬이 빠졌고 대신 목사가 설교만 한다면,
그것은 마치 구약시대에 어린양의 번제와 진설병은 빠지고, 제사장이 대신 설교로 가름하며 찬양대가 찬양하는 것으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과 같습니다.
@하토브 이 댓글 내용을 보니 더욱더 예배의중심은 주의만찬 여야 함을 알게 됩니다.
더 분명 합니다.
성령께서는 이방인 세계에 전도하실 때에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에 의한 영원한 속죄를 가르치시고 전해오셨습니다. 때가 되면 그분의 인도하심이 율법을 위반하거나 무시하거나 짓밟는 방향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게하시고 차츰 여건이 마련되면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가시고, 안식일에 합당한 예배를 갖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어느 날에 예배해도 진정으로 합당한 주님의 만찬이 중심이 된 예배를 드린다면 그분은 기뻐받으실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여전히 보호하심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안식일에 예배하며 더욱 성경에 충실한 모임이 된다면 순종의 영역은 확대되고 은혜는 확장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더욱 순종할수록 우리의 순종의영역은 확대되고 은혜는 확장됩니다.
예수님을 주 로 영접한 이후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해 오는 사실입니다.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다녀 보아라~ 찬송가사 후렴이 생각납니다.
먼저 딴지를 걸거나 토론하자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그런데 하토브님의 주장을 근거로 보면 지금까지 사도 시대 초대교회 후 어떤 모임도
바른 예배를 드린 곳은 없다는 결론인 것 같습니다.
올바른 예배에 대한 정신과 자세에 대하여는 충분히 동의하고 인정하겠으나
안식일과 주의만찬의 회복 그것이 진정한 예배의 본질인 것처럼 비추어져서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금까지 거짓 예배만 보신 것 같습니다.
인간이 드린 그 어떤 예배도 받으실 수 없는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지금까지 복음이 유지 되고 전달 되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의식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본질은 아닙니다. 율법이 중요하지만 율법이 본질이 아니듯
안식일이나 주의 만찬의 행위가 중요하지만 그것은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의식이 필요 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의식은 본질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에 중요하지
의식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을 말할 때 호6:6 요17:3 절에 잘 나타나 있듯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호4:1, 6 절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조상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조상들과 달라서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고 그러므로 예배도
잘 드린다고 생각했으며 율법을 잘 안다고 생각햇을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 연구 전문가였으며 서기관들은 모세오경을 암송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나칠 정도로 지키려고 하다가 즉 의식에 치중한 나머지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님이 오셨어도 알아보지 못했고 도리어 안식일을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친아버지라 하여 신성모독죄로 몰아서 십자가 처형을 한 것이지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본질입니다. 의식이 아니라 아무리 의식을 거룩하게 행한다 해도
그것에 하나님 없는 의식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민할 것은 과연 우리가 사는 모든 삶 거기에는 신앙과 삶, 예배까지 포함해서
하나님이 함께하는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분명히 밝히지만 의식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아시기 바라고 또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도 아님을 아시길 바랍니다.
하토브님의 지식과 견해는 매우 깊고 사려 깊으며 군형 잡혔지만
사람은 어떤 누구도 완벽하거나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내 견해와 깨달음 그리고 주장이 잘못 될 수도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셨으면 합니다.
혹시 이 글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불쾌하시다면 이해 해주십시오.
저 역시 제 견해를 피력했을 뿐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복음을 잘 깨달았고 깊이 아는 분들은 제가 주장하는 바에 상당히 반발하는 것이 보통 있는 일입니다.
심지어 제가 나가고 있는 모임에서도 그 정도 이상으로 반발하기 때문에 저는 아예 말을 안꺼내는 정도입니다.
제가 그런 방식의 생각을 갖고 살아온 것이 아마도 30년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더 깊은 묵상을 거쳤을 때 구분할 것은 구분하게되었습니다.
우선 만찬예배와 안식일 문제는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합니다.
