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렁탕과 로맨스 / 정끝별]
처음 본 남자는 창밖의 비를 보고
처음 본 여자는 핸드폰의 메씨지를 보네
남자는 비를 보며 순식간에 여자를 보고
여자는 메씨지 너머 보이는 남자를 안 보네
물을 따른 남자는 물통을 밀어주고
파와 후추와 소금을 넣은 남자는 양념통을 밀어주네
마주앉아 한번도 마주치지 않는 허기
마주앉아 한번 더 마주보는 허방
하루 만에 먹는 여자의 국물은 느려서 헐렁하고
한나절 만에 먹는 남자의 밥은 빨라서 썰렁하네
남자는 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여자는 숟가락을 들고 늦도록 국물을 뜨네
깜빡 놓고 간 우산을 찾으러 온 남자는
여전한 여자를 처음처럼 한번 더 보고
혼자 남아 숟가락을 들고 있는 여자는
가는 남자를 처음처럼 한번도 안 보고
그렇게 한번 본 여자의 밥값을 계산하고 사라지는 남자와
한번도 안 본 남자의 얼굴을 계산대에서야 떠올려보는 여자가
단 한번 보고 다시는 보지 못할 한평생과
단 한번도 보지 못해 영원히 보지 못할 한평생이
추적추적 내리네 만원의 합석 자리에
시월과 모래내와 설렁탕집에
<와락>, 창비
누구나 로맨스를 꿈꾸지만 현실에서의 로맨스는 드라마 속에만 존재하는 이야기입니다. 낯선 여자가 낯선 남자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합석을 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이 밥을 먹었지만 아무런 말도 없이 헤어집니다.
다음 날 두 사람이 또 우연히 만납니다. 남자는 여자의 밥값을 계산해주고 사라집니다. 그다음 날 두 사람은 또다시 만나고, 이것은 필연이라며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사랑은 다릅니다.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다시 만날 확률부터 희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여자와 남자도 만나고 사랑을 합니다.
세상의 모든 연인에게는 서로 다른 사랑의 방식이 있습니다. 설렁탕처럼 오랜 시간 우려낸 사랑,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지만 금방 녹아버리는 사랑, 잘 구워낸 쿠키처럼 고소하지만 좀 딱딱한 사랑, 솜사탕처럼 허망한 사랑, 전복죽처럼 속 편한 사랑도 있습니다.
사랑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분홍물이 듭니다. 이렇게 좋은데 왜 사랑하지 않는 걸까요? 부디 사랑하세요. 진심을 다해 사랑하고, 가슴에서 출렁이는 사랑의 말을 입 밖으로 꺼내서 자주자주 들려주세요. 말하지 않고, 표현하지 않고 마음에만 담아둔 사랑은 사랑을 깨뜨리는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정진아 엮음 《맛있는 시》 중에서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