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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없이 왕위에 오르다
중종은 1488년(성종 19)에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이름은 역(懌), 자는 낙천(樂天)이다. 1494년(성종 25)에 진성대군(晉城大君)에 봉해졌다. 실록에는 그의 성품에 대해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청단(聽斷)을 잘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서열상으로는 왕위에 오를 수 없었으나 신하들이 일으킨 반정으로 1506년(연산군 12)에 왕위에 올랐다.
본인 스스로는 전혀 반정의 뜻이 없었음을 다음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반정하던 날 먼저 군사를 보내어 사제(私第, 중종이 있던 집)를 에워쌌는데, 대개 해칠 자가
있을까 염려해서였다. 임금이 놀라 자결하려고 하자 부인 신씨가 말하기를 "군사의 말 머리가 이 궁을 향해 있으면 우리 부부가 죽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말 꼬리가 궁을 향하고 말 머리가 밖을 향해 있으면 반드시 공자(公子)를 호위하려는 뜻이니, 알고 난 뒤에 죽어도 늦지 않습니다." 하고, 소매를 붙잡고 굳이 말리며 사람을 보내 살피게 했더니 말 머리가 과연 밖을 향해 있었다. - 《연려실기술》 권7, 중종
조 고사본말
반정 세력이 군사를 일으켜 자신의 집을 호위할 때까지도 중종은 자신이 왕으로 추대된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반정 세력은 궐 안을 장악한 후 대비인 정현왕후에게 진성대군을 추대해 왕으로 삼는다는 교지를 내리도록 종용했다. 처음엔 반대하던 정현왕후가 결국 허락하니, 그날로 즉위식이 이루어졌다. 얼마나 급하게 진행되었는지 예식에 갖추어야 할 면류관이 없어서 익선관을 쓰고 즉위했다고 한다. 이처럼 아무런 준비도 없이 왕위에 오른 중종은 한동안 반정 세력들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중종이 얼마나 힘없는 왕이었는지는 첫 번째 부인인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의 폐비 문제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중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 신수근의 딸과 혼인했고, 중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그 부인인 신씨도 자연스레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왕의 장인이 되는 신수근이 누구인가. 바로 연산군과 함께 폐출된 폐비 신씨의 오빠이자 임사홍과 더불어 갑자사화를 주도했던 연산군의 핵심 측근이 아닌가. 반정으로 인해 신수근은 당연히 역적으로 몰려 숙청되었다. 그러니 반정 세력으로서는 역적의 딸을 왕비로 두면 후탈이 우려될 수밖에
없었다. 반정 세력들은 단경왕후 신씨를 폐비시킬 것을 종용했다. 중종과 단경왕후는 그 사이에 자식은 없었으나 금슬이 무척 좋았다. 중종은 "아뢴 일이 매우 당연하나 조강지처를 어찌하겠는가." 하면서 폐비만은 막아 보려고 간청했으나 결국 신하들의 뜻을 꺾지 못했다.
첫 번째 부인인 신씨가 폐비된 후 중종은 윤여필(尹汝弼)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가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이다. 장경왕후는 1남 1녀를 낳았으나 1515년(중종 10)에 원자(12대 인종)를 낳은 지 엿새 만에 죽었다. 장경왕후가 죽자 한때 사림파들이 폐비 신씨를 복위시키려고 했으나 반정공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중종은 1517년(중종 12)에 세 번째 부인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를 맞아들였다. 문정왕후는 윤지임(尹之任)의 딸로, 13대 왕인 명종의 모후이기도 하다. 문정왕후는 명종
외에도 4명의 딸을 더 낳았다.
중종은 이 밖에 경빈 박씨가 낳은 복성군을 비롯해 9명의 후궁에게서 아들 7명과 딸 6명을 더 낳아, 총
9남 11녀를 두었다.
반정을 주도한 세력들
중종반정은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 등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성희안은 성종의 총애를 받던
훈구파로 연산군이 즉위한 후에도 이조참판까지 지냈다. 그러나 연산군의 방탕함을 비난하는 글을 짓는 바람에 왕의 눈 밖에 나서 미관말직으로 좌천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역심을 품게 된 성희안은 반정의 계획을 세우고 박원종을 거사에 끌어들였다.