만찬예배를 가장 충실하게 실행하는 오늘날의 모임으로는 형제모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요일 예배자들입니다. 따라서 만찬예배와 안식일 예배문제는 전혀 다른것으로 구분되어야 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만찬예배를 중심으로 모인 역사는 초대교회 이후에, 몬타니스트, 카타리, 노바티안, 보고밀, 알비, 페트로 드 부르시안, 보도아, 왈덴지안, 보헤미아 형제단, 스위스 형제단, 모라비아 형제단, 초기 감리교회, 플리머스 형제단 등 무수한 모임들이 만찬예배를 중심이로 실행해왔습니다.
따라서 만찬예배를 매주일 실행하던 모임들이 역사상 없었다는 것은 이러한 성경적 모임들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데서 오는 것으로 분별됩니다.
심지어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만찬을 중시하는 글들은 그리스도 중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 카톨릭인데도). 요한 웨슬레는 매주 1회 만찬예배를 강조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칼빈도
일주일에 최소한 한번 바람직하게는 두번 만찬예배를 실행해야 한다고 기독교 강요에서 강조하였습니다. 장로교 신학대학이나 장로교에서는 이런 것을 안 가르칩니다. 참으로 기이한 현상중의 하나입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성경적 모임들에서 만찬예배가 중심이 되었던 사례들은 많습니다.
그들은 대신 < 화체설> 에 대해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만찬 예배가 목사들의 설교예배 중심으로 바뀐 것은 개혁시대 이후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적인 만찬예배는 사라지고 그리스도인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배 갱신운동이 벌어지고, 성서침례교회에서는 한달에 한번으로 바뀌었지만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안식일 예배에 관해서는 성경 안에서 바뀌지 않았음을 제가 다른 글로 이미 설명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계는 363-364년에 열린 라오디게아 공의회가 안식일 예배를 아나떼마로 정죄 선언하기까지는 안식일 예배자들이 기독교인들의 대부분이었습니다. 일요일 예배자들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외에는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안식일 예배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뒤로 라오디게아 공의회 이후, 그 이전부터 일요일을 공휴일로 선포한 로마제국법과 맞물려서 안식일 예배 모임들은 그 수가 많이 줄기 시작하였고 530년 경 또다시 더욱 일요일 예배가 의무화되고, 7세기 후엽에 사라센의 침공으로 북아프리카
도나티스트들이 멸종되면서 안식일 예배자들은 종적을 감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왈덴지안들 모임들 중에서도
안식일 예배자들은 있었으며 세계 곳곳에 산발적으로 안식일 예배모임들이
있어왔습니다. 안식일 예배모임은 엘렌 화이트가 창시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 제7일 침례교> 들이 있었는데 그것을 그녀가 차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고 하십니다(마 24:20) 안식일이 폐해졌다면 어찌 그렇게 안식일을 염두에 두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도 요한이 말한 주의 날은 분명히 < 안식일> 입니다(계 1:10) 그의 수제자 폴리캅은 안식일 오후에 체포되어
큰 안식일에 처형되었다고 역사는 기록하며, 그는 마르치온 파와 부활절이냐? 유월절이냐? 의 논쟁을 벌이어 마르치온파를 이단으로 밝혀내고 이단으로 선언했다고 말합니다. 폴리캅은 요한에게서 율법의 유효성을 배웠던 것으로 알게해주는 대목입니다. 그외에도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안식일 자체가 폐해진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께서 일요일 공휴일 세계에 침투하셔서 일요일예배를 용인하고 계시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다가오는 천년왕국에서는 초막절도 회복되고 ( 스카랴 14: 16-19) 안식일도 회복되는 것( 이사야 66:23) 으로 이해됩니다.
오늘날 온전하게 안식일에 예배하는 모임이나 그리스도인들은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2천년의 역사는 죠지 뮐러, 허드슨 테일러, 스펄젼 같은 훌륭한 그리스도인들, 상급 그리스도인들까지는 배출하였으나, 엘리야, 이사야, 다니엘, 사도 바울, 사도 요한같은 초상급의 하나님의 사람들은 배출하지 못하였다고 보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이들은 개인규모가 아닌 국가적 민족적 규모의 믿음을 발휘하였고, 그 국가적 민족적 믿음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법에 관한 인식이 늘 있었다고 믿어집니다.
