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권과 장대일, 미치도록 뛰고 싶었다
이상철 기자 / 2008-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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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권은 올 시즌 K3리그에서 7년 만에 그라운드를 누빈다.
사진 이휘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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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돌아오고 있다.
오래 전 은퇴했던 제용삼(36), 우제원(36,이상 서울 유나이티드), 조현두(35,용인시민축구단) 등은 지난해 현역으로 복귀해 K3리그 무대를 누볐다.
이들이 거둔 성적은 우수했다.
서울 유나이티드는 제용삼과 우제원을 앞세워 지난 시즌 K3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제용삼은 18경기에 출전해 13골 9도움으로 득점왕과 도움왕, 최우수선수상을 싹쓸이했다.
용인시민축구단은 조현두의 활약에 힘입어 4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은퇴한 K리거들의 K3리그 진출은 크게 문제될 게 없다.
K3리그의 신입 선수들은 대한축구협회에 등록돼 있지 않아야 하는데 K리거는 은퇴 뒤 등록이 말소되기 때문이다.
또 나이 제한 규정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아마추어 팀에서 뛰었다고 해도 이적 동의서만 있으면 입단이 가능하다.
은퇴한 K리거들의 K3리그 진출은 올해에도 이어지고 있다.
그 가운데 국가대표 출신 선수 2명이 있다.
정재권(38,전 포항 스틸러스)은 유상수(35,전 전남 드래곤즈), 정주완(34,전 전북 현대)과 함께 서울 유나이티드에서 제2의 선수생활을 시작한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 출전했던 장대일(33,전 부산 아이파크)은 양주시민축구단으로 선수 등록을 마쳤다.
정재권, 난 죽지 않았다
정재권은 1990년대 화려한 선수생활을 했다.
빠른 스피드를 이용한 측면 돌파가 뛰어났던 정재권은 1997년 마니치(36), 샤샤(36), 김주성(42)과 함께 부산 대우의 시즌 3관왕을 이끌었다.
1992년 국가대표로 뽑힌 뒤 A매치 14경기에 뛰었다.
그러나 2001년 포항에서 자유계약선수(FA)로 풀린 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정재권은 "포항에서 나올 때 상처를 많이 받았다. 기분이 상해 무조건 쉬고 싶었다.
일본 J리그, 포르투갈리그 팀들의 이적 제의도 뿌리쳤다.
솔직히 1년 쉬고 다시 뛰어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나 정재권의 생각은 짧았다.
2002년 여름 선배 김종부(43)의 부탁으로 임시로 동의대 코치를 맡으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한 선배에 의해 동래중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정재권은 더 이상 선수가 아닌 지도자가 됐다.
현역 복귀에 대한 욕심을 못 버려 동네 조기축구회를 기웃거렸지만 작은 실수라도 하면 "국가대표가 왜 저래"라는 따가운 시선에 시달려 그만뒀다.
정재권은 "축구선수 정재권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또 지도자와 선수를 함께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선수생활을 접게 됐다"고 밝혔다.
그런 정재권이 지난 1월 한양대 코치를 맡은 게 선수생활을 다시 하게 된 계기가 됐다. 1월 가진 대신고와 연습경기에서 정재권이 30분 정도 뛰는 걸 임근재(39) 서울 유나이티드 감독 겸 대신고 감독이 지켜본 것이다.
정재권과 임감독은 1989년 청소년대표 시절부터 알고 지낸 각별한 사이였다.
임감독은 정재권에게 다시 선수로 뛸 것을 권유했고 정재권은 이를 받아들였다.
임감독은 "(정)재권이의 스피드가 전성기 못지 않았다.
웬만한 대학 선수들보다 볼을 잘 찼다"며 "선수층이 얇은 서울 유나이티드 전력에 큰 보탬이 될 것 같다"고 기대했다.
정재권이 서울 유나이티드행을 선택한 데에는 지리적인 조건도 한몫을 했다.
한양대 코치를 맡고 있는 정재권은 선수나 지도자 가운데 어느 한쪽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양대와 서울 유나이티드의 홈경기장인 잠실종합경기장은 승용차로 20분도 채 안 걸리는 데다 K3리그 경기가 주말에만 열려 큰 부담이 없었다.