박원종은 월산대군의 부인으로 연산군과 추문이 있던 박씨 부인의 동생이다. 평소 연산군에게 불만이 많았던
박원종은 성희안의 제안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박원종은 무신 출신이었기 때문에 군사를 동원하는 데 유리했다.한편 반정에 앞서 박원종은 신수근을 찾아가 장기를 두다가 궁(宮)을 바꾸어 두자고 했다. 반정을 암시한
것이다. 박원종은 신수근에게 딸과 여동생 중 누가 더 중하냐고 넌지시 물었다. 이 말은 딸과 혼인한 중종과 여동생과 혼인한 연산군 중 누구의 편에 서겠느냐는 의미였다. 신수근은 버럭 화를 내며 "차라리 내 목을 베어가라."라고 했다. 결국 신수근은 반정이 일어난 후 일순위로 제거되었다.
성희안과 박원종은 이조판서였던 유순정에게 거사 계획을 알렸다. 유순정은 처음에는 머뭇거렸으나 결국 그들의
거사에 동참하기로 했다. 그 후 신윤무(辛允武), 박영문(朴永文), 장정(張珽), 홍경주(洪景舟) 등이 가담했다. 실록은 중종반정의 전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지중추부사 박원종, 부사용 성희안, 이조판서 유순정 등이 주동이 되어 건의하고서, 군자부정
신윤무, 군기시첨정 박영문, 수원부사 장정, 사복시첨정 홍경주와 거사하기를 밀약했다. 거사하기 하루 전날 저녁에 성희안이 김감(金勘), 김수동(金壽童)의 집에 가서 모의한 것을 고하고, 이어 박원종, 유순정과 더불어 훈련원에서 회합했다. 무사와 건장한 장수 들이 호응해 운집했고, 유자광, 구수영(具壽永), 운산군 이계(李誡), 운수군 이효성(李孝誠), 덕진군 이활(李活)도 또한 와서 회합했다. 여러 장수들에게 부대를 나누어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뜻밖의 일에 대비하게 했다. 밤 3경에 박원종 등이 곧바로 창덕궁으로 향해 가다가 하마비동(下馬碑洞) 어귀에 진을 쳤다.
이에 문무백관과 군민 등이 소문을 듣고 분주히 나와 거리와 길을 메웠다. 영의정 유순(柳洵), 우의정 김수동(金壽童), 찬성 신준(申浚)과 정미수(鄭眉壽), 예조판서 송일(宋軼), 병조판서 이손(李蓀), 호조판서 이계남(李季男), 판중추부사 박건(朴楗), 도승지 강혼(姜渾), 좌승지 한순(韓恂)도 왔다. 먼저 구수영, 운산군, 덕진군을 진성대군의 집에 보내어 거사한 사유를 갖추어 아뢴 다음 군사를 거느리고 호위하게 했다. 또 윤형로(尹衡老)를 경복궁에 보내어 대비께 아뢰게 한 다음, 드디어 용사(勇士)를 신수근, 신수영(愼守英), 임사홍 등의 집에 나누어 보내어, 위에서 부른다고 핑계 대고 끌어내 쳐 죽였다. - 《중종실록》 권1, 중종 1년 9월 2일
반정이 성공한 후 반정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공신의 지위를 얻었다. 특히 반정의 핵심 3인방인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은 각각 이조판서, 우의정, 병조판서에 올라 정권을 잡았다. 즉위 초에 아무런 준비 없이 왕위에 오른 중종은 자신을 왕으로 옹립한 반정공신들에게 대항할 힘이 없었다. 이들 반정 세력은 연산군의 학정으로 문란해진 국가 기강을 바로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왕도 어찌하지 못하는 막강한 세력을 이용해 뇌물을 받고 훈공의 등급을 정하고, 관작을 남발하는 등 비난받을 일을 행하기도 했다. 특히 반정 세력으로서 마땅히
타도해야 할 유자광에게조차 반정공신의 자격을 준 것은 반정의 정당성마저 훼손하는 처사였다.