율법준수 유효 믿음이라는 관점에서의 율법 효력에 대한 이해는 맞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여러 가지 지켜야 할 또는 행해야 할 의무들에 관한 이행은
우리가 지키고 행하려고 하다 보면 다시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을 봅니다.
저는 성경에서 이런 의식적인 행위 율법 준수 행위는 이사야 시대나 예레미야 시대 사람들이
오늘날로 말하면 흉내도 내기 어려울만큼 철저히 지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일 월삭 모든 대회 모든 절기 거기에다 살진 짐승(제물) 즉 가장 좋은 제물로 드렸고
유향과 향품을 먼 곳에서 구하다 하나님께 드릴만큼 그들의 의식과 정성은 대단했습니다.(사1장, 렘6:20절 참조)
@좋은친구 그런데 하나님은 받지 않았습니다.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 마음 속에 본질이 없는 의식적인 행위에만 치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의도와 맞지 없는 중요한 그 무엇이 빠진 예배와 제사는 하나의 의식일 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받으실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하나님 없는 예배와 제사로 봅니다. 행사를 치르는 거죠.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의식이 필요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안식일과 주의만찬 중요합니다. 저 역시 안식일을 안식일 교단에서 지키는 그런 안식일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애쓰던 기간들이 짧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무리들은 지금도 있습니다.
@좋은친구 지금은 일요일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저 역시 그 의문이 (안식일과 주일에 대한) 깨끗하게
해소 된 것은 아닙니다. 그냥 주일에 예배드리는 사람도 안식일 날 예배 드리는 사람도
하나님 중심적인 마음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오직 심자가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가는 사람이라면
그 마음과 그 자세를 중히 여길 것입니다. 안식일 교단은 법대로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이행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믿는 것은 맞습니다. 믿음+ 할례 / 믿음+ 안식일/ 믿음+ 행함
믿음+ 주의만찬 이 모든 것 = 올바른 신앙이라는 등식
@좋은친구 갈라디아 교회처럼 믿음에다 그 무엇을 더하여 하는 행위 이것이 과연 성경적이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른 길일까요? 오늘날 개혁을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교회 시스템 문제를 들고 나옵니다. 물론 개선해야 할 점들이 많습니다. 인정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 점에 대하여 안타깝게 여깁니다. 저 역시 부득불 대세라고 하는
기존 시스템을 따르고 있지만 그것이 전적으로 맞고 옳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물론 타협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하토브님이 인정하듯 그런 시스템에도 구원은 있어 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분적인 것으로 전적인 부정으로 몰아간다면
@좋은친구 이 세상에 온전하고 완벽한 단체나 그것을 행하는 무리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 무모한 시도를 해보지만
다 실패로 끝나게 되는 것을 보지요. 종교다원주의 역시 그런 시도를 한다고 봅니다.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것은 참으로 좋지요. 온 인류와 종교를 하나로!
결론입니다. 저는 하토브님의 주장에 대하여 반박하거나 반대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시도와 생각은 좋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식적인 개혁은 결국 변질 됩니다.
본질인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 하나님의 백성 다운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가 고만하고 풀어갈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감사.
@좋은친구 여기 어느분이 중요한 표현을 사용하셨는데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는다
다만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을 읽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목표이겠지요.
그 실현을 어떻게 할 것인가? 도구는 많이 있습니다. 방법도 다양합니다.
의식도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방법과 길은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의 방법인데 호6:6 절에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외에 어떤 방법도 대신하지 못할 것입니다.
훌륭한 우리 믿음의 사람들처럼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아 그리고 한 가지 감사드릴 것이 있습니다. 제7일 안식일 침례교가 있었다는 사실을
ㅇ
@좋은친구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단체예 대한 기록을 어떻게 알 수있을까요?