정재권은 올 시즌 서울 유나이티드의 홈경기에 집중적으로 출전할 계획이다.
7년 만의 선수생활인 데다 K3리그라고 하지만 40대에 접어든 나이에 젊은 선수들과의 경쟁이 쉬울 리 없다.
그러나 정재권은 자신감으로 가득하다.
정재권은 "그동안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90분 출전은 어렵겠지만 '조커' 구실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며 "뛰는 경기마다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는 게 올 시즌 목표다.
또 잊혀진 선수 정재권을 축구 팬들의 기억 속에 다시 떠올리게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장대일, 축구가 그리웠다
장대일은 축구선수이자 연예인이었다.
그러나 두 직업 모두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2의 홍명보'로 불렸던 연세대 재학 시절부터 잘 생긴 외모로 많은 여성 팬을 몰고 다녔다.
1순위로 천안 일화에 입단한 1998년에는 이동국(29,미들스브로), 고종수(30,대전 시티즌), 안정환(32,부산), 김은중(29,FC 서울) 등과 함께 K리그의 르네상스를 이끌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2003년 95경기 6골 4도움의 초라한 성적을 남긴 채 28살의 젊은 나이에 축구화를 벗었다.
이후 연예계 문을 두드렸지만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
연예계는 외모만으로 통하는 곳이 아니었다.
장대일은 "주위에서 부추겨 연예인이 됐다.
무리한 시도였고 끝내 실패로 끝났다"고 했다.
사실 장대일의 은퇴는 예정된 게 아니었다.
당시 부산은 장대일과 2년 연장 계약을 추진했지만 장대일 측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다른 팀으로 이적을 꾀했다.
그러나 협상 과정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고 선수 등록 마감기한을 넘겼다.
장대일은 "3개월을 쉰 뒤 추가 선수 등록을 해야 했다.
그런데 쉬면서 몸이 점점 망가졌고 결국 스스로 (선수생활을)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장대일은 이후 축구와 담을 쌓았다. 4년 동안 볼을 한 번도 차지 않았다.
살이 찌면서 몸도 예전 같지 않았다. 개인사업으로 하루하루 바쁘게 살았다.
그렇다고 축구에 대한 애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축구 중계가 있으면 장대일의 눈은 TV를 향했다.
장대일은 "다시 축구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운동을 그만뒀기 때문에 미련도 많이 남았다.
그렇지만 내 의지만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고 말했다.
장대일이 그렇게 고민하는 가운데 2003년 한 시즌 동안 부산에서 함께 뛰었던 신영록(27) 양주시민구단 코치에게서 "다시 한번 선수로 뛰어 볼 생각이 없느냐"는 연락이 왔다.
장대일은 고민하지 않고 신코치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장대일은 "그토록 원했던 축구선수로 뛰는 기회를 갖게 된 데다 평일 밤에 훈련하고 주말에 경기를 해 사업에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때 잘 나갔던 국가대표 출신 선수의 K3리그행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을 수도 있다. "이미지가 나빠질 수 있다"며 장대일의 결정에 반대한 지인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장대일은 그같은 시선이 있다고 하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10년 전이라면 모를까, 이제 내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스타 의식을 버린 지도 오래됐다.
난 이제 축구가 하고 싶은 평범한 축구선수일 뿐"이라고 말했다.
올 시즌 K3리그는 3월 22일 개막한다. 그러나 후기리그가 시작된 이후에나 장대일을 볼 수 있다.
장대일은 오랫동안 운동을 하지 않아 당장 경기에 나설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다. 적어도 3개월 정도 몸을 만들어야 한다.
5년 동안 많은 게 바뀌었지만 "젊은 선수들과 경쟁에서 이기고 싶다"는 장대일의 승부욕만큼은 변함없다.
장대일은 한마디 더 했다.
"객관적인 전력에선 뒤지겠지만 FA컵에서 내셔널리그, K리그 팀들을 상대해 꼭 한번 이기고 싶다."
SPORTS2.0 제 93호(발행일 3월 3일)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