실패한 조광조의 개혁정치
즉위 초 아무런 힘없이 반정 세력에게 휘둘리던 중종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국왕으로서의 권한을
되찾으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정 세력을 견제할 새로운 세력을 키울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등용한 인물이 바로 조광조(趙光祖)이다. 조광조는 김굉필의 문하로 김종직으로부터 이어지는 사림파의 맥을 잇는 인물이었다. 조광조의 등장으로 조정에서는 다시 한 번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하게 되었다.
중종은 왕의 자문기관인 홍문관의 기능을 강화하고 망가졌던 성균관을 학문의 전당으로 복원했다. 또한
폐지되었던 경연도 부활시켜 연산군에 의해 문란해진 국가의 유교적 기강을 바로잡고자 했다. 중종은 유교적 왕도정치를 바탕으로 하는 개혁정치를 실시하고자 했다. 그리고 조광조의 도학(道學)정치론이 자신이 표방하는 개혁정치를 이끌어 갈 적절한 정치 이론이라고 생각했다.
조광조는 도학정치의 이념을 바탕으로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조광조의 이러한 사상과
개혁의지는 중종의 지지를 얻었다. 이를 바탕으로 조광조는 여러 가지 제도 개혁을 추진했다. 우선 언로를 확충하기 위해 대간의 위상을 강화했다.
또한 향약을 실시해 백성을 유교적 윤리로 교화하고, 과거 제도를 대신해 천거 제도인 현량과(賢良科)를 도입해 인재 등용에 있어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결과적으로 사림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교두보가 되었다. 실제로 현량과를 통해 추천된 사림들이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승정원 등의 요직에 대거 포진하게 되었다. 이에 훈구파들은 위협을 느꼈다.
러나 조광조는 훈구파의 반발에도 계속해서 과격하고 급진적인 개혁 정책들을 과감하게 추진해 나갔다.
궁중의 여악(女樂)을 폐지하고 소격서를 혁파했다. 소격서 폐지에 대한 일화를 보자.
무인년에 양사와 홍문관, 예문관에서 소격서를 없애자고 교대로 글을 올려 청하고 대신들도 또한
아뢰었으나 여러 달이 되어도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부제학 조광조가 면대하기를 청해 극력 논했고, 이튿날 또 동료들을 거느리고 합문 밖에 엎드려 네 번이나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조광조는 승지에게 말하기를 "이 일을 허락받지 않으면 오늘은 물러가지 않겠다." 했는데 날이 저물자 대간이 모두 물러갔다. 조광조가 안색이 달라져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날이 저물었고 대간들도 모두 물러갔으나 우리들은 죄책(罪責)을 받더라도
마땅히 정성을 다해 아뢰어 밤새도록 물러나지 않아서 기어코 임금의 마음을 돌려야 한다." 하고 닭이 울 때까지 아뢰기를 그치지 않으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을 내가 어찌 헤아리지 않았겠는가마는, 다만 그 내력이 이미 오래되어 어렵게 여기는 것뿐이다. 내일 대신들을 불러 의논해 소격서를 파하리라." 했다. - 《연려실기술》 권 7, 중종 조 고사본말
이때부터 조광조의 개혁을 지지하던 중종의 태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조광조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한 개혁의지에 중종이 점차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도학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군주의 자질과 학문적 윤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조광조의 태도에 중종은 피곤함까지 느꼈다.
그러던 중 1519년(중종 14) 조광조는 대간을 앞세워 정국공신 중에 잘못 책록된 사람이 많으니 공이
없으면서도 공신의 지위를 얻은 76명에 대해서 위훈을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중종은 공신의 위훈을 삭제하는 일은 지금까지 유례가 없던 일이라며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아무리 조광조에게 훈구대신들에 대한 견제 역할을 맡겼다고는 하지만 공신 세력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는 일에는 부담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는 이번에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해서 위훈 삭제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래도 중종이 받아들이지 않자 모든
대간들이 사직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결국 중종은 조광조의 요구대로 76명의 위훈을 삭제할 것을 윤허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훈구파들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그들은 중중과 조광조 사이에 심상치 않은
간극이 생긴 것을 포착하고 그 틈새를 노렸다. 훈구파들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들이 붕당을 조직해 국정을 어지럽히고 있다고 탄핵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사림파들의 과격한 주장에 염증을 느낀 중종은 이번 기회에 그들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즈음 중종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궁궐 후원에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씨의 형태로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이 발견된 것이다. 여기서 '주초(走肖)'란
'조(趙)'를 파자(破字)한 것으로 '조씨가 왕이 된다'라는 뜻이었다. 이는 남곤(南袞)이 미리 나뭇잎에 꿀로 글씨를 써서 꾸민 일이었지만, 종종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는 충분했다.