혹시 가지고 있다면 나누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논쟁 아닌 논쟁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좋은친구 https://en.wikipedia.org/wiki/Seventh_Day_Baptists
제7일 안식일 침례교는 1650년경에 시작되어 엘렌 화이트의 재림교보다 200년 가량 먼저 안식일 예배를 실행했습니다. 위의 주소는 위키피디아 주소이고 그외에도 많습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22개국에 5만명 밖에 안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예배하는 교단은 세계적으로 50여개 단체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중 메시야 유대인들의 모임들과 안식교가 가장 큰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제가 이 카페에도 안식일에 예배하는 모임들은 설명해놓은 기억이 있습니다.
@좋은친구 마음이 빠지고 의식만 남은 의식행사가 성경적으로 타당하지 않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도 그러한 의식도 지키면서 또한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진심으로 순종하는 믿음을 가졌던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은 축복하셨다고 믿어집니다. 다니엘은 음식에 대해서나 우상숭배에 대하여 하나님을 순종하였습니다. 엘리야는 나아가서 우상숭배에 대하여 싸웠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 대해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요 7:19)
반대로 예수님은 율법을 지켰습니다(요 15:10)
만찬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기에 Gatsby 님이 올리신 글처럼, < 보여주는 복음> 인 만찬도
바로 그 자체가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좋은친구 이 율법이나, 주님의 만찬이나, 목사제도나, 예배요일 등의 문제는 분별과 실행의 차이라는 글을 제가 쓰고 있는데 그것을 읽으시면 무엇이 핵심교리이고, 무엇이 파생교리이며, 또 당장 반드시 지켜야 할 것과 성령께서 인도하실 때 기회를 잡아서 지켜나가야 할 것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저는 당장 모든 사람들이 제가 성경을 통해서 분별해냈다고 하는 파생교리들을 지키고 실천할 수 있다고 기대하지도 않거니와 저 자신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분에서 평안한 자세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한편, 분별 자체는 무엇이 옳은지를 솔직하게 시인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토브 감사합니다. 분명 정로로 행하는 것이 맞습니다. 파생교리에 대한 솔직한 고백 감사합니다.
저 역시 초기 신앙 때 진리가 제 안에서 전혀 분별이 되지 않았으면서도 기독교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그것은 말씀과 삶이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에 입문해서 참된 자유와 평안 안식을 찾으려고 적극적 참여와 활동을 했으나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여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구도의 길을 떠난 적 있습니다.
86 년도 2월 5일 경 배낭 하나에 몇 권의 책과 간단한 의복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떠나서 여기 저기 기웃거렸으나 내 믿음은 파산했고 결국 세상으로 나갔지요.
기가막힌 깊은 수렁에서 나를 건져올리신 ㄱ
@좋은친구 그 이후 그토록 갈망하고 찾던 질문들에 대한 답이 해결 되었지요. 그것이 거듭남일 것입니다.
저 역시 이땅에서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고 싶고 그런 사람들과 교제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요. 제가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았지만 사람들이 만든 조직은
다 거기서 거기더라는 거죠. 결론적으로 완벽한 조직은 없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다만 부족하지만 얼마나 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려고 하는 아름다운 신앙인들이 모여 있는가?
그 차이일 뿐 사람은 본질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했으며 악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뿐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로 서기를 그것이 저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좋은친구 맞습니다. 우리는 기가 막힌 수렁에서 건져내진 불쌍한 영혼들이며 이제 구원얻은 후에 차츰 차츰 고쳐지고 바로잡아져 갈 뿐입니다. 이제 성령님께 의지하고 그분이 어디까지 바로잡으실지 의지하며 따라갈 뿐입니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이라고 인정해주고, 부족한 것은 부족한 자아임을 인정하고 기다리며 또 안식하며 그분을 바라볼 뿐입니다. 그 안에 평안과 기쁨이 있으며 겸손과 순종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