결국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한 김정(金淨), 김식(金湜) 등의 사림들을 유배했다가 사사했다. 이 밖에도
여러 명의 사림들이 화를 입었다. 이를 기묘사화(己卯士禍)라 한다. 기묘사화로 인해 조광조의 개혁정치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중종 역시 개혁을 포기했다. 그리하여 조정에는 훈구권신들이 득세하게 되었다.
삼포왜란과 비변사의 설치
1510년(중종 5)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났다. 삼포란 부산포(釜山浦, 동래), 제포(薺浦, 창원), 염포(鹽浦, 울산)의 세 포구를 말하는데, 이 지역에 살던 왜구들이 조선의 엄격한 통제에 반발해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우선 삼포왜란이 일어난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삼포를 왜구들에게 개방한 배경부터 알아야 한다. 삼포를
개방한 것은 세종 때였다. 상왕 태종이 1418년(태종 18)에 단행한 대마도 정벌로 조선과 일본의 교섭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이 계속 무역 재개를 간청해 오자 할 수 없이 삼포를 개방했다. 일종의 유화 정책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삼포에 드나드는 왜인의 수가 증가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났다. 불법으로
체류하는 왜인이 늘어나고, 정해진 규정을 지키지 않았으며, 거래 행위가 문란해졌다. 이로 인한 피해는 조선 백성들에게 돌아갔다. 성종 조에 이르러 이러한 폐해를 없애고자 삼포에 드나드는 왜인들에 대한 단속과 통제가 강화되었고, 이런 방침은 중종 조에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자 이에 불만을 품은 왜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이를 삼포왜란이라 한다.
폭동을 일으킨 왜인의 수가 4~5천 명에 이르렀는데, 조선을 약탈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대마도주가 이들을 지원했다. 폭도들은 제일 먼저 부산포와 제포를 연달아 공격하고 여세를 몰아 웅천과 동래 지역까지 치고 들어왔다. 그 과정에서 부산진첨사인 이우증(李友曾)이 죽고 제포첨사인 김세균(金世均)이 납치되는 등 인명 손실과 민간에 대한 약탈이 자행되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좌의정 유순정을 도순찰사에 임명해 반란을 진압하고자 했다. 진압군이 수륙 양면으로 파상공격을 펼친 결과 6여 일 만에 왜인
폭도들의 거점이 모두 초토화되었으며, 폭도의 대장 격이던 대마도주의 아들이 전사하자 남은 왜인들은 모두 대마도로 도망쳤다.
이 일을 계기로 중종은 삼포에 있던 왜관(倭館)을 모두 폐쇄하고 일본과의 교역을 모두 단절했다. 그러나
2년 후인 1512년(중종 7)에 임신조약(壬申條約)이 체결되면서 국교는 다시 정상화되었고, 제포 한 군데만 다시 개항했다.
삼포왜란을 계기로 중종은 비변사(備邊司)를 신설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국방에 관련한 모든 업무는
의정부와 병조에서 맡아서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삼포왜란과 같은 변란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 비변사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초법제적 임시기구였다. 비변사에서는 의정부의 삼대신과 병조의 주요 인사를 비롯해 변방의 군사 책임자들이 폭넓게 참여해 군사 전략과 전술을 논의하고 군국의 사무를 맡아보게 되어 있었다. 이후 비변사는 변란이 있을 때마다 이를 포괄적으로 대처하는 기관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면서 점차
임시기구가 아닌 상설기구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군사 기능에 행정 기능과 외교·통상의 기능까지 갖춘 국가 최고 의결기관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비변사의 확대와 강화는 국가의 주요 기능이 한 기관에 지나치게 집중되는 결과를 초래해 국정을
문란하게 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이에 비변사를 혁파하자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애초에 변란을 대비해 임시로 설치한 기구인 만큼 국가에 별다른 일이 없을 때는 마땅히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변사는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사림의 권력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혁파 논의도 자연히
흐지부지되었다. 결국 비변사는 1864년(고종 1)에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잡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 기능과 권한을 유지했다. 흥선대원군은 비변사의 기능을 대폭 축소시켜 사실상 폐지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만들었다.</P></DI
권신정치의 등장
조선 정치사를 볼 때 중종이 왕위에 있던 16세기 중엽은 세조 때부터 시작된 훈신정치가 거의
마무리되고 사림정치로 넘어가던 시기였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죽고 사림파가 실권(失權)하자 다시 권신들이 득세할 기회를 잡았다. 이 시기는 훈신 계열의 일부 권신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권신정치의 시대였다. 권신정치는 중종이 조광조를 앞세워 실시했던 정치 개혁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따라서 사림파들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향약, 현량과 실시, 소격서 폐지 등이 다시 원상으로 회귀하고 말았다.
권신정치의 포문을 연 것은 기묘사화를 주도한 심정, 남곤, 홍경주 세 사람이었다. 이들을 일컬어
기묘삼간(己卯三奸)이라고 한다. 그 후 이항(李沆)과 김극핍(金克愊)이 권신 대열에 합류했는데, 이들을 심정과 더불어 신묘삼간(辛卯三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권력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들을 몰아낸 사람은 김안로(金安老)였다.
김안로는 기묘사화 직후 이조판서에 오르고, 아들 김희(金禧)를 효혜공주(孝惠公主, 장경왕후 소생으로
인종의 누나)에게 장가 보내면서 척신이 되었다. 그러나 한동안 남곤, 이항 등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기도 했다. 남곤이 죽고 난 후 유배에서 풀려난 김안로는 심정을 죽이고 이행(李荇), 정광필(鄭光弼), 김극성(金克成) 등을 귀양 보낸 후 권력을 장악했다. 김안로는 허항(許沆), 채무택(菜無擇) 등과 함께 세자(훗날의 인종)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전횡을 일삼았다. 그러나 그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정적인 문정왕후를 폐위시키려다가 오히려 사사되었다. 김안로는 허항, 채무택과 함께 정유삼흉(丁酉三凶)으로 불렸다. 이후에는 세자의 비호 세력인 대윤(大尹)과 문정왕후와 동생들의 세력인 소윤(小尹)이 대결하며 권신정치의 정점을 찍었다.
용군 밑에서는 유능한 신하가 자라지 못한다.
중종은 1544년(중종 39) 11월 14일,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죽었다. 이때 그의 나이 57세였다. 중종은 신하들이 일으킨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폐주 연산군이 저지른 폐정을 바로잡으려 애썼다. 또한 반정 세력의 그늘에서 벗어나 조광조 등을 앞세워 정치 개혁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종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우유부단한 용군(庸君)이었고, 결국 뜻하던 정치 개혁을 이루기는커녕 충신도 간신도 살아남지 못하는 결과만을 초래했다.
처음에는 훈구파의 말을 듣고 기묘사화 등을 일으켜 사림들을 어육(魚肉)으로 만들더니, 또 그 뒤에는
이준경(李浚慶), 구수담(具壽聃)의 말을 듣고 당시 화를 입은 사람들을 풀어 주었다. 이에 훈구파가 반론을 제기하자 다시 이를 뒤집었다. 결국 이준경과 구수담은 김안로 등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중종의 이러한 처사는 수많은 인재들이 죽거나 스스로 떠나도록 만들었다. 용군 밑에서는 유능한 신하가 자라지 못함을 중종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중종 말기부터 인종, 명종 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권신들이 권력 다툼을 벌이며
국정을 혼란에 빠뜨린 것도 결국 중종의 정치력이 모자란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중종이 죽자 그의 큰아들 인종은 모후인 장경왕후가 묻힌 경기도 고양에 중종의 시신을 예장했다. 그러나 인종이 죽고 명종이 왕위에 오른 후 문정왕후는 중종의 능을 현재의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겼다.
묘호는 정릉(靖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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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장경왕후 윤씨 희릉
첫댓글 폭군, 암군, 혼군, 용군..........다아 모지란 왕들이였군요?
최근엔 조선의 왕들중...별루인 왕들만 주로 찾아보고 있어